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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럼 네가 복줄꽃이나 환생꽃 같은 걸로 피면, 나랑 꽃가루받이할 거야?’

청현은 말문이 막혔다. 어떤 꽃으로 피든, 그가 여울이나 다른 암꽃들과 하나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청현의 마음은 확고했다. 청현이 대답을 피하자 여울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몰아쳤다.

‘나 말고도 다른 꽃들이 너한테 이런 말 많이 한 거 알아. 왜 다 거절하는 거야?’
‘난…….’
‘이서 때문에?’

그쯤에서 청현은 정신을 차리고 이서를 보았다. 이서는 풀밭에 편안히 누워 청조(靑鳥)와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청조가 이서의 머리카락을 콕콕 쪼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뺨이며 가슴께로 움직였다. 이서가 간지러운 듯 웃다가 청조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청조는 일말의 두려운 기색도 없이 폴짝 그녀의 손가락에 앉았다.
“안녕, 지켜줄꽃님?”
이서가 청조를 청현 쪽으로 내밀며 이상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아주 가늘고 부자연스럽게 높은 여자 목소리였다. 청현은 그게 뭐야, 하며 웃었지만 이서는 개의치 않았다.
“난 청조야. 나랑 이름 한 자가 같으니 우리 꽃가루받이하지 않을래? 짹짹.”
“하지 마.”
청현은 웃으며 이서의 손을 밀어 냈다. 청조가 파드득 날아갔다. 이서는 풀밭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길하고 희귀한 꽃으로 핀 청현보다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네가 지켜줄꽃이라 진짜 좋아. 대기만성이라더니 그 말이 맞나 봐.”
이서는 자기도 오래 기다린 만큼 아주 근사한 꽃으로 피리라 기대하는 듯했다. 청현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이서가 신이 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지켜보았다. 이서는 잔뜩 신이 나서, 대답하지 못하는 꽃들에게 공연히 말을 걸기도 하고 청현에게 실없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서는 정말 기대에 부푼 채였다.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사실 이서는, 많은 꽃들이 끝까지 피지 않는 자기와 청현을 보며 수군거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악의적인 짓은 아니었다. 그저 지나치게 오래 피지 않는 둘이 혹시 최악의 꽃으로 피는 게 아닐까 우려했을 뿐이다.
개의치 않으려 해도 그런 말은 신경이 쓰였다. 어떤 꽃이 될까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많은 이룰싹들이 흉한 꽃으로 필 때마다 이서는 속이 탔다. 혹시 나도 귀먹을꽃 같은 거면 어쩌지? 그런 불안이 목 끝까지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자기만큼 오래 기다린 청현이 지켜줄꽃으로 피었으니, 이제 이서도 언제까지든지 기다려 더 멋지고 복된 꽃으로 필 수 있었다. 적어도 이서의 생각은 그랬다.
“역시 천제님은 공정하셔. 오래 기다린 만큼 좋은 게 기다리고 있는 거 말이야.”
“너 평소에 천제님 잘 찾지도 않잖아.”
청현은 웃기지 말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청현의 말은 사실이었으므로 이서도 거기에 별다른 변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이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꽃들은 천제에게 관심이 없었다. 꽃들은 오히려 꽃감관 김진성에게 더 마음을 기울였다. 진성은 서천꽃밭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꽃감관님도 네가 지켜줄꽃이란 거 알고 좋아하셨지?”
“글쎄, 꽃감관님은 어떤 꽃이든 다 좋아하시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이룰싹들은 자아가 확실했으므로 자기가 어떤 꽃으로 필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진성은 이룰싹들이 ‘좋은’ 꽃으로 피든 ‘나쁜’ 꽃으로 피든 똑같이 축복해 주었다. 장주가 부러질꽃으로 피어 울 때도, 진성은 그를 달래며 이 세상에 나쁜 꽃 같은 건 없다고 말해 주었다.
