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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남자
2화
1. 마른땅에 핀 꽃 한 송이
성학이 미국에서 오랜만에 전화했을 때 진우는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 진우야. 네게 부탁하고 싶은 아이가 있어.
순간 기쁨으로 가득했던 진우의 표정이 떪은 감을 씹은 듯 일순간에 구겨졌다.
‘부탁? 형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대번에 까칠해지는 진우의 어조에 성학은 수화기 저편에서 말이 없었다.
그의 영감 같은 태도에 진우는 한숨을 쉬며 읊조렸다.
‘좋아. 일단 이야기부터 들어 볼게.’
성학은 조용한 목소리로 아이의 프로필을 읊었다.
― 나이는 18세. 한솔고등학교에 재학 중이고 이름은 서우재야.
성학의 말에 진우는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시큰한 듯 눈을 감고 콧등을 한참 동안 잡고 있다가 안경을 키보드 위에 내려놓았다.
‘남자애야?’
하지만 성학은 예상과 달리 여자애라고 대답했다. 여자? 왜 하필 여자애야? 피곤하게.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처럼 시끄럽고 예민한 존재가 또 있던가? 진우가 한숨을 쉬자 성학은 진우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형이랑 어떤 관계인데? 설마 숨겨 놓은 자식,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진우의 말에 성학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더니 한마디 했다.
― 설마, 만약에 내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면 너한테 맡겼을까. 네 성격이 유별난 건 세상이 다 아는데.
성학의 농담에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성학이 형이 그럴 리가 없지.
‘뭘 도와주면 되는 건데.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돈이야? 얼마나 필요한데?’
― 아니,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지금 과외 선생을 찾고 있대.
갑작스러운 성학의 말에 진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도대체 이 형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과외 선생이라니. 내가 요즘 뭐 때문에 정신 빼놓고 사는지도 잘 아는 사람이?
‘설마 지금 나보고 그 아이 과외 선생을 하라는 뜻은 아니겠지?’
― 맞아. 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어.
성학의 말에 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작업실을 어지럽게 걸어 다녔다.
‘형. 지금 내 사정 뻔히 알면서 그런 말을 해? 본격적으로 일 시작하고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다고. 프로듀싱 맡으라는 건도 거절하고 있는 판에.’
― 너 군대 가기 전까지 대치동에서 꽤 이름 날리던 선생이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는데……. 꼬맹이 하나 맡는 건 일도 아니잖아. 워낙 조용해서 다른 여자애와 달리 걸리적거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네가 좀 지켜봐 줘.
뭐? 지켜봐 줘? 내가 무슨 보모라도 되나?
‘정말 제대로 설명 안 할 거야?’
진우의 말에 성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진우야. 어쩌면 이 일은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애와 넌 데칼코마니 같거든.
이상한 소리를 하는 성학의 말에 진우는 어지럽게 걸어 다니던 걸음을 멈추고 거실 중간에 우뚝 섰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딴 계집애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 아주 많이 닮았어. 너희 둘.
전원이 꺼진 텔레비전 모니터에 인상을 잔뜩 구긴 진우의 표정이 드러났다. 이성학만 아니었다면 이런 제안 따위 간단하게 거절하는 건데.
― 대신 아이 부모에게는 네가 부르는 대로 과외비를 지급하라고 말씀드렸어. 너 유학 준비 하는 거 다 알고 있어.
성학의 말에 진우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하여간 이 형은 사람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그래도 과외비를 깎으면 깎았지 저렇게 말할 형이 아닌데.
‘뭐야, 형. 나한테 그 아이를 맡기고 싶다면 이해가 가는 수준으로 설명해 줄 수는 없겠어? 형은 뒤에서 남모르게 계략 꾸미는 타입 아니잖아.’
진우의 조용한 물음에 성학이 수화기 저편에서 빙그레 웃는 것이 느껴졌다.
― 그래. 하지만 때론 말보다 경험이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거절하지 말고 수락해 주라.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우재는 마음에 남아.
이성학의 마음에 남은 아이라. 성학의 말에 진우에게도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이 형이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기에.
― 해 볼 거야?
성학의 날카로운 질문에 갑자기 진우가 버럭대고 소리를 질렀다.
