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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5화)
3. 카브 길드(2)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후아! 개운하다.”
겨우 굶주린 오크 세 마리를 상대하는 데 체력이 10 이하로 떨어졌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는 했지만 가볍게 손을 털고 만신창이가 된 구리 투구를 주워 들었다.
능력치 분배는 이따가 해야겠군. 피 냄새에 다른 몬스터들이 몰려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빨리 전직을 하던가 해야지, 이거야 원…….”
쐐애애액―
퍼억!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파공음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어라? 왜 갑자기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거지?
털썩.
[사망하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마을로 이동합니다. 초보자 페널티로 현실 시간으로 1시간 동안 접속하실 수 없습니다.]
죽……음? 젠장, 주변에 몬스터가 있던 건가?
“거봐, 진짜 구리 투구라니까!”
“대박이다! 아직 금속으로 된 방어구는 몇 개 안 나왔잖아? 더구나 투구류는 드랍률도 낮은 편인데!”
로그아웃을 하려는 순간 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설마…….
“이 정도면 머더러가 됐어도 용서해 주시겠지? 모두 ‘길드’를 위한 일이니까.”
몬스터가 아니라 PK를 당한 건가? 개자식들!
그 뒤로도 잡다한 얘기가 오갔지만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로그아웃을 했다.
“젠장, 기분 잡치는군.”
몬스터에게 죽었으면 그나마 나으련만 전투 후 뒤치기를 당해 죽었다는 것을 알자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아무래도 죽으면서 구리 투구를 떨어뜨린 모양인데…… 남 좋은 일 했군. 쳇!”
제작자가 초보랑 원수라도 졌는지 접속 시간 페널티는 초보자 때, 그러니까 100레벨 이하일 때만 적용되어서 1시간 후에나 접속할 수 있었다. 즉 1시간 동안은 꼼짝없이 손가락 빨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홈페이지나 가 봐야겠군.”
이왕 접속 제한이 걸린 것, 머리에 열도 식힐 겸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얻기로 했다.
시작의 마을이 다 비슷하기야 하겠지만 인근 사냥터와 나중을 위해 마그리드로 가는 길 정도는 알아 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그렇게 전직 이후의 성장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1시간이란 길고도 짧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검과 마법의 또 다른 세계. 그곳에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아레스.”
[확인되었습니다. 그대의 출발에 대자연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파밧.
캐릭터와의 하이파이브까지 마치자 눈앞에 시작의 마을, 메테오의 광장이 펼쳐졌다. 스타팅 포인트인 것이다.
“상태창.”
[아레스]
레벨 8 직업 : 없음
칭호 : 없음 학파 : 없음
HP : 80/80 MP : 40/40
힘 : 27
민첩성 : 22
체력 : 16
마력 : 10
정신력 : 10[수동]
행운 : 5
보너스 포인트 : 0
젠장, 레벨 업을 하자마자 죽은 탓에 다시 레벨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 만큼 조금만 사냥해도 복구가 될 테지만 어쨌건 레벨 다운이라는 건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니다. 더욱이 PK로 인한 것이라면.
“어떤 놈인지 걸리기만 해 봐라. 인벤토리!”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잡템으로 가득한 아이템 창이 열렸다.
“으음, 떨어뜨린 건 구리 투구와 소지금 일부가 전부인가? 참 재수도 없군.”
가장 가치 있는 아이템이니 구리 투구를 잃어버린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떻게 또 달랑 그거 하나만 흘렸다.
소지금이야 사망 시 무조건 10%를 떨어뜨리게 되어 있으니 별수 없다지만……. 쩝!
손실 정도를 파악하고 나자 왠지 다시 사냥할 의욕이 사라졌다. 우연히 얻은 아이템인 데다 덕분에 9에 가깝게까지 수월히 레벨을 올렸으니 미련은 없지만 조금 맥이 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정리나 해야겠군.”
결국 아이템 창 가득한 잡템부터 처분하기로 했다.
오크에게서 얻은 몽둥이 중 내구력이 가장 높은 것을 제하고 장사를 시작하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재오픈 한 지 이미 7시간 이상이 지났다지만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상점들이 여전히 발 디딜 곳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조금 가격을 높게 책정하더라도 제법 쓸 만한 타격치를 가진 ‘코볼트의 작은 방망이’나 오크가 준 ‘조잡한 몽둥이’, ‘고블린의 녹슨 단검’ 따위를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23실버 60쿠퍼라. 꽤 짭짤한데?”
모르고 있었는데 리셋 후 초기 자본금이 대폭 늘어나 개인당 무려 10실버나 됐다. 전에는 2실버로 겨우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이 전부였는데 수치상으로 따지면 5배나 늘어난 것이다.
그래 봐야 최하 품질의 숏소드 한 자루가 50실버이니 그 돈으로 제대로 된 장비를 맞추기란 요원한 일이지만 퀘스트 몇 개를 해결하거나 잡템을 얼마간 주워 모으면 15실버짜리 ‘단단한 목검’정도는 살 수 있을 터였다.
덕분에 아이템 창을 정리하자 내 수중에도 23실버라는 적지 않은 금액이 생겨 있었다.
“이참에 나도 무기나 장만할까?”
