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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갑자기 예준이 룸을 나가 버렸다. 지석은 화들짝 놀랐다. 당황한 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지석은 갈팡질팡하다 크리스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무님! 같이 가요!”
예준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석은 발을 동동거렸다.
“지금 제정신이세요? 크리스랑 계약은 어쩌고요? 300억 원짜리라고요!”
“300억 원보다 나한텐 하윤이가 더 중요해.”
“가벼운 사고였대요. 찰과상 정도. 그러니까 제발 다시 올라가요.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다른 이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어차피 저 인간 우리랑 계약할 생각 없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계약할 마음이 있었으면 어제 했고, 오늘 대낮까지 술 처먹고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설사 계약할 마음이 있대도 이젠 내가 반대야. 저런 개망나니를 어떻게 믿고 회사를 맡겨? 내가 국내파로 생각해 둔 인물이 따로 있으니까, 걱정 말고 지금 당장 서울 가는 비행기나 알아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예준을 따라가며 지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진작 차선책이 있다고 얘기를 하시지. 무턱대고 그냥 나가 버려서 놀랬잖아요!”
무데뽀. 그가 일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가끔 이유도 없이 자기주장대로 일을 밀어붙이곤 하는데, 그게 참 희한하게도 늘 대박을 치는 바람에 언제부턴가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일단 믿어 보고 볼 일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예준이 영입하려는 인물은 크리스가 해낸 300억 원의 성과를 뛰어넘을 것이 분명했다.
지석은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일적인 면에서는 예준을 100퍼센트 신뢰하기에 진석은 홀가분하게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석을 먼저 회사로 보내고, 혼자 병원으로 향한 예준은 하윤이 입원한 병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병실이 텅 비어 있었다.
그때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오하윤 환자 보호자분이세요?”
“네. 제 아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사라지다니……. 순간 예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많이 다쳤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지금 당장 김 박사님 좀 불러 주세요.”
“지금 급한 수술 들어가셔서 자리에 안 계세요. 대신 저한테 부탁하셨어요. 보호자분께 오하윤 환자 상태 잘 설명해 드리라고.”
예준은 빨리 본론을 말하라는 듯 다급한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봤다.
“후진하던 차에 부딪혔습니다. 다행히 차의 속력이 크지 않아서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환자분이 놀랐는지 기절한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왔고요. 외상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 CT와 MRI 촬영을 권했는데…… 영상의학과로 이동하던 중 환자분께서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때 예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속 발신인을 확인한 예준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의사를 향해 양해를 구하듯 고개를 숙였다. 의사가 설명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 간호사와 차트를 확인했다. 그사이 예준은 전화를 받았다.
“차지해! 너 하윤이랑 같이 있지?”
― 어떻게 알았어?
“지금 어디야?”
― 어디긴. 오빠네 집이지.
“하윤이 좀 바꿔.”
― 그게…… 지금 자는데. 깨울까?
“잔다고? 아니야. 됐어. 깨우지 마. 내가 지금 당장 갈 테니까.”
전화를 끊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가려던 예준은 의사와 얘기 중이었던 것이 생각나 뒤로 돌았다.
“죄송합니다. 아내가 집에 있다고 하네요.”
“환자분 상태에 대해…….”
“자세한 얘기는 제가 김 박사님과 통화하겠습니다.”
“저기…….”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곤란한 얼굴로 의사가 예준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성격 급한 그는 이미 밖으로 달려 나가고 없었다.
정문 앞에 대기해 둔 차에 올라탄 예준의 마음이 조급했다. 오늘따라 차는 왜 이리 막히는지, 속력을 낼 수도 없었다. 애꿎은 핸들만 꽝꽝 내리쳤다.
우르르쾅쾅.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해가 쨍쨍 나는 하늘에서 천둥이 치더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새까맸다.
“날씨가 미쳤네.”
제 마음 같은 날씨를 올려다보던 예준은 초록불이 바뀌자마자 차의 속력을 높였다.