‘벌써 판 다 짜 놓고 뭘 물어?’‘
그러자 성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아니, 혹시라도 나중에 날 원망이라도 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갑자기 머리가 묵직해지는 것이 뭔가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어떤 꼬맹이인지 만나는 보겠는데, 결과는 장담하지 마. 싹수가 노랗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잘라 버릴 테니까.’
진우의 퉁명스러운 말에 성학은 고맙다는 말 대신 한술 더 떴다.
― 그래, 네가 한번 잘 다듬어 봐. 나도 기대하고 있을게.
잘 다듬어 봐라? 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어떤 종자기에 다듬기까지 해야 해?’
― 진우야. 만약 네가 그 마른땅에 물만 뿌릴 수 있다면 너에게 진짜 귀한 기회가 찾아올지도 몰라.
성학은 이상한 주문을 남긴 채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지금 그 문제의 종자가 풍선껌을 불면서 불량스러운 자세로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지금 네가 도망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라, 뭐 이거냐?”
진우의 머리 뒤로 찌릿하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계속 과외를 해 주는 걸 너무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 같다. 첫날 어머니 사건을 지켜본 책임도 있고 해서 좀 불쌍하게 생각하려고 했더니만 도저히 안 되겠네.
“왜 안 갔어요? 더 못 볼 꼴 보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했을 텐데.”
풍선껌을 불며 삐딱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진우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입 가까이 손을 가져다 댔다.
“뱉어.”
싸늘한 진우의 말에 우재는 빙긋 웃으면서 그의 손바닥에 퉤하고 껌을 뱉어 냈다. 그녀를 싸늘하게 째려보며 그는 자신이 뽑아 온 문제지를 책상 위에 툭 하고 던졌다.
“풀어. 오늘 테스트해 보겠다고 했잖아.”
진우의 말에 우재는 못마땅한 듯 그를 한참 째려보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문제지를 쥐고 연필로 사각거리며 문제를 풀어 나갔다. 거침없이 문제를 푸는 꼴이 그래도 공부에 있어 아주 젬병은 아닌 듯 보였다.
그녀가 영어문제지를 다 풀어내자 그는 인상을 쓰면서 그것을 잡아챘다. 20문제 중 2개를 틀렸다. 문법에 약간 실수가 있었으나 단어와 독해는 수준급이었다.
국어는 20문제 중 1개. 이것 봐라? 아주 형편없는 머리는 아닌 모양인데?
하지만 문제는 수학이었다.
영어와 국어는 거침없이 풀어 가던 그녀가 수학 문제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우는 ‘됐어!’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드디어 포착한 그녀의 약점에 그는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넌 문과 머리구나?”
진우의 말에 인상을 쓰던 그녀는 그의 앞에서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끙끙거리면서도 계속 문제를 풀기 위해 애썼다.
골이 난 표정으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진우는 설핏 웃음이 나왔다. 안 되면 바로 포기할 줄 알았더니 예상 밖의 고집스러움이 있었다. 뭔가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 나이 특유의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을 드러냈다. 이런 얼굴을 가지고서 어울리지도 않는 어른 흉내를 내기는.
진우는 입술을 틀어 올려 웃음을 짓다가 그녀가 골몰하며 풀고 있던 문제지를 뺏어 빨간 색연필로 쫙쫙 줄을 그어 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펄쩍 뛰는 그녀를 바라보며 진우가 빙긋 웃었다.
“주어진 20분 끝났어. 20점.”
갑자기 수학문제지를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더니 진우는 그녀의 책상 위로 문제지를 던졌다.
“지금 네가 이 문제지 말고 다른 할 말이 있어? 네 엄마는 열심히 채찍질해서 좋은 대학 보낼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시던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종잇장 구기듯 구겨져 버렸다.
“난 대학 안 가요.”
뜻밖의 말에 진우는 팔짱을 끼고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과외도 필요 없어요.”
또 시작이네. 그 레퍼토리. 이제 좀 지겹지 않나?
“그러니까 그만둬요. 이 집.”
아! 성학이 형.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사고뭉치 계집애랑 실랑이할 동안 벌써 곡 작업을 해도 몇 곡을 했겠는데…….
