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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1화

프롤로그


혁진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문은 바로 열렸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꼭대기 층이고, 늦은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회사는 전체적으로 한산했다.
적당히 그을린 얼굴에 살짝 흐트러진 머리, 어딘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릴 순 없었다. 반듯한 태도에도 그는 어딘지 야성적으로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한 번에 1층까지 내려가길 바랐지만, 8층에서 엘리베이터는 멈췄다.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몸을 돌려 그를 등졌다. 엘리베이터 안에 어떤 사람이 탔건 말건 상관없이 그저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는 것 같았다.
여름이 끝나 갈 무렵이었지만 그녀는 소매가 긴 얇은 검정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안에 입은 브래지어와 속옷의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단정한 느낌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스커트, 그 밑으로 스타킹에 감싸인 쭉 뻗은 다리,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헤어스타일까지 어딘지 답답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살짝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미세한 몸의 움직임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얼핏 보니 목까지 단추를 채운 것 같았는데, 순간적으로 그것을 확 뜯어 버리고픈 충동이 일어나 혁진은 자신도 깜짝 놀랐다.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야. 답답해. 그냥, 답답한 느낌이야.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 쇼팽의 곡이 흐른다. 혁진이 슈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내려 하자 앞에 서 있던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아, 민혁 씨.”
혁진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핸드폰을 사무실에 놓고 온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아주 맑았다. 여성스럽고 섹시했다. 마치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벗겨 버리고픈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옷차림처럼.
“웨딩드레스는…….”
그녀는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의식했는지 살짝 음성을 낮췄다.
“어차피 결혼하면……. 그러니까…….”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입술을 깨무는 듯했다.
“오늘은 일이 너무 늦게 끝났어요. 미안해요.”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계속 전화 통화를 했고 한 쌍의 남녀는 속닥였다.
드디어 1층. 그녀는 여전히 전화를 끊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집에 가서 전화할게요. 일단.”
한 쌍의 남녀가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혁진은 핸드폰을 찾으러 다시 올라가야 했다. 그가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안 내립니까?”
“아, 네.”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엘리베이터를 나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잠시 뒤를 돌아다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는 그를 이상한 듯 쳐다보자 혁진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눈길을 끄는 데가 있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무언가를 걱정하거나 갈망하는 듯한 눈빛이 특히 그랬다. 그것은 그녀의 온몸에 흐르는 분위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혁진은 이런 부류의 여자를 아주 싫어했다. 어딘가 억압되어 있는 듯이 답답함이 느껴지는, 뭔가를 원하는 듯한, 남자가 오해하기 딱 쉬운 그런 아리송한 분위기가 있는 여자.
아주 오래전에도 그런 여자가 있었다.
혹시 그녀를 여자로 사랑했던 것일까.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왜 자신을 떠났을까. 자신이 그녀를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가장 사랑했을 때.
그는 단 몇 분 만에 여자를 판단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자신의 판단력을 지나치리만큼 신뢰했다. 아니, 필요 이상으로 믿고 있었다.
꼭 닫힌 블라우스, 조심스러운 목소리,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경계하는 눈빛.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든다. 동시에 속에서 뜨겁고 강한 기운이 그를 덮쳤다. 그는 격렬한 감정의 소유자이지만 그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자제심 또한 강한 사람이었다.
방금 전 나간, 그녀의 잔상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1


