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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크 가드 1권(20화)
7. 사람을 봐 가면서 건들어야지(5)
즐거운 추억을 생각하듯 그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꺼내 놓고,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렸다. 자신이 자일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약한 몸으로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그 어떤 이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자일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가식적인 말일지 몰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일지 몰라도.
‘오라버니를 잊지 않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덤으로 자신 역시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 주는 것도 있었다. 자일이 자신을 위해 노력한 것에 보답해 주기 위해서.
“아마 그날이 처음 일 것이에요. 자일 오라버니는 술 마시는 돈도 아깝다고 모으신 수전노시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잔뜩 술에 취해서는 몇 번이나 같은 말만 하다가 주무신 날이 있는데 그날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렇게 취했었나?’
자일과 술을 처음 마신 날은 카이론도 기억하고 있다. 술 한 잔을 마시고는 놀란 눈으로 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모습은 평소 무뚝뚝한 표정과는 전혀 달랐기에 여전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뭔데?”
“흠흠,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카이론에게 몸을 의탁해. 내가 오늘 술 사 줬으니까.’라고 하고는 바로 곯아떨어지셨죠.”
“에? 하하하! 하긴 동생인 네가 수전노라 할 정도라면 그 정도 값어치는 있겠지. 거기에 첫 술 상대였기까지 했으니 그런 것으로도 부족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호호호. 그런가요?”
“당연하지. 그 무뚝뚝한 자일인데 말이야. 솔찍히 나도 좀 그때는 많이 놀랐다고, 평소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는데 대뜸 같이 술 마시지 않겠냐고 해서 얼마나 당황했는데.”
카이론의 이야기 주머니는 그렇게 풀리기 시작했다. 자일과 같이 있던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카이론의 입은 멈추지를 않았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의 비법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딱히 그들에게는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잘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기억.
그때그때 즐거웠던 순간을 잊지 않고, 웃었던 순간을 잊지 않고, 힘들었던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풀어 보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의 즐거운 추억이 될 수가 있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카이론은 거의 천재적이라 할 정도였다. 재미있는 말을 잊지 않았고, 카이론 스스로가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내는 인물이었다.
카이론의 입담으로 인해 카이론의 말을 듣고 있던 세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뒤늦게 케일의 배에서 울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카이론과 케일이 대충 작별 인사를 하고는 복귀하였다.
“심심하면 우리 집에 놀러와. 내 동생도 있으니까 돌봐 줄 겸 말이야. 그럼 이 오라비가 특별히 용돈도 줄 테니까.”
“예. 조만간 찾아갈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 다음번에는 꼭 못다한 이야기해 주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멀어지는 카이론을 향해 사리엔이 나름 크게 외쳤지만 빠르게 사라지는 둘이었기에 아마 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속은 후련했다.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부끄러워질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가슴속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뻥 뚫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더욱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있었다.
“물론!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비번 날에 동생 데리고 와서 자일 그 녀석 무표정이 깨진 이야기 다 해 줄 테니까! 와하하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이미 멀찍이 사라진 카이론이 영지가 크게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는 것보다 카이론의 저런 행동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리엔은 눈물을 흘렸다. 참을 수도 있었지만 참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번까지만이야, 자일 오빠. 꼭 지켜봐 줘. 나 씩씩하게 살아갈게. 힘들어도, 아파도 오빠를 잊지 않고, 꾹 참고 살아갈게. 나는 오빠의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사리엔이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는 석양을 보며 작게 다짐했다. 자신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며.
한편 카이론은 그날 영지에서 소리를 질렀다는 이유로 복귀하는 내내 지나치는 기사들을 비롯해 마지막에는 크람드의 구박과 싸웠다는 작은 이야기가 영지에 퍼졌다는 것은 여담이다.
8. 한 번 밉상은 끝까지 밉상(1)
실로 오랜만에 모논 영지의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빛의 신인 하오리아의 축복이라며 말들을 하는 사람들도 간간히 보였다.
그런 그들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존재했다. 올해 초부터 시작해 자신들의 정성을 쏘아서 일군 결과물이 오늘부로 모든 수확을 마친 상태였다.
그랬기에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서로 어울려 놀고 있는 것이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자주 만나지 못한 이들과 끊이지 않을 수다를 떨고, 종종 다툼이 일어나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곳은 영지병들로 인해 빠르게 진압이 되었다.
“거참 고생들이 많네.”
바쁘게 돌아다니는 영지병들을 보며 카이론은 태평하게 한 손에는 나무 병으로 된 시원한 맥주를 다른 한 손에는 아리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고참의 특권 중의 특권!
자신이 원할 때 휴가를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귀찮은 일을 피함과 동시에 동생인 아리아와의 추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카이론의 옆에서 사람들이 뛰어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아리아의 한 손에는 꼬치가 들려 있었다. 카이론 스스로 생각하길 자신이 만든 것보다는 못하지만 분위기가 그런 것을 잊게 해 주고 있는지 아리아는 열심히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자아∼ 이거는 특별히 귀여운 리아에게 주는 것이니 많이 먹어라.”
식당 주인은 터질 것 같은 두 팔 근육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며 카이론과 아리아의 사이에 비어 있는 접시 위에 꼬치를 몇 개 더 올려 주었다.
“아우우우.”
