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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술병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네 명의 남자 손님들이 들어왔다. 이미 술을 한잔 걸치고 온 듯 그들은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맥주와 소주를 주문했다. 주방 구석에서 피로한 눈에 인공눈물을 흘려 넣은 후 안줏거리를 내어 들고 테이블로 갔다.
‘야, 너 그 새끼 기억나냐?’
‘그 새끼? 어떤 새끼?’
‘왜 있잖아. 중학생 때 병신같이 지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은 새끼.’
‘아아, 네가 괴롭혔다는 걔?’
‘괴롭히긴 씨발. 매점에 심부름 보내고 몇 번 발로 걷어찬 게 괴롭힌 거냐?’
‘미친놈. 경찰은 대체 뭐 했대? 이런 자식 안 데려가고.’
‘씹새, 내가 뭘 잘못했는데 콩밥을 처먹어?’
조명 아래 드러난 놈의 얼굴이 익숙했다. 김진태. 놈은 따돌림을 지시한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가장 악질적인 방법으로 영우를 괴롭힌 인물이었다.
[김진태가 영우에게 빵 심부름을 시켰어요. 초코 빵을 사 오라고 했는데 다 팔려서 메론 빵을 사다 주었더니 뺨을 때렸어요.]
‘웃기네. 까딱하면 콩밥 먹을 뻔했으면서.’
‘닥쳐, 이 새끼야.’
진술서를 바탕으로 재수사를 시작한 직후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들의 부모들이 집으로 찾아왔었다. 아직도 생생했다. 제 아버지의 손에 눌려 고개를 숙이던 놈의 입술엔 조소가 가득했다. 그 상황이 엿 같아 견딜 수 없다는 듯 입가를 씰룩이던 놈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하여간에 예전부터 재수 없던 새끼였어. 지가 뭐라고 존나 착한 척하는데…….’
안주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영우는 죽었고, 놈은 솜방망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억울하고 분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새끼 졸라 시스터보이였는데. 말끝마다 우리 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어쩌구저쩌구…… 거시기에 털 난 새끼가 매번 우리 누나 우리 누나! 존나 웃긴 게 뭔지 아냐? 평소엔 뭔 짓을 해도 죽은 듯 있던 새끼가, 니 누나 자지는 예쁘냐 물으니까 회까닥해서 지랄 발광을 떠는 거야. 더러운 입으로 지 누나를 모욕하지 말래나 뭐래나…… 참 나. 자랑을 졸라 해 대길래 얼마나 대단한 년인가 했는데, 야, 말도 마. 키만 멀대같이 큰 게 딱 사내놈이야. 뭐? 어디서 봤냐고? 씹새 부모가 고손지 뭔지 하겠다고 지랄 발광을 해서 꼰대랑 같이 그 새끼 집에 갔는데…… 처웃지 마, 새끼야. 썅. 그 새끼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울화가 치밀어. 뒤질려면 곱게 뒤질 것이지 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지랄이야? 그 뒤로 꼰대가 용돈을 팍 줄여서 내가 얼마나…… 뭐야, 넌?’
술잔을 기울이다 나를 발견한 놈의 미간이 구겨졌다. 술기운이 돌아 붉어진 놈의 얼굴을 바라보자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술집 안의 소음이 멎고 주변의 인물들이 사라졌다. 오로지 놈의 모습만이 선명했다. 더운 피가 몸 안에서 거세게 휘몰아쳤다. 태어나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그 강렬한 충동의 이름은, 살의(殺意)였다.
‘뭐냐고 묻잖아.’
불쾌한 듯 놈이 눈가를 찡그리는 순간 단숨에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쌍꺼풀진 두 눈이 경악을 담아 일그러졌다. 놈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칼이 박힌 뱃가죽에서 꿀렁꿀렁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뭐, 뭐. 간신히 이어지던 말이 끊기고 정적이 일었다.
놈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악몽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등 뒤에서 덮치듯 달려든 누군가로 인해 칼을 놓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손잡이에 쓸린 손바닥이 찢겨 나가 있었다. 검은 구두코가 눈앞을 스치더니 머리에 둔탁한 통증이 일었다.
‘진태야, 괜찮아? 정신 차려!’