그날은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불었다. 딱히 태풍이 왔다거나 심한 강풍 주의보가 내려지지 않았는데도 입고 간 스커트가 비바람에 뒤집힐 것 같아 그녀는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아침에 옷을 입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체크한다. 점점 기후 변화가 들쑥날쑥이라서 날씨에 따른 옷차림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환절기엔 감기에 걸리기 일쑤고 기침과 코를 훌쩍거리고 다니는 것만큼 허술해 보이는 것도 없을 터.
물론 감기에 걸리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만큼 자기 관리에 허점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몸매 관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건강 관리다. 게다가 회사라는 전쟁터에서 약한 육체의 여자를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겉으론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사람들은 곧바로 자기 보호에 들어가기 바쁘다. 심한 경우는 같이 점심을 먹는 것도 피한다. ‘요즘 감기가 원체 독해야지.’ 이런 농담을 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올해 처음으로 꺼내 입은 트렌치코트를 단단히 여미고 우산을 접었다. 조금 전까지 내렸던 이슬비는 바람덕분에 휘청거리며 힘겹게 우산을 받치고 다니는 사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젖은 머리를 털고, 회사 정문 앞에서 멈췄다. 12층짜리 사옥으로 멋지게 꾸민 <작가주의> 출판사가 그녀가 5년째 일하고 있는 직장이다.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메이저급 출판사답게 아침부터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예상되고 있어서 그녀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5년 차이지만 불과 한 달 전에 해외문학부로 발령이 난 터라 아직 일이 완전히 손에 익지 않아 더욱 그렇다.
5년 동안 내내 실용서와 비소설 분야만 맡다가, 평소 해외문학에 관심이 많다는 말을 은연중에 내비쳐서 그랬을까. 밀어닥치는 원고에 치여 매너리즘에 빠질 때쯤 생각지도 않았는데 해외문학부로 옮기라는 제의를 받았다.
원래부터 내성적이고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녀는 좋든 싫든 다시 신입 때의 긴장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부서를 바꾸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새로운 기획과 작가 발굴이 목표인 실용서에 비해 원고를 다듬는 빈도수는 낮을지 몰라도 번역서에 대한 이해와 해외 저작권자와 국내 에이전시와의 상대, 계약서 확인 등 치밀함이 훨씬 요구되는 파트라 그녀는 오늘도 머릿속에 생각이 많다. 물론 한 달 전부터 잦아진 야근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에 재미를 붙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일 욕심이 많다기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실수하지 않고 일을 잘 처리하자는 주의였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모험심이 부족해 새로운 일에는 도전 정신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평소 실생활 자체도 그러하다는 걸 인정했다.
모험심이라.
그녀는 코트에 묻은 물방울을 털며 생각해 보았다.
인생에서 모험이란 건 얼마나 부질없고 헛되던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항상 꿈을 꾸고 모험을 감행하라고 하지. 그 후에 책임져야 하는 결과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마치 그렇게 사는 것이 멋지고 앞서 나가는 삶처럼 얼마나 요란한 포장을 하는가.
그녀는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어려서부터 성숙하다거나 가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는데 어쩐지 자신이 인생을 너무 회의적으로 보는 것 같아 씁쓸해졌다.
우중충하고 바람 부는 아침처럼 자신의 마음도 우울해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이 용납되지 않고 용납되어서도 안 되는 일터이다. 상큼한 미소와 웃음은 기본.
그녀는 억지로라도 웃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정말 처진 기분에서 벗어날 때도 있다. 직장이라는 곳이 그런 의미에선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죽게도, 살게도 하는 곳.
그래서 그 어떤 이유라도 그녀는 이곳을 좋아했고, 좋아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일 역시 좋아했고, 그 일을 아주 잘 해낼 때가 더 많았다. 의식적인 노력이나 의식적인 미소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을 통과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습관적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스커트가 살짝 젖어 불편했지만 코트가 가려 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다른 직원들보다 빨리 출근하기에 이 시간이면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못 보던 남자가 먼저 타고 있었다. 아마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것이리라.
그 남자는…….
맙소사. 누가 보아도 눈길을 끌 만한 남자였다. 검정색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그는 잘 그을린 피부에 냉정해 보이는 눈빛이 매력적인 사내였다. 잘생겼다는 말로 설명이 부족한 듯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는 그냥 남자라는 느낌이었다. 그 공기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제한된 공간에서, 그들의 눈도 마주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 한쪽에 기대어 서서 여유 있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마치 그녀를 뒤에서 품평회 하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는 8층이 눌려 있었다. 그녀도 내릴 층이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능적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투명한 피부 톤에 어딘지 상기된 표정, 부드러운 눈매와 핑크빛이 도는 입술.
나쁘지 않았다. 워낙 내추럴한 분위기를 좋아해 거의 색이 없는 립스틱을 바르는데도 그녀는 원래 입술 색이 붉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음악 소리가 들렸다. 쇼팽의 녹턴 1번 피아노 연주곡. 이런 날씨에 딱 어울리는 곡이지.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핸드백을 열고는 핸드폰을 집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핸드폰에는 전화 온 흔적이 없었다.
“응. 그래. 좋아. 물론.”
짧은 단답형의 목소리. 낮은 목소리. 어딘지 착착 감기는 목소리.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이어지는 찰나, 그녀가 그를 잠시 쳐다보자 그는 전화를 끊고 그녀를 향해 말을 건넸다.
“벨소리가 똑같은가 봐요.”
“아, 네.”
그녀는 가방 안에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흔치 않은 벨소린데.”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빈정대는 듯한 말투여서 기분이 좋진 않았다. 아까부터 마치 자신을 가늠하듯 쳐다보는 불쾌한 눈빛에 정면으로 맞설 만큼 그녀는 강단 있는 여잔 아니었다.
어딘지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에게 본능적으로 맞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자기 보호와 같은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에 내렸다. 이른 시각이라 몇몇 직원들이 복도 한쪽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 문학부 직원인 듯했다. 부서가 일일이 나눠져 있고, 다른 직업에 비해 이직률도 높아 타부서 사람들을 전부 알진 못했다. 그런데 그가 향한 곳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옆이었다.
“편집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녀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남자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래, 오랜만이네.”
아까와 같은 낮은 톤의 목소리를 듣자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편집장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