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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2화)
1. 월드, 리셋(2)


“너…….”
“응?”
“침 좀 닦아라.”
쓰읍. 흠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했나 보군.
“어쨌든, 오늘은 나랑 노는 거다?”
“그래.”
어차피 서버가 닫혀 있다면 딱히 할 일도 없고, 좀 전에 본 시험이 이번 학기 마지막 시험이니 하루쯤 노는 것도 좋겠지. 방학 첫날인 셈이니까.

딸깍, 딸깍.
딸깍, 딸깍.
젠장, 아무리 마우스를 클릭해 봐도 나오는 건 게임사 측에서 떡하니 걸어 놓은 접속 불가 페이지뿐이다.
“뭐지?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대규모의 패치라면 바라던 바이고 하루 이틀쯤 서버를 닫는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현상이 벌써 일주일째, 하루 24시간 꼬박 계속되고 있다는 거다. 그것도 이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홈페이지까지 닫아 놓고.
“제발 좀 되라. 제발 좀. 접속, 접속, 접속!”
파앗!
홈페이지 접속을 포기하고 미친 사람처럼 고글을 쓴 채 소리치던 중 어느 순간 전구가 나간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러곤 저 멀리서 밀려오는 빛.
“돼, 됐다!”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는 빛.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서버가 봉인의 쇠사슬을 풀어헤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검과 마법의 또 다른 세계. 그곳에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아레스.”
하늘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답해 당당히 외쳤다. 더 월드에서는 중복되는 이름을 허용하지 않기에 캐릭터 네임을 대는 것만으로 중복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있다.

[확인되었습니다. 그대의 출발에 대자연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홍채와 뇌파 스캔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배경은 빠르게 캐릭터 대기실로 이동해 갔다.
“이상하네. 저 멘트는 캐릭터를 처음 생성할 때나 나오는 건데. 업데이트 하면서 수정됐나?”
마법사 클래스인 나라면 ‘그대의 진리의 길에 마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이라고 나오는 것이 정상인데 아무래도 일괄 통일시켰나 보다.
하긴, 그런 쓸데없는 멘트로 용량 잡아먹는 것도 낭비지.
“오오! 눈물 나게 보고 싶었다, 나의 분신…… 어럽쇼?”
어느새 다섯 발자국 앞까지 다가온 내 캐릭터와의 극적 상봉에 기쁨의 눈물을 흩뿌리려는 찰나, 뭔가 어색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너, 못 본 사이에 많이 저렴해졌다?”
다시 만난 나의 분신은 지팡이가, 로브가, 기타 방어구들이…… 모두 가출한 상태였다.
입고 있는 것이라곤 시작할 때 주어지는 초보자용 옷뿐.
전체 랭킹 195위의 포스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해킹?”
캐릭터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아레스’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해 본 결과 떠오르는 결론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젠장.”
더 월드의 접속기는 홍채 인식을 기본으로 하지만 개개인의 특수한 뇌파도 읽는다. 어떤 특정한 파장을 보냈을 때 되돌아오는 뇌파는 지문처럼 개개인이 모두 달라서 해킹 따위는 절대 벌어질 수 없다.
그걸 잘 알기에 내 머릿속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다 시선이 문득 캐릭터의 발밑으로 향했다.
“마, 말도 안 돼!”

[뇌파가 불안정하여 강제 종료됩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나는 방금 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놀라 강제 종료의 후유증이랄 수 있는 어지럼증마저 잊고 날듯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서버가 열린 이상 더 월드의 홈페이지 역시 이용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래, 홈페이지에 가면 뭔가 있겠지.
“찾았다.”
과연 서버가 열리자 홈페이지 역시 정상화되었고 제일 상단에 굵직한 글씨의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서버 재오픈. 그에 따른 공지 및 업데이트 내용」

“그, 그럼 그렇지.”
그간의 접속 불가 현상이 업데이트 때문이었다는 걸 공지 제목을 통해 확인하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방금 전 내가 본 환각을 부정하며 차분히 글을 읽어 나갔다.

[공지]
현 시간부로 더 월드의 접속 제한이 모두 해제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일주일간의 예기치 못한 서버 봉쇄는 본사 슈퍼컴퓨터로의 갑작스런 해킹에 의한 것이었으며 수십 시간의 공방 끝에 해커를 몰아냈으나 추적에는 실패하였습니다. 본사는 이를 심대한 도발 행위로 규정하여 끝까지 이들을 추적, 응징할 것을 모든 유저 분들께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이번 해킹 건에 의한 피해로 더 월드 캐릭터의 모든 정보가 소멸되었음을 알립니다. 따라서 모든 캐릭터의 레벨은 1로 돌아가며 직업 및 아이템도 모두 초기화되었습니다. 더불어 캐릭터 능력에 따른 시나리오 진행 수준을 맞추기 위해 기존 진행되었던 세계관 역시 초기화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만 기존의 캐릭터 외형과 네임은 유지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으며, 개인의 의사에 따라 초기화된 캐릭터로 서버에 접속하기 전 대기실에서 1회에 한해 설정 변경이 가능합니다.

[업데이트 내용]
1. 맵이 추가되었습니다.
2. 몬스터가 추가되었습니다.
3. 새로운 아이템이 추가되었습니다.
4. 숨겨진 직업이 추가되었습니다.
.
.
.
23. 시작 포인트의 지정이 가능해집니다.

