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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어 미국, 영국, 태국, 중국, 홍콩까지. 해외 출장 일정은 오늘로 33일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예상보다 길어진 출장 일정에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오늘 이 미팅이 마지막 일정이라는 걸 위안 삼으며 겨우 짜증을 억눌렀다. 하지만 겨우 누그러뜨린 짜증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던 예준의 아래턱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10분. 벌써 10분이나 지났다. 도대체 이 작자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선진미디어 마케팅 총괄 차예준 상무의 해외 출장 마지막 미션은 홍콩에 설립할 선진미디어 해외 법인 대표로 크리스를 영입하는 일이었다.
사실 예정대로라면 어제 크리스와 미팅을 끝내고 진작 한국으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크리스가 멋대로 약속을 취소하는 바람에 예준의 한국행이 하루 늦춰진 상황이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 때문에 예준은 크리스라는 인물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씨, 이 새끼 왜 안 와?”
결국 터져 버리고 말았다. 예준이 낮게 욕을 읊조렸다.
상사의 입에서 비속어가 튀어나오자 뒤에 있던 비서 강지석이 못마땅한 눈으로 예준을 흘겨보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상무님. 제발 그 말투 좀 고치세요. 회장님한테 그렇게 혼이 나고도…….”
무섭기로 소문난 차 회장의 말도 들어 처먹지 않는 상사 때문에 강 비서만 고생이었다.
“젠장.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고치라고.”
“하긴, 결혼하고 인간 됐지.”
“뭐라고?”
“아니에요.”
차 회장의 세 아들 중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마이 웨이 하던 그는 영화 제작과 연출 일을 하며 20대를 보냈다. 아버지 회사 따위 일절 관심에도 없던 예준은 할리우드 유명 제작사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귀국하더니 선진미디어에 입사했다.
그때 재계가 발칵 뒤집혀졌다. 후계 구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난 거 아니냐며.
사내도 난리가 났다. 잘생긴 도련님 얼굴에 홀딱 빠진 여사원들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팬클럽까지 만들 기세였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김 과장은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고, 컴퓨터 학원을 다니든가 인강이라도 들어. PPT 수준이 이게 뭐야. 초딩이야? 요즘 초딩들도 이렇겐 안 만들어. 다시!’
‘다시! 이거 기획안 맞아? 대하소설 읽은 줄. 졸려. 짧고 굵게, 그게 기획안의 기본 아닌가?’
‘고객사 앞에서 PT를 하는데 말을 더듬어? 이 대리, 뒤지고 싶어?’


막말의 신세계를 접한 사원들은 다들 입을 모아 외쳤다.
저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 쓰레기가 잘생기면 뭐 하냐고.
하지만 뒤에서 그렇게 욕을 해 대던 사원들도 상무인 그가 부장급도 만들지 않는 PPT를 직접 만들어 PT 시범을 보일 때면 생각이 바뀌었다.
다시 가서 주워 오고 싶다. 저 아름다운 쓰레기.
그는 영화 연출을 하던 사람이라선지 PPT 구성 능력이 뛰어났다. 단 한 장의 페이퍼로도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시장을 파악하고 셀링 포인트를 짚어 내는 괴물 같은 능력은 업계에서도 유명했다.
게다가 말은 얼마나 잘하는지, 엎어진 계약도 5분이면 다시 판을 뒤집어 거래를 성사시키곤 했다. 사실 지랄 맞은 그의 성격도 딱 한 가지만 건드리지 않으면 회사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그 한 가지가 조금 유별나서 그렇지.
“강 비서! 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지?”
“그럼요. 알죠. 알다 뿐이겠어요.”
“근데 뭐 하고 있어? 빨리 전화해. 크리스 왜 안 오냐고. 이 미친 새끼, 나 빨리 집에 가야 되는데.”
선진미디어 사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차예준 상무가 집에 가고자 할 때 절대 방해하지 말 것.
예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다리를 꼰 채 문을 노려보고 있는 예준을 지석은 불안한 눈으로 관찰했다. 예전 같았으면 10분은커녕 10초만 늦어도 계약은 없던 일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선후배 사이로, 또 그의 비서로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지석은 차예준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33일 동안 잘 참았지. 이제 터질 때도 됐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옆에 둔 것처럼 지석은 불안에 떨었다.
예준은 원래 영화 제작사 Y를 설립한 인물로 엔터 쪽에서는 이름 꽤나 날리던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같이 작품을 한 연예인들보다 스타일 좋고 수려한 외모로도 유명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서인지, 이 험난한 엔터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한 위장이었는지, 아니 어쩌면 태생부터 그러했을까? 집안, 학벌, 외모 모든 걸 다 가진 예준은 행동이나 언사가 다소 거친 것이 흠이었다.
