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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15화)
6. 기도하는 여신상(3)


우웅.
샤라랑.
홀락이 신이 나서 여신상을 흔들자 다가오는 오크들의 머리 위로 한 무리의 빛이 내려앉았다.
설마 보조 주문인 거냐?
“이아손! 막앗!”
“성스러운 일격.”
콰앙!
다급히 내린 명령에 이아손이 자신에게 회복 주문을 걸다 말고 오크들과 내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나 한 녀석이 주춤거리는 사이 나머지 놈들이 다시 이아손을 핍박해 들어갔다.
“다연발 매직 애로우! 이아손, 일단은 후퇴다. 적당히 저지하면서 몸을 피해! 절대 죽지 마라!”
이대로 이아손이 죽어 버리면 퀘스트를 성공할 확률이 극히 적어진다. 아니, 사실상 실패라고 봐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죽어 버리면 그 순간 퀘스트가 종료된다.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이아손은 스스로 회복 주문을 걸 수 있으니 믿어 볼 수밖에.
“알겠습니다.”
내가 몸을 돌려 달아나는 사이 이아손은 내 쪽을 힐끔거리며 오크들을 상대했다.
큭, 비참하군.
“가만 놔둘 성싶으냐? 디바인 홀드!”
우웅!
홀락이 외치자 여신상이 크게 진동하며 빛을 뿜었다.
“아닛?”
파밧.
발밑에서 솟구친 빛무리는 사냥꾼의 덫처럼 내 발을 꼭 붙든 채 놓아주질 않았다.
디바인 홀드까지 쓰다니. 설마 3서클까진 전부 쓸 수 있는 건가?
“시간 끌지 말고 해치워라. 레서 힐!”
챙! 챙! 챙!
홀락의 회복 마법이 뒤를 받쳐 주자 기세등등해진 오크들이 이아손을 몰아쳐 갔다. 점점 수세에 몰리는 이아손. 점점 손발이 바빠지더니 간간이 행하던 회복 주문을 쓸 틈마저 없어졌다.
제길, 어떻게든 수를 내야…….
“라이트닝 애로우!”
“크크, 그럴 줄 알았다. 파이어 애로우!”
파츠츳.
발이 묶였다 뿐이지 마법의 사용까지 제한된 건 아니기에 빠르게 라이트닝 애로우를 쏘아 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홀락의 마법과 부딪혀 상쇄되었다.
“후욱,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다연발 매직 애로우! 다연발 매직 애로우! 다연발 매직…….”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최대한 교란이라도 시킬 수밖에. 나는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홀락의 전신을 타깃팅하고 매직 애로우를 뿌려 댔다. 크게 당황하는 홀락. 직접 말로써 캐스팅하는 그들이 나의 연사 속도를 당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쳇, 마나만 충분했어도…….
“크윽, 막아라!”
큰 데미지는 아니겠지만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홀락이 소리치자, 이아손을 거의 무너뜨려 가던 호위병들이 급히 몸을 날려 매직 애로우들을 막아 냈다.
그러나 몇 개의 매직 애로우는 그들을 넘어 홀락을 향했다.
티잉.
그중 하나가 기도하는 여신상에 맞았다.
“됐다!”
푸쉿.
그 순간 디바인 홀드의 효과가 사라졌다.
“이아손! 후퇴다!”
디바인 홀드가 사라진 순간, 그리고 이아손이 수세를 면하는 순간, 다시금 매직 애로우를 연발로 날리며 후퇴 명령을 내렸다. 홀락의 안전이라는 대명제 때문에 우릴 쫓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오크들.
“제기랄!”
정말 뭣 빠지게 도망친 덕분에 홀락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젠장, 이거 꼴이 말이 아니군.
일단은 숨도 쉬지 않고 마을까지 달음질쳐 돌아왔다.
“빠득! 이 빚은 확실히 되갚아 주마.”