끼이이이익.
집 앞에 아무렇게나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예준은 냅다 달려 대문을 열고, 넓은 마당을 지나 마침내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코끝으로 스며든 달콤한 체리 향. 그녀가 애용하는 바디워시 냄새였다.
어딘가에서 그녀의 향기가 났다.
예준은 직감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김없이 그곳엔 그녀가 있었다. 창가에 서 있는 하윤의 뒷모습을 확인한 예준은 안도감에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오하윤…….”
예준이 아내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그러자 조금 느리게 그녀가 뒤를 돌았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생크림같이 하얀 피부에 초롱초롱한 큰 눈망울.
예준의 눈빛은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고정되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아내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 예준의 가슴이 사춘기 소년처럼 두근거렸다. 예준은 애써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사고 났었다며. 다친 데는? 어디 아픈 덴 없어?”
예준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살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달려가 그녀를 품에 꽉 안아 버렸다. 예준은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하던 행동이었다. 그가 이렇게 안아 주면, 그녀는 더욱더 자신의 품에 파고들어 얼굴을 비비적거리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제 품에 안긴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급기야 그녀가 예준의 가슴팍을 밀쳐 내더니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예준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윤아.”
어렵게 입을 열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매일 밤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달콤한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너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예준이 걱정스레 묻자 드디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누구세요?”
TV 드라마에서 많이 들어 본 진부한 대사에 예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피식 웃어 버렸다.
“야. 무슨 이런 장난을 쳐. 놀랬잖아.”
“…….”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하윤을 빤히 보던 예준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그때 정적을 깨고 현관문이 열렸다.
“오빠!”
스냅백에 핫팬츠를 입은 지해가 나타났다. 지해는 예준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막내 여동생이었다. 아내인 하윤과 절친이기도 했다.
지해가 예준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오빠. 병원 갔다 왔어?”
동생의 하이톤 목소리에도 예준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하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상태를 확인한 지해는 예준의 팔을 잡아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김 박사님한테 못 들었어?”
“뭘?”
“놀라지 말고 들어. 하윤이 해리성 기억 장애래. 나도 기억 못 하고, 아무것도 기억 못 해. 심지어 자기 이름도 몰라서 내가 알려 줬다니까?”
예준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너네 둘 요새 연기 연습 하냐? 재미없으니까 그만해라.”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 까르르 웃어 대던 지해였다. 하지만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동생 녀석의 얼굴엔 어울리지 않게 그늘이 가득했다.
예준은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예준은 고개를 돌려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창가에 서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그녀의 얼굴이 낯설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도대체 왜…….
“유산한 것도 기억 못 하는 모양이야.”
지해는 혹시라도 하윤에게 들릴까 작게 속삭였다. 지해의 말에 예준의 시선이 다시 하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엔 결혼해서도 수줍게 자신을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던 귀여운 아내는 없었다.
그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열다섯 살에 TV 단막극에 출연해 KBC 방송국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한 이력을 빼면 아주 평범했다.
젖살이 빠진 얼굴은 어느덧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눈동자엔 수심이 가득했다. 낯설었다. 언제나 밝게 웃던 그녀였는데…….
“차라리 잘된 거 아닐까? 하윤이 그 일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잖아.”
스물셋,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힘들었던 일이었을까? 어쩐지 자신이 그녀를 망친 것 같은 죄책감에 예준은 가슴이 아렸다.
신혼 초기에 아이를 유산했을 때도,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며 아직은 둘이 더 좋다던 그녀였는데.
예준은 하윤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후두둑. 후두둑.
어느새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졌다.
휘이익. 휘이익.
무거운 정적을 깨고 창문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창문을 때리는 그 바람은 더욱 거세져 마당에 핀 장미 꽃잎들을 떨어뜨렸다. 무섭게 쏟아지는 비와 함께 꽃잎은 사방으로 자유롭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꽃이 지고 있었다.
