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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
1화
prologue
“난 K라고 불러.”
그가 말했다.
“이름 이니셜인가요?”
실은 장난해요? 라고 물어야 했다. 하지만 낯선 장소, 낯선 시간, 그리고 어이없는 해프닝 끝에 도착한 장소부터가 장난인지 현실인지조차 모호했다.
“아니. 전혀. 그냥 그렇게 불러. 어차피 의미도 없으니까. 그리고 일회용이고. 그쪽은 뭐라고 불렀으면 좋겠어?”
저쪽 모퉁이에서 목소리만 들렸다. 뭔가 짭짤한 향이 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
뭐라 불리우면 좋을까. 어차피 불리울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일회용 이름이라니. 재밌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 대꾸할 거 같지 않았지만 이런 기분이라면 괜찮았다. 뭔들 어떨까.
“J라고 해요.”
제 이름 석 자에는 들어 있지 않은 이니셜이었다.
“좋네.”
노래 제목도 있었고,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의 메신저 아이디이기도 했었고, 또 저가 몇 번쯤 갔던 어느 카페의 이름이기도 했다. 제 입에서 그렇게 내뱉고 나니까. 정말 스스로가 J가 된 것 같았다. 제 자신이 아닌.
“침대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 보는 바와 같이 의자에서 잘 수도 없고, 바닥은 더더욱 눕기 불가능하고. 그러니 침대는 같이 써야 해. 난 보이는 것처럼 전혀 하자가 없는 건강한 남자야. 게다가 그쪽은 근사한 외모를 지닌 거 같고 성적으로도 매력적이고. 낯선 남녀가 한 침대에서 손만 붙잡고 잘 수는 없잖아? 어차피 이래저래 해서 일이 날 게 뻔하니까, 아예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하지. 난 근사하지는 못해도 그럴듯한 섹스는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준비 없이 어찌저찌 하는 거보다 미리 말해 두려고. 찾아보면 콘돔도 있으니 뒷걱정은 필요 없을 테고.”
면전에서 들었다가는 당혹스러울 소리였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 또한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는 에그 타르트와 아메리카노를 하자는 듯 아무런 억양도, 느낌도, 심지어 감정도 없이 일상적이었다.
그녀는 넓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눕기에 불편하지 않을 만한 침대를 보았다. 이불도 근처의 숙소들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고, 다행스럽게 베개도 푹신해 보였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일 텐데, 아니 남자가 여기 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래 머무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남자가 혼자 사는 시골집치곤 그다지 역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비위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자의 어수선한 외모보다 훨씬 상태가 나아 보이는, 살라고 하면 고개를 젓겠지만 하루쯤 묵으라고 하면 호기심이 갈 만한 침실이었다. 침대 옆에는 작은 책상도 있었고, 손때 묻은 책상 위엔 근사하게도 잉크와 펜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누런 종이 뭉치까지.
옆에 있는 의자는 솔직히 좀 지저분해 보이는 천이 씌워져 있어서 저기서 자라고 하면 왠지 찝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까 길가에서도 본 꽃들을 말려서 병에 가득 담아 놓은 게 쭉 쌓여 있었다.
병은 작은 잼이나 혹은 주스 병 같았지만 크기가 들쭉날쭉한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장식인지 아니면 어디에 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게 예뻤다.
남자는 여전히 모퉁이에서 뭔가 치직거리면서 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로 물은 남자는 제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뭐라 했더라?
아…… 섹스.
“그래요.”
치직거리는 요란한 소리 때문에 그다지 호기롭지 못한 제 목소리를 못 들어서 대답이 없나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버진은 아니지?”
버진이라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버진은 우대하는 건가요?”
“아니. 난 개시는 안 해. 그러면 의자에 앉아서 조는 게 낫지.”