놈의 일행이 외치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만 하루가 지나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형사들에게 이끌려 유치장에 갇혔다. 나는 그들의 물음에 성실히 응했다. 살의를 참지 못하고 주방 아주머니에게 칼을 빌려 그것으로 놈을 찌른 경위를 남김없이 설명했다.
김진태가 척추에 손상을 입어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 집에 찾아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냐 애도의 말을 표하던 놈의 부모는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기묘한 복수극에 흥미를 가진 기자들이 나와 접촉하려 애썼지만 감흥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렸지만 마비가 된 것처럼 모든 것이 무감각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무조건,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해.’
조카를 구명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이모는 공판 직전까지 나를 설득하려 애썼다.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다고, 반성하고 있다 말해야 참작이 돼. 응? 이모 말 들을 거지? 제발,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고. 너 이러다간 큰일 나. 합의도 못 했는데 반성까지 안 한다 하면…….’
김진태와는 어떤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합의를 청한다 해서 순순히 받아 주지도 않겠지만 나 역시 선처를 바라며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릴 마음은 없었다.
‘이것아, 이 독한 것아. 미안하지 않아도 미안하다고 해야, 죽을죄를 졌다 사과해야, 그래야 니가 살 수 있어. 왜 자꾸 고집을 피워, 왜. 니 인생이 달린 문제야. 자존심 부린다고 될 게 아니란 말야.’
눈물 섞인 애원에도, 나는 끝내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은 가장 존귀한 가치이므로 이를 침해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 피해자가 입은 상해의 정도가 중하고 피고인 스스로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점, 피해자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해자 측에서 엄중한 처벌을 원하는 점 등에 비추어…….」
마침내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최종 판결을 내리는 젊은 판사의 입술이 벌어졌다.
「피고인 정지안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한다.」
⁂
버스에서 내렸지만 멍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멀뚱히 서 있다 매점에서 사이다 한 캔을 샀다.
“천삼백 원입니다.”
무심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떨리는 손을 눈치채지 않길 바라며 돈을 지불하고 돌아섰다. 금덩어리 사이다로 목을 축인 후 택시를 탔다. 예상대로 기본요금도 상당히 올라 있었다. 놀란 가슴을 달래며 오늘만, 하고 변명했다. 십 분을 달려 동생이 잠들어 있는 납골당에 도착했다.
사진 속 동생은 오래전 보았던 그대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안녕, 잘 지냈어?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네고 나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갈 곳 없이 헤매던 시선 끝에 동생의 사진 옆에 놓인 국화꽃 한 송이가 닿았다. 놓아둔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하얀 꽃잎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올 사람이 없을 텐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사진 속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거긴 어때, 살 만해? 부모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외롭진 않지?
스물한 살 겨울,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둔 아버지의 유골과 다음 해 여름,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어머니의 유골은 납골당이 아닌 뒷산에 뿌려졌다. 찰진 밥과 뒤섞인 유골은 새와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살아생전 두 사람이 바라던 그대로.
죽은 자의 세상이란 것이 있을까. 정말 세 사람은 하늘 너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산 자의 부질없는 바람이란 걸 알지만, 기왕이면 그들이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다 믿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들의 영혼이 차가운 눈 더미 속을, 파도가 들이치는 바위 위를, 병원의 빛바랜 침대 위를 헤매고 있다 생각하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다음에 또 오겠노라 인사한 후 색색의 조화들로 어지러운 건물을 빠져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벤치에 앉았다. 피곤하다거나 지쳐서가 아니었다. 단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자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시 혼자구나.
처음에 마뜩잖은 걸음으로 면회를 오던 친척들은 싸늘한 내 태도에 질려 발길을 끊었다.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모 역시 육 개월 전 딸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간 상태였다. 일본으로 가기 전 나를 면회 왔던 이모가 생각났다.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하다, 지안아.’
이모부의 사업 실패로 집과 땅을 팔아 빚을 갚고 일본에 사는 딸의 집에 의탁하게 된 그녀의 얼굴엔 삶의 고단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6년이라니, 말도 안 돼. 변호사한테 물어보니까 항손가 뭔가 하면 된다더라. 우리 그거 하자, 지안아. 6년이라니, 그게 말이나 돼. 포기하지 말자, 응?’
