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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바람막이 점퍼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던 다인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환한 라이트 불빛과 함께 나타난 차를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지른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한 발자국도 되지 않을 거리를 남겨 두고 ‘끽!’ 소리를 내며 멈춰 선 차의 보닛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커질 대로 커진 눈으로 보닛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다인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아 버렸다.
다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혼이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다시 일어서지도 못했다. 턱 주변을 비롯해 온몸에 돋았을 소름은 만져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였다.
덩치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던 차에 부딪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꿀꺽 삼키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학생. 괜찮아?”
벙거지를 덮어쓴 남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과 모자 때문에 남자의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선 마을도 멀어.’
하필 이런 순간에 택시 기사의 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덜컥 겁이 난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봐요.”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던 그가 몸을 한층 더 숙이며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거무튀튀한 야상점퍼와 확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가 더욱 소름 돋게 했다.
이제 차에 치일 뻔했다는 충격은 가시고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떡해야 하지?’
속엣말을 읊조리던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부들부들 떨리기는 하지만 사지가 부러진 것은 아니니 기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저 수상한 사람에게서 도망가는 것이 이 순간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웅크린 채로 몸을 돌려 슬금슬금 기기 시작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윤성은 어이없는 실소를 내뿜었다.
“아니, 괜찮으냐니까 왜 도망을 가요?”
그의 부름에 일순 멈칫한 다인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별장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뛰어간다면 대문까지 1분 정도 걸리겠다. 1분 안에 저 남자에게 잡히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렇다는 얘기다.
다인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아까 택시를 떠나보낸 자리는 더 멀다. 다인은 울상을 지었다.
‘밤중에 혼자 정류장에 서 있느니보다는 택시가 나을 거야.’
택시 기사의 충고를 떠올린 그녀의 표정이 별안간 확 펴졌다. 얼결에 받아 챙긴 명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 아프면 병원이라도 가야죠. 보험사 부를 테니까 도망가지 말아요.”
남자는 계속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다인은 명함을 어디 넣었는지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선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골치 아픈 일 생기는 건 딱 질색이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기척도 없이 다가온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 대는 통에 소스라치게 놀란 윤성은 얼른 손을 뗐다. 마치 치한의 습격이라도 받은 듯 몸서리까지 쳐 가며 비명을 지르는 여자가, 그에게는 더 괴기스럽게 보였다.
‘설마?’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여잔가 싶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한층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보호자를 찾아 인계해야 마무리가 될 테니 말이다.
“괜찮아요?”
그는 손을 대지 않는 대신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뭐지?’
어쩐지 걱정이 담긴 것 같은 목소리가, 그녀는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보험사’라는 얘기도 했었다. 지레 겁을 먹고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오해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몇 분 만에 일어난 모든 일이 충격의 연속이었으니, 잠시 이성이 마비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다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환하게 켜진 라이트 속으로 들이민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헉!’ 세찬 들숨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엄마야! 가가가, 가가가가, 강…….”
“윤성.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서울에서 온 겁니까?”
그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싸늘해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미처 끝맺지 못한 이름을 대신 말하며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저, 저, 저기, 그러니까, 어…… 서울에서 온 건 맞아요, 맞네요.”
더듬거리는 그녀의 대답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는 제 할 말만 쏟아 냈다.
“다친 데 없죠? 내일이라도 아픈 데 있으면 회사로 연락하세요. 알아서 해 줄 거예요. 그리고 왔던 길로 쭉 다시 나가면 버스 정류장 있어요. 10시까지 버스 다니니까 서둘러 가면 탈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성큼성큼, 화난 듯한 그의 걸음걸이를 지켜보고 있던 다인은 문득 자신의 목적을 깨닫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형부가!”
일단 그를 불러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호칭을 잘못 말한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톡 때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임지후 씨가 보내서 온 거예요.”
차에 올라타려던 그는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전 국민이 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절친한 친구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여자가, 이젠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그는 차 안으로 팔을 뻗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금 확인할까요? 아니면 그냥 조용히 돌아갈래요?”
다인은 입을 딱 벌렸다.