그녀는 제 배낭을 열었다. 짐을 숙소에 놓고 오면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귀중품은 모조리 가져온 상태였다. 게다가 여벌의 속옷과 화장품 파우치도 있었다. 혹시나 물에 빠질까 봐 그런 건데 괜히 무거운 걸 들고 다니나 싶었지만 이럴 땐 다행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꺼내고 있는데 또 칸막이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서 출가하거나 수녀가 될 계획이 있는 건 아닌가?”
웬 출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다시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그럴 계획 없는데요.”
“처음 개시도 사절이지만, 마지막 마무리도 사절이야. 됐어. 둘 다 아니면.”
“상습적인가 봐요. 콘돔도 구비해 두고 있는 거 보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생각돼서 물었을 뿐이다.
“노코멘트. 뭐, 서로 알 필요 없잖아.”
“그러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일 아닌가.
“다 됐어. 아마 짤 거야. 여긴 모조리 짜니까. 그렇다고 간을 안 하면 냄새 때문에 못 먹어. 걸어올 수 없는 거야?”
남자의 머리통이 불쑥 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삐죽삐죽한 수염이 난 남자는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하나로 묶은 데다 칙칙한 색의 후줄근한 셔츠를 입었지만 콧대가 반듯하고 이마가 단정해서 바탕이 못 봐 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뒤로 한 가닥도 없이 싹 넘긴 머리 덕에 그 이마 선이 아주 돋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질색을 했던 장발의 남자라니……. 수염을 치렁치렁하게 기른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지만, 지금 보니 수염도 며칠 안 깎은 듯 거칠어 보였다. 과연 저런 남자랑 섹스란 게 가능할까? 제 머릿속에서 아까의 단어를 되씹기 전에 남자가 다시 물었다.
“못 걷겠어?”
“아뇨. 걸을 수 있어요.”
“그럼 와서 먹어.”
화끈거리는 발목 덕에 한쪽 다리로 거의 깡충거리다시피 해서 남자의 목소리와 음식 냄새가 나는 곳까지 가니 널빤지로 된 모퉁이 뒤쪽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덕지덕지 기름때가 낀 조리도구와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시커먼 윅인지 하는 중국식 냄비가 있었다.
딱 신문지 한 장 펼쳐 놓을 만큼의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정체불명의 요리와 한눈에 봐도 밥알이 풀풀 날릴 거 같은 밥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물 대신 여긴 차를 마셔. 이 동네 물에 석회 성분이 많아서 맹물로 먹으면 배탈 나.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쪽 의자에 앉아. 원래 내 의자거든. 난 여기 상자에 앉을 테니.”
한 사람이 옴짝달싹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좁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덩치가 컸다. 그을린 구릿빛 피부 덕에 건장한 근육질의 남자는 탄탄해 보여 거구라는 말이 나올 만큼 몸이 좋았고 그 때문에 넓지 않은 공간은 더욱더 좁아 보였다.
남자는 밥그릇을 들더니 정말 이곳 사람들처럼 풀풀 밥알이 날리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배가 조금 고픈 것도 같았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까의 대화를 생각했다.
이 남자랑 자야 하는 건가.
1. 그녀 & 그녀(1)
“둘 중에 어떤 게 나아? 이거 핑크……. 좀 튀나?”
“블랙.”
핑크라니……. 저건 꽃분홍이었다. 세기가 바뀌기 전 공주병 초등학생의 에나멜 구두 색깔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어머…… 이거 요번 S/S시즌 최고 핫한 컬러예요. 코랄핑크죠. 핑크에 오렌지를 가미한 색이에요. 화사함이란 게 바로 이런 거죠.”
“그런가?”
이런 걸 이런 가격을 주고 산다는 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블랙이 세련돼 보여. 그리고 무난하고.”
라고 말하고 나서 잠시 후회했다. 내가 사는 것도 아니었다. 무난이란 말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에게 그런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블랙이 시크해 보기인 해. 그래도 블랙은 심심하잖아. 너 같은 직장 여성한테나 어울리지. 나 같은 백수가 그런 거 들고 갈 데라곤 장례식장밖에 더 있겠니?”
