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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그녀 & 그녀(2)


제 이런 티 나지 않게 빌붙는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들긴 했다. 제가 버텨 나가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는 ‘물주’인 친구가 없어진다는 건 생활에 큰 지장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한다고 해서 재연이가 바뀔 확률은 거의 없다는 답이 30초도 지나지 않아 나왔다. 그러므로 곧 안심을 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뒤에 붙은 정략 약혼이라니…… 갑자기 조금 재밌어지는 듯했다.
“그럴 가능성이 커. 엄마도 뭐 그냥 약혼이나 하래.”
“왜? 상대가 안 좋은 사람인가?”
커피와 같이 나온 동전 크기만 한 마카롱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고르면서 물었다.
“나쁜 놈이래.”
마침 제가 속으로 찜한 민트색을 집어 들면서 재연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나쁜 놈?”
어쩔 수 없이 핑크색을 든 나의 궁금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맘에 들었는지 재연이 바싹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청난 악당 같은 놈이라지?”
“아니 그런데 왜 너한테 약혼을 하라는 거야? 그러다 결혼이라도 해야 하면 어쩌려고?”
재연이가 까르르 웃었다. 참으로 천진난만하게.
“그럴 확률은 제로야. 집에서도 그랬다니까. 그냥 눈가림으로 약혼이나 하라고. 그러다 한 일 년쯤 끌고 세간에 보는 눈이 없어지면 흐지부지 한 듯 만 듯 만들든지 아니면 화끈하게 파혼하라고. 그래서 해 보려고. 은수랑 연서도 다 한 약혼식 나도 한번 드라마틱하게 해 봐야지. 안 그래?”
“거야, 그렇지.”
생각해 보니 그 애들은-그녀들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난 재연이의 친구니까 재연이의 친구는 내가 그 애들이라 칭해도 상관 안 할 것이다- 다들 속도위반 따위를 해서 급하게 약혼식을 했던 거 같다. 바로 결혼식을 해야 하는 분위기였지만, 한 두 달 터울을 두고 약혼이니 결혼이니 한 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걔들은 미리 혼수를 넣어 가지고 했잖니. 모양 안 나게.”
재연이가 들었던 마카롱을 한입 물었다 그냥 놓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살짝 웃음까지 지었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나도 반쯤 먹던 핑크색의 마카롱을 내려놓고 대답해 줬다.
“그러게, 모양이 많이 빠지지. 그럼 넌 약혼식에 의미를 두는 거야?”
“당연하지.”
다시 재연이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의 싱싱한 메이크업은 아마 해가 지고 난 다음에 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렇게 촉촉하게 빛나니까. 얼른 제 얼굴에서 버석거리는 화장들을 씻어 내고 싶어 나는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누르면서 말했다.
“시간 내 볼게.”
“그래야지. 가방 마음에 들지?”
재연이도 알고 있는 듯했다.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바보 천치는 아니니까. 그러나 서로 필요한 걸 주는 사이니까 굳이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그러나 제 탁자 위에 오롯이 올려진 고급스러운 종이 가방을 보고 피로를 풀어야 하는 날이었다.
치사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6개월 전에 새로 입사한 세무법인은 규모가 컸다. 어린 나이에 운이 좋게 그 어렵다는 세무사 시험에 합격했기에 덜컥 이런 대단한 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전엔 세무사 시험에 합격하면 대단하게 여겨 바로 개업을 했다지만, 이제는 세무사도 넘쳐 나는 시대였다. 다행히 빽도 조금 있고, 얼굴도 빠지지 않아서 이런 엄청난 규모의 세무법인 사무실에 취직이 되긴 했지만, 아직 능숙한 실무자-일명 경리들보다도 못한 처지였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고 자격증이 있었기에 월급은 그리 박하지 않았다. 다만 그 박하지 않은 월급은 번듯한 오피스텔의 월세와 무리해서 뽑은 외제 중형차의 할부금으로 원천징수를 당하고, 그 외에는 그럴듯한 외모를 꾸미는 데 밑 빠진 독처럼 들어가 버려 남아나는 게 없을 뿐이었다.
물론 나는 된장녀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에 대단한 사람들을 대하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다 보니 상대에게 밉보이는 차림새나 쓰임새를 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남들은 적금을 들어야 살 수 있는 가방이나 구두 따위를 날름 날로 먹을 수 있는 재벌 2세 친구를 귀하게 여기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그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나를 손가락질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의 보는 눈은 높고, 제 월급은 그 높이를 따라가기 힘들었으니까.
