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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7화)
3. 카브 길드(4)


“마스터를 보호하라!”
순식간에 인간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치잇.”
누군가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렇다고 공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비켜라!”
휘청.
힘 수치에 비중을 둔 파워 타입의 유저 하나가 나서서 밀치자 저렙으로 구성된 1차 방어선에 커다란 빈틈이 생겼다. 죽음을 불사하고 시선을 끄는 미끼 역할이 전부인 그들인지라 레벨도 형편없었고, 보너스 포인트의 대부분을 민첩성과 체력에만 쏟아부은 것이다.
틈을 발견하자 다시 하이에나들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흐흐흐. 이제 보니 허수아비만도 못한 녀석들이었군.”
철퍼덕.
고작 몇 명이 나섰을 뿐인데 그들의 방어선은 비눗방울처럼 힘없이 붕괴되고 말았다.
거치적거리는 이들을 힘으로 끌어내 버리고 나니 남은 것은 일곱의 숏소드 유저와 길드 마스터뿐.
장비의 열세가 마음에 걸렸지만 군중의 광기는 사람들에게 용기인지 객기인지 모를 기운을 가져다줬다.
“흥, 숏소드 따위! 나도 리셋 전엔 한가락 하던 몸이라고! 차핫!”
곧 단단한 목검을 든 자가 힘차게 달려 나갔다.
서걱―
“헙.”
하지만 내구력이 모자랐던지 그만 소중한 무기가 반 토막 난 채 치욕적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호오, 베기가 제법 그럴싸한데?
“이이익!”
“누구든 가까이 오면 이 꼴을 만들어 주겠다!”
“모두 무기가 반 토막 나기 싫으면 물러서라!”
한 번의 출수로 이득을 본 카브 길드원들은 위협적으로 소리치며 으르렁거렸다.
“쳇, 이대로 물러나야 하는 건가?”
“에이, 눈 딱 감고 저질러 버려? 무려 롱소드에 마법 아이템인데 말이야.”
“저것만 있으면 랭커 자리에 오르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인데.”
그러나 잠시간의 웅성거림으로 흔들리던 눈동자들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암, 그래야지. 흐흐흐!
“어디 이것도 베어 봐라!”
이윽고 또 한 사내가 달려들었다.
이번엔 ‘이 빠진 낡은 철검’이다.
“후읍!”
“합!”
사내의 기세가 남달랐기에 그들도 경시하지 못하고 두 명이 같이 출수했다.
“음, 이때다.”
스윽.
당황한 사내의 이 빠진 낡은 철검과 두 자루의 숏소드가 부딪치려는 찰나, 나는 근처에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서성이던 자의 등을 슬쩍 밀었다.
“어? 어……?”
푸욱!
“날…… 왜……?”
억울한 눈으로 쓰러지는 구경꾼.
그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나는 모두가 멍해진 틈을 타 소리쳤다.
“머더러다!”
번뜩.
그 한마디에 사람들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흐흐흐, 이제 한마디만 덧붙이면…….
“저놈을 잡으면 숏소드가 떨어진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목검 하나도 구하기 어려운 판에 숏소드가 어디야?”
“내 컨트롤이면 숏소드만 있어도 고수까지 금방이지!”
“저놈은 내 거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롱소드에 마법 아이템이라는 대박만을 쫓던 자들이 당장 눈앞에 있는 중박으로 시선을 돌리자 가뜩이나 흉흉하던 기운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죽어라!”
“벨 테면 베어 봐라. 숏소드는 내 거다!”
그러곤 모두가 광전사가 되었다.
“이, 이런……!”
“큭. 마스터, 명령을!”
“빠드득. 어쩔 수 없다. 모두 베어라!”
손쓸 수 없을 만큼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유저들을 보며 그들은 결국 머더러가 되기를 택했다.
순식간에 엉겨 붙은 길드와 유저들.
카브 길드원들이 가진 무기의 우월함은 분명한 효과를 봤지만 유저들은 머더러가 된 길드원만을 노렸고, 전직조차 하지 못한 길드원들의 체력은 여타의 유저들과 차이가 없었기에 그 숫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후후. 그러게 감히 이 몸을 건드려?”
그 치열한 난전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았다. 괜히 저 틈에 끼어 봤자 눈먼 칼에, 몽둥이에 맞아 죽기 십상일 뿐이다.