하나뿐인 이모의 애원마저 외면한 못된 조카였다. 헌데 그런 조카에게, 그녀는 네게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미안하다, 지안아. 정말 미안해.’
섧게 울던 그녀의 등을 다독이고 싶었지만 앞에 놓인 반투명한 유리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아무런 보답 없이 오랫동안 나를 돌보아 준 그녀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았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보듬고 위로해 주고 싶었던 사람은 곁에 없었다.
“이제부터 뭘 해야 되나.”
사지가 멀쩡한 이상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살아야 할 텐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스물아홉이었다. 학력은 대학교 중퇴. 경력이라곤 대학 시절의 과외와 술집에서의 아르바이트 경험, 그리고 살인 미수죄로 6년을 복역한 것이 전부. 부모님이 남긴 재산은 김진태에 대한 손해배상 명목으로 넘어가, 가진 것이라곤 얇은 옷가지 몇 벌, 영치금과 수감 생활 동안 작업을 하며 벌어들인 것을 합한 돈 80여만 원, 빛바랜 크로스백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든 만날 수 있는데, 만날 사람이 없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철창 밖을 나와 얻은 자유는 시리고 차갑기만 했다.
1
첫날,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 여관에 들어갔다.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금세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때수건과 오백 원짜리 일회용 샴푸, 일회용 칫솔을 구입하고 들어선 목욕탕은 평일이라 비교적 한산했다. 굴러다니는 비누 하나를 주워 몸을 헹구고 온탕에 몸을 담그자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서너 차례 묵은 때를 벗겨 내고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을 즈음에야 긴 목욕을 끝마쳤다.
분식집에서 김밥 두 줄을 사 들고 오는 길에 미리 봐 둔 공원으로 갔다. 벤치에 앉아 김밥을 먹는데 금세 목이 막혔다. 물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공원 한가운데에 정수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간신히 마지막 김밥 꽁다리를 삼킨 후 자판기에서 콜라 하나를 뽑아 마셨다. 톡 쏘는 탄산이 넘어가자 막힌 목이 시원하게 뚫렸다.
천천히 생각하자.
수중에 남은 돈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답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이 거북스럽다곤 해도 당장의 주머니 사정에 여관방에 머무는 건 사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수 없다는 게 맞았다.
“너무 낯설어.”
그래, 너무 낯설었다. 철창 안에 갇혀 있던 시간 동안 세상은 무서우리만치 변해 있었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거리의 풍경도,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막상 변해 버린 세상을 마주하자 당혹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쇼윈도에 비친,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외따로 선 스스로를 보고 기가 죽은 건지도 몰랐다.
시차 적응에 잠시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갇혀 있을 땐 매일같이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을 꿈꾸었다.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힘겨운 여정의 끝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을 이겨 내기 위해 암시를 걸었던 고3 시절처럼, 필사적으로 주문을 걸었다.
여기만 나가면.
여기만, 나가면.
출소 전날엔 설레는 마음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정작 밖을 나온 순간부터는 이상하리만큼 감각이 무뎠다. 자유라는 추상적인 단어보다는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단어가 더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에.
막막했다. 색색으로 곱게 물든 나뭇잎들은 생명의 노래를 부르짖고 있는데 홀로 물기 하나 없는 모래사막에 던져진 것 같았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보이는 건 모래언덕뿐. 살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디가 앞인지 알 수 없어 걸음조차 내디딜 수 없었다.
⁂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솜털처럼 가벼운 비였지만 지금은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었다. 비를 맞자 몸이 차갑게 식었다. 반팔 위에 걸친 얇은 남방은 떨어지는 체온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신문지에 하나둘 진회색 얼룩이 생겨났다. 구인란을 메운 작은 글씨가 빗물에 번지기 시작했지만 비를 피할 의지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아귀에 짓눌린 신문지가 버석거리며 구겨졌다.
여관을 나와 찜질방을 전전하며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한 지 나흘째였다. 번듯한 곳은 무리라도 단기 아르바이트 같은 건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 미처 몰랐다.