이서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진성이 말해 주었다. 꽃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그래도 이서는 여전히 ‘좋은’ 꽃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좋은 꽃이 되기 위해 이제껏 기다려 온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울이는 어디 갔어?”
문득 이서가 청현에게 물었다. 청현은 모르겠다며 고개만 저었다. 이상하네, 하고 이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서와 청현, 여울은 어릴 적부터 친했다. 여울은 아주 이르게 핀 이룰싹이었고 이서와 청현은 가장 나중까지 이룰싹으로 남았지만, 셋은 아무 문제 없이 잘 어울렸다.
그런데 청현이 고통스러운 개화열을 이기고 핀 오늘, 여울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제일 먼저 축하해 주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아까 꽃들이 모여 있었을 때도 못 본 것 같았다.
“여울이 찾으러 가자.”
“난 됐어. 좀 앉아 있고 싶어.”
이서는 벌떡 일어나 출발하려다가 멈칫했다. 청현이 이런 식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다. 다른 때라면 당연히 같이 갔을 텐데……. 아마 아침부터 꽃들이 몰려와 피곤했던 모양이다. 이서는 그쯤에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피곤했구나. 그럼 쉬어야지.”
청현은 대답하지 않고 모호하게 웃었다. 당연히 이서는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서는 청현의 어깨를 두어 번 주물러 주고 휙 돌아서서 여울을 찾아 달려갔다. 청현은 팔랑팔랑 멀어지는 이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서가 여울을 발견한 건 서천꽃밭에 노을이 번진 저녁이었다.
여울은 버드나무 샘에 있었다. 버드나무 아래 앉아, 여울은 두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게 샘만 바라보았다. 이서는 총총 그쪽으로 달려갔다.
“여울아!”
짠, 하듯 그 앞에 서며 불렀지만 여울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여울은 이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이서는 당황했다. 얘가 왜 이러지?
“왜 그래, 어디 아파?”
가끔 꽃들도 병에 걸렸다. 온몸이 끔찍하게 가려워지거나 시커먼 반점이 마구 올라오곤 했다. 꽃감관 진성이 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꽃들은 대체로 아프면 진성에게 찾아갔다.
이서는 여울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울아, 못 걷겠어? 내가 꽃감관님 모셔 올까?”
“저리 가.”
여울이 홱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이서는 분명히 들었다. 여울의 거부에 이서는 깜짝 놀랐다. 여울은 구김살이 없고 친절한 꽃이었다. 꽃들은 모두 여울을 좋아했다. 이제껏 여울은 누구에게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여울아.”
이서가 놀라서 여울을 불렀다. 부르는 것 말고는 다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서는 그냥 여울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울도 여울 나름대로 마음이 불편했다. 소녀는 친구의 침묵이 무섭고 싫었다. 차라리 왜 그러느냐고 화를 냈다면 여울도 마음껏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너 때문에 청현이가 나랑 꽃가루받이하기 싫대. 너 때문이야. 그런데 넌 아무것도 모르고!
“아니면 같이 청현이 보러 갈래? 지켜줄꽃이라던데…….”
이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역효과였다. 번쩍 고개를 든 여울은, 뭐라고 한바탕 고함을 칠 듯 입을 벌렸다가 갑자기 서럽게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서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왜 그래, 너 진짜 어디 많이 아픈 거야?”
이서는 어쩔 줄 몰라 여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확 뿌리칠까 두려웠는지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여울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절대 이길 수 없는 연적이면서, 동시에 청현을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는 이서의 손을 느끼며 펑펑 울었다.
제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더 서러웠다. 열다섯 살이라 해도 천상에서는 아주 어린 나이였다. 여울은 화를 낼 수도 없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어서 무작정 울기만 했다.
여울아, 여울아, 하고 계속 부르던 이서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뚝 멎었다. 여울은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꽃감관님에게 갔을지도 몰라. 병이 난 게 아닌데. 그렇게 고개를 든 여울은 뜻밖의 상황에 직면했다.