“크아악! 다 죽여 주마. 강격!”
쩌억!
전체적으로 카브 길드가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길드 마스터란 녀석만은 유일한 전직자답게 압도적인 무위를 펼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흐음, 이래서야 재수 없으면 판도가 뒤집히겠는걸.”
만일 여기서 카브 길드의 승리로 끝나 버리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카브 길드원의 수가 많으니 이들 모두가 머더러라고 해도 다른 길드원들이 음식이며 회복용 아이템을 날라다 주면 오래지 않아 머더러 상태가 풀릴 것이고, 그렇게 해서 다시 이들이 기득권을 획득하면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요, 방해 공작을 펼 수도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저 길드 마스터란 놈은 내가 추방당한 오크 전사를 몰고 온 일이나 구경꾼을 밀친 일 등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곤란하지. 곤란해. 저깟 놈들 50명이 아니라 100명이 덤벼도 무섭지는 않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어디 보자, 저걸로 할까?”
결국 유저들의 편에서 한몫 거들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큼지막한 돌들을 주워 모아 한 팔 가득 안아 들었다.
“그럼 시작해 보실까?”
휙! 휙!
까앙! 까앙!
전직한 놈의 움직임은 재빨랐지만 사방에 적과 엉켜 붙어 있는지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움직이는 내 공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개자식들!”
까앙! 까앙!
“큭, 뭐냐!”
난전을 펼치느라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던 놈은 공격이 계속되고 점점 더 힘을 실어 가자 비로소 내 공격을 피하기 위한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네놈이었나!”
그러곤 일갈을 내지르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크아악! 저리 꺼지란 말이다!”
하지만 대박의 유혹에 눈이 먼 주위의 유저들이 그를 놓아줄 리 만무했다. 뿅망치 같은 작은 데미지로나마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자들이 열을 헤아리니 제아무리 그라 해도 쉽사리 몸을 빼내지 못했다.
“후후.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네 녀석의 길드원을 탓하도록.”
까앙!
녀석은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 가며 발악을 했지만 나는 원거리에서 착실히 녀석의 체력을 줄여 나갔다.
“크윽.”
“이럴 순…… 없어…….”
그러는 동안 일곱이던 숏소드 유저들의 수도 줄고 줄어 어느덧 넷만 남았다. 게다가 그마저도 이미 많은 힘을 소진했는지 안색이 파리했다.
“마스터, 일단 몸을 피하는 게…… 큭!”
“퓨어! 으득. 이 자식드을!”
후아아앙―!
또 한 명의 길드원이 회색빛 시체로 변하는 순간, 그의 검에서 믿을 수 없는 힘이 뻗어 나왔다.
“회, 회오리 베기?”
“말도 안 돼! 그건 견습 기사로 승급한 다음에나 배울 수 있는 스킬이잖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회전한 그의 주위로 자신의 죽음조차 인식하지 못한 다섯 구의 시체가 쓰러져 내렸다.
“회오리 베기라니…… 그건 갓 직업을 얻었을 뿐인 토들러 나이트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닐 텐데?”
더 월드에서의 직업은 노멀 클래스 마법사를 기준으로 볼 때 무직(1~9), 토들러 메이지(10~49), 견습 마법사(50~99), 마법사(100~199), 익스퍼트 메이지(200~299), 마도사(300~399), 현자(400레벨 이상)의 순으로 승급한다.
히든입네 스페셜입네 하는 녀석들이 많아서 전부 통용되는 공식은 아니지만 적어도 노멀 클래스 직업들에는 모두 비슷하게 적용된다.
즉, 아직 10~49레벨 사이일 녀석은 토들러 나이트일 것이 분명하다는 얘기.
하지만 ‘회오리 베기’는 견습 기사가 되어서야 배울 수 있는 기술이다.
지금의 녀석이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닐 텐데…….
“끄으윽…….”
“오호라?”
모두가 그의 놀라운 무위에 경직돼 있는 순간, 나는 미약한 그의 신음 소리를 읽었다.
그랬군. 조금 전의 움직임은 일종의 히든 피스이거나 무리한 행동이었어. 아마도 HP까지 소모하는 오버 액션이었겠지.
어쩌면 근육의 경직으로 스턴 상태일지도?
파밧.
“허세였군. 훗.”
그의 상태를 임의로 진단한 나는 주저 없이 달려들어 조잡한 몽둥이를 힘껏 내질렀다.