“너 뭐냐?”
갑자기 치밀어 오른 성질에 진우가 삐딱하게 굴자 우재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못 하겠다 하라니까? 엄마한테 그 말도 못 해? 당신 가난해? 고학생이야? 옷차림을 보면 그렇게 궁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당신? 이게 점점. 진우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졌지만 우재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그가 던진 수학문제지를 밀어 냈다.
“사람 사는 모습이 꼭 성적순인 건 아니잖아요.”
“사람 구실을 못하면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지. 이 사회는 무한 경쟁 시대니까. 우리 사회가 서울대 들어간 아이와 대학도 못 가 빌빌대는 아이를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지는 않잖아?”
비아냥대는 그의 말에 우재는 반박했다.
“그럼 다른 걸 잘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요즘 서울대 들어가는 애들도 모든 걸 다 잘해! 유명 연예인들 못 봤어? 서울대 출신도 많잖아? 그러는 넌 뭘 그렇게 잘하는데? 음악? 미술? 체육?”
그의 말에 우재는 어쩜 생각이 그렇게 단순하냐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에게서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생각하는 것 하고는. 꼭 자기처럼 세상을 본다니까?”
아! 성학이 형! 진우의 주먹에 꽉 하고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관찰을 잘해요.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거든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연애 상담 같은 것도 심심치 않게 해 줘요. 그리고 제법 글도 잘 쓰고요. 그런 걸 할 때는 세상의 온갖 시름이 싹 하고 사라지죠.”
해맑은 표정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그녀를 보며 진우는 허를 찔린 듯 순간 멍해졌다. 도대체 뭐야? 얘는? 외계인인가?
진우의 멍한 표정을 본 우재가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해맑아서 진우는 잠시 잠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응시했다.
“몇 점 이상이면 대학 가고, 몇 점 이하면 못 가니까 얼마까지 성적을 올려야 하는 그런 이야기 말고,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 하면서 살면 안 되는 거예요? 대학에 가는 것에 씨름하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하고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괴감 느끼고. 그러고 나서는 종국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쉽게 주저앉고.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좋은 인생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우재의 말에 진우의 입술이 심술궂게 뒤틀어졌다.
“아직은 배가 덜 고프구나.”
뭔가 삐딱한 진우의 말에 우재가 처음으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애써 감춰져 있던 날카로운 들개의 눈빛이었다. 무서워. 그의 눈빛이 우재를 향해 번뜩였다.
우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우재의 맑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성학이 형은 이 아이가 가진 맑은 기운을 지켜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마냥 백옥 같기만 한 것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 진우는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돈 없어서 처절하게 울어 본 적 없었겠지. 겨우겨우 지위와 실력을 갖췄다 해도 미천한 출신 때문에 내쳐진 적도 없을 테고. 그 꼬리표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비참하지 않은 척 안간힘을 써 본 적도 없을 거야. 하지만 너와는 달리 공부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사람들도 있어. 공부까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못 받으니까. 바로 효용가치가 없어져서 비참하게 버려지지. 그래서 살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어. 너처럼 그렇게 태평한 인생이 아니라.”
진우의 살벌한 말투에 우재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진우의 반성도 잠시 우재의 질문이 둘 사이의 침묵을 뚫고 날아왔다.
“댁도 그랬어요?”
댁? 갑자기 우재의 이마로 인정사정없는 진우의 꿀밤이 날아들었다.
“아!”
우재가 두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감싸자 진우가 살벌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게 어디서 자꾸 기어올라? 댁? 당신? 말 똑바로 못 해?”
그의 난데없는 고함에 우재는 그를 째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제부터는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 내가 맡기로 한 이상 너에게 선택권은 없어!”
단호한 진우의 말에 우재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우재가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는 스산하게 웃으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네 과외비가 얼마냐고 물었어? 난 달에 30만 원짜리 선생이 아니라, 회당 30만 원짜리 선생이야. 네 부모 등골 빼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있는 시간만큼은 돈값을 해.”