그거야 그랬다. 잠시 내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읽은 듯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둘 다 줘요.”
“아…… 네. 고객님.”
그녀는 한도도 없는 플레티늄 카드를 내밀었다. 손끝에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손톱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회사 갈 때만 들어. 나랑 만날 때 둘이 커플로 들고 다니면 웃기잖니?”
“고마워.”
내가, 지금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게 권태롭기만 한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 지 성질대로 사느라 친구 따위 하나도 없는 이 짜증나는 여자와 귀한 시간을 쪼개 만나서 하릴없이 시시덕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도도 없는 카드로 마구 사 댈 수 있는 친구는 어쩌면 친구가 아닐지도 몰랐다.
하재연은 대형 건설사가 모기업인, 지금은 DB엔터프라이즈라 불리는 대봉건설의 하본무 회장의 막내딸이었다.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부모와 오빠들 사이에 그야말로 공주처럼 자란 영애였다.
그다지 손을 대지 않아도 예쁘장한 얼굴과 타고난 재복 덕에 귀티가 줄줄 흐르는 재연은 별다른 취미도 특기도 없었고 가정교사니 과외교사니 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있었어도 그다지 성적이 신통하지도 않았다.
죽어라 공부를 해서 악착같이 명문 사립고에 입학한 저와는 중학교부터 동창이었다. 싫증을 잘 내기도 했고, 있는 집 자식이라 시기와 질투 덕에 옆에서 아부하면서 들러붙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그녀의 짜증스러운 성격이나 변덕을 감내해 주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름대로 머리가 좋았다. 집안이 그다지 넉넉한 편이 아니었던 나는 이 변덕스럽고 별스러운 친구의 비위를 잘 맞춰 주기만 하면 떨어지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아주 어렸을 적에 알고 말았다.
나는 나름대로 영악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녀의 전지전능한 능력에 굴복하거나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름 쿨 하게 그녀의 옆에서 떠돌았다.
다른 친구들이 그녀가 사 주거나 던져 주는 고가품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고마워하거나 혹은 자존심 상해하는 것 대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래? 네가 이걸 내게 꼭 주고 싶어 하니 받아는 줄게. 그러나 별스럽지는 않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걸 스킬로 삼았다.
그리고 별로 머리가 좋지 않은 것 같은, 아니 애초에 그런 것에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재연이는 곧 이런 쿨 한 척하는 나를 베프로 정해 버렸고,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끈끈한 우정을 이어 가기 위해 일관성 있는 반응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맛 괜찮네.”
내가 보기에도 괜찮았다. 그러나 그런 척하지는 않았다.
“기름이 좀 많은 거 같아. 그거 빼고는 괜찮네.”
“그래? 하긴 좀 그런 거 같기도 하다.”
바질페스토 파스타는 적당한 맛이었다. 약간 짠 것 같기도 했지만, 고급스러운 가격처럼 괜찮았다. 원래 오일이 많이 들어가는 건데 기름이 많다 느끼는 건 오일을 좋아하지 않는 제 취향일 뿐이었다.
그러나 재연이 제공하는 고급진 것에 대해 무조건 트집부터 잡고 보는 것이 내 스킬이었으므로 이 무심한 투정은 어쩔 수 없었다.
“넌 참 입맛이 복잡해. 네 입맛에 딱 맞는 거 찾기가 힘들다니까.”
“그래? 난 오히려 무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완벽한 만족을 못 할 뿐이야.”
그리고 그건 네 앞에서만이지, 라고 속으로 덧붙여 주었다. 배가 고프면 순댓국이나 혹은 편의점의 컵라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야말로 생존에 강인한 식성을 지녔다고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피곤했다. 가격대가 어마어마하니까 이 늦은 시간에도 이런 까다로운 손님을 위한 음식을 내오겠지. 아마 이 정도 규모의 레스토랑이라면 콧대 높게 영업이 끝났음을 알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얼른 가서 이 갑갑한 힐을 벗어 버리고 뜨거운 물로 굳어 있는 마스카라를 지워 버리고 아까 받은 재무제표를 들여다봐야만 했다.
