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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2화
그로부터 한 시간 뒤.
“고홍주 씨. 이쪽은 권혁진 편집장님이세요.”
엘리베이터에 그 남자를 서 팀장은 이렇게 소개했다. 그제야 홍주는 그를 찬찬히 훑어볼 수 있었다.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대놓고 그를 정면으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마, 홍주 씨는 잘 모를 거예요. 1년 동안 해외에 나가 계셨으니까.”
그가 혁진을 마주 보며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홍주 씨는 한 달 전에 저희 팀에 왔어요. 그래서…….”
혁진이 그의 말을 자르고 홍주를 마주 보았다.
“권혁진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회사에서의 수줍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단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가 몰라 뵈었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편집장님.”
그녀가 순간 손을 빼려 하자, 혁진은 아까보다 더 힘을 꽉 주어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제가 더 잘 부탁드려야죠, 고홍주 씨.”
그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꼭 다문 입술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강인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자신의 손을 부서질 정도로 꽉 잡은 커다란 손이 너무도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어떻게든 그의 손을 놓으려고 고심하던 찰나, 다시 한번 쇼팽의 연주곡이 울렸다. 덕분에 그녀의 손이 자유로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번엔 그쪽인데.”
그가 재밌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홍주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김민혁’이라는 이름이 뜨자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근무 중이에요. 나중에.”
그녀가 전화를 받는 틈을 타 서 팀장이 혁진에게 무언가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민혁 씨. 네…… 네. 오늘은 늦게 끝날지도 몰라요. 아니, 기다리지 마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그녀가 전화를 끊자 서 팀장은 장난기 있는 말투로 그녀를 놀렸다.
“곧 있으면 신부가 될 사람이 애인한테 너무 사무적인 거 아냐?”
“아니에요, 그런 거.”
홍주는 한쪽 머리를 뒤로 넘기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서 팀장은 혁진의 눈치를 살피며 분위기를 가볍게 몰고 가려 했다.
“편집장님이 일 빡세게 시키기로 유명하신 분인데, 어쩌나. 우리 홍주 씨.”
“팀장님, 제가 그 정도 구분도 못 할 것 같아요?”
그러자 혁진이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인사는 했으니, 이젠 일 시작하지.”
그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의 그 빈정거리던 미소는 이미 사라졌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그가 계속 자신을 주시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을 어딘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의 눈빛이 거슬리고 신경 쓰인다. 표현이 이상하긴 한데,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자신의 알몸을 다 훑는 것 같은,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눈빛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그를 남자로 의식해서 피해망상증에라도 걸린 것 같다며 합리화를 했다.
그는 아무 감정도 없는데, 그는 그저 부하 직원으로서 그녀를 대했을 뿐인데. 자신 혼자 이런 불편한 감정을 갖고 그를 대하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오늘 처음 만났는데. 그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그가 상사가 아니라면 좋겠다.
공과 사가 얽히는 일을 그녀는 늘 경계해 왔다. 왜냐하면 공사(公私)가 얽혀 들면 언제나 사(私)가 패하기 마련이니까. 그것은 뚜렷한 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맞는 거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실패할 감정 따위는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하다.
게다가 자신에겐 인생을 함께할 애인이 있지 않은가. 곧 결혼할.
어찌 보면 모든 것들이 꽃길인 셈이다. 이제 머지않아 가정도 꾸릴 것이고, 이곳에서 커리어를 더 쌓다 보면 분명히 인정받는 편집자로서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번역서들이야. 한번 훑어보는 것만도 며칠은 걸릴 거야.”
어느새 그녀는 그 앞에서 업무 지시를 받고 있었다. 홍주는 바짝 긴장을 한 채 원고들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편집장님.”
“애인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오늘은.”
“알고 있습니다, 일찍 못 끝나는 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홍주는 그러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저, 벨소리 말인데요. 제가 바꿀게요. 아무래도 그러는 게.”
“그럴 필요 없어.”
“아니, 저…… 그건.”
“가서 일해.”
그가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당분간은 야근이야.”
홍주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언제나 이 일을 좋아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홍주는 어렸을 때부터 보수적인 집안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랜 공직 생활을 하다 불과 일 년 전에 퇴직했고, 엄마는 속물근성이 다분한 평범한 중년 여인이다. 그녀의 집안은 아직도 식탁에서 쓸데없이 잡담을 한다든가, 늦은 밤까지 술을 먹고 들어오는 걸 참지 못하고 일장 연설을 하는 분위기다.
어려서부터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공식 아닌 공식을 수도 없이 들은 터라 이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에도 익숙하다. 비록 경제적인 궁핍은 없었지만 그녀는 집 안에 있으면 늘 불편하고 불안한 정서에 시달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히 답답한 집안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집에 와 있는 하나밖에 없는 언니를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 오니?”