생각보다 꽤 많은 액수에 충격을 받은 우재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진우는 그제야 조금 자존심이 회복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 신조가 바로 고객 만족이거든? 나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네 부모지 네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학생이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해. 그러니까 너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 그만하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우재의 표정이 있는 힘껏 일그러지자 진우의 얼굴이 그제야 좀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진우와 전쟁 같은 수업을 한바탕 치른 후 그로기 상태가 된 우재는 거실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얼마 안 있어 현관문이 열리더니 엄마와 박 기사가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중증의 조울증을 겪고 있는 엄마는 지난번 자해 소동 이후 다시 조증이 심해진 것인지 또다시 무의미한 쇼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기 놔 줘요. 박 기사. 종일 쫓아다니느라 고생 많았어요.”
박 기사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뒤돌아 나가자 우재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엄마. 나 그 선생한테 과외 안 받으면 안 돼?”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우재의 말에 엄마는 갑자기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다.
“어머! 너 오늘 수업 있는 날이었지? 어때? 뭔가 싹수는 있어 보여?”
엄마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우재가 몸을 돌렸다가 갑자기 공중에 하이킥을 차며 벌떡 일어났다.
“엄마. 제발 부탁인데 사람 교체 하면 안 될까? 그 사람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정리하자. 제발 부탁이야. 이상한 데 돈 쓰지 말고 차라리 날 줘.”
우재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까지 흘러나오자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실력 좋은 선생이라더니 헛소문이 아닌 모양이네?”
엄마의 혼잣말에 갑자기 우재가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 그 사람은 정말 아니라니까! 성격도 까칠하고 말투도 험악한 게 어쨌든 느낌이 영 안 좋아!”
역시나 엄마는 이번에도 자식인 우재의 마음을 살피기보다 선생의 스펙과 배경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우재의 신경질에 엄마가 그 말이 사실인지 가늠해 보려는 듯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딴 성질이 뭐가 중요해.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되지.”
우재는 엄마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몸과 마음이 약해진 엄마가 여전히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딱 두 가지 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의 아빠와 자식 교육에 대한 일이다. 엄마는 그 둘을 위해서라면 가끔 영혼이라도 팔 것처럼 악다구니를 떨었다.
2화
1. 마른땅에 핀 꽃 한 송이
성학이 미국에서 오랜만에 전화했을 때 진우는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 진우야. 네게 부탁하고 싶은 아이가 있어.
순간 기쁨으로 가득했던 진우의 표정이 떪은 감을 씹은 듯 일순간에 구겨졌다.
‘부탁? 형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대번에 까칠해지는 진우의 어조에 성학은 수화기 저편에서 말이 없었다.
그의 영감 같은 태도에 진우는 한숨을 쉬며 읊조렸다.
‘좋아. 일단 이야기부터 들어 볼게.’
성학은 조용한 목소리로 아이의 프로필을 읊었다.
― 나이는 18세. 한솔고등학교에 재학 중이고 이름은 서우재야.
성학의 말에 진우는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시큰한 듯 눈을 감고 콧등을 한참 동안 잡고 있다가 안경을 키보드 위에 내려놓았다.
‘남자애야?’
하지만 성학은 예상과 달리 여자애라고 대답했다. 여자? 왜 하필 여자애야? 피곤하게.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처럼 시끄럽고 예민한 존재가 또 있던가? 진우가 한숨을 쉬자 성학은 진우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형이랑 어떤 관계인데? 설마 숨겨 놓은 자식,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진우의 말에 성학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더니 한마디 했다.
― 설마, 만약에 내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면 너한테 맡겼을까. 네 성격이 유별난 건 세상이 다 아는데.
성학의 농담에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성학이 형이 그럴 리가 없지.
‘뭘 도와주면 되는 건데.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돈이야? 얼마나 필요한데?’
― 아니,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지금 과외 선생을 찾고 있대.
갑작스러운 성학의 말에 진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도대체 이 형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과외 선생이라니. 내가 요즘 뭐 때문에 정신 빼놓고 사는지도 잘 아는 사람이?
‘설마 지금 나보고 그 아이 과외 선생을 하라는 뜻은 아니겠지?’
― 맞아. 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어.
성학의 말에 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작업실을 어지럽게 걸어 다녔다.