까앙!
퍼석!
“크악!”
크리티컬! 돌팔매질에 맞아 내구력이 바닥을 기었는지 때마침 기워 만든 조잡한 구리 투구의 내구력이 0이 되며 박살 났다. 도리어 착용자의 머리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구리 파편들.
산발한 그의 머리가 피로 젖으며 몸 또한 기울어 갔다.
꾸욱.
“오호?”
그러나 마지막 자존심이요, 의지인 듯 그는 뒤로 넘어가지 않고 버텨 섰다.
“……네놈의 얼굴, 잊지 않겠다. 기억하라. 나는 카브 길드의 마스터 테스다!”
놈은 지독한 독기 서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마지막 포효를 했다.
가만, 카브 길드의 테스라? 아, 기억났다. 기사가 대부분인 주제에 마법 도시 마그리드를 근거지로 삼은 놈들.
내게 덤볐다가 영영 사라져 버린 ‘현자의 숲’이란 길드가 나와 싸우기 전에 이놈들과 전쟁을 벌였다가 대패하는 바람에 전력이 크게 떨어진 거라고 핑계를 댔지, 아마. 감히 현자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쓴 주제에 실력은 고만고만해도 100명이 넘는 대인원에 마도사급 플레이어가 꽤 있었는데 말이야.
뭐, 그래 봤자였지만.
“카브든 커브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난 걸어 오는 싸움을 피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말이야. 특별히 알려 주지. 이 몸의 존함은 아레스. 장차 대마법사가 되실 몸이다!”
티잉.
털썩.
손가락으로 가볍게 놈의 이마를 튕기자 녀석의 몸이 썩은 통나무마냥 힘없이 무너졌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이어 들려오는 알림음. 8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던 경험치가 머더러를 잡으면서 끝까지 차오른 모양이다.
이걸로 복수는 깔끔히 한 셈인가?
“와우.”
게다가 인벤토리를 확인해 보니 놈이 떨어트린 아이템이 두 개나 됐다. 머더러 상태라서 아이템 드랍률이 높아진 탓이다.
인벤토리에 들어온 아이템은 각각 나무 방패와 부츠. 테스란 녀석이 추방당한 오크 전사를 잡아 얻은 전부였다.
녀석, 약 좀 오르겠군.
“아레스라면 매드 메이지……!”
꿀꺽.
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누군지를 알아차린 살아남은 유저들은 나와 숏소드를 든 나머지 길드원들을 번갈아 보기만 할 뿐 선뜻 행동을 취하진 못했다.
“저, 정말 대륙 3광 중 하나인 매드 메이지란 말이야?”
대륙 3광.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광전사 카마인과 광속의 트리스 그리고 매드 메이지로 불리는 나, 아레스를 지칭하는 말이다. 셋 다 노멀 클래스의 직업을 갖고 있고 레벨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랭킹에서 100위권 밖의 그리 눈에 띌 만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자들과 싸워 꼬꾸라뜨리기를 예삿일로 알고 수틀리면 단신으로 대형 길드와 맞장 뜨기를 주저하지 않았기에 붙여진 별명으로, 그 덕에 더 월드에서는 ‘3광(실제로는 그 미친놈들이라고 함)과 척을 지느니 몽둥이 들고 드래곤 레어를 쳐들어가는 게 낫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아, 물론 큰 피해를 입고 항복하는 건 항상 대형 길드 쪽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나를 그 두 사이코와 묶어서 도매금으로 취급하다니. 난 가끔씩, 아주 조금 욱할 뿐이라고.”
매번 하는 말이지만, 난 정말 억울하다.
“음, 혹시 스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도리도리.
혹시나 해서 묻자 사람들이 정색을 했다.
“그럼 나머지는 알아서 나눠 드세요. 전 이만하면 됐으니.”
“예, 옙!”
“우오오오∼!”
남은 세 명의 숏소드 유저에게 관심 없음을 표명하자 나머지 유저들도 얼굴에 화색이 돌며 다시 한 번 불타올랐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을 접하니 이날 일곱 중 숏소드를 떨어트린 자는 모두 다섯이었고, 그 뒤로 곧장 메테오를 떴는지 캐릭터를 지웠는지 이들의 모습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홀로 떨어진 허기진 오크 몇 마리를 잡아 드디어 10레벨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