‘기막혀!’
지금 저 남자의 행동은 마치 귀찮은 사생팬에게나 할 법한 행동이다.
‘혹시 그냥 돌아가라고 하면 나를 팔아, 나한테 바로 전화해.’
교수와의 면담 직후, 걱정과 당부를 쉴 새 없이 반복하는 민영 옆에 묵묵히 서 있던 지후가 한 말이었다. 지후의 선견지명에 다인은 수십 번 감사를 표하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지후의 번호를 찾아 당당히 그에게 보여 주며 호기롭게 선언했다.
“내가 하죠.”
다행히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지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 다인아.
“오빠, 청평 도착했는데요. 근데 길에서 강윤성 씨를 만났는데…….”
― 바꿔.
지후는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듯 그녀의 말을 자르며 짧게 대꾸했다. 그녀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윤성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윤성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전화기를 받아 귀에 댔다.
“여보세요?”
― 나 원수 같은 강윤성 친구 임지후인데, 다인이 김영지 교수 제자야. 그리고 곧 내 처제 될 아가씨기도 하고. 순순히 모시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홀대했다간 두 번 다시 나 못 볼 줄 알아! 끊어!
윤성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 버렸다.
통화가 종료되었음을 알려 주는 메시지만 깜빡거리는 전화기를 노려보던 윤성은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콧방귀를 뀌었다.
‘앰뷸런스군.’
며칠 전 선포했던 대로, 지후는 구급차를 보낸 것이다. 물론 차가 아닌 사람이지만.
“일단 타요. 그냥 보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으니까…….”
조금은 누그러진 그의 말투를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냉큼 차로 달려가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는 그를 힐끔거리며 그녀는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는 두 손을 힘껏 마주 잡았다. 떨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긴 싫어서다.
“요즘 대학병원은 환자 인터뷰에 본과생도 보내나?”
그의 삐딱한 말투에 그녀는 또 한 번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신경질을 내리눌러야만 했다.
‘침착하자, 이 사람은 환자야.’
환자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그녀의 신경을 박박 긁어 대는 말만 골라 하는 환자일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생긋 웃는 얼굴과 상냥한 말투로 대답했다.
“저 학생 아니에요.”
“그럼 인턴인가?”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움찔하게 된다. 게다가 비꼬는 듯한 말투는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심리적 충격에 의한 행동 변화.’
전공서의 한 구절을 기억해 낸 다인은 자신의 한심함을 꾸짖으며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공의예요. 레지던트라고 들어 보셨죠? 올해 2년 차고, 스물여덟이에요. 그리고 전 하대해도 된다고 동의한 적 없어요.”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는 그의 표정은 무서우리만치 무미건조했다. 짜증도, 혐오도, 미안함도 없는 마치 밀랍 인형과도 같은 그의 표정을 마주하고 있으면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심리 질환이 아니라 싸가지 결핍증이잖아.’
속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차는 벌써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흠, 무혈입성이로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을 들어 버린 그는 비웃음에 가까운 콧방귀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마당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기다리는 일에 재주가 없는 그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손짓을 했다.
“아, 미안요.”
짤막한 사과를 중얼대며 들어서는 그녀의 뒤통수를, 윤성은 한껏 찌푸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가 아는 정신과 의사들은 ‘미안요.’ 따위의 가벼운 언행은 하지 않는 부류다. 물론 그가 아는 정신과 의사는 어머니의 친구인 영지밖에 없지만…….
그녀는 별장 안을 둘러보면서도 여전히 시끄러웠다. 사람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감탄사를 한 번씩 다 내질러 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지켜봤다.
‘맞겠지?’
지후를 통해 확인까지 했으니 맞을 것이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특이한 레지던트일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는 발을 옮겼다. 아무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짐 가방을 든 채로 거실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예요.”
그의 부름에 그녀가 홱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를 듣긴 들었나 보다. ‘아!’ 그녀의 입에서 짧은 탄사가 튀어나왔다.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었나 보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여전히 느리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눈도 그대로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그는 열린 방문을 두들겨 그녀의 주의를 일깨웠다.
