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라이크 가드 1권(19화)
7. 사람을 봐 가면서 건들어야지(4)
웬만해서는 그냥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그녀가 어찌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에가밀은 잘됐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카이론에게서 느낀 공포를 애써 털어내고는 오히려 이번에는 살기 번뜩이는 눈으로 카이론을 노려보았다.
왠지 처음으로 카이론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오신 것입니까!”
갑작스럽게 두 사람의 사이로 한 인물이 튀어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자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그오로였다.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비번인 날 같았다.
“이곳에 자주 오시는 것 같습니다? 레이디밖에 없는 집 같은데 좋지 않은 소문을 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그오로에게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카이론은 빠른 눈치로 대충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카이론에게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읽는 재주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에가밀을 밀어붙이기에는 남고도 남았다.
“이거 같은 군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을 힘도 없는 레이디를 상대하는데 사용하다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아니, 군을 떠나 남자로서 쪽팔리네요. 거기 덜렁거리는 거 그냥 싹뚝하고 제가 깔끔하게 처리해 드립니까? 덤으로 소변도 못 보게 불로 살짝 지져 줄 수도 있는데. 아! 조금 아플 수가 있으니 엉덩이를 때리는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만.”
카이론의 말투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런저런 막말을 내뱉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평안한 말투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에가밀의 속을 배로 박박 긁어 놓았다.
갈굼의 기술은 단순히 후임병에게만 써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 딱히 돌아가 봤자 기다려 주는 부인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냥 영지나 슬슬 둘러보는 것을 적극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닥쳐랏! 내가 네 녀석의 명령 따위를 들을 위치는 아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단지 주변의 뜨거운 시선으로 인해 에가밀 씨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 같아서 그런 것인데 이거야 원, 물에 빠진 쓰레기 건져 줬더니 내 집에 자리 잡아 집만 더럽히는 꼴 아니야.”
마지막 말은 작게 말한다고 한 것 같지만 에가밀뿐만이 아닌 싸움이 일어남으로 인해 주변 몰린 사람들까지 충분히 들을 정도였다.
“네, 네 녀석! 절대로 네 녀석만큼은 용서하지 않겠다! 두고 봐라! 그리고 네년도 적당히 튕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변의 시선을 인식한 것인지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려는 에가밀이었지만 돌아가라는 말과는 다르게 기회를 잡은 카이론은 에가밀을 쉽사리 놓아 주지 않았다.
“말은 바로하고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튕긴다? 내가 볼 때는 튕길 가치도 없어 보이는데. 인간과 쓰레기가 같이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안 그러냐 케일?”
“에, 예? 옛! 그렇습니다!”
케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카이론의 말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다.
‘응?’
평소에 상당히 엉성한 면이 많아 카이론에게 많은 구박을 당하지만 그런 때하고는 무언가 조금 다르다는 느낌에 카이론은 케일을 돌아보았다.
덤으로 이럴 때는 참으로 기특하게 대답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칭찬이라도 해 주기 위해 돌아본 것도 있었는데 케일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케일의 시선은 에가밀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카이론이 바라보면 시선 돌리기 바쁜 케일이었는데 지금은 바로 옆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녀석 저번에는 덤벙이불여우에게 혹하더니 이번에는 이 여자애인가?’
젊은 남성들이라면 호기를 부릴 때도 있는 법이었다. 카이론은 케일의 지금과 같은 행동을 그런 것이라 착각했다.
“네 녀석 둘! 내일 두고 보도록 하지. 절대로 네 녀석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으흐흐. 그리고 네 녀석의 집에 있는 벙어리 계집 역시.”
퍽!
“커헉!”
투두둑.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에가밀은 자신의 입을 부여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은 상태였는데 그런 손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미 바닥에는 누런 이까지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는데 입안이 보지 않아도 대충 다른 이들은 에가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런 생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우으, 으으윽.”
에가밀은 고통으로 인해 끙끙거리기만 하고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러며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그런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었는데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자신이 부상을 당했는데도 주변에서는 아무런 비명성이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놀라는 작은 신음성조차도.