일단 구인란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별생각 없이 공중전화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공중전화 따윈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거리를 헤맨 뒤에야 공중전화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휴대폰을 빌려 구인란에 적힌 가게에 연락을 할 자신도 없어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납골당을 빠져나온 직후 무작정 다른 도시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었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새로이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혹여 아는 사람을 마주할까 겁이 났다. 처음 밟아 보는 낯선 도시에서, 별 특징도 없는 작은 가게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간신히 원하던 장소에 찾아가도 난관에 봉착하긴 마찬가지였다. 대개는 무덤덤하게, 드물지만 호의적으로 면접을 마치고 나면 당연한 듯 연락처를 물어 왔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 말했지만 휴대폰도, 구체적인 거주지가 정해지지 않아 집 전화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엔 노골적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왔다.
어쩌면 문제는 내게 있었는지 몰랐다. 좀 더 당당하게 행동하면 좋았겠지만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교도소에 들어가면 호적에 빨간 줄이 생긴다는 건 낭설이었다. 큰 회사라면 모를까 말하지 않는 이상 전과 사실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 눈에 비친 나는 살인 미수죄로 징역살이를 하고 돌아온 전과자가 아닌, 그저 서른을 앞둔 보통 여자에 불과했다.
괜히 기죽을 것 없이 자신감 있게 행동했더라면…… 실소가 새어 나왔다. 거짓말이었다. 나를 작아지게 하는 건 전과자라는 꼬리표만이 아니었다. 교도소 안에선 살아온 전적이 어떠하든 동등한 수감자의 신분이라 자격지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헌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자 세상 속 나란 인간의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됐다.
‘스물아홉? 아니, 뭐, 나이 같은 건 별 상관 없지만…… 그전엔 무슨 일 했어요?’
‘젊은 사람이 휴대폰도 없어요? 그럼 집 전화라도 알려 줘요. 집 전화도 없어요? 직접 찾아오겠다구요? 어디 사는데요. 여관? ……아, 그럼 여관에서 사는 거예요?’
상황은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니던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실은 무엇 하나 같지 않았다. 초라한 나의 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의 얼굴에 어린 동정, 의문, 희미한 경멸.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때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반응 하나하나에 상처 입는 내가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술병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네 명의 남자 손님들이 들어왔다. 이미 술을 한잔 걸치고 온 듯 그들은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맥주와 소주를 주문했다. 주방 구석에서 피로한 눈에 인공눈물을 흘려 넣은 후 안줏거리를 내어 들고 테이블로 갔다.
‘야, 너 그 새끼 기억나냐?’
‘그 새끼? 어떤 새끼?’
‘왜 있잖아. 중학생 때 병신같이 지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은 새끼.’
‘아아, 네가 괴롭혔다는 걔?’
‘괴롭히긴 씨발. 매점에 심부름 보내고 몇 번 발로 걷어찬 게 괴롭힌 거냐?’
‘미친놈. 경찰은 대체 뭐 했대? 이런 자식 안 데려가고.’
‘씹새, 내가 뭘 잘못했는데 콩밥을 처먹어?’
조명 아래 드러난 놈의 얼굴이 익숙했다. 김진태. 놈은 따돌림을 지시한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가장 악질적인 방법으로 영우를 괴롭힌 인물이었다.
[김진태가 영우에게 빵 심부름을 시켰어요. 초코 빵을 사 오라고 했는데 다 팔려서 메론 빵을 사다 주었더니 뺨을 때렸어요.]
‘웃기네. 까딱하면 콩밥 먹을 뻔했으면서.’
‘닥쳐, 이 새끼야.’
진술서를 바탕으로 재수사를 시작한 직후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들의 부모들이 집으로 찾아왔었다. 아직도 생생했다. 제 아버지의 손에 눌려 고개를 숙이던 놈의 입술엔 조소가 가득했다. 그 상황이 엿 같아 견딜 수 없다는 듯 입가를 씰룩이던 놈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하여간에 예전부터 재수 없던 새끼였어. 지가 뭐라고 존나 착한 척하는데…….’