갑자기 예준이 룸을 나가 버렸다. 지석은 화들짝 놀랐다. 당황한 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지석은 갈팡질팡하다 크리스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무님! 같이 가요!”
예준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석은 발을 동동거렸다.
“지금 제정신이세요? 크리스랑 계약은 어쩌고요? 300억 원짜리라고요!”
“300억 원보다 나한텐 하윤이가 더 중요해.”
“가벼운 사고였대요. 찰과상 정도. 그러니까 제발 다시 올라가요.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다른 이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어차피 저 인간 우리랑 계약할 생각 없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계약할 마음이 있었으면 어제 했고, 오늘 대낮까지 술 처먹고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설사 계약할 마음이 있대도 이젠 내가 반대야. 저런 개망나니를 어떻게 믿고 회사를 맡겨? 내가 국내파로 생각해 둔 인물이 따로 있으니까, 걱정 말고 지금 당장 서울 가는 비행기나 알아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예준을 따라가며 지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진작 차선책이 있다고 얘기를 하시지. 무턱대고 그냥 나가 버려서 놀랬잖아요!”
무데뽀. 그가 일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가끔 이유도 없이 자기주장대로 일을 밀어붙이곤 하는데, 그게 참 희한하게도 늘 대박을 치는 바람에 언제부턴가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일단 믿어 보고 볼 일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예준이 영입하려는 인물은 크리스가 해낸 300억 원의 성과를 뛰어넘을 것이 분명했다.
지석은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일적인 면에서는 예준을 100퍼센트 신뢰하기에 진석은 홀가분하게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석을 먼저 회사로 보내고, 혼자 병원으로 향한 예준은 하윤이 입원한 병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병실이 텅 비어 있었다.
그때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오하윤 환자 보호자분이세요?”
“네. 제 아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사라지다니……. 순간 예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많이 다쳤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지금 당장 김 박사님 좀 불러 주세요.”
“지금 급한 수술 들어가셔서 자리에 안 계세요. 대신 저한테 부탁하셨어요. 보호자분께 오하윤 환자 상태 잘 설명해 드리라고.”
예준은 빨리 본론을 말하라는 듯 다급한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봤다.
“후진하던 차에 부딪혔습니다. 다행히 차의 속력이 크지 않아서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환자분이 놀랐는지 기절한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왔고요. 외상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 CT와 MRI 촬영을 권했는데…… 영상의학과로 이동하던 중 환자분께서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때 예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속 발신인을 확인한 예준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의사를 향해 양해를 구하듯 고개를 숙였다. 의사가 설명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 간호사와 차트를 확인했다. 그사이 예준은 전화를 받았다.
“차지해! 너 하윤이랑 같이 있지?”
― 어떻게 알았어?
“지금 어디야?”
― 어디긴. 오빠네 집이지.
“하윤이 좀 바꿔.”
― 그게…… 지금 자는데. 깨울까?
“잔다고? 아니야. 됐어. 깨우지 마. 내가 지금 당장 갈 테니까.”
전화를 끊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가려던 예준은 의사와 얘기 중이었던 것이 생각나 뒤로 돌았다.
“죄송합니다. 아내가 집에 있다고 하네요.”
“환자분 상태에 대해…….”
“자세한 얘기는 제가 김 박사님과 통화하겠습니다.”
“저기…….”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곤란한 얼굴로 의사가 예준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성격 급한 그는 이미 밖으로 달려 나가고 없었다.
정문 앞에 대기해 둔 차에 올라탄 예준의 마음이 조급했다. 오늘따라 차는 왜 이리 막히는지, 속력을 낼 수도 없었다. 애꿎은 핸들만 꽝꽝 내리쳤다.
우르르쾅쾅.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해가 쨍쨍 나는 하늘에서 천둥이 치더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새까맸다.
“날씨가 미쳤네.”
제 마음 같은 날씨를 올려다보던 예준은 초록불이 바뀌자마자 차의 속력을 높였다.
