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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3화


방으로 들어온 홍주는 갑자기 울려 대는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쇼팽의 녹턴. 순간 혁진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남자 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냉큼 받았다. 그는 가끔 전화를 늦게 받으면 좀 짜증스럽게 말하곤 했으니까.
‘나 바쁜 거 몰라? 우리한텐 시간이 금이야.’
‘시간 쪼개서 전화하는데 빨리 좀 받을 수 없어?’
언제나 전화를 받으면 기분 좋은 말보단 조금은 신경질적인 말투로 내뱉곤 했다. 이해는 했다. 밤새 수술실에서 시달리고 쪽잠을 자는 고된 일과가 편할 리는 없으니까.
말끔한 가운을 입고 정의감에 불타올라 한 명의 환자라도 더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멋진 의사들의 모습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뿐,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걸 그녀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혁 씨?”
― 고홍주 씨죠?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놀라 물었다.
“누구세요?”
― 여긴. 음…… 술집인데요. 민혁 씨가 너무 많이 취해서. 아, 오해는 마세요. 저는 여기서 일하는 여자니까요.
“술집이요? 얼마나 마셨길래.”
― 아, 그러니까. 오늘은 좀 많이 마신 것 같네요. 그러게 작작 좀 마시라고 해도. 아무튼, 여기가 어디냐면요.
오늘은 좀 많이 마신 것 같네요?
홍주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마치 늘 오던 단골손님이라도 되는 양,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홍주는 일단 그녀가 불러 준 주소를 받아 적고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술 때문에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늘 반듯한 사람이었다. 딱히 그 점이 좋아 그와 사귄 건 아니지만 그가 그렇게 술을 많이 먹는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의사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폭음을 많이들 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에 한에서의 얘기다.
홍주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던 시끄러운 여자들의 목소리가 괜히 신경 쓰였다.
여자들이 있는 술집이겠지? 룸살롱 같은. 아니면 당연히 2차를 나가는. 돈만 주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 주는 그렇고 그런 술집. 특히 스트레스가 심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이 찾는다는 강남의 대형 룸살롱들.
그녀는 받아 적은 주소와 술집 이름으로 대충 추측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쁘다는 여자들이 전부 모여 있다고 으스대며 떠들어 대는 곳. 알 만한 남자들은 다 안다는 그런 곳.
홍주도 들은 풍문으로만 알고 있을 뿐, 막상 그런 곳에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기분이 씁쓸할 뿐이었다.
그는 나와 결혼할 남자야.
조금 있으면 평생을 함께할 남자라고.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홍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기분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는 게 더욱 답답했다.

그녀는 내비를 켜고 차를 몰아 어렵사리 술집을 찾아갔다. 화려한 술집 앞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발레파킹 담당자가 재빨리 나와 그녀에게 차 키를 건네받았다. 출입구에서부터 따라붙은 핸섬한 웨이터의 안내를 받고는 룸으로 들어갔다.
음악 소리와 여자들의 목소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시끄럽진 않았다. 술집은 전체적으로는 어둡고 차분한 분위기였으나 룸 안은 조명 때문인지, 여자의 웃음소리 때문인지 한결 가볍고 전형적인 술집 느낌이었다.
“어, 왔어? 내 사랑.”
그는 놀랍게도 멀쩡했다. 조금 취한 듯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인사불성까진 아니었다. 아까 전화를 걸었던 여자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옆에 앉은 여자가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애인분, 미인이시네요. 분발하셔야겠어요.”
예상외로 그녀는 홍주를 보자 벌떡 일어나더니, 자리를 내주었다. 한쪽 다리가 훤히 드러난 롱스커트가 펄럭이자 스커트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역겨워 뭔가 속에서 울컥 올라왔지만 여자가 자신 앞에서 보란 듯이 그에게 윙크를 하고 사라지는 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홍주는 앉지 않고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는 두 팔을 소파에 걸치면서 여유롭게 대꾸했다. 의외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냥 한잔하고 싶어서.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한잔해.”
그는 얼음이 들어 있는 잔에 위스키를 따라 주며 그녀에게 건배를 청했다.
“우리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민혁 씨!”
“마셔. 마시라고.”
그는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랐다. 홍주는 자리에 앉아 술잔을 입에 댔으나 너무 써서 인상을 썼다.
“아까 그 여자랑 잤어요?”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그가 미친 듯이 웃어 재꼈다. 너무 웃어 눈물이 고일 때까지 웃는 통에 홍주는 불쾌해졌다.
“잤냐고? 내가 그 여자랑?”
“왜 그래요, 지금? 내 말이 웃겨요?”
그가 남은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켜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잤지. 그것도 아주 여러 번. 그리고 몇 년씩이나 말이지.”
“뭐라고요?”
홍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그 틈을 주지 않고 그가 말을 이었다.
“잠자리에서 성녀처럼 구는 애인을 둔 남자는 어떻게 자신의 욕구를 풀까요? 정답은? 자위를 하며 혼자 푼다, 병신처럼. 아니면 다른 여자를 만나 주기적으로 섹스를 한다. 그것도 아니면 이 여자, 저 여자 닥치는 대로 만나 원나잇을 하고는 자신과 맞는 여자를 찾아 헤맨다. 내가 어떤 스타일일 것 같아?”
그는 웃었다.
“날 지금껏 만났으면 내가 어떤 스타일인지 알아야 하지 않나? 그대는 내 애인인데.”