그러나 이 나른하고 돈 많고 시간 많은 친구의 가장 큰 약점은 시간이 없는 척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난 그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릴없는 재벌 상속녀의 시간으로는 아직은 일렀다.
“너, 그 뒤로 피부 상한 거 안 돌아오는 거 같다.”
“음…… 그래?”
막 숟가락을 놓았을 때 무심하게 재연이 말했다.
“이 년도 더 되지 않았나?”
“이 년째지. 꽤 됐는데. 아직도 그런가?”
“음, 쫌…….”
“그거야 뭐, 나이 탓이겠지.”
“아니야, 네 무모함 탓이지. 그런 델 왜 그러고 돌아다니니? 하긴 뭐,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겠다만, 그래도 얼굴이 너무 상했잖아. 나 이번 주에 에스테틱 예약했는데 너도 올래? 청담동 이 실장이 독립해서 오픈했다는데, 뭐 괜찮다더라고.”
“글쎄. 시간이 날까…….”
어마어마한 곳일 터였다. 무조건 가 줘야 하지만 나는 슬쩍 튕겼다. 웬만한 데는 다섯 번에 두어 번 정도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래야 제 말이라면 죽어라 쫓아다니는 없어 보이는 추종자 같아 보이지 않을 테니까.
“거기 웨이팅이 꽤 길더라. 이 실장이 수완이 좀 좋아야 말이지. 그렇지만 뭐, 내가 전화하면 두 자리는 나겠지. 그리고 거기는 못 가더라도 꼭 가야 할 데가 있어.”
주말이면 내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단정 짓는 건 이 천진난만한 공주의 한가한 생각일 뿐이었다. 야근도 있고, 회식도 있고, 팀장의 주말 산행 따위도 있는 직장이었다. 그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려면 난 내 개인시간을 줄이든지 아니면 수면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직 젊기에 그걸 버텨 가고는 있었다.
주말이라……. 이번 주 주말에 시간을 내려면 주중에 매우 고달플 것이 분명했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마사지를 받고 얼굴에 온갖 것을 다 칠하면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가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 중인데, 재연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 주말에 드레스 골라야 해. 네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내 첫 약혼 드레스인데.”
“그래?”
놀라는 척을 해 주었다. 재연이는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가 막내딸이었다. 아직 나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솔직히 막내 공주라는 타이틀이 아니었으면 벌써 재혼을 해도 몇 번을 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누구와 결혼을 하든지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첫 결혼, 아니 약혼이었다. 그에 맞는 리액션을 해 줘야 했다.
“연애는 아니지?”
그래도 친구다운 질문을 해 줘야 했다. 내가 보기에 절대 재연이는 연애결혼 따위를 할 리가 없는 애였다. 그만큼 심심하고, 무료하고 따분한 애니까. 그건 아마 본인만 모르지 세상 사람들이 다 알 것이었다.
“그렇지 뭐, 내가.”
그러나 재연이의 타이틀은 충분히 세기의 결혼 따위를 할 만했다. 어떤 돈에 눈이 먼 놈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친구를 잘 둔 덕에 제법 재계에도 발뒤꿈치쯤은 담가 봤으니.
“나 정도 되면 그래도 정략 약혼 같은 거 한 번쯤은 해 봐야 하겠지? 그렇지만 난 결혼은 꼭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할 거야.”
참으로 천진난만 해피엔딩한 소리였다. 그래, 너 정도라면 그런 꿈도 가지겠지.
“좋지. 그런데 이 약혼은 뭐야? 정략 약혼에서 끝나는 거야?”
졸렸지만, 내리감기는 눈을 뜨게 만드는 이야깃거리였다. ‘결혼은’이라니, 이번 약혼은 약혼으로 끝내 버릴 거라는 말이 아닌가.