“알았어요! 거참, 성격 급하시네.”
되레 큰소리를 치며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와 이거 안방 아녜요? 무슨 손님방이 이렇게 넓어! 대궐이네, 대궐. 나 여기 세 좀 들면 안 될까요?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고, 방까지 넓어. 꿀이다, 꿀…….”
그녀의 입은 잠시도 쉴 생각이 없나 보다. 윤성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어머! 욕실도 있어, 웬일이야! 손님방에 욕실이라니. 여기 혹시 펜션이에요? 아님 펜션이었던 데를 개조한 건가?”
안쪽에서 흘러나온 외침에 윤성은 움찔하며 멈췄다가 다시금 빠르게 발을 놀렸다. 지금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재로 들어선 그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 잘 모시고 들어갔냐?
전화기 저쪽에서는 여유로운 지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성은 다짜고짜 묻기부터 했다.
“말도 없이 보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 미리 얘기했잖아. 앰뷸런스 보낸다고.
되레 윽박지르는 시늉을 하는 지후에게 윤성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 여자는 앰뷸런스가 아니잖아.”
바늘구멍만 한 스피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뭐, 그럼 진짜 앰뷸런스에 덩치 이만한 남자 서넛 보내서 끌고 나올 줄 알았어? 그런 걸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네.
친구의 농담도 윤성에겐 심드렁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친구의 너스레를 참아 넘긴 윤성은 궁금했던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저 여자 의사 맞긴 맞아?”
― 어, 유능한, 촉망받는.
지후는 자신 있는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윤성은 콧방귀로 응수했다.
“대체 어딜 봐서…….”
윤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후는 으름장을 놨다.
“너 다인이 우습게 보지 마, 그래 봬도 세종대학병원 상위 1%야.”
병원장 아버지를 둔 배경까지 포함한다면 1%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지후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합리화를 했다. 그렇다고 실력이 영 바닥인 것은 아니다.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제법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니 1%까진 아니더라도 5% 안에는 들 것이다.
전화기 저편의 콧방귀 소리를 무시하며 지후는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아까 성민 형하고 통화했는데 OST 하기로 했다며?”
최대한 가벼운 투를 꾸며 내 물었지만, 저쪽에선 묵묵부답이다. 5초, 10초, 속으로 셈을 하던 지후는 귀에 붙였던 전화기를 떼어 내 상태를 확인했다. 통화가 끊긴 것은 아니다. 다시 전화기를 귀에 대려는 순간, 깊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한숨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지후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대답, 아주 내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이제 그만하면 됐어. 1년이야, 1년. 요즘 강산은 1년 만에도 바뀐다더라?”
― 11개월.
고집스럽게 셈을 바로잡아 주는 친구에게 지후는 입을 삐죽이며 응수했다.
“따지기는……. 그래, 11개월. 1년 넘겨 몇 년씩 거기서 썩을 생각 아니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봐. 주변 사람 전부 이렇게 목을 매고 나오라고 할 때는, 못 이기는 척 나와 주는 게 예의야.”
길고도 진지한 말을 끝낸 지후는 친구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 이번에도 10초 이상은 걸릴 줄 알았던 대꾸가, 예상외로 빨리 흘러나왔다.
― 쉬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끊겨 버린 전화를, 지후는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쩝’ 입맛을 다시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런 식으로 전화를 끊은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은 조금 떨떠름하다. 한사코 끌어내려는 주변의 노력이 친구에게는 되레 고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후는 얼른 도리질을 쳤다.
‘참 귀도 얇다.’
친구의 깊은 한숨 소리 몇 번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팔랑 귀도 이런 팔랑 귀가 있을까 싶다.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전화가 울리기 전 집중하고 있던 일로 되돌아갔다. 모처럼 밤샘 촬영이 없는 날, 한 번에 몰아서 모니터하지 않으면 좀체 기회가 없으니 시작한 김에 끝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TV 화면 속 자신의 모습에 흥미가 똑 떨어져 버렸다.
TV를 꺼 버린 그는 곧장 침대로 향했다.