7. 레벨, 그것이 문제라면(1)


후퇴는 성공적이었지만 오크족 따위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오크족 영웅인 대전사 렉토르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그깟 레벨 50 남짓의 애송이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치다니. 명예욕 같은 걸 떠나서 이건 굉장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와 현재의 괴리.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꼬리에 따라붙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였다.
“그래. 레벨이 문제야, 레벨이.”
전에는 300레벨 대의 붉은 머리 어금니 오크족이 사는 오크 타운도 맘껏 휘저었는데 하는 환상 같은 추억도 잠시. 현재 내 상태와 문제점을 생각하고 자리를 박찼다.
그래. 2서클만 익혔어도, 마나양만 충분했어도 이 꼴을 보이진 않았겠지.
“그렇다면 얼마든지 올려 주마. 아직 15일이 지나려면 멀었으니까.”
남은 돈을 털어 보름치 식량과 최하급 체력 포션, 최하급 마나 포션을 되는 대로 사들이고 이아손과 함께 ‘썩은 땅’으로 향했다.
“퀵 무브. 스트랭스.”
클레릭인 이아손에게 ‘삭아 빠진 스켈레톤’과 ‘걸신들린 좀비’가 나오는 썩은 땅은 최고의 사냥터였다. 비록 한정적 가디언이라 경험치는 고스란히 나에게 헌납해야 했지만 신의 의지에 반하는 언데드를 처치하기 위한 그의 몸놀림은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었다. 더구나 40대 초반의 레벨이라 연속해서 사냥하는 데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성스러운 일격.”
“라이트닝 애로우.”
퍼억!
파지직.
나 역시 이번만큼은 후방 지원이라는 마법사의 기본 원칙을 고수하며 철저하게 사냥에만 집중했다.
“헉헉! 아레스 님, 조금 쉬었다 하는 게…….”
“시끄러. 이아손, 공격.”
콰앙!
다수의 몬스터를 연속으로 상대하고 나서나 신성력이 바닥을 보일 때 이아손이 휴식 요청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깔끔이 무시했다. 삭아 빠진 스켈레톤이나 걸신들린 좀비는 영혼 계열이 아니기에 신성력이 없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힘이 빠지면 어김없이 나의 마법 난사가 이어지니 죽을 걱정은 없는 것이다.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NPC인 이아손은 입에 게거품 물도록 메이스를 들고 뛰어다녀야 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아직 멀었어.”
역시 레벨 업은 빨랐다. 40대 초반 몬스터가 나오는 지역이긴 했지만, 쭉 나와 함께하는 가디언이 아니라 ‘대여된’ 가디언이라서인지 이아손은 아무리 몬스터를 잡아도 경험치가 쌓이지 않는 탓이다. 그 덕에 몬스터를 잡고 얻은 경험치가 모두, 100% 나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1, 2레벨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다. 레벨 업을 알리는 알림음과 동시에 나는 기계적으로 상태창을 열어 보너스 포인트를 모두 마력에 투자하고 다시 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아손, 공격.”
“끄으으응.”
퍽!
입에서 난내 나도록 뛰어다니는 이아손을 연신 불러 대면서.
“이아손, 이아손, 이아…….”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음, 이쯤 해 둘까.”
“저, 정말입니까. 오! 신이시여…….”
사냥을 그만둔다는 게 저렇게나 좋을까. 보기 미안할 정도로 폭삭 늙어 버린 이아손이 사냥을 멈춘다는 얘기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신까지 찾아 댔다.
지난 열흘간 정말 무지하게 부려 먹긴 했지. 쩝.
“상태창.”

[아레스]
레벨 44 직업 : 토들러 메이지
칭호 : 없음 학파 : 없음
HP : 200/200 MP: 110/520
힘 : 40
민첩성 : 60
체력 : 40
마력 : 130
정신력 : 15[수동]
행운 : 5
보너스 포인트 : 0