“에가밀 씨 괜찮으십니까?”
고통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에가밀의 몸이 카이론의 말과 동시에 뚝 멈추었다. 누가 본다면 죽어 버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한순간에 멈추었다.
에가밀의 고개가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졌다. 천천히 들어 올려진 에가밀은 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이론의 눈과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것을 느꼈다.
무엇이라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약간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그런 것보다는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카이론이 에가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으으으!”
여전히 입은 아픈지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상태로 에가밀은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는 뒤로 연신 물러났다.
“이런, 누가 에가밀 씨를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뒤로 물러나는 에가밀을 본 카이론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에가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누구한테 이렇게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둘러 돌아가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곳에 남아서 에가밀 씨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먼지가 묻어 있군요.”
카이론이 에가밀의 어깨 부분은 툭툭 치자 그런 것에 맞추어 에가밀의 몸이 움찔거렸다. 저 손이 단숨에 자신의 목을 향해 다시 쏘아져 나오는 것 같은 있어서는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결국 그런 상상으로 인해 에가밀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르게 되었다.
뿌직!
“응? 이게 무슨 냄새…….”
에가밀의 상태를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지는 모를 정도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이론은 갑작스럽게 표정을 구겼다.
“우으으! 우우으!”
카이론이 표정을 굳히자 에가밀은 갑작스럽게 몸을 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카이론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 생각한 것이다.
도망가야 한다.
당장 이 자리에서 피해야 한다.
머릿속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에가밀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다리와 땅을 쇠로 붙여 놓은 것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어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지도 좀 더러워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카이론이 슬쩍 에가밀의 하반신을 내려다보며 조소를 날렸다. 카이론이 맡은 냄새는 에가밀이 앞, 뒤로 싼 소변과 대변의 냄새였다.
남들이 비웃을 만한 어마어마한, 아니, 평생을 가도 지울 수 없는 실수를 하였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런 웃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배.
카이론이 주변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마나 연공법을 꾸준히 행하고 있지만 조금 걸리는 것이 있어 아직 제대로 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카이론이었다.
그 말은 아직 카이론은 마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말인데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카이론은 단순히 분위기만으로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우으으으!”
결국 에가밀은 눈을 뒤집어 까고는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렸다. 눈이 감긴 에가밀의 표정은 이렇게 기절하는 것이 더욱 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상황이 조금은 묘했다. 인생의 반환점을 맞이한 에가밀을 멀찍이 버려 두고는 몸이 좋지 않은 소녀가 있는 집에 들른 카이론은 집안을 쓰윽 둘러보았다.
집 안은 더럽지는 않았다.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는데 왠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집 같았다.
“흠흠, 다시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카이론입니다.”
아까와는 다르게 간단하게 자신의 이름만을 말하며 자신의 앞에 있는 병약한 소녀를 카이론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녀의 얼굴에서 자일의 흔적을 찾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도와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사리엔이라고 해요.”
“아, 사리엔이라… 예쁜 이름입니다. 그것보다 자일이 없는데 생활에는 불편한 점이 없습니까?”
카이론의 말에 사리엔의 몸이 흠칫거렸다. 맑은 호수를 담고 있는 것 같은 푸른 눈동자가 있는 흰자위는 붉게 변해 갔다.
악착같이 눈물을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예, 괜찮아요. 그것보다 카이론 씨라면 제 오라버니께서 자주 말씀하시던 분 같은데 그분이 맞나요?”
사리엔의 물음은 카이론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 마치 기사같이 기립해 있는 그오로를 향한 질문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딱 봐도 그오로가 조금은 나이가 많아 보이는 상황임에도 그는 사리엔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사리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몬스터 토벌이 있은 뒤 어느 날인가부터 그오로는 자신을 계속 따라다녔다. 평생 수발이 되어 주겠다며 노예로 사용해 달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처음에는 그런 그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왜 그런지 묻게 되어 자일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죽일 만큼 미웠다.