‘형. 지금 내 사정 뻔히 알면서 그런 말을 해? 본격적으로 일 시작하고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다고. 프로듀싱 맡으라는 건도 거절하고 있는 판에.’
― 너 군대 가기 전까지 대치동에서 꽤 이름 날리던 선생이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는데……. 꼬맹이 하나 맡는 건 일도 아니잖아. 워낙 조용해서 다른 여자애와 달리 걸리적거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네가 좀 지켜봐 줘.
뭐? 지켜봐 줘? 내가 무슨 보모라도 되나?
‘정말 제대로 설명 안 할 거야?’
진우의 말에 성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진우야. 어쩌면 이 일은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애와 넌 데칼코마니 같거든.
이상한 소리를 하는 성학의 말에 진우는 어지럽게 걸어 다니던 걸음을 멈추고 거실 중간에 우뚝 섰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딴 계집애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 아주 많이 닮았어. 너희 둘.
전원이 꺼진 텔레비전 모니터에 인상을 잔뜩 구긴 진우의 표정이 드러났다. 이성학만 아니었다면 이런 제안 따위 간단하게 거절하는 건데.
― 대신 아이 부모에게는 네가 부르는 대로 과외비를 지급하라고 말씀드렸어. 너 유학 준비 하는 거 다 알고 있어.
성학의 말에 진우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하여간 이 형은 사람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그래도 과외비를 깎으면 깎았지 저렇게 말할 형이 아닌데.
‘뭐야, 형. 나한테 그 아이를 맡기고 싶다면 이해가 가는 수준으로 설명해 줄 수는 없겠어? 형은 뒤에서 남모르게 계략 꾸미는 타입 아니잖아.’
진우의 조용한 물음에 성학이 수화기 저편에서 빙그레 웃는 것이 느껴졌다.
― 그래. 하지만 때론 말보다 경험이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거절하지 말고 수락해 주라.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우재는 마음에 남아.
이성학의 마음에 남은 아이라. 성학의 말에 진우에게도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이 형이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기에.
― 해 볼 거야?
성학의 날카로운 질문에 갑자기 진우가 버럭대고 소리를 질렀다.
‘벌써 판 다 짜 놓고 뭘 물어?’‘
그러자 성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아니, 혹시라도 나중에 날 원망이라도 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갑자기 머리가 묵직해지는 것이 뭔가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어떤 꼬맹이인지 만나는 보겠는데, 결과는 장담하지 마. 싹수가 노랗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잘라 버릴 테니까.’
진우의 퉁명스러운 말에 성학은 고맙다는 말 대신 한술 더 떴다.
― 그래, 네가 한번 잘 다듬어 봐. 나도 기대하고 있을게.
잘 다듬어 봐라? 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어떤 종자기에 다듬기까지 해야 해?’
― 진우야. 만약 네가 그 마른땅에 물만 뿌릴 수 있다면 너에게 진짜 귀한 기회가 찾아올지도 몰라.
성학은 이상한 주문을 남긴 채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지금 그 문제의 종자가 풍선껌을 불면서 불량스러운 자세로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지금 네가 도망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라, 뭐 이거냐?”
진우의 머리 뒤로 찌릿하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계속 과외를 해 주는 걸 너무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 같다. 첫날 어머니 사건을 지켜본 책임도 있고 해서 좀 불쌍하게 생각하려고 했더니만 도저히 안 되겠네.
“왜 안 갔어요? 더 못 볼 꼴 보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했을 텐데.”
풍선껌을 불며 삐딱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진우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입 가까이 손을 가져다 댔다.
“뱉어.”
싸늘한 진우의 말에 우재는 빙긋 웃으면서 그의 손바닥에 퉤하고 껌을 뱉어 냈다. 그녀를 싸늘하게 째려보며 그는 자신이 뽑아 온 문제지를 책상 위에 툭 하고 던졌다.
“풀어. 오늘 테스트해 보겠다고 했잖아.”
진우의 말에 우재는 못마땅한 듯 그를 한참 째려보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문제지를 쥐고 연필로 사각거리며 문제를 풀어 나갔다. 거침없이 문제를 푸는 꼴이 그래도 공부에 있어 아주 젬병은 아닌 듯 보였다.