그녀의 언니. 항상 자신과 비교 대상이 되는 평생의 라이벌이자, 숙적과도 같은 존재.
홍주는 여느 때처럼 무심히 대꾸했다.
“일이 많아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밤낮없이 일을 해? 월급은 많이 줘?”
“언니, 나 지금 피곤하거든.”
그때였다.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정 여사가 거실에서 쌀쌀맞게 대꾸했다.
“너는 오랜만에 언니가 왔는데, 그 말투가 뭐니?”
“지난주에도 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늘 있는 일이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심사가 뒤틀렸는지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딴 출판사 따위는 뭐 하러 다니는데. 이제 곧 의사 사모님이 될 건데 신부 수업이나 조신하게 받지 않고.”
“놔둬요, 엄마. 홍주 쟤는 그럼에도 난 내가 하고 싶은 일 당당히 한다, 뭐. 이런 모드잖아. 21세기는 그런 여자들이 멋지게 사는 거잖아요? 부잣집 아들 만나서 호강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여자들의 얘기라잖아. 그러니까 그냥 놔둬요. 뭐,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에 정 여사는 발끈하며 맞장구를 쳤다.
“홍주 너는 헛똑똑이야. 네 성적이면 충분히. 아니, 뭐 다 지나간 일이지만. 요즈음이 어떤 세상이니. 학교 선생이 판검사한테 시집가도 꿀릴 게 없는 세상이야. 진즉에 사범대 들어가서 임용 패스 하면 얼마든지 남자 골라잡을 수 있는 것을. 왜 이런 절호에 기회를 못 살리고.”
“엄마, 그만둬요. 벌써 다 지난 일을. 그래도 홍주, 의사 남친 물었잖아. 그것도 뭐 다 네 형부 덕이지만.”
급기야 홍주는 참을 수가 없었다.
“좀 가 줄래? 벌써 11시가 넘었거든. 형부가 안 찾아?”
“출장이야. 그리고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다 네 생각…….”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언니는 언니나 잘하고 살아. 쓸데없이 생색낼 생각 말고.”
“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언니한테 말버릇 하곤. 홍주, 너는 네 언니 반만 닮아도 인생 성공한 거야. 네 주제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남잘 언니가 만나게 해 줬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에, 그 말버릇이 뭐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남자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엄마는 항상, 늘, 한결같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부터 열까지를 언니와 비교했다.
그래, 어느 정도는 그녀도 인정했다. 언니는 타고난 미모에 공부까지 뛰어나게 잘해서 어려서부터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모든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고,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중, 고등학교를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홍주는 늘 언니의 그림자 노릇만 해야 했다. 남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언니와 친해지고 싶어 홍주를 이용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추억거리지만 그 남학생들 중엔 홍주가 짝사랑했던 남자도 있었다.
처음엔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고 나갔다가 언니의 연락처를 물으며 제발 한 번만이라도 언니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통에 어린 나이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다.
수많은 남학생이 홍주를 통해 그녀의 언니를 만나고 싶어 했다. 결국 학교의 퀸카였던 그녀의 언니, 고윤주의 동생이란 사실을 누군가 아는 게 너무 싫어 그녀는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내성적인 소녀로 자라게 되었다.
난 고윤주의 동생이 아니라, 그냥 고홍주야. 난 그냥 고홍주라고.
그녀는 항상 이렇게 자신에게 되뇌었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언니의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마음속에 공허감만은 어찌하질 못했다.
언니라는 존재는 친구처럼 쉽게 인연을 끊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평생을 원하든 원치 않든, 붙어 다니든 떨어져 다니든, 어쩔 수 없이 함께 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홍주는 자신이 이렇게 얘기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엄마, 언감생심은 아니죠. 그 남자가 저 많이 좋아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네가 고분고분한 맛은 좀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러니까 괜히 잘난 척하지 말고 남자가 하자는 대로 해. 좀 똑똑한 사람이니.”
엄마는 그러면서 윤주를 힐끗 보다 말고 말을 이었다. 내심 자신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홍주의 손을 잡으면서 속삭였다.
“도도하고 까칠한 네 언니, 진짜 좋은 남자 많이 놓친 거 너도 알지? 지금 박 서방도 뭐 처지는 거 없는 사람이지만 넌 네 언니와는 다른 케이스야. 그건 너도…….”
홍주는 엄마에게 잡힌 손을 조용히 놓았다.
“엄마, 저 가서 쉴게요. 말 통하는 언니와 얘기하세요.”
“이놈의 계집애는 다 너 생각…….”
정 여사는 혀를 끌끌 차며, 방으로 들어가는 홍주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2화
그로부터 한 시간 뒤.