안주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영우는 죽었고, 놈은 솜방망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억울하고 분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새끼 졸라 시스터보이였는데. 말끝마다 우리 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어쩌구저쩌구…… 거시기에 털 난 새끼가 매번 우리 누나 우리 누나! 존나 웃긴 게 뭔지 아냐? 평소엔 뭔 짓을 해도 죽은 듯 있던 새끼가, 니 누나 자지는 예쁘냐 물으니까 회까닥해서 지랄 발광을 떠는 거야. 더러운 입으로 지 누나를 모욕하지 말래나 뭐래나…… 참 나. 자랑을 졸라 해 대길래 얼마나 대단한 년인가 했는데, 야, 말도 마. 키만 멀대같이 큰 게 딱 사내놈이야. 뭐? 어디서 봤냐고? 씹새 부모가 고손지 뭔지 하겠다고 지랄 발광을 해서 꼰대랑 같이 그 새끼 집에 갔는데…… 처웃지 마, 새끼야. 썅. 그 새끼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울화가 치밀어. 뒤질려면 곱게 뒤질 것이지 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지랄이야? 그 뒤로 꼰대가 용돈을 팍 줄여서 내가 얼마나…… 뭐야, 넌?’
술잔을 기울이다 나를 발견한 놈의 미간이 구겨졌다. 술기운이 돌아 붉어진 놈의 얼굴을 바라보자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술집 안의 소음이 멎고 주변의 인물들이 사라졌다. 오로지 놈의 모습만이 선명했다. 더운 피가 몸 안에서 거세게 휘몰아쳤다. 태어나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그 강렬한 충동의 이름은, 살의(殺意)였다.
‘뭐냐고 묻잖아.’
불쾌한 듯 놈이 눈가를 찡그리는 순간 단숨에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쌍꺼풀진 두 눈이 경악을 담아 일그러졌다. 놈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칼이 박힌 뱃가죽에서 꿀렁꿀렁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뭐, 뭐. 간신히 이어지던 말이 끊기고 정적이 일었다.
놈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악몽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등 뒤에서 덮치듯 달려든 누군가로 인해 칼을 놓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손잡이에 쓸린 손바닥이 찢겨 나가 있었다. 검은 구두코가 눈앞을 스치더니 머리에 둔탁한 통증이 일었다.
‘진태야, 괜찮아? 정신 차려!’
놈의 일행이 외치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만 하루가 지나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형사들에게 이끌려 유치장에 갇혔다. 나는 그들의 물음에 성실히 응했다. 살의를 참지 못하고 주방 아주머니에게 칼을 빌려 그것으로 놈을 찌른 경위를 남김없이 설명했다.
김진태가 척추에 손상을 입어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 집에 찾아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냐 애도의 말을 표하던 놈의 부모는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기묘한 복수극에 흥미를 가진 기자들이 나와 접촉하려 애썼지만 감흥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렸지만 마비가 된 것처럼 모든 것이 무감각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무조건,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해.’
조카를 구명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이모는 공판 직전까지 나를 설득하려 애썼다.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다고, 반성하고 있다 말해야 참작이 돼. 응? 이모 말 들을 거지? 제발,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고. 너 이러다간 큰일 나. 합의도 못 했는데 반성까지 안 한다 하면…….’
김진태와는 어떤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합의를 청한다 해서 순순히 받아 주지도 않겠지만 나 역시 선처를 바라며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릴 마음은 없었다.
‘이것아, 이 독한 것아. 미안하지 않아도 미안하다고 해야, 죽을죄를 졌다 사과해야, 그래야 니가 살 수 있어. 왜 자꾸 고집을 피워, 왜. 니 인생이 달린 문제야. 자존심 부린다고 될 게 아니란 말야.’
눈물 섞인 애원에도, 나는 끝내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은 가장 존귀한 가치이므로 이를 침해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 피해자가 입은 상해의 정도가 중하고 피고인 스스로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점, 피해자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해자 측에서 엄중한 처벌을 원하는 점 등에 비추어…….」
마침내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최종 판결을 내리는 젊은 판사의 입술이 벌어졌다.
「피고인 정지안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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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렸지만 멍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멀뚱히 서 있다 매점에서 사이다 한 캔을 샀다.
“천삼백 원입니다.”