1화
prologue
“난 K라고 불러.”
그가 말했다.
“이름 이니셜인가요?”
실은 장난해요? 라고 물어야 했다. 하지만 낯선 장소, 낯선 시간, 그리고 어이없는 해프닝 끝에 도착한 장소부터가 장난인지 현실인지조차 모호했다.
“아니. 전혀. 그냥 그렇게 불러. 어차피 의미도 없으니까. 그리고 일회용이고. 그쪽은 뭐라고 불렀으면 좋겠어?”
저쪽 모퉁이에서 목소리만 들렸다. 뭔가 짭짤한 향이 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
뭐라 불리우면 좋을까. 어차피 불리울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일회용 이름이라니. 재밌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 대꾸할 거 같지 않았지만 이런 기분이라면 괜찮았다. 뭔들 어떨까.
“J라고 해요.”
제 이름 석 자에는 들어 있지 않은 이니셜이었다.
“좋네.”
노래 제목도 있었고,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의 메신저 아이디이기도 했었고, 또 저가 몇 번쯤 갔던 어느 카페의 이름이기도 했다. 제 입에서 그렇게 내뱉고 나니까. 정말 스스로가 J가 된 것 같았다. 제 자신이 아닌.
“침대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 보는 바와 같이 의자에서 잘 수도 없고, 바닥은 더더욱 눕기 불가능하고. 그러니 침대는 같이 써야 해. 난 보이는 것처럼 전혀 하자가 없는 건강한 남자야. 게다가 그쪽은 근사한 외모를 지닌 거 같고 성적으로도 매력적이고. 낯선 남녀가 한 침대에서 손만 붙잡고 잘 수는 없잖아? 어차피 이래저래 해서 일이 날 게 뻔하니까, 아예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하지. 난 근사하지는 못해도 그럴듯한 섹스는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준비 없이 어찌저찌 하는 거보다 미리 말해 두려고. 찾아보면 콘돔도 있으니 뒷걱정은 필요 없을 테고.”
면전에서 들었다가는 당혹스러울 소리였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 또한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는 에그 타르트와 아메리카노를 하자는 듯 아무런 억양도, 느낌도, 심지어 감정도 없이 일상적이었다.
그녀는 넓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눕기에 불편하지 않을 만한 침대를 보았다. 이불도 근처의 숙소들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고, 다행스럽게 베개도 푹신해 보였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일 텐데, 아니 남자가 여기 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래 머무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남자가 혼자 사는 시골집치곤 그다지 역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비위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자의 어수선한 외모보다 훨씬 상태가 나아 보이는, 살라고 하면 고개를 젓겠지만 하루쯤 묵으라고 하면 호기심이 갈 만한 침실이었다. 침대 옆에는 작은 책상도 있었고, 손때 묻은 책상 위엔 근사하게도 잉크와 펜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누런 종이 뭉치까지.
옆에 있는 의자는 솔직히 좀 지저분해 보이는 천이 씌워져 있어서 저기서 자라고 하면 왠지 찝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까 길가에서도 본 꽃들을 말려서 병에 가득 담아 놓은 게 쭉 쌓여 있었다.
병은 작은 잼이나 혹은 주스 병 같았지만 크기가 들쭉날쭉한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장식인지 아니면 어디에 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게 예뻤다.
남자는 여전히 모퉁이에서 뭔가 치직거리면서 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로 물은 남자는 제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뭐라 했더라?
아…… 섹스.
“그래요.”
치직거리는 요란한 소리 때문에 그다지 호기롭지 못한 제 목소리를 못 들어서 대답이 없나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버진은 아니지?”
버진이라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버진은 우대하는 건가요?”
“아니. 난 개시는 안 해. 그러면 의자에 앉아서 조는 게 낫지.”