“고홍주 씨. 이쪽은 권혁진 편집장님이세요.”
엘리베이터에 그 남자를 서 팀장은 이렇게 소개했다. 그제야 홍주는 그를 찬찬히 훑어볼 수 있었다.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대놓고 그를 정면으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마, 홍주 씨는 잘 모를 거예요. 1년 동안 해외에 나가 계셨으니까.”
그가 혁진을 마주 보며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홍주 씨는 한 달 전에 저희 팀에 왔어요. 그래서…….”
혁진이 그의 말을 자르고 홍주를 마주 보았다.
“권혁진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회사에서의 수줍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단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가 몰라 뵈었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편집장님.”
그녀가 순간 손을 빼려 하자, 혁진은 아까보다 더 힘을 꽉 주어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제가 더 잘 부탁드려야죠, 고홍주 씨.”
그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꼭 다문 입술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강인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자신의 손을 부서질 정도로 꽉 잡은 커다란 손이 너무도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어떻게든 그의 손을 놓으려고 고심하던 찰나, 다시 한번 쇼팽의 연주곡이 울렸다. 덕분에 그녀의 손이 자유로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번엔 그쪽인데.”
그가 재밌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홍주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김민혁’이라는 이름이 뜨자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근무 중이에요. 나중에.”
그녀가 전화를 받는 틈을 타 서 팀장이 혁진에게 무언가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민혁 씨. 네…… 네. 오늘은 늦게 끝날지도 몰라요. 아니, 기다리지 마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그녀가 전화를 끊자 서 팀장은 장난기 있는 말투로 그녀를 놀렸다.
“곧 있으면 신부가 될 사람이 애인한테 너무 사무적인 거 아냐?”
“아니에요, 그런 거.”
홍주는 한쪽 머리를 뒤로 넘기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서 팀장은 혁진의 눈치를 살피며 분위기를 가볍게 몰고 가려 했다.
“편집장님이 일 빡세게 시키기로 유명하신 분인데, 어쩌나. 우리 홍주 씨.”
“팀장님, 제가 그 정도 구분도 못 할 것 같아요?”
그러자 혁진이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인사는 했으니, 이젠 일 시작하지.”
그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의 그 빈정거리던 미소는 이미 사라졌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그가 계속 자신을 주시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을 어딘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의 눈빛이 거슬리고 신경 쓰인다. 표현이 이상하긴 한데,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자신의 알몸을 다 훑는 것 같은,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눈빛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그를 남자로 의식해서 피해망상증에라도 걸린 것 같다며 합리화를 했다.
그는 아무 감정도 없는데, 그는 그저 부하 직원으로서 그녀를 대했을 뿐인데. 자신 혼자 이런 불편한 감정을 갖고 그를 대하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오늘 처음 만났는데. 그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그가 상사가 아니라면 좋겠다.
공과 사가 얽히는 일을 그녀는 늘 경계해 왔다. 왜냐하면 공사(公私)가 얽혀 들면 언제나 사(私)가 패하기 마련이니까. 그것은 뚜렷한 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맞는 거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실패할 감정 따위는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하다.
게다가 자신에겐 인생을 함께할 애인이 있지 않은가. 곧 결혼할.
어찌 보면 모든 것들이 꽃길인 셈이다. 이제 머지않아 가정도 꾸릴 것이고, 이곳에서 커리어를 더 쌓다 보면 분명히 인정받는 편집자로서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번역서들이야. 한번 훑어보는 것만도 며칠은 걸릴 거야.”
어느새 그녀는 그 앞에서 업무 지시를 받고 있었다. 홍주는 바짝 긴장을 한 채 원고들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편집장님.”
“애인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오늘은.”
“알고 있습니다, 일찍 못 끝나는 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홍주는 그러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저, 벨소리 말인데요. 제가 바꿀게요. 아무래도 그러는 게.”
“그럴 필요 없어.”
“아니, 저…… 그건.”
“가서 일해.”
그가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당분간은 야근이야.”
홍주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언제나 이 일을 좋아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홍주는 어렸을 때부터 보수적인 집안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랜 공직 생활을 하다 불과 일 년 전에 퇴직했고, 엄마는 속물근성이 다분한 평범한 중년 여인이다. 그녀의 집안은 아직도 식탁에서 쓸데없이 잡담을 한다든가, 늦은 밤까지 술을 먹고 들어오는 걸 참지 못하고 일장 연설을 하는 분위기다.
어려서부터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공식 아닌 공식을 수도 없이 들은 터라 이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에도 익숙하다. 비록 경제적인 궁핍은 없었지만 그녀는 집 안에 있으면 늘 불편하고 불안한 정서에 시달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히 답답한 집안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집에 와 있는 하나밖에 없는 언니를 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 오니?”