왜 자신의 오빠가 대신 죽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무뚝뚝하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보아도 자일은 그런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그만큼 그의 속마음은 그 누구보다 여리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자신을 몇 년 전부터 부모 없이 키워 온 사람이었다. 치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힘들어 버리려 하여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일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자일의 행동에 자신이 그에게 아픈 상처를 준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자일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랐다.
“너는 누가 뭐라 해도 내 하나뿐인 동생이다. 내가 몸이 좋아 이렇게 하는 것이지 아마 내가 몸이 좋지 않고 네가 건강했다면 너는 분명 나보다 더욱 너를 희생시킬 아이야.”
언제부터였을까?
몇 번이나 들었던 자일의 그 말이 가슴 한편에 막혀 있던 무언가를 열어 주었다. 바보같이 약한 자신의 몸만을 탓하던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 자신을 걱정하던 자일의 얼굴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자신이 무리하거나 하면 어떻게 할지를 몰라 당황하던 모습, 자신이 웃을 때마다 작게 미소 지어 주던 모습, 가끔 너무 고지식한 것을 나무라면 조용히 고개 숙이는 모습…….
세상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을 빼앗아 간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서 용서를 빌고 있었다.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용서가 되는 일일까?
결국 자신의 소중한 이를 빼앗아 간 그오로에게 작은 손찌검도, 그렇다고 작은 쓴 말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 뒤로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오로는 자신을 찾아와 이런저런 집안일을 대신해 주었다. 이렇게 된 지는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오로가 자일을 닮아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자신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인지 그오로는 사무적인 말투만을 사용하였고, 상당히 무뚝뚝했다.
‘잠시만, 앞으로 아주 잠시 동안만 그런 모습으로 있어 주세요. 저는 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바로 용서할 수는 없으니까요.’
언젠가는 분명 그오로에 대한 화가 풀릴 것이라 믿고 있는 사리엔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아직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한순간 부터가 이미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흠흠, 아무튼 이거…….”
무언가 묘한 분위기에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이론은 결국 묘한 분위기를 끝까지 참지 못하고는 먼저 나섰다.
아직은 근무 중이었기에 서둘러 용무를 마치고는 대충 영지를 순찰하는 척을 해 주어야만 했다.
“이게 무슨?”
“제가 자일에게 빚진 거라고 할까요? 아니, 고마움에 대한 표시라고나 할까?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입니다.”
카이론이 내미는 것이 무엇인지는 마주보고 앉아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내려지는 순간 사리엔은 알 수 있었다.
돈.
그녀의 행동은 빨랐다.
“고마워요. 잘 쓰도록 할게요.”
‘호오∼’
카이론은 아주 잠깐 사리엔을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런 것을 사리엔은 놓치지 않았다.
“주신 것은 카이론 오라버니신데 그런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네요. 저를 시험하신 건가요?”
“아? 아하하하.”
카이론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오라버니라 부르는 사리엔의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었다. 실로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남들보다 약한 몸을 갖고는 있지만 그 속에는 그 무엇보다도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는 아이였다.
“이거 그오로 저 녀석이 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저 녀석을 돌보게 될 것 같은데.”
“호호호. 그런가요? 하지만 전혀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솔직히 오라버니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라버니 걱정도 있었지만 가슴 한편으로는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 많이 했어요. 아마 그오로 씨가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저는 카이론 오라버니를 찾아갔을 거예요.”
“응? 날?”
마치 전부터 친하게 지내 온 것과 같이 카이론과 사리엔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런 두 사람을 옆에 있던 계급이 낮은 두 병사들이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 자일 오라버니께서는 원래 술을 안 마신다는 것은 알고 계셨나요?”
“대충 짐작은 했지. 항상 회식 같은 시간에는 빠지고 전에 같이 술을 마셨을 때 술을 처음 마셔 보는 것 같은 행동을 취했거든.”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자일에 대한 이름이 나오면 금방 슬픔으로 인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의 사리엔은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