그녀는 제 배낭을 열었다. 짐을 숙소에 놓고 오면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귀중품은 모조리 가져온 상태였다. 게다가 여벌의 속옷과 화장품 파우치도 있었다. 혹시나 물에 빠질까 봐 그런 건데 괜히 무거운 걸 들고 다니나 싶었지만 이럴 땐 다행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꺼내고 있는데 또 칸막이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서 출가하거나 수녀가 될 계획이 있는 건 아닌가?”
웬 출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다시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그럴 계획 없는데요.”
“처음 개시도 사절이지만, 마지막 마무리도 사절이야. 됐어. 둘 다 아니면.”
“상습적인가 봐요. 콘돔도 구비해 두고 있는 거 보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생각돼서 물었을 뿐이다.
“노코멘트. 뭐, 서로 알 필요 없잖아.”
“그러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일 아닌가.
“다 됐어. 아마 짤 거야. 여긴 모조리 짜니까. 그렇다고 간을 안 하면 냄새 때문에 못 먹어. 걸어올 수 없는 거야?”
남자의 머리통이 불쑥 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삐죽삐죽한 수염이 난 남자는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하나로 묶은 데다 칙칙한 색의 후줄근한 셔츠를 입었지만 콧대가 반듯하고 이마가 단정해서 바탕이 못 봐 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뒤로 한 가닥도 없이 싹 넘긴 머리 덕에 그 이마 선이 아주 돋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질색을 했던 장발의 남자라니……. 수염을 치렁치렁하게 기른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지만, 지금 보니 수염도 며칠 안 깎은 듯 거칠어 보였다. 과연 저런 남자랑 섹스란 게 가능할까? 제 머릿속에서 아까의 단어를 되씹기 전에 남자가 다시 물었다.
“못 걷겠어?”
“아뇨. 걸을 수 있어요.”
“그럼 와서 먹어.”
화끈거리는 발목 덕에 한쪽 다리로 거의 깡충거리다시피 해서 남자의 목소리와 음식 냄새가 나는 곳까지 가니 널빤지로 된 모퉁이 뒤쪽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덕지덕지 기름때가 낀 조리도구와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시커먼 윅인지 하는 중국식 냄비가 있었다.
딱 신문지 한 장 펼쳐 놓을 만큼의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정체불명의 요리와 한눈에 봐도 밥알이 풀풀 날릴 거 같은 밥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물 대신 여긴 차를 마셔. 이 동네 물에 석회 성분이 많아서 맹물로 먹으면 배탈 나.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쪽 의자에 앉아. 원래 내 의자거든. 난 여기 상자에 앉을 테니.”
한 사람이 옴짝달싹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좁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덩치가 컸다. 그을린 구릿빛 피부 덕에 건장한 근육질의 남자는 탄탄해 보여 거구라는 말이 나올 만큼 몸이 좋았고 그 때문에 넓지 않은 공간은 더욱더 좁아 보였다.
남자는 밥그릇을 들더니 정말 이곳 사람들처럼 풀풀 밥알이 날리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배가 조금 고픈 것도 같았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까의 대화를 생각했다.
이 남자랑 자야 하는 건가.
1. 그녀 & 그녀(1)
“둘 중에 어떤 게 나아? 이거 핑크……. 좀 튀나?”
“블랙.”
핑크라니……. 저건 꽃분홍이었다. 세기가 바뀌기 전 공주병 초등학생의 에나멜 구두 색깔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어머…… 이거 요번 S/S시즌 최고 핫한 컬러예요. 코랄핑크죠. 핑크에 오렌지를 가미한 색이에요. 화사함이란 게 바로 이런 거죠.”
“그런가?”
이런 걸 이런 가격을 주고 산다는 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블랙이 세련돼 보여. 그리고 무난하고.”
라고 말하고 나서 잠시 후회했다. 내가 사는 것도 아니었다. 무난이란 말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에게 그런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블랙이 시크해 보기인 해. 그래도 블랙은 심심하잖아. 너 같은 직장 여성한테나 어울리지. 나 같은 백수가 그런 거 들고 갈 데라곤 장례식장밖에 더 있겠니?”