끼이이이익.
집 앞에 아무렇게나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예준은 냅다 달려 대문을 열고, 넓은 마당을 지나 마침내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코끝으로 스며든 달콤한 체리 향. 그녀가 애용하는 바디워시 냄새였다.
어딘가에서 그녀의 향기가 났다.
예준은 직감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김없이 그곳엔 그녀가 있었다. 창가에 서 있는 하윤의 뒷모습을 확인한 예준은 안도감에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오하윤…….”
예준이 아내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그러자 조금 느리게 그녀가 뒤를 돌았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생크림같이 하얀 피부에 초롱초롱한 큰 눈망울.
예준의 눈빛은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고정되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아내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 예준의 가슴이 사춘기 소년처럼 두근거렸다. 예준은 애써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사고 났었다며. 다친 데는? 어디 아픈 덴 없어?”
예준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살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달려가 그녀를 품에 꽉 안아 버렸다. 예준은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하던 행동이었다. 그가 이렇게 안아 주면, 그녀는 더욱더 자신의 품에 파고들어 얼굴을 비비적거리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제 품에 안긴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급기야 그녀가 예준의 가슴팍을 밀쳐 내더니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예준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윤아.”
어렵게 입을 열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매일 밤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달콤한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너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예준이 걱정스레 묻자 드디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누구세요?”
TV 드라마에서 많이 들어 본 진부한 대사에 예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피식 웃어 버렸다.
“야. 무슨 이런 장난을 쳐. 놀랬잖아.”
“…….”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하윤을 빤히 보던 예준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그때 정적을 깨고 현관문이 열렸다.
“오빠!”
스냅백에 핫팬츠를 입은 지해가 나타났다. 지해는 예준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막내 여동생이었다. 아내인 하윤과 절친이기도 했다.
지해가 예준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오빠. 병원 갔다 왔어?”
동생의 하이톤 목소리에도 예준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하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상태를 확인한 지해는 예준의 팔을 잡아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김 박사님한테 못 들었어?”
“뭘?”
“놀라지 말고 들어. 하윤이 해리성 기억 장애래. 나도 기억 못 하고, 아무것도 기억 못 해. 심지어 자기 이름도 몰라서 내가 알려 줬다니까?”
예준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너네 둘 요새 연기 연습 하냐? 재미없으니까 그만해라.”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 까르르 웃어 대던 지해였다. 하지만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동생 녀석의 얼굴엔 어울리지 않게 그늘이 가득했다.
예준은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예준은 고개를 돌려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창가에 서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그녀의 얼굴이 낯설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도대체 왜…….
“유산한 것도 기억 못 하는 모양이야.”
지해는 혹시라도 하윤에게 들릴까 작게 속삭였다. 지해의 말에 예준의 시선이 다시 하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엔 결혼해서도 수줍게 자신을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던 귀여운 아내는 없었다.
그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열다섯 살에 TV 단막극에 출연해 KBC 방송국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한 이력을 빼면 아주 평범했다.
젖살이 빠진 얼굴은 어느덧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눈동자엔 수심이 가득했다. 낯설었다. 언제나 밝게 웃던 그녀였는데…….
“차라리 잘된 거 아닐까? 하윤이 그 일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잖아.”
스물셋,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힘들었던 일이었을까? 어쩐지 자신이 그녀를 망친 것 같은 죄책감에 예준은 가슴이 아렸다.
신혼 초기에 아이를 유산했을 때도,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며 아직은 둘이 더 좋다던 그녀였는데.
예준은 하윤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후두둑. 후두둑.
어느새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졌다.
휘이익. 휘이익.
무거운 정적을 깨고 창문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창문을 때리는 그 바람은 더욱 거세져 마당에 핀 장미 꽃잎들을 떨어뜨렸다. 무섭게 쏟아지는 비와 함께 꽃잎은 사방으로 자유롭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꽃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