무심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떨리는 손을 눈치채지 않길 바라며 돈을 지불하고 돌아섰다. 금덩어리 사이다로 목을 축인 후 택시를 탔다. 예상대로 기본요금도 상당히 올라 있었다. 놀란 가슴을 달래며 오늘만, 하고 변명했다. 십 분을 달려 동생이 잠들어 있는 납골당에 도착했다.
사진 속 동생은 오래전 보았던 그대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안녕, 잘 지냈어?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네고 나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갈 곳 없이 헤매던 시선 끝에 동생의 사진 옆에 놓인 국화꽃 한 송이가 닿았다. 놓아둔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하얀 꽃잎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올 사람이 없을 텐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사진 속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거긴 어때, 살 만해? 부모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외롭진 않지?
스물한 살 겨울,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둔 아버지의 유골과 다음 해 여름,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어머니의 유골은 납골당이 아닌 뒷산에 뿌려졌다. 찰진 밥과 뒤섞인 유골은 새와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살아생전 두 사람이 바라던 그대로.
죽은 자의 세상이란 것이 있을까. 정말 세 사람은 하늘 너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산 자의 부질없는 바람이란 걸 알지만, 기왕이면 그들이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다 믿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들의 영혼이 차가운 눈 더미 속을, 파도가 들이치는 바위 위를, 병원의 빛바랜 침대 위를 헤매고 있다 생각하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다음에 또 오겠노라 인사한 후 색색의 조화들로 어지러운 건물을 빠져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벤치에 앉았다. 피곤하다거나 지쳐서가 아니었다. 단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자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시 혼자구나.
처음에 마뜩잖은 걸음으로 면회를 오던 친척들은 싸늘한 내 태도에 질려 발길을 끊었다.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모 역시 육 개월 전 딸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간 상태였다. 일본으로 가기 전 나를 면회 왔던 이모가 생각났다.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하다, 지안아.’
이모부의 사업 실패로 집과 땅을 팔아 빚을 갚고 일본에 사는 딸의 집에 의탁하게 된 그녀의 얼굴엔 삶의 고단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6년이라니, 말도 안 돼. 변호사한테 물어보니까 항손가 뭔가 하면 된다더라. 우리 그거 하자, 지안아. 6년이라니, 그게 말이나 돼. 포기하지 말자, 응?’
하나뿐인 이모의 애원마저 외면한 못된 조카였다. 헌데 그런 조카에게, 그녀는 네게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미안하다, 지안아. 정말 미안해.’
섧게 울던 그녀의 등을 다독이고 싶었지만 앞에 놓인 반투명한 유리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아무런 보답 없이 오랫동안 나를 돌보아 준 그녀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았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보듬고 위로해 주고 싶었던 사람은 곁에 없었다.
“이제부터 뭘 해야 되나.”
사지가 멀쩡한 이상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살아야 할 텐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스물아홉이었다. 학력은 대학교 중퇴. 경력이라곤 대학 시절의 과외와 술집에서의 아르바이트 경험, 그리고 살인 미수죄로 6년을 복역한 것이 전부. 부모님이 남긴 재산은 김진태에 대한 손해배상 명목으로 넘어가, 가진 것이라곤 얇은 옷가지 몇 벌, 영치금과 수감 생활 동안 작업을 하며 벌어들인 것을 합한 돈 80여만 원, 빛바랜 크로스백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든 만날 수 있는데, 만날 사람이 없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철창 밖을 나와 얻은 자유는 시리고 차갑기만 했다.
1
첫날,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 여관에 들어갔다.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금세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때수건과 오백 원짜리 일회용 샴푸, 일회용 칫솔을 구입하고 들어선 목욕탕은 평일이라 비교적 한산했다. 굴러다니는 비누 하나를 주워 몸을 헹구고 온탕에 몸을 담그자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서너 차례 묵은 때를 벗겨 내고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을 즈음에야 긴 목욕을 끝마쳤다.
분식집에서 김밥 두 줄을 사 들고 오는 길에 미리 봐 둔 공원으로 갔다. 벤치에 앉아 김밥을 먹는데 금세 목이 막혔다. 물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공원 한가운데에 정수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간신히 마지막 김밥 꽁다리를 삼킨 후 자판기에서 콜라 하나를 뽑아 마셨다. 톡 쏘는 탄산이 넘어가자 막힌 목이 시원하게 뚫렸다.