새하얀 빌트인 가구들이 들어찬 오피스텔의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에 비치는 여자를 보았다. 화장을 지우고 나니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잡티가 보이는 얼굴이 안쓰러워 보였다. 정말 그때 많이 상해 버린 걸까? 이 년이나 지났는데…….
무작정, 아니 그 당시에는 절실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이 여행을 하고 싶어서 떠났던 한 달 동안의 오지 여행은…… 내가 왜 이 고생을 자처했나 싶다가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에 잠시 할 말을 잊기도 했었다.
세상을 잊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너무 모든 것을 잊고 있다는 말을 아직도 후유증처럼 종종 듣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그 사람…….
‘난 K라고 불러.’
잊었었다. 그러나 재연이가 파 뒤집은 제 얼굴 덕에 그 여행의 끝자락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재빨리 떠오른 끝자락을 저기 어딘가로 처박아 버렸다.
열심히 스킨로션을 바르면서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가 넘어 있었다. 비싼 돈을 내고 산 미백 크림과 에센스를 듬뿍 발랐다. 아무리 바빠도 주말에 에스테틱에는 가야 할 것 같았다.

* * *

“아니 그것보다, 바이올렛.”
보라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러나 보라는 왠지 촌스러웠다. 그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요즘 유행하는 입꼬리 올림 수술을 막은 건 백 번 천 번 잘한 일이었다. 저 입술의 주름 끝에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가 그나마 밋밋한 얼굴의 포인트니까.
“그렇지? 핑크라니……. 웃기잖아.”
“피앙세는 순결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필요 없지 않아? 그쪽이 노출은 없지만 더 섹시해.”
놀랄 만큼 매끄러워진 제 손등을 두드리면서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렴 한 번 가는데 돈 백이 넘게 들었고, 설사 그 돈을 싸 들고 간다 하더라도 마냥 웨이팅을 해야 하는 최고급 에스테틱에서 하루 종일 주무르고 문질러 준 피부는 광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니 제 눈앞에 거적이나 장례식용 나일론 한복을 입고 서 있다 하더라도 찬사가 나올 판인데, 눈앞에는 이름만 들어도 헉 하는 디자이너의 드레스들이 즐비했다. 단, 그 이름값을 별로 못 하는 듯한 평범한 디자인에 의아스럽긴 하지만.
“네 건 이게 어때?”
부담스러운 디자이너의 이름에 비하면 하등의 쓰잘데기 없는 드레스라는 이름의 하얀색 천 쪼가리를 들고 있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주인공은 너잖아. 흰색은 절대 안 되지.”
“그런가? 그럼 차 실장님, 제 친구 옷도 하나 골라 줘요. 쟨 스타일이 좋아서 아무거나 잘 어울릴 테니까.”
그녀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거대 기업 막내딸의 약혼은 단순한 파티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결합일 수도 있었고, 잘 포장된 재계의 보이지 않는 합병식일 수도 있었다. 그런 대단한 행사의 준비 따위를 저 내키는 대로 바캉스 여행에 필요한 수영복을 사러 가듯 친구와 와서 정해 버릴 수 있는 고집을 부릴 수 있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아니, 결혼식은 아니니까 그 엄하신 회장님 내외가 내키지 않는 약혼 드레스 정도야 혼자 고르는 걸로 기분 풀이를 할 수 있도록 해 줬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재연이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에 하듯 옷이나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야 어제 밤을 새우긴 했지만, 아까 마사지를 받으면서 한잠 잤더니 몸이 편해졌다. 그리고 재연의 기분이 좋은 건 더 다행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옷을 고르러 같이 오는 것도 피곤했다. 넘치는 건 돈이고, 보는 건 다 수준 이상이었다. 그러니 고르는 데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어떠신가요?”
검은색의 드레스였다. 단출하지만 우아해 보였다. 커다란 코르사주가 포인트였지만 그걸 떼면 그냥 입어도 될 듯했다. 다만 가격이 그냥 입을 만한 옷은 아닐 터였지만.
“너무 칙칙하지 않나?”
“괜찮아.”
그 정도 가격에 그 브랜드 네임이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라는 말은 물론 뺐다.

재연이는 늘 무료했다. 늘 심심했고, 늘 재미없고, 사는 게 늘 나른했다. 그래서 같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른하거나 무료할 수 없는 말단 세무사라는 직업을 가진 저로서는 그게 부럽기도 하고 가끔은 짜증스럽기도 했다. 그것을 감내하고 얻어 가는 것이 있더라도.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아니 다른 게 정답일지도 몰랐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첫 번째 약혼식의 드레스를 고르는 날이니까.