그녀가 영어문제지를 다 풀어내자 그는 인상을 쓰면서 그것을 잡아챘다. 20문제 중 2개를 틀렸다. 문법에 약간 실수가 있었으나 단어와 독해는 수준급이었다.
국어는 20문제 중 1개. 이것 봐라? 아주 형편없는 머리는 아닌 모양인데?
하지만 문제는 수학이었다.
영어와 국어는 거침없이 풀어 가던 그녀가 수학 문제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우는 ‘됐어!’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드디어 포착한 그녀의 약점에 그는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넌 문과 머리구나?”
진우의 말에 인상을 쓰던 그녀는 그의 앞에서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끙끙거리면서도 계속 문제를 풀기 위해 애썼다.
골이 난 표정으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진우는 설핏 웃음이 나왔다. 안 되면 바로 포기할 줄 알았더니 예상 밖의 고집스러움이 있었다. 뭔가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 나이 특유의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을 드러냈다. 이런 얼굴을 가지고서 어울리지도 않는 어른 흉내를 내기는.
진우는 입술을 틀어 올려 웃음을 짓다가 그녀가 골몰하며 풀고 있던 문제지를 뺏어 빨간 색연필로 쫙쫙 줄을 그어 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펄쩍 뛰는 그녀를 바라보며 진우가 빙긋 웃었다.
“주어진 20분 끝났어. 20점.”
갑자기 수학문제지를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더니 진우는 그녀의 책상 위로 문제지를 던졌다.
“지금 네가 이 문제지 말고 다른 할 말이 있어? 네 엄마는 열심히 채찍질해서 좋은 대학 보낼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시던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종잇장 구기듯 구겨져 버렸다.
“난 대학 안 가요.”
뜻밖의 말에 진우는 팔짱을 끼고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과외도 필요 없어요.”
또 시작이네. 그 레퍼토리. 이제 좀 지겹지 않나?
“그러니까 그만둬요. 이 집.”
아! 성학이 형.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사고뭉치 계집애랑 실랑이할 동안 벌써 곡 작업을 해도 몇 곡을 했겠는데…….
“너 뭐냐?”
갑자기 치밀어 오른 성질에 진우가 삐딱하게 굴자 우재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못 하겠다 하라니까? 엄마한테 그 말도 못 해? 당신 가난해? 고학생이야? 옷차림을 보면 그렇게 궁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당신? 이게 점점. 진우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졌지만 우재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그가 던진 수학문제지를 밀어 냈다.
“사람 사는 모습이 꼭 성적순인 건 아니잖아요.”
“사람 구실을 못하면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지. 이 사회는 무한 경쟁 시대니까. 우리 사회가 서울대 들어간 아이와 대학도 못 가 빌빌대는 아이를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지는 않잖아?”
비아냥대는 그의 말에 우재는 반박했다.
“그럼 다른 걸 잘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요즘 서울대 들어가는 애들도 모든 걸 다 잘해! 유명 연예인들 못 봤어? 서울대 출신도 많잖아? 그러는 넌 뭘 그렇게 잘하는데? 음악? 미술? 체육?”
그의 말에 우재는 어쩜 생각이 그렇게 단순하냐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에게서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생각하는 것 하고는. 꼭 자기처럼 세상을 본다니까?”
아! 성학이 형! 진우의 주먹에 꽉 하고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관찰을 잘해요.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거든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연애 상담 같은 것도 심심치 않게 해 줘요. 그리고 제법 글도 잘 쓰고요. 그런 걸 할 때는 세상의 온갖 시름이 싹 하고 사라지죠.”
해맑은 표정으로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그녀를 보며 진우는 허를 찔린 듯 순간 멍해졌다. 도대체 뭐야? 얘는? 외계인인가?
진우의 멍한 표정을 본 우재가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해맑아서 진우는 잠시 잠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응시했다.
“몇 점 이상이면 대학 가고, 몇 점 이하면 못 가니까 얼마까지 성적을 올려야 하는 그런 이야기 말고,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 하면서 살면 안 되는 거예요? 대학에 가는 것에 씨름하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하고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괴감 느끼고. 그러고 나서는 종국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쉽게 주저앉고.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좋은 인생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우재의 말에 진우의 입술이 심술궂게 뒤틀어졌다.