그거야 그랬다. 잠시 내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읽은 듯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둘 다 줘요.”
“아…… 네. 고객님.”
그녀는 한도도 없는 플레티늄 카드를 내밀었다. 손끝에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손톱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회사 갈 때만 들어. 나랑 만날 때 둘이 커플로 들고 다니면 웃기잖니?”
“고마워.”
내가, 지금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게 권태롭기만 한 다이아몬드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 지 성질대로 사느라 친구 따위 하나도 없는 이 짜증나는 여자와 귀한 시간을 쪼개 만나서 하릴없이 시시덕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도도 없는 카드로 마구 사 댈 수 있는 친구는 어쩌면 친구가 아닐지도 몰랐다.
하재연은 대형 건설사가 모기업인, 지금은 DB엔터프라이즈라 불리는 대봉건설의 하본무 회장의 막내딸이었다.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부모와 오빠들 사이에 그야말로 공주처럼 자란 영애였다.
그다지 손을 대지 않아도 예쁘장한 얼굴과 타고난 재복 덕에 귀티가 줄줄 흐르는 재연은 별다른 취미도 특기도 없었고 가정교사니 과외교사니 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있었어도 그다지 성적이 신통하지도 않았다.
죽어라 공부를 해서 악착같이 명문 사립고에 입학한 저와는 중학교부터 동창이었다. 싫증을 잘 내기도 했고, 있는 집 자식이라 시기와 질투 덕에 옆에서 아부하면서 들러붙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그녀의 짜증스러운 성격이나 변덕을 감내해 주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름대로 머리가 좋았다. 집안이 그다지 넉넉한 편이 아니었던 나는 이 변덕스럽고 별스러운 친구의 비위를 잘 맞춰 주기만 하면 떨어지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아주 어렸을 적에 알고 말았다.
나는 나름대로 영악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녀의 전지전능한 능력에 굴복하거나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름 쿨 하게 그녀의 옆에서 떠돌았다.
다른 친구들이 그녀가 사 주거나 던져 주는 고가품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고마워하거나 혹은 자존심 상해하는 것 대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래? 네가 이걸 내게 꼭 주고 싶어 하니 받아는 줄게. 그러나 별스럽지는 않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걸 스킬로 삼았다.
그리고 별로 머리가 좋지 않은 것 같은, 아니 애초에 그런 것에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재연이는 곧 이런 쿨 한 척하는 나를 베프로 정해 버렸고,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끈끈한 우정을 이어 가기 위해 일관성 있는 반응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맛 괜찮네.”
내가 보기에도 괜찮았다. 그러나 그런 척하지는 않았다.
“기름이 좀 많은 거 같아. 그거 빼고는 괜찮네.”
“그래? 하긴 좀 그런 거 같기도 하다.”
바질페스토 파스타는 적당한 맛이었다. 약간 짠 것 같기도 했지만, 고급스러운 가격처럼 괜찮았다. 원래 오일이 많이 들어가는 건데 기름이 많다 느끼는 건 오일을 좋아하지 않는 제 취향일 뿐이었다.
그러나 재연이 제공하는 고급진 것에 대해 무조건 트집부터 잡고 보는 것이 내 스킬이었으므로 이 무심한 투정은 어쩔 수 없었다.
“넌 참 입맛이 복잡해. 네 입맛에 딱 맞는 거 찾기가 힘들다니까.”
“그래? 난 오히려 무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완벽한 만족을 못 할 뿐이야.”
그리고 그건 네 앞에서만이지, 라고 속으로 덧붙여 주었다. 배가 고프면 순댓국이나 혹은 편의점의 컵라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야말로 생존에 강인한 식성을 지녔다고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피곤했다. 가격대가 어마어마하니까 이 늦은 시간에도 이런 까다로운 손님을 위한 음식을 내오겠지. 아마 이 정도 규모의 레스토랑이라면 콧대 높게 영업이 끝났음을 알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얼른 가서 이 갑갑한 힐을 벗어 버리고 뜨거운 물로 굳어 있는 마스카라를 지워 버리고 아까 받은 재무제표를 들여다봐야만 했다.