오죽하면 지석의 업무 절반이 변호사를 만나는 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겠는가.
“지석아, 크리스가 LK엔터에서 매출 300억 원 정도 올렸다고 했나?”
“네. 매출도 그렇고, 아시아 쪽 인프라가 탄탄한 크리스가 이번 우리 홍콩지사 대표로 적임자예요. 뭐, 다 떠나서 제일 중요한 건 윗분들이 크리스를 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 상무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역시 회사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후회가 막심했다. 하지만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에 들어와 경영 수업을 받는 대가로 얻은 것은 정말 그에게 있어, 세상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혼한 거 후회하세요?”
“미쳤냐?”
“그럼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상무님 회사 들어오는 조건으로 회장님이 결혼 허락했다면서요.”
그뿐인가. 회사에 들어와 능력을 보여 주라기에, 할리우드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한국으로 귀국하자마자 밤낮없이 일만 했다.
그 결과 영화 사업 본부를 신설해 영화 채널을 개국했고, 채널은 개국과 동시에 속된 말로 대박을 치며 예준은 차 회장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정말 어렵게 결혼에 골인한 것이다. 그게 벌써 1년 전 일이다.
사랑하는 그녀와 평생 함께할 수 있는 행복을 얻은 대신 잃은 것도 많았다.
지금껏 규율이나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일을 해 온 예준은 대기업의 경직된 조직 문화에 영 적응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힘이 드는 건, 그녀가 보고 싶을 때 제 맘대로 보러 가지 못한다는 것.
“이놈의 회사는 쓸데없는 일이 너무 많아. 도대체 집엔 언제 갈 수 있는 거야?”
지석은 투덜대는 예준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고작 1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예준이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그가 지금의 아내 오하윤을 만나기 전엔 안 그랬다.
영화 제작과 연출도 지금 예준이 소화하고 있는 업무 뺨치게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는데, 그땐 오히려 지석이 그에게 제발 집에 좀 가라고 할 정도로 그는 심각한 워커홀릭이었다.
변해도 너무 변했어.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도대체 집에 가서 뭐 하세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아직 총각인 지석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휴, 그렇게 좋으세요? 이제 슬슬 권태기 올 때 되지 않았나?”
사실 예준은 남녀 간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는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후 생각이 바뀌었다. 영원할 수도 있겠다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은 더 불타올랐다. 이 상태라면 죽을 때까지 그녀만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권태기? 우리한테 그딴 건 없어.”
예준은 환한 미소로 배웅을 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곤, 뒤로 휙 돌아섰다.
평소에는 무뚝뚝하면서 제 아내 얘기라면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는 예준이 귀여웠던 지석은 남몰래 킥킥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끼고 핸드폰을 꺼냈다.
“네. 강지석입니다. 김 박사님께선 어쩐 일로…… 네?”
통화를 하는 지석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러자 예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무슨 일인지 알아내기 위해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네. 알겠습니다. 네…….”
지석이 전화를 끊자마자, 예준은 무슨 일이냐며 눈으로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석이 대답했다.
“사모님이 좀 다쳤나 봐요.”
“뭐? 다쳐?”
예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석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 차분하게 굴었다.
“가벼운 교통사고였대요.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중이고, 김 박사님께서 자세한 얘기는 직접 와서 들으셔야 할 것 같다고…….”
지석은 말끝을 흐렸다. 마침 문이 열리고 크리스가 나타난 것이다.
“상무님. 일단 미팅 후에 얘기하시죠.”
지석이 애원하듯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색이 된 예준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크리스가 룸으로 들어왔다.
크리스는 사과 한마디 없이 능글맞게 웃으며 예준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크리스에게서 나는 술 냄새 때문에 예준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지석도 알코올 향을 맡고는 고개를 돌려 남몰래 코를 찡긋거렸다.
「계약 조건 들어 봅시다.」
아직도 술이 덜 깬 모양인지 크리스가 거만하면서도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예준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영어로 말했다.
「난 그쪽 사과부터 들어야겠는데?」
「뭐?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크리스가 열받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예준은 살벌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주눅이 든 크리스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굳이 폭력적인 말이나 주먹을 날리지 않아도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눈빛은 예준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무기였다. 물론 떡 벌어진 어깨, 큰 키, 다부진 골격은 기본 옵션이었다.
예준은 크리스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에 실패했는지 지석을 향해 다급히 물었다.
“하윤이 지금 병원에 있다고?”
“네…… 그렇긴 한데, 상무님 잠깐만요! 어디 가세요?”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