이서가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이서는 아주 추운 것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은 물론 드러난 목이며 손발까지 시뻘게졌다. 여울은 너무 놀라 울음을 뚝 그쳤다.
“이서야!”
여울이 이서에게 달려들어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서는 자꾸 벌벌 떨어 대기만 할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뜨겁다. 기이한 열기였다. 단순한 열이 아니다. 이건 개화열이야! 이미 한번 개화열을 겪어 본 여울은 어쩔 줄 모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열이 너무 심했다. 이서의 몸은 거의 타는 것 같았다. 이서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쳤다. 조금이라도 찬 기운을 찾아 땅에 몸을 바짝 붙이고 괴로워했다. 물론 개화열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꽃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이렇게…….
여울은 자기도 모르게 확 이서의 몸에서 손을 뗐다. 정말로 불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여울은 이서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이서의 몸에서 방출되는 열기가 주위의 풀까지 바짝 말려 버렸다.
이제껏 이런 개화열은 없었다. 다른 생명을 상하게 하는 열이라니.
이건 뭔가 이상해……. 여울은 벌떡 일어나 달렸다. 아무래도 진성을 데려와야 할 것 같았다.

여울이 꽃감관 진성을 부르러 간 사이, 이서는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되찾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 배 속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뒤부터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열 때문인지 제대로 앞을 볼 수도 없었다. 이서는 더듬더듬 주위를 짚었다. 뜨거워. 뜨거워. 숨을 쉴 때마다 몸은 더욱 뜨거워졌다. 한 호흡 한 호흡이 다 고통이었다. 이서는 불길이 목을 태우고 배 속으로 들어가 온 다리를 지졌다가 발끝으로 사라져 버리는 기이한 감각 속에서 몸부림쳤다.
이서를 샘으로 이끈 건 본능이었다. 이서는 기다시피 해 샘으로 갔다. 목말라. 차가운 물이 손끝에 닿았다. 이서는 먼 어린 시절처럼, 그대로 깊은 샘에 뛰어들었다.

샘은 아주 차갑고 깊었다. 이서는 아주 달게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순식간에 열기를 식혀 주었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이서는 눈을 떴다.
저녁 무렵이라 물속은 어두웠다. 하지만 이서는 앞을 볼 수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제 팔다리가 물속에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서는 위로 고개를 들었다. 너무 깊이 들어왔을까. 숨이 모자랐다. 수면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이룰싹이라 해서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룰싹은 신선도 신수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 선계에서 가장 많은 한계를 가진 존재였다. 이서는 일단 위로 올라가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팔다리를 동시에 움직여 봐도 나아가는 속도는 더뎠다.
그때 뭔가 서늘한 것이 이서의 허리를 감았다. 이서는 본능적으로 그걸 붙잡고 허리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의 두껍고 긴 꼬리였다. 꼬리. 검푸른 비늘.
이서는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입에서 우르르 거품이 쏟아졌다. 용이다. 이건 샘 바닥에 산다는 그 용이야! 이서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다. 매끄럽기만 한 비늘을 쥐어뜯고, 꼴깍꼴깍 물을 마셔 가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서는 무력했다. 긴 꼬리는 그대로 이서를 샘 바닥까지 끌어당겼다.
이제 이서는 익사하기 직전이었다. 아주 어둡고 추운 곳으로, 이서는 끌려 내려갔다. 의식이 멀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푸하!”
이서의 입에서 거센 기침이 터졌다. 이서는 콜록거리며 눈가로 흘러내리는 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라 아무 소용도 없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편안해지자, 이서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물속이었다. 그러나 이서는 커다란 물방울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이서는 엉금엉금 기어 투명한 막처럼 보이는 물방울의 표면을 만져 보았다. 만진 후에야 터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 모습만 흐리게 비칠 뿐이었다.