아리아는 그럼 식당 주인의 행동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식당 주인은 아리아의 그런 행동에 다시 크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거칠게 하는 거라면 사양입니다.”
찌릿.
카이론의 눈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며 식당 주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저 두꺼운 팔 근육을 갖고 있는 식당 주인이 거칠게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면 여린 아리아의 목이 뚝하고 부러질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버린 카이론이었다.
“아.하.하.하.”
식당 주인은 어색하게 웃고는 조심스럽게 아리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북적거리는 식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평소에는 고용한 사람들로 모든 일을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추수가 끝난 뒤 하는 축제 때에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했다.
영지에서도 이 식당 주인이 분위기파라는 것을 대부분이 알고 있기에 이럴 때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주변에 있는 다른 식당을 하는 곳에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몬스터 급의 팔뚝을 자랑하는 이에게 함부로 대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우아우.”
맥주만을 홀짝이던 카이론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아리아의 호출에 두 눈을 반짝이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리아를 볼 때만큼은 자신의 눈이 카메라가 되고 뇌는 무한대 용량을 가진 필름이 되길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카이론이 돌아보기 무섭게 아리아는 식당 주인이 무료로 주고 간 꼬치를 하나 내밀었다. 다른 것은 먹지 않고 맥주만 홀짝이는 카이론이 딱해 보인 것인지 안주를 주는 것이다.
“아아∼ 리아야.”
카이론은 아리아의 그런 작은 배려에 세상을 모두 갖은 것 같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꼬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게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맛이란 말인가.”
어디에나 흔히 있는 것이긴 하지만 카이론에게 있어 특별 조미료인 아리아의 사랑이 듬뿍 들어 있었다는 것으로 인해 신경 쓰지도 않던 꼬치의 새로운 맛에 정신을 놓고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예상으로는 곧 자신에게 다가올 귀찮은 일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서.
***
이미 예상은 했었다. 일개 병사로서는 불가능할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많은 정보력을 갖고 있는 카이론이었으니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짜증이 숨을 쉴 때마다 밀려들어 왔다.
“그럼 지금부터 군법 회의를 시작하겠다. 이번 회의에 참관한 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마일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작은 책자를 힐끔거리며 조금은 버겁다는 표정으로 회의를 시작하였다.
“에가밀과 카이론 두 사람은 빛의 신인 하오리아의 이름 아래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은 다짐하는가?”
신고인인 에가밀은 마일드의 말에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쭉 편 손으로 가슴 부분에 손바닥을 대고는 작게 원을 그렸다.
“빛의 신인 하오리아 님의 종인 에가밀은 여신님의 이름 앞에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바이옵니다.”
“빛의 신인 하오리아 님의 이름 아래 카이론 역시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을 다짐합니다.”
“건방지구나! 감히 하오리아 님의 이름을 말하며 그런 태도를 보이다니! 마일드 기사님, 아니, 회의에 참석한 모든 여러분! 저 건방진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은 회의를 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당장 저 녀석을 영지에서 내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들까지 여신님의 화를 피해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귀찮음이 다분히 묻어나는 카이론의 말투를 에가밀은 놓치지 않고 공략했다. 아주 확실하게 카이론을 짓밟을 생각이었다.
얼마 전 자신이 당한 것의 몇 배로 돌려 줄 생각이었다. 에가밀은 그 일이 있은 뒤 오늘 이 군법 회의가 있기 전까지는 밖으로 잘 돌아다니질 않았다. 아니, 돌아다니질 못했다.
자신이 무시하던 이들의 앞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엄청난 수모를 당한 에가밀이었다. 처음 며칠간은 자신과 눈을 마주한 카이론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아 공포로 인해 돌아다니지 못한 것이었지만 조금 안정을 찾고 나서는 그때 있었던 말로는 표현 못할 수치스러웠던 일이 떠올라 돌아다니지 못했다.
자신이 일찍이 신청한 이 군법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남들이 없는 곳에서 업무를 보고 있거나 집에 박혀서 카이론을 저주하고 있었을 에가밀이었다.
“지금 우리는 군법 회의 중이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우선 에가밀 자네가 카이론을 신고한 이유를 말해 보도록.”
신이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딱히 자신들에게 해 주는 것이 없기에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 마일드는 에가밀의 그런 행동을 간단하게 무시했다.
모논 영지에서는 딱히 군법 회의를 행하는 이들이 없었다. 모두가 가족같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이번 군법 회의도 거의 몇 년 만에 일어나는 회의였다.
심지어 대부분의 이들은 군법 회의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랬기에 이 군법 회의가 일어난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에가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들 좋지 않은 일에 카이론이 연관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안타까워했다.
“우선 카이론 저자는 다른 이들이 없는 곳에서 저에게 많은 하극상을 행하였습니다. 상부에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이용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해명을 요청하는 바이옵니다.”
에가밀이 카이론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카이론은 어이가 없었다.
“해명이고 뭐고 없습니다. 증거가 불충분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라면 제가 아는 한 에가밀 저 사람은 벌써 영지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살인자로 불리고도 남을 것입니다. 아, 증거 불충분은 아마 포로무 왕국 국법에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카이론의 말에 마일드는 빠르게 나름 오래된 국법이 적힌 책을 빠르게 뒤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었기에 자신을 힘들게 하는 카이론을 힐난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