마지막으로, 본사는 이번 일을 감행한 해커들을 추적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며 기필코 찾아내어 단죄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어, 어버버버버…….”
놀라서 말이 다 나오지 않는다.
그럼 내가 본 게 사실이란 거야? 정말로? 리얼리?

[아레스]
레벨 1 직업 : 없음

이 충격적인 사실에, 그리고 게임사의 광오한 자신감과 사과의 말 한마디 넣지 않는 무책임함에 뭐라 대꾸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미친 새끼들, 그럼 처음부터 다시 키우란 말이야!”
모니터를 박살 낼 듯이 노려봐도,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봐도 게임사는 묵묵부답. 공지에 코멘트를 달 수조차 없게 해 놓은 상태였다.
“아아악! 천재들만 모아 놨다더니 어떻게 해킹 한 방에 캐릭터 정보를 깡그리 날려 먹냐! 아니, 그놈들은 왜 하필이면 그걸 건드려 놓은 거야! 크아아악!”
나의 발광은 1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으으으.”
온몸의 진이 다 빠져서 쓰러진 후에야 나는 겨우 멈춰 섰지만 다른 이들은 체력이 더 좋은 모양이다.
서버가 오픈 된 순간부터 시작된 온 동네의 고함 소리는 두 시간이 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제길, 정말 똥배짱이군.”
진정하고 홈페이지를 둘러봤지만 댓글로라도 게임사 측은 미안하다 소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 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듯 흉수에 대한 분노를 느낄 수 있는 글은 몇 개 있었다.
물론 보상 차원에서 한 달 치 계정비를 돌려준다는 것이나 몬스터의 리젠 속도를 당분간 늘려 준다거나 하는 조치가 있었다. 하지만 항의하는 유저들에게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하기 싫으면 말든가’라는 식이었다. 애초에 게임을 시작할 때 ‘게임 아이템과 캐릭터는 개인의 자산이 아닌 회사의 자산입니다’라는 약관에 동의를 했으니 열은 받을지언정 법적으로 따지고 들 수도 없었고.
“더 재수 없는 건 이렇게 나와도 다시 안 할 수가 없다는 거지. 젠장.”
아쉬운 놈이 죄인이 되는 법이라 게임사 측에서 이렇게 막나가도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다시 플레이 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가상현실 게임이 이거 하나는 아니지만 이만한 퀄리티를 지닌 게임이 없다는 게 문제지.
아마 이번 일로 많은 유저가 빠져나갈 테지만 그들도 곧 돌아올 것이다. 이 더 월드라는 게임은 빌어먹게도 안 하는 놈이 손해일 정도의, 그런 게임이니까.
“휴,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시 해 주지. 한 번 가 본 길이니 더 쉽게 갈 수 있을 테고.”
마음껏 성질부리고 나니 머릿속이 좀 정리가 됐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이대로 더 월드를 접을 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다시 시작하는 편이 좋다. 길을 알고 시작하는 건 나만이 아니니까.
사실 냉정하게 따져 보자면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대마법사. 허울 좋은 랭킹 1위 따위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리면서 잊고 있었던, 혹은 무심코 지나쳤던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게 아닐까?
“좋아. 결정했다면, 다시 시작이다!”
결국 팽개쳐 둔 고글을 다시 집어 들고 호기롭게 ‘접속!’을 외쳤다.



2. 모두 다 초보는 아니다(1)


칠흑 같은 어둠. 그 속에서 빛이 밀려온다.

[검과 마법의 또 다른 세계. 그곳에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아레스.”

[확인되었습니다. 그대의 출발에 대자연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또다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몰골의 아레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군. 좋아, 다시 시작이다. 잘 부탁한다, 아레스.”
짝.
대기하고 있던 캐릭터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순간 초보자 마을로 자동 워프 되었다.
“아차! 스타팅 포인트 설정을 안 했다.”
본래 설정대로라면 스타팅 포인트는 랜덤 선택이었다. 워낙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접속을 하는 탓에 생겨난 법칙이다. 하지만 조금 전 공지에서 스타팅 포인트의 설정이 가능하게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수로 그냥 접속해 버린 것이다.
“끄응,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야겠군. 일단은…… 저기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식료품 가게였다. 생각 같아서는 잡화점이나 하다못해 빵집에라도 가고 싶었지만, 현재 접속했고 또 지금 이 순간에 접속하고 있을 사람들의 수를 생각할 때 NPC에게 말 한 번 붙이기가 국왕 알현하기보다 더 힘들 것이 뻔했다.
식료품 가게라면 일반적으로 요리 재료를 구입하는 곳 정도로만 생각해서 배달 퀘스트가 아닌 이상 잘 찾지 않지. 더구나 내가 원하는 건 그리 거창한 정보나 아이템이 아니니까.
딸랑.
“어서 오십시오.”
역시나 내 예상이 적중했다. 거의 잡화점 크기 절반에 미칠 정도로 식료품 가게가 컸지만 들어와 있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었다.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가?
“36쿠퍼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제이슨 씨. 헌데 이 마을의 위치가 어디쯤이죠?”
식료품 중에는 그 자체로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현실성이 높은 더 월드에서는 먹는 것도 꽤 중요하기에 가지고 다니며 먹기 편한 치즈와 과일 따위를 몇 개 고르고 주인에게 친근한 듯 말을 걸었다.
주인의 이름 정도야 가게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지. 가게 이름부터가 ‘제이슨의 식료품’이니까.
……개발자들, 어지간히도 이름 짓기 귀찮았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