잠시 동안 홍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그녀가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 단 한 번도 이런 얘길 나한테 한 적이 있어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미쳤어요, 지금?”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 그러면서 여전히 그녀에게 빈정거렸다.
“내가 너랑 왜 결혼하자고 했는지 넌 아직도 모르는구나. 아직도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처음, 홍주와 그는 언니를 통해 만났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부를 통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언니와 형부는 캠퍼스 커플이었고 연애도 오래했다. 수많은 남자들의 열렬한 구애를 받은 언니였지만 의외로 몇 년씩이나 언니를 해바라기처럼 바라보았던 순정남을 언니는 택했다.
형부는 천성이 순하고 누구에게나 반듯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언니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으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고 했던가. 형부는 웬만하면 언니에게 대부분의 것들을 맞춰 주고, 받아 주며 지금껏 잘 살아왔다. 형부의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별문제 없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니가 예의 바른 순정남을 택한 건 엄밀히 말하자면 형부가 그 당시 학교 내에서 가장 부유한 재력가 3세 중에 한 명으로 앞길이 창창했던 남자였기 때문이다. 민혁은 형부와는 동아리 선후배 사이였고, 같은 학교였기 때문에 언니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민혁은 형부의 소개로 만났다. 만약 언니가 소개시켜 줬더라면 믿음이 안 가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형부는 그런 언니와는 달랐다. 거짓말이란 걸 도통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홍주는 언니보다는 형부를 더 신뢰했다.
‘처제한테 딱 맞는 사람이야. 자식이 의사가 되더니 눈이 높아져서 아무 여자나 안 만난다고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 달래잖아. 내가 처제 사진 보여 주니까 마음에 든다며 다리 좀 놔 달라고 하더라고. 어때? 한번 만나 볼래?’
홍주는 그렇게 민혁과 만나게 되었고 민혁은 세 번의 만남 만에 홍주에게 청혼했다. 물론 결혼 약속을 한 후, 가끔 데이트도 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함께 밤을 보내기도 했지만 먼저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던 건 민혁이었다. 그가 굉장히 뜨거운 남자란 걸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들 민혁의 행동은 이해되질 않았다.
홍주는 문득 자신이 생각보다 이성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행동이 ‘용서가 되질 않았다’가 아니라 ‘이해가 되질 않았다’니.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왜 너랑 결혼을 결심했는지.”
“왜 결심했는데요.”
홍주는 남은 위스키를 인상을 쓰며 전부 마셨다.
“남자가 결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야. 내 경우는 그래.”
그가 계속 술을 마시며 말했다.
“육체적인 쾌락과 집안일에서의 해방이야.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섹스 파트너의 역할과 도우미 아줌마의 역할을 잘해 주면 남자로선 백 프로 이상적인 결혼이지.”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게 어쩌면 모든 남자들의 이기적인 희망 사항일지도 모르지. 겉으론 사랑으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난 네가 두 가지를 전부 다 잘하는 줄 알았어. 겉으로 얌전해 보이는 여자가 밤에 더 뜨겁다면 그거야말로 최고의 파트너거든. 너한텐 남자의 로망, 아니 나의 로망을 실현시켜 줄 능력이 충분히 보였단 말이야. 넌 어딘지 섹스어필했으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는 조용히 그의 얘길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세상에. 목석도 이런 목석이 없단 말이지, 난 말이야.”
“그만해요. 알아들었으니까.”
그가 조용히 웃었다.
“그러니까, 잠자리 때문에 바람을 피웠다는 거군요. 내가 민혁 씨를 만족시켜 주지 못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그 정도로 저질은 아니거든.”
그는 빈정댔다. 홍주는 쓰레기라는 말도 그에게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제게 들었던 그 이상한 감정의 정체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화가 그다지 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이상한 것이었는데,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가 나 아닌 다른 여자와 몇 년 동안 잠자리를 가졌다는데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 그냥 불쾌하고 기분이 나쁠 뿐. 그냥 이 남자가 쓰레기고 더러워서 그럴 뿐이라는 너무도 이성적인 생각만 난다. 그다지 억울하지도 않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홍주는 차분히 말했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 고분고분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동안이면, 날 만나기 전부터 만났다는 얘긴데. 나랑 왜 결혼하자고 했어? 아니, 아니지. 그 이유를 아까 민혁 씨가 말했지. 두 가지, 이유. 그래, 그랬지. 그 여자는 그 두 가지를 다 만족시켜 줄 수가 없었나 보구나.”
홍주는 하도 어이가 없어, 횡설수설을 하듯 내뱉었다.
도대체 이 남자를 내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게다가 몇 년씩이라니.
그녀는 뭔가 힘이 쭉 빠지는 듯한 허탈감마저 들었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그저 그가 바쁘면 바쁜가 보다, 일이 많으면 많은가 보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을까. 바보같이. 머저리같이.
자신이 바보 천치 같아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배신한 것보다 자신의 무지함에 더 화가 났다.
아내에게 평생 육체적인 쾌락과 도우미 아주머니의 역할을 해 주길 바라는 남자와 결혼하려는 머저리 같은 여자가 세상천지에 있을까. 설령 그것이 모든 남자들의 숨겨진 로망이라도, 평생 숨겨야 하는 그 진실 아닌 진실을 버젓이 결혼할 여자에게 내뱉는 그런 남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