그러나 이 나른하고 돈 많고 시간 많은 친구의 가장 큰 약점은 시간이 없는 척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난 그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릴없는 재벌 상속녀의 시간으로는 아직은 일렀다.
“너, 그 뒤로 피부 상한 거 안 돌아오는 거 같다.”
“음…… 그래?”
막 숟가락을 놓았을 때 무심하게 재연이 말했다.
“이 년도 더 되지 않았나?”
“이 년째지. 꽤 됐는데. 아직도 그런가?”
“음, 쫌…….”
“그거야 뭐, 나이 탓이겠지.”
“아니야, 네 무모함 탓이지. 그런 델 왜 그러고 돌아다니니? 하긴 뭐,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겠다만, 그래도 얼굴이 너무 상했잖아. 나 이번 주에 에스테틱 예약했는데 너도 올래? 청담동 이 실장이 독립해서 오픈했다는데, 뭐 괜찮다더라고.”
“글쎄. 시간이 날까…….”
어마어마한 곳일 터였다. 무조건 가 줘야 하지만 나는 슬쩍 튕겼다. 웬만한 데는 다섯 번에 두어 번 정도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래야 제 말이라면 죽어라 쫓아다니는 없어 보이는 추종자 같아 보이지 않을 테니까.
“거기 웨이팅이 꽤 길더라. 이 실장이 수완이 좀 좋아야 말이지. 그렇지만 뭐, 내가 전화하면 두 자리는 나겠지. 그리고 거기는 못 가더라도 꼭 가야 할 데가 있어.”
주말이면 내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단정 짓는 건 이 천진난만한 공주의 한가한 생각일 뿐이었다. 야근도 있고, 회식도 있고, 팀장의 주말 산행 따위도 있는 직장이었다. 그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려면 난 내 개인시간을 줄이든지 아니면 수면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직 젊기에 그걸 버텨 가고는 있었다.
주말이라……. 이번 주 주말에 시간을 내려면 주중에 매우 고달플 것이 분명했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마사지를 받고 얼굴에 온갖 것을 다 칠하면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가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 중인데, 재연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 주말에 드레스 골라야 해. 네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내 첫 약혼 드레스인데.”
“그래?”
놀라는 척을 해 주었다. 재연이는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가 막내딸이었다. 아직 나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솔직히 막내 공주라는 타이틀이 아니었으면 벌써 재혼을 해도 몇 번을 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누구와 결혼을 하든지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첫 결혼, 아니 약혼이었다. 그에 맞는 리액션을 해 줘야 했다.
“연애는 아니지?”
그래도 친구다운 질문을 해 줘야 했다. 내가 보기에 절대 재연이는 연애결혼 따위를 할 리가 없는 애였다. 그만큼 심심하고, 무료하고 따분한 애니까. 그건 아마 본인만 모르지 세상 사람들이 다 알 것이었다.
“그렇지 뭐, 내가.”
그러나 재연이의 타이틀은 충분히 세기의 결혼 따위를 할 만했다. 어떤 돈에 눈이 먼 놈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친구를 잘 둔 덕에 제법 재계에도 발뒤꿈치쯤은 담가 봤으니.
“나 정도 되면 그래도 정략 약혼 같은 거 한 번쯤은 해 봐야 하겠지? 그렇지만 난 결혼은 꼭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할 거야.”
참으로 천진난만 해피엔딩한 소리였다. 그래, 너 정도라면 그런 꿈도 가지겠지.
“좋지. 그런데 이 약혼은 뭐야? 정략 약혼에서 끝나는 거야?”
졸렸지만, 내리감기는 눈을 뜨게 만드는 이야깃거리였다. ‘결혼은’이라니, 이번 약혼은 약혼으로 끝내 버릴 거라는 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