바람막이 점퍼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던 다인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환한 라이트 불빛과 함께 나타난 차를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지른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한 발자국도 되지 않을 거리를 남겨 두고 ‘끽!’ 소리를 내며 멈춰 선 차의 보닛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커질 대로 커진 눈으로 보닛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다인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아 버렸다.
다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혼이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다시 일어서지도 못했다. 턱 주변을 비롯해 온몸에 돋았을 소름은 만져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였다.
덩치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던 차에 부딪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꿀꺽 삼키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학생. 괜찮아?”
벙거지를 덮어쓴 남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과 모자 때문에 남자의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선 마을도 멀어.’
하필 이런 순간에 택시 기사의 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덜컥 겁이 난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봐요.”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던 그가 몸을 한층 더 숙이며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거무튀튀한 야상점퍼와 확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가 더욱 소름 돋게 했다.
이제 차에 치일 뻔했다는 충격은 가시고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떡해야 하지?’
속엣말을 읊조리던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부들부들 떨리기는 하지만 사지가 부러진 것은 아니니 기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저 수상한 사람에게서 도망가는 것이 이 순간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웅크린 채로 몸을 돌려 슬금슬금 기기 시작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윤성은 어이없는 실소를 내뿜었다.
“아니, 괜찮으냐니까 왜 도망을 가요?”
그의 부름에 일순 멈칫한 다인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별장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뛰어간다면 대문까지 1분 정도 걸리겠다. 1분 안에 저 남자에게 잡히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렇다는 얘기다.
다인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아까 택시를 떠나보낸 자리는 더 멀다. 다인은 울상을 지었다.
‘밤중에 혼자 정류장에 서 있느니보다는 택시가 나을 거야.’
택시 기사의 충고를 떠올린 그녀의 표정이 별안간 확 펴졌다. 얼결에 받아 챙긴 명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 아프면 병원이라도 가야죠. 보험사 부를 테니까 도망가지 말아요.”
남자는 계속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다인은 명함을 어디 넣었는지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선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골치 아픈 일 생기는 건 딱 질색이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기척도 없이 다가온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 대는 통에 소스라치게 놀란 윤성은 얼른 손을 뗐다. 마치 치한의 습격이라도 받은 듯 몸서리까지 쳐 가며 비명을 지르는 여자가, 그에게는 더 괴기스럽게 보였다.
‘설마?’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여잔가 싶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한층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보호자를 찾아 인계해야 마무리가 될 테니 말이다.
“괜찮아요?”
그는 손을 대지 않는 대신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뭐지?’
어쩐지 걱정이 담긴 것 같은 목소리가, 그녀는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보험사’라는 얘기도 했었다. 지레 겁을 먹고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오해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몇 분 만에 일어난 모든 일이 충격의 연속이었으니, 잠시 이성이 마비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다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환하게 켜진 라이트 속으로 들이민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헉!’ 세찬 들숨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엄마야! 가가가, 가가가가, 강…….”
“윤성.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서울에서 온 겁니까?”
그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싸늘해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미처 끝맺지 못한 이름을 대신 말하며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저, 저, 저기, 그러니까, 어…… 서울에서 온 건 맞아요, 맞네요.”
더듬거리는 그녀의 대답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는 제 할 말만 쏟아 냈다.
“다친 데 없죠? 내일이라도 아픈 데 있으면 회사로 연락하세요. 알아서 해 줄 거예요. 그리고 왔던 길로 쭉 다시 나가면 버스 정류장 있어요. 10시까지 버스 다니니까 서둘러 가면 탈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성큼성큼, 화난 듯한 그의 걸음걸이를 지켜보고 있던 다인은 문득 자신의 목적을 깨닫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형부가!”
일단 그를 불러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호칭을 잘못 말한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톡 때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임지후 씨가 보내서 온 거예요.”
차에 올라타려던 그는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전 국민이 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절친한 친구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여자가, 이젠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그는 차 안으로 팔을 뻗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금 확인할까요? 아니면 그냥 조용히 돌아갈래요?”
다인은 입을 딱 벌렸다.