유난히 이벤트 따위를 좋아하는 그녀는 이런 성대한 이벤트의 주인공이 되는 게 나름 기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기분을 맞춰 주는 것도 제 할 일이었다. 게다가 그 대가로 제 월급으로도 한참 부담스러운 과하디과한 옷 한 벌을 챙겼다.
“묻지도 않네.”
“뭘?”
저녁때가 됐는데 드레스샵에서 주는 커피 따윌 마시며 앉아 있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이런 곳에서 공짜로 주는 것은 절대 손도 안 대는 재연이가.
“내…… 약혼자.”
궁금해해 줘야 했다. 그게 순서가 맞는 건데 하도 머릿속이 복잡해서 잊고 있었다. 친구로서 약혼자를 궁금하게 여겨 주는 건 당연했다. 가끔 제가 받은 것에 대한 만큼의 구실을 못 하는 건 미안해해야 했다.
“아, 그러게. 진작 물어보려고 했는데, 저번에…… 하도 안 좋은 소리를 해서 말을 못 꺼냈네.”
나쁜 놈이니 악당이니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었다. 그리고 왜 그런 결혼을, 아니 약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게 있는 자들의 특징이었으므로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익숙해져 묻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물어봐 줬어야 했는가 싶었다.
“거기엔…… 좀 뭐,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복잡하긴 한데 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고……. 그런데 말이야.”
몸을 들이민 재연이 제가 좋아하는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럼 맞장구를 쳐 줘야지.
“그런데?”
그러나 갑자기 몸을 뒤로 빼더니 웃음을 지었다. 마치 누가 보고 있는 것처럼. 저럴 땐 재연도 나름 예쁘다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귀하게 자라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살았으니 굳이 깎고 다듬지 않아도 훤한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그게 부러울 거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다.
“아냐. 이따 이야기해 줄게. 저녁은 8시에 먹자. 아직 배 안 고프지?”
배가 고팠다. 많이 먹어도 몸에 쌓이지 않는 게 축복받은 제 체질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머리를 많이 쓰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저로서는 일이 없으면 별로 잘 먹지 않는다는 걸 그 이유로 들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부쩍 머리 쓸 일이 많았고, 그 덕에 오늘은 출근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배가 고팠다. 마사지를 진득하게 받는 것도 일이라면 일일 수도 있었다.
“그래. 뭐 따로 예약했어?”
재연이는, 우리나라 어떤 식당이든지 당장 먹고 싶은 것을 제 시간에 맞게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젊은 여자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뭘 먹어야겠다 싶으면 제 입맛에 맞는 대로 제 시간에 맞춰 먹었다. 그리고 그걸 해결하는 게 두둑한 봉급을 받는 이유인 비서도 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한 시간이나 텀을 두고 약속이란 걸 잡았나 싶었다.
“누가 와?”
“음. 맞아. 누가 오기로 했어.”
재연이답지 않게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별일이다. 재연이가 누군가에게 흥미를 느끼는 건 참 드문 일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다들 열광하는 아이돌이니 하이틴 스타니 하는 것도 시답지 않아 했다. 만약 딴 애들 같았다면, 제 생일날 무더기로 불러다가 하루 종일 제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할 수도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굳이 그들에게 흥미를 느낄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처음 보는 표정은 대체 뭔가. 설마?
“약혼자?”
“뭐, 뻔한 거지. 머리 좋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재연이, 아니 이런 애들 특유의 재수 없음이 풀풀 풍겼지만, 그것에 대해 별로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있어도 되겠어?”
굳이 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악당이니 나쁜 놈이니 하는 소리를 들어서, 저쪽 계통의 인격이 시궁창 같은 놈들은 요즘 들어 클라이언트라는 이름으로 자주 보기 때문에 굳이 미리 보고 싶지가 않았다.
“음, 그래서. 혼자 있기엔 좀 우습다고나 할까? 그냥 가볍게 밥이나 같이 먹자고.”
제 약혼자였다. 그런데 왜 혼자 만나기에 우습다는 걸까?