예상보다 쉽게 돈이 모이자 나도 살짝 욕심이 났다. 20실버만 내면 무기점에서 ‘튼튼한 단봉’을 구할 수 있었고 거기에 5실버만 더 보태 대장간으로 가져가면 ‘양 끝에 추가 박힌 튼튼한 단봉’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
1실버 40쿠퍼가 부족하고 단숨에 빈털터리가 될 테지만 익숙하지 않은 몽둥이를 사용하는 것보다 손에 익은 스태프 계열의 무기를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부족한 돈이야 마지막 남은 몽둥이를 팔면 어떻게 될 것도 같고……. 응?”
저벅저벅.
저벅저벅.
우르르르.
하나 남은 ‘조잡한 몽둥이’를 판매 목록에 올리려는 순간, 광장 한쪽이 소란해지면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그리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뒤따르는 무리들. 어딘지 낯익은 광경이었다.
“카브 길드가 오크 화전민 마을을 쓸러 간대!”
길드? 길드를 만들려면 대도시로 나가야 하고 100골드짜리 ‘길드 창설 신청서’를 사야 할 텐데?
음, ‘리셋 전’ 길드인 녀석들인가?
“뭐? 거길 벌써?”
“흥, 아무리 전직을 했다지만 추방당한 오크 전사한테는 아직 무리일걸.”
길드라는 녀석들의 행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예전에 제법 레벨이 됐던 듯한 녀석이 으스대며 일축했다.
‘오크 화전민 마을’이라면 굶주린 오크보다 한 단계 높은 ‘허기진 오크’ 스무 마리와 보스 몬스터인 ‘추방당한 오크 전사’가 있는 곳이지, 아마? 허기진 오크야 어떻게 처리해도 추방당한 오크 전사는 레벨이 18쯤이었던 것 같은데…….
“쪽수를 믿는 건가?”
얼핏 봐도 길드라는 녀석들의 수는 4, 50쯤 돼 보였다.
초반에 저 정도 인해전술이라면 어느 정도 효과는 보겠군. 하지만 그만큼 경험치도 분산될 테고, 무엇보다…….
“과연 오크 전사에게도 통할까?”
중수 열 명이 모여도 고수 유저 한 명을 이기지 못한다. 클래스 간 상성에 따라 상대할 수 있는 적의 수가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정상적으로 성장한 고수 캐릭이라면 적어도 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과거, 내가 기분에 따라 더 월드를 휘젓고 다닐 수 있었던 거고.
그때는 단신으로 길드 하나를 와해시키기도 했는데……. 쩝.
“어라?”
반짝.
나 역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려는 찰나, 그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빛무리를 보았다. 저건…….
“숏소드?”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넷…… 무려 일곱이나 되는 자들이 숏소드로 무장하고 있었다.
헐, 저게 다 얼마야?
“켁! 3골드 50실버? 저만한 돈이 다 어디서……. 가만?”
깜짝 놀라 그 주위를 살피니 역시나 나머지 인원의 장비는 처참할 정도였다. 초기 자본금이 10실버나 되니 컨트롤 좋은 몇 명에게 밀어 주기를 한 건가? 그렇다면…….
“저 녀석이 길드 마스터겠군.”
일곱의 호위를 받듯 걸어가는 사내의 손에는 날을 잘 벼린 롱소드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1골드 50실버짜리의, 정상적인 플레이라면 지금 절대 가질 수 없는 아이템이다.
“얼씨구? 벌써 전직까지 하셨군.”
놈이 입은 ‘수련자의 레더 아머’는 기사 전직 시 지급되는 보상 아이템이었다.
기억이 오래돼서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초보자용 장비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 나머지 아이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신발은 ‘질긴 나무줄기 단화’고 장갑은 ‘닳아 해진 얇은 가죽 장갑’인가? 좋은 건 아니지만 장갑이나 신발 같은 기타 방어구류는 구하기가 더 어려운데 용케도 구했군.
오, 투구는 무려…….
“기워 만든 조잡한 구리 투구?”
게다가 말라붙은 핏자국과 약간의 살점까지.
저거, 내 거잖아?
“흐응, 그렇단 말이지.”
노멀 아이(머더러 상태가 되면 눈이 빨갛게 변해 레드 아이라고도 부른다)인 것을 봐서 길드 마스터 녀석이 저지른 짓은 아닌 듯했지만 가만히 살피니 역시나, 길드의 떨거지 중 한 녀석이 레드 아이, 즉 머더러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사망했는지 경비병이 인식하지 않았고, 동료들 사이에 파묻혀서 걷다 보니 유저들의 공격 또한 받지 않았다.
변변한 아이템 하나 없어 보이는 놈을 잡으려고 단신으로 길드 단위와 척을 질 미련한 자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내 거란 소리잖아?
“카브라고 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놈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듯도 했다. 캐릭터를 삭제 후 재생성하면 받을 수 없는 초기 자본금 10실버를 모두 털어 바칠 정도의 단결력을 가진 길드라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말이야. 사람들이 알아보는 걸로 봐서 레벨도 그리 낮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 봐야 내 기억엔 없는 놈들이지만.
“에휴, 이놈의 건망증. 일단 따라가 보자.”
가물가물한 기억을 애써 더듬는 사이 마을 밖으로 녀석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오크 화전민 마을은 내가 사냥하던 동쪽 숲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동쪽 숲은 일종의 고렙 존으로, 전직을 전후로 한 8레벨 이상의 유저들이 혼자 사냥하기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소로를 따라 걸으니 몬스터와 마주치는 일도 별로 없었고, 간혹 몬스터가 나타나도 숏소드를 가진 녀석들이 재빠르게 해치워서 피해는 전무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로의 끝인 화전민 마을에 도착했다.
“시작하지.”
길드 마스터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일곱 명의 숏소드 유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