클레릭의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썩은 땅을 떠나지 않은 탓에 이제 들어오는 경험치의 양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대량의 몬스터를 해치우니 레벨은 어느덧 40을 넘어 44에 달했다. 열흘간 무려 10레벨을 올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벤토리에도 삭아 빠진 스켈레톤과 걸신들린 좀비가 주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아이템이 가득한 상태였다. 대부분 ‘삭은 뼈’나 ‘좀비의 눈알’과 같은 잡템이었지만 그 수가 워낙 많고 무기류도 간간이 나와서 정리하면 제법 돈 주머니가 묵직해질 것 같았다.
“돌아간다.”
“이놈들, 길을 비켜라!”
얼마나 고대했는지 이아손은 복귀 명령이 떨어지자 시키지도 않은 공격을 해 가며 열심히 마을로 향하는 길을 뚫었다.
마을로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잡화점과 무기점. 인벤토리 가득한 잡템들과 장비를 팔자 무려 5골드에 가까운 거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2서클 마법의 가격을 알기에 입맛이 썼다.
“오! 어서 오게. 정화는 끝냈는가?”
“아직입니다.”
“그런가? 그것 참 곤란하군. 급한 대로 인편을 이용하고는 있네만 연락할 곳도 많고 시일을 다투는 일도 많아서 일 처리가 늦어지는 형편이네. 서둘러 주게.”
벤은 내가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통신구에 대한 얘기를 꺼내더니 아직이라고 하자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2서클 마법, 배울 수 있습니까?”
“물론이네. 매직 애로우의 강화형인 매직 미사일부터 파이어 볼, 아쿠아 볼, 라이트닝 볼트, 또…….”
돈이 될 만한 말을 꺼내자 예의 그 상인적 기질이 발휘되는 벤이었다.
“아, 마법은 전부 개당 50실버일세.”
젠장, 1서클에 비해 5배나 올랐다. 알고는 있지만 피 같은 돈이 구멍 뚫린 듯 새어 나가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군.
당장에 필요한 마법을 배우고 나니 남은 돈은 고작 2골드 40실버. 아직도 많이 남긴 했지만 순식간에 소지금이 반 이하로 줄었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퀘스트 제한 시간까지 남은 기한은 3일. 시도할 수 있는 기회는 기껏해야 두세 번일까.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고 봐도 좋을 만큼 궁지에 몰렸지만 두 번도 필요 없다. 여기서 또 밀린다면 그냥 혀 깨물고 죽어 버리는 게 낫지.
“오는군.”
무려 1골드를 투자하여 최하급 체력 포션 하나와 최하급 마나 포션 여섯 개를 보충하고 나서 곧장 이아손을 이끌고 동쪽 숲으로 왔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녀석이 오는 길목에 마주 섰다.
“취익. 인간. 또 왔다.”
그때 죽지 않았던 호위병 하나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크크크. 용케도 다시 나타날 생각을 했군.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네 목숨을 거둬 가겠다. 디바인 홀드!”
우웅.
픽.
“응?”
하지만 녀석이 만든 빛의 덫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홀드 계열은 상대가 땅에 발을 붙이고 있을 때만 제대로 발동하는 법. 나는 녀석의 낌새를 알아채자마자 이아손의 등을 밟고 도약한 상태였다.
“파이어 볼!”
“이런! 막아라!”
기습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역습이 가해지자 놀란 홀락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고래고래 목청만 돋웠다.
콰앙!
홀락이 몸을 숨긴 가운데 호위병이 대신해서 몸으로 공격을 받아 냈다.
“아쿠아 볼! 라이트닝 볼트!”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엔 상당한 파괴력을 가진 물의 공과 전격의 구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쏘아졌다.
퍼엉.
콰지지직!
떠올랐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물벼락이 떨어지더니 젖은 몸을 타고 짜릿한 전격이 작렬했다.
“라이트닝 볼트! 이아손, 성스러운 일격!”
“성스러운 일격.”
녀석들의 상태가 확인되기도 전에 한 발의 전격의 구를 더 날리고 곧장 이아손을 투입시켰다. 지금이라면 이아손 역시 전격의 영향을 받을 테지만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지닌 사제 계열이기에 비교적 적은 타격으로 끝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끝이 아니다.
“라이트닝 볼트! 다연발 매직 미사일.”
이번엔 끝이 뭉툭한 타원형의 마력 덩어리들이 폭격을 시작했다.
펑!
퍼벙!
피어오른 먼지 틈 사이로 유도 기능이 있는 폭발형의 마나가 쉴 새 없이 퍼부어졌다.
“이아손, 나와!”
휘익.
여전히 먼지가 오크들을 뒤덮은 가운데 달려들었던 이아손이 표홀히 날아 내 곁으로 돌아왔다.
“라이라!”
띠리띠―
먼지구름을 향해 시프의 ‘간파’ 스킬과 비슷한 탐색 마법을 펼치자 의미 모를 기계음과 함께 살아남은 녀석의 간단한 정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