‘기막혀!’
지금 저 남자의 행동은 마치 귀찮은 사생팬에게나 할 법한 행동이다.
‘혹시 그냥 돌아가라고 하면 나를 팔아, 나한테 바로 전화해.’
교수와의 면담 직후, 걱정과 당부를 쉴 새 없이 반복하는 민영 옆에 묵묵히 서 있던 지후가 한 말이었다. 지후의 선견지명에 다인은 수십 번 감사를 표하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지후의 번호를 찾아 당당히 그에게 보여 주며 호기롭게 선언했다.
“내가 하죠.”
다행히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지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 다인아.
“오빠, 청평 도착했는데요. 근데 길에서 강윤성 씨를 만났는데…….”
― 바꿔.
지후는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듯 그녀의 말을 자르며 짧게 대꾸했다. 그녀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윤성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윤성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전화기를 받아 귀에 댔다.
“여보세요?”
― 나 원수 같은 강윤성 친구 임지후인데, 다인이 김영지 교수 제자야. 그리고 곧 내 처제 될 아가씨기도 하고. 순순히 모시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홀대했다간 두 번 다시 나 못 볼 줄 알아! 끊어!
윤성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 버렸다.
통화가 종료되었음을 알려 주는 메시지만 깜빡거리는 전화기를 노려보던 윤성은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콧방귀를 뀌었다.
‘앰뷸런스군.’
며칠 전 선포했던 대로, 지후는 구급차를 보낸 것이다. 물론 차가 아닌 사람이지만.
“일단 타요. 그냥 보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으니까…….”
조금은 누그러진 그의 말투를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냉큼 차로 달려가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는 그를 힐끔거리며 그녀는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는 두 손을 힘껏 마주 잡았다. 떨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긴 싫어서다.
“요즘 대학병원은 환자 인터뷰에 본과생도 보내나?”
그의 삐딱한 말투에 그녀는 또 한 번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신경질을 내리눌러야만 했다.
‘침착하자, 이 사람은 환자야.’
환자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그녀의 신경을 박박 긁어 대는 말만 골라 하는 환자일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생긋 웃는 얼굴과 상냥한 말투로 대답했다.
“저 학생 아니에요.”
“그럼 인턴인가?”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움찔하게 된다. 게다가 비꼬는 듯한 말투는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심리적 충격에 의한 행동 변화.’
전공서의 한 구절을 기억해 낸 다인은 자신의 한심함을 꾸짖으며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공의예요. 레지던트라고 들어 보셨죠? 올해 2년 차고, 스물여덟이에요. 그리고 전 하대해도 된다고 동의한 적 없어요.”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는 그의 표정은 무서우리만치 무미건조했다. 짜증도, 혐오도, 미안함도 없는 마치 밀랍 인형과도 같은 그의 표정을 마주하고 있으면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심리 질환이 아니라 싸가지 결핍증이잖아.’
속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차는 벌써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흠, 무혈입성이로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을 들어 버린 그는 비웃음에 가까운 콧방귀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마당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기다리는 일에 재주가 없는 그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손짓을 했다.
“아, 미안요.”
짤막한 사과를 중얼대며 들어서는 그녀의 뒤통수를, 윤성은 한껏 찌푸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가 아는 정신과 의사들은 ‘미안요.’ 따위의 가벼운 언행은 하지 않는 부류다. 물론 그가 아는 정신과 의사는 어머니의 친구인 영지밖에 없지만…….
그녀는 별장 안을 둘러보면서도 여전히 시끄러웠다. 사람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감탄사를 한 번씩 다 내질러 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지켜봤다.
‘맞겠지?’
지후를 통해 확인까지 했으니 맞을 것이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특이한 레지던트일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는 발을 옮겼다. 아무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짐 가방을 든 채로 거실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예요.”
그의 부름에 그녀가 홱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를 듣긴 들었나 보다. ‘아!’ 그녀의 입에서 짧은 탄사가 튀어나왔다.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었나 보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여전히 느리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눈도 그대로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그는 열린 방문을 두들겨 그녀의 주의를 일깨웠다.