“아직은 배가 덜 고프구나.”
뭔가 삐딱한 진우의 말에 우재가 처음으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애써 감춰져 있던 날카로운 들개의 눈빛이었다. 무서워. 그의 눈빛이 우재를 향해 번뜩였다.
우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우재의 맑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성학이 형은 이 아이가 가진 맑은 기운을 지켜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마냥 백옥 같기만 한 것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 진우는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돈 없어서 처절하게 울어 본 적 없었겠지. 겨우겨우 지위와 실력을 갖췄다 해도 미천한 출신 때문에 내쳐진 적도 없을 테고. 그 꼬리표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비참하지 않은 척 안간힘을 써 본 적도 없을 거야. 하지만 너와는 달리 공부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사람들도 있어. 공부까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못 받으니까. 바로 효용가치가 없어져서 비참하게 버려지지. 그래서 살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어. 너처럼 그렇게 태평한 인생이 아니라.”
진우의 살벌한 말투에 우재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진우의 반성도 잠시 우재의 질문이 둘 사이의 침묵을 뚫고 날아왔다.
“댁도 그랬어요?”
댁? 갑자기 우재의 이마로 인정사정없는 진우의 꿀밤이 날아들었다.
“아!”
우재가 두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감싸자 진우가 살벌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게 어디서 자꾸 기어올라? 댁? 당신? 말 똑바로 못 해?”
그의 난데없는 고함에 우재는 그를 째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제부터는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 내가 맡기로 한 이상 너에게 선택권은 없어!”
단호한 진우의 말에 우재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우재가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는 스산하게 웃으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네 과외비가 얼마냐고 물었어? 난 달에 30만 원짜리 선생이 아니라, 회당 30만 원짜리 선생이야. 네 부모 등골 빼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있는 시간만큼은 돈값을 해.”
생각보다 꽤 많은 액수에 충격을 받은 우재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진우는 그제야 조금 자존심이 회복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 신조가 바로 고객 만족이거든? 나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네 부모지 네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학생이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해. 그러니까 너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 그만하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우재의 표정이 있는 힘껏 일그러지자 진우의 얼굴이 그제야 좀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진우와 전쟁 같은 수업을 한바탕 치른 후 그로기 상태가 된 우재는 거실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얼마 안 있어 현관문이 열리더니 엄마와 박 기사가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중증의 조울증을 겪고 있는 엄마는 지난번 자해 소동 이후 다시 조증이 심해진 것인지 또다시 무의미한 쇼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기 놔 줘요. 박 기사. 종일 쫓아다니느라 고생 많았어요.”
박 기사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뒤돌아 나가자 우재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엄마. 나 그 선생한테 과외 안 받으면 안 돼?”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우재의 말에 엄마는 갑자기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다.
“어머! 너 오늘 수업 있는 날이었지? 어때? 뭔가 싹수는 있어 보여?”
엄마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우재가 몸을 돌렸다가 갑자기 공중에 하이킥을 차며 벌떡 일어났다.
“엄마. 제발 부탁인데 사람 교체 하면 안 될까? 그 사람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정리하자. 제발 부탁이야. 이상한 데 돈 쓰지 말고 차라리 날 줘.”
우재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까지 흘러나오자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실력 좋은 선생이라더니 헛소문이 아닌 모양이네?”
엄마의 혼잣말에 갑자기 우재가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 그 사람은 정말 아니라니까! 성격도 까칠하고 말투도 험악한 게 어쨌든 느낌이 영 안 좋아!”
역시나 엄마는 이번에도 자식인 우재의 마음을 살피기보다 선생의 스펙과 배경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우재의 신경질에 엄마가 그 말이 사실인지 가늠해 보려는 듯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딴 성질이 뭐가 중요해.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되지.”
우재는 엄마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몸과 마음이 약해진 엄마가 여전히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딱 두 가지 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의 아빠와 자식 교육에 대한 일이다. 엄마는 그 둘을 위해서라면 가끔 영혼이라도 팔 것처럼 악다구니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