천천히 생각하자.
수중에 남은 돈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답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이 거북스럽다곤 해도 당장의 주머니 사정에 여관방에 머무는 건 사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수 없다는 게 맞았다.
“너무 낯설어.”
그래, 너무 낯설었다. 철창 안에 갇혀 있던 시간 동안 세상은 무서우리만치 변해 있었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거리의 풍경도,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막상 변해 버린 세상을 마주하자 당혹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쇼윈도에 비친,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외따로 선 스스로를 보고 기가 죽은 건지도 몰랐다.
시차 적응에 잠시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갇혀 있을 땐 매일같이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을 꿈꾸었다.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힘겨운 여정의 끝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을 이겨 내기 위해 암시를 걸었던 고3 시절처럼, 필사적으로 주문을 걸었다.
여기만 나가면.
여기만, 나가면.
출소 전날엔 설레는 마음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정작 밖을 나온 순간부터는 이상하리만큼 감각이 무뎠다. 자유라는 추상적인 단어보다는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단어가 더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에.
막막했다. 색색으로 곱게 물든 나뭇잎들은 생명의 노래를 부르짖고 있는데 홀로 물기 하나 없는 모래사막에 던져진 것 같았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보이는 건 모래언덕뿐. 살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디가 앞인지 알 수 없어 걸음조차 내디딜 수 없었다.
⁂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솜털처럼 가벼운 비였지만 지금은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었다. 비를 맞자 몸이 차갑게 식었다. 반팔 위에 걸친 얇은 남방은 떨어지는 체온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신문지에 하나둘 진회색 얼룩이 생겨났다. 구인란을 메운 작은 글씨가 빗물에 번지기 시작했지만 비를 피할 의지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아귀에 짓눌린 신문지가 버석거리며 구겨졌다.
여관을 나와 찜질방을 전전하며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한 지 나흘째였다. 번듯한 곳은 무리라도 단기 아르바이트 같은 건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 미처 몰랐다.
일단 구인란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별생각 없이 공중전화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공중전화 따윈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거리를 헤맨 뒤에야 공중전화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휴대폰을 빌려 구인란에 적힌 가게에 연락을 할 자신도 없어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납골당을 빠져나온 직후 무작정 다른 도시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었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새로이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혹여 아는 사람을 마주할까 겁이 났다. 처음 밟아 보는 낯선 도시에서, 별 특징도 없는 작은 가게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간신히 원하던 장소에 찾아가도 난관에 봉착하긴 마찬가지였다. 대개는 무덤덤하게, 드물지만 호의적으로 면접을 마치고 나면 당연한 듯 연락처를 물어 왔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 말했지만 휴대폰도, 구체적인 거주지가 정해지지 않아 집 전화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엔 노골적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왔다.
어쩌면 문제는 내게 있었는지 몰랐다. 좀 더 당당하게 행동하면 좋았겠지만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교도소에 들어가면 호적에 빨간 줄이 생긴다는 건 낭설이었다. 큰 회사라면 모를까 말하지 않는 이상 전과 사실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 눈에 비친 나는 살인 미수죄로 징역살이를 하고 돌아온 전과자가 아닌, 그저 서른을 앞둔 보통 여자에 불과했다.
괜히 기죽을 것 없이 자신감 있게 행동했더라면…… 실소가 새어 나왔다. 거짓말이었다. 나를 작아지게 하는 건 전과자라는 꼬리표만이 아니었다. 교도소 안에선 살아온 전적이 어떠하든 동등한 수감자의 신분이라 자격지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헌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자 세상 속 나란 인간의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됐다.
‘스물아홉? 아니, 뭐, 나이 같은 건 별 상관 없지만…… 그전엔 무슨 일 했어요?’
‘젊은 사람이 휴대폰도 없어요? 그럼 집 전화라도 알려 줘요. 집 전화도 없어요? 직접 찾아오겠다구요? 어디 사는데요. 여관? ……아, 그럼 여관에서 사는 거예요?’
상황은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니던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실은 무엇 하나 같지 않았다. 초라한 나의 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의 얼굴에 어린 동정, 의문, 희미한 경멸.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때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반응 하나하나에 상처 입는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