재연이의 취향과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재연이는 고리타분한 것을 좋아했다. 가끔 같이 다니는 게 짜증스러울 정도로. 자기가 재벌집 외동딸이란 걸 과시하듯 으리으리하고 고전적이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시시콜콜 옆에서 시중을 들어 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니 아마 제가 셀프로 음식을 들고 다녀야 하는 패스트푸드점이니 하는 곳은 얼씬도 안 하는 게 당연했고, 하다못해 끝내주는 인테리어의 커피 전문점 같은 곳에 가도 같이 간 자신이나 아니면 비서가 커피를 들고 다녔다. 그 여자야 그런 걸 하고 돈을 받는 여자니까. 그러나 그런 곳에 간 건 손에 꼽았다. 대부분 명품관이나 기가 막힌 드레스샵이나, 아니면 이런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서는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커피 따위 최고급으로 딸려 나오니까.
“여기 어때, 수현아?”
“괜찮은데?”
괜찮았다. 정말로. 늘 좀 침침하고 위압적이고 쉐프들이 들고 나오는 가격만 고급진 음식들이 나오는 곳보다는 캐주얼해 보이고 요즘 젊은 여자들, 그러니까 평범한 저 같은 여자들이 딱 좋아할 만한, 그러나 가격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이는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다만, 그런 곳을 지나서 조용한 별실로 안내되기는 했다.
“난 소란스럽다. 저런 시끄러운 데서 먹을 것이 넘어가나?”
편의점이나 코스트코의 푸트 코트를 보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현은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거야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조용한 곳도 있잖아. 그쪽은 언제 온대?”
시계를 흘끗거리면서 보았다. 역시 재연이의 독특한 취향 덕에 득템한 비싼 시계였다.
“시간 맞춰 올 거야. 아 왔다.”
왔다, 그 누군가가…….
수현은 저도 모르게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제 눈앞에는 그 악당이라는 말과는 전혀 딴판인, 매끈한 슈트를-그것도 요즘 보기 힘든, 조끼까지 있는 완벽한 쓰리피스의 슈트를 잘 차려입은 미끈한 남자가 약간의 무표정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모델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 떨어지는 고급스러운 옷 덕인지 아니면 그 옷에 맞는 매끈하고 샤프한 외모 때문인지 남자는 하재연이라는 재벌 2세의 영양에게 전혀 기 따위 죽지 않을 만큼 도도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저도 모르게 굳어 버린 건 딴 이유 때문이었다.
‘K?’
K라니…… 기억에도 없었던 이상한 알파벳이 툭 튀어나왔다.
“……?”
남자는 신경질적인 눈으로 재연을 쳐다보았고, 재연은 그것을 보고는 그녀답지 않게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말했던 친구예요. 그런 ‘친구’ 말고 진짜 친구요.”
‘친구’라는 의미를 잘 알고 있는지 남자는 바로 대답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현태입니다.”
그렇지만 남자는 손을 내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고개를 끄덕거리지도 않았다. 그냥 슈트 단추 하나를 푼 뒤에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수현은 제 굳은 얼굴을 펼 수 있었다.
단지, 키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이제 보니 닮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정체불명의 남자는 덥수룩했고 지저분했고 야성적이었다. 게다가 덩치도 어마어마하게 컸었다. 분명히 그 구채구(九寨溝)의 무성한 원시림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그런 남자였다. 그리고…… 열정적……이었다. 이 창백하고 사나운 표정의 재벌 2세와는 전혀 다른…….
그제야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를 했다. 그가 앉자 기다렸다는 듯 메뉴판을 들고 오는 종업원에게 남자는 묻지도 않고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그리고 재연이도 그걸 보고만 있었다. 희한한 광경이었다.
있는 자의 심술이라도 보여 주듯, 재연이의 취미는 메뉴판 고대로 주문하지 않고 제 상식과 취향을 내보이고 싶은 듯 이것저것 조합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거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당황하는 종업원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하재연을 저렇게 얌전한 요조숙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그녀가 악당이라고 규정한 눈앞에 있는 자신감이 넘쳐서 사람의 기를 빨아들일 것 같은 오만한 남자의 존재였다.
“길 막히지는 않으셨는지?”
“뭐 제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괜찮았습니다.”
“다행이군요.”
다음 주면 약혼을 하는 사이였다. 뭔가 다른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 무탈한 대화들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아니 하재연이 저렇게 고분고분 대답을 하는 게 가장 큰 의미인 걸까?
뭘 하는 남자였더라? 저 남자 옆에 서 있으려고 드레스까지 골랐다지만, 수현은 제 잘난 친구의 일회용 약혼자 따위가 뭘 하는지까지 알 만큼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 아니 끈끈한 친분이 있다 해도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