그녀의 언니. 항상 자신과 비교 대상이 되는 평생의 라이벌이자, 숙적과도 같은 존재.
홍주는 여느 때처럼 무심히 대꾸했다.
“일이 많아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밤낮없이 일을 해? 월급은 많이 줘?”
“언니, 나 지금 피곤하거든.”
그때였다.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정 여사가 거실에서 쌀쌀맞게 대꾸했다.
“너는 오랜만에 언니가 왔는데, 그 말투가 뭐니?”
“지난주에도 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늘 있는 일이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심사가 뒤틀렸는지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딴 출판사 따위는 뭐 하러 다니는데. 이제 곧 의사 사모님이 될 건데 신부 수업이나 조신하게 받지 않고.”
“놔둬요, 엄마. 홍주 쟤는 그럼에도 난 내가 하고 싶은 일 당당히 한다, 뭐. 이런 모드잖아. 21세기는 그런 여자들이 멋지게 사는 거잖아요? 부잣집 아들 만나서 호강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여자들의 얘기라잖아. 그러니까 그냥 놔둬요. 뭐,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에 정 여사는 발끈하며 맞장구를 쳤다.
“홍주 너는 헛똑똑이야. 네 성적이면 충분히. 아니, 뭐 다 지나간 일이지만. 요즈음이 어떤 세상이니. 학교 선생이 판검사한테 시집가도 꿀릴 게 없는 세상이야. 진즉에 사범대 들어가서 임용 패스 하면 얼마든지 남자 골라잡을 수 있는 것을. 왜 이런 절호에 기회를 못 살리고.”
“엄마, 그만둬요. 벌써 다 지난 일을. 그래도 홍주, 의사 남친 물었잖아. 그것도 뭐 다 네 형부 덕이지만.”
급기야 홍주는 참을 수가 없었다.
“좀 가 줄래? 벌써 11시가 넘었거든. 형부가 안 찾아?”
“출장이야. 그리고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다 네 생각…….”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언니는 언니나 잘하고 살아. 쓸데없이 생색낼 생각 말고.”
“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언니한테 말버릇 하곤. 홍주, 너는 네 언니 반만 닮아도 인생 성공한 거야. 네 주제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남잘 언니가 만나게 해 줬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에, 그 말버릇이 뭐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남자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엄마는 항상, 늘, 한결같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부터 열까지를 언니와 비교했다.
그래, 어느 정도는 그녀도 인정했다. 언니는 타고난 미모에 공부까지 뛰어나게 잘해서 어려서부터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모든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고,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중, 고등학교를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홍주는 늘 언니의 그림자 노릇만 해야 했다. 남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언니와 친해지고 싶어 홍주를 이용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추억거리지만 그 남학생들 중엔 홍주가 짝사랑했던 남자도 있었다.
처음엔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고 나갔다가 언니의 연락처를 물으며 제발 한 번만이라도 언니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통에 어린 나이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다.
수많은 남학생이 홍주를 통해 그녀의 언니를 만나고 싶어 했다. 결국 학교의 퀸카였던 그녀의 언니, 고윤주의 동생이란 사실을 누군가 아는 게 너무 싫어 그녀는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내성적인 소녀로 자라게 되었다.
난 고윤주의 동생이 아니라, 그냥 고홍주야. 난 그냥 고홍주라고.
그녀는 항상 이렇게 자신에게 되뇌었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언니의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마음속에 공허감만은 어찌하질 못했다.
언니라는 존재는 친구처럼 쉽게 인연을 끊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평생을 원하든 원치 않든, 붙어 다니든 떨어져 다니든, 어쩔 수 없이 함께 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홍주는 자신이 이렇게 얘기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엄마, 언감생심은 아니죠. 그 남자가 저 많이 좋아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네가 고분고분한 맛은 좀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러니까 괜히 잘난 척하지 말고 남자가 하자는 대로 해. 좀 똑똑한 사람이니.”
엄마는 그러면서 윤주를 힐끗 보다 말고 말을 이었다. 내심 자신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홍주의 손을 잡으면서 속삭였다.
“도도하고 까칠한 네 언니, 진짜 좋은 남자 많이 놓친 거 너도 알지? 지금 박 서방도 뭐 처지는 거 없는 사람이지만 넌 네 언니와는 다른 케이스야. 그건 너도…….”
홍주는 엄마에게 잡힌 손을 조용히 놓았다.
“엄마, 저 가서 쉴게요. 말 통하는 언니와 얘기하세요.”
“이놈의 계집애는 다 너 생각…….”
정 여사는 혀를 끌끌 차며, 방으로 들어가는 홍주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