“알았어요! 거참, 성격 급하시네.”
되레 큰소리를 치며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와 이거 안방 아녜요? 무슨 손님방이 이렇게 넓어! 대궐이네, 대궐. 나 여기 세 좀 들면 안 될까요?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고, 방까지 넓어. 꿀이다, 꿀…….”
그녀의 입은 잠시도 쉴 생각이 없나 보다. 윤성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어머! 욕실도 있어, 웬일이야! 손님방에 욕실이라니. 여기 혹시 펜션이에요? 아님 펜션이었던 데를 개조한 건가?”
안쪽에서 흘러나온 외침에 윤성은 움찔하며 멈췄다가 다시금 빠르게 발을 놀렸다. 지금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재로 들어선 그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 잘 모시고 들어갔냐?
전화기 저쪽에서는 여유로운 지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성은 다짜고짜 묻기부터 했다.
“말도 없이 보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 미리 얘기했잖아. 앰뷸런스 보낸다고.
되레 윽박지르는 시늉을 하는 지후에게 윤성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 여자는 앰뷸런스가 아니잖아.”
바늘구멍만 한 스피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뭐, 그럼 진짜 앰뷸런스에 덩치 이만한 남자 서넛 보내서 끌고 나올 줄 알았어? 그런 걸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네.
친구의 농담도 윤성에겐 심드렁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친구의 너스레를 참아 넘긴 윤성은 궁금했던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저 여자 의사 맞긴 맞아?”
― 어, 유능한, 촉망받는.
지후는 자신 있는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윤성은 콧방귀로 응수했다.
“대체 어딜 봐서…….”
윤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후는 으름장을 놨다.
“너 다인이 우습게 보지 마, 그래 봬도 세종대학병원 상위 1%야.”
병원장 아버지를 둔 배경까지 포함한다면 1%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지후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합리화를 했다. 그렇다고 실력이 영 바닥인 것은 아니다.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제법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니 1%까진 아니더라도 5% 안에는 들 것이다.
전화기 저편의 콧방귀 소리를 무시하며 지후는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아까 성민 형하고 통화했는데 OST 하기로 했다며?”
최대한 가벼운 투를 꾸며 내 물었지만, 저쪽에선 묵묵부답이다. 5초, 10초, 속으로 셈을 하던 지후는 귀에 붙였던 전화기를 떼어 내 상태를 확인했다. 통화가 끊긴 것은 아니다. 다시 전화기를 귀에 대려는 순간, 깊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한숨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지후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대답, 아주 내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이제 그만하면 됐어. 1년이야, 1년. 요즘 강산은 1년 만에도 바뀐다더라?”
― 11개월.
고집스럽게 셈을 바로잡아 주는 친구에게 지후는 입을 삐죽이며 응수했다.
“따지기는……. 그래, 11개월. 1년 넘겨 몇 년씩 거기서 썩을 생각 아니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봐. 주변 사람 전부 이렇게 목을 매고 나오라고 할 때는, 못 이기는 척 나와 주는 게 예의야.”
길고도 진지한 말을 끝낸 지후는 친구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 이번에도 10초 이상은 걸릴 줄 알았던 대꾸가, 예상외로 빨리 흘러나왔다.
― 쉬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끊겨 버린 전화를, 지후는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쩝’ 입맛을 다시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런 식으로 전화를 끊은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은 조금 떨떠름하다. 한사코 끌어내려는 주변의 노력이 친구에게는 되레 고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후는 얼른 도리질을 쳤다.
‘참 귀도 얇다.’
친구의 깊은 한숨 소리 몇 번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팔랑 귀도 이런 팔랑 귀가 있을까 싶다.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전화가 울리기 전 집중하고 있던 일로 되돌아갔다. 모처럼 밤샘 촬영이 없는 날, 한 번에 몰아서 모니터하지 않으면 좀체 기회가 없으니 시작한 김에 끝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TV 화면 속 자신의 모습에 흥미가 똑 떨어져 버렸다.
TV를 꺼 버린 그는 곧장 침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