그러나 이서는 곧 펄쩍 뛰다시피 해 뒤로 물러나야 했다. 어두운 물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용의 머리가 나타난 것이다. 용의 머리는 이서보다 훨씬 더 컸다. 언뜻언뜻 드러나 보이는 이빨이 이서의 손바닥만 했다. 이서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용의 눈동자는 검었다. 검푸른 비늘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신비롭다기보다는 징그러웠다. 이서는 물결 따라 일렁이는 긴 수염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용이 입을 벌렸다. 큰 이빨과 시뻘건 혀가 동시에 드러났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이서가 뒤로 넘어졌다. 그러자 용은 입을 다물었다. 용은 이서가 앉아 있는 커다란 거품 근처를 빙빙 돌았다. 들어갈 구멍이 없나 찾는 움직임이었다. 이서는 벌벌 떨며 제발 용이 이 거품 안으로 들어오지 않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용은 긴 몸으로 거품을 감싸다시피 해 한참을 맴돌다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서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안녕.”
뒤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이서는 움찔하지도 못하고 굳어졌다. 이서는, 끔찍한 이빨과 침이 뚝뚝 흐르는 혀와 시커먼 목구멍이 보일 것을 예상하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건 용도 괴물도 아니었다. 작은 남자아이였다.
“넌 그때 그 애구나.”
아이가 고개를 약간 숙여 주저앉은 이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는 소매가 넓은 물빛 옷을 헐렁하게 걸치고 있었다. 머리에 수사슴 뿔이 솟은 게 보였다. 이서는 한참 숨만 몰아쉬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제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상하네. 아직도 무서운가? 꽤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러더니 아이는 성큼 이서를 지나쳐 거품 벽에 자기 모습을 비쳐 보았다. 그러더니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뿔이 아직이었네.”
아이가 이서를 향해 휙 돌아서자, 뿔은 아이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우드득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끔찍한 소리였고 경악할 광경이어서 이서는 또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이서 앞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왜 말이 없어.”
“누구, 누구세요.”
이서는 앉은 채로 주춤 물러나며 물었다. 웅얼거리는 소리였지만, 아이는 용케 알아듣고 대답했다.
“난 아자개야. 천제의 교룡(蛟龍)이지. 여기 살아.”
역시 용이었어. 이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예상은 했다. 이서는 용을 본 적이 없지만, 대강의 생김새는 알았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이 버드나무 샘에는 용이 산다 했다. 이룰싹들은 종종 진성에게 그게 정말인지 물었지만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용은 나쁜 생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 친절하지도 않다. 이서는 그저 용이 무서웠다. 제 손바닥만 한 이빨이나 머릿속으로 우드득 빨려 들어가던 뿔이나 가지런한 비늘도 전부.
그때, 이서의 몸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서는 아까의 그 열기가 다시 제 몸을 덮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서는 숨을 몰아쉬며 용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 이게 개화열이구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가끔 진성이 와서 말해 줬었지. 요새는 통 안 오지만.”
아자개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이서는 정말 이대로 죽을 것 같았다. 샘물을 마시니 괜찮아졌는데. 아까는 거의 익사할 뻔했지만, 지금 당장은 물이 더 급했다. 이서는 힘겹게 눈을 돌려 아자개를 보았다. 제 앞에 선 아자개는 무구한 얼굴이었다. 이서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청했다.
“물, 마시게 해 주세요. 목이…….”
“이 밖으로 나가면 또 숨이 막힐 텐데. 너 죽을 뻔했던 거 아냐?”
“뜨거워…….”
열은 또 순식간에 이서를 휘감았다. 몸이 불타는 것 같아. 아까 열이 가라앉았던 건 거짓말이었다는 듯, 몸은 타오르고 또 타올랐다. 이 샘물만 마시면. 이서는 고통 중에 생각했지만 물방울은 너무나 단단했다. 이서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들어 투명한 바닥을 두드렸다. 하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