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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월드 1권(18화)
8. 약탈자의 소굴(3)
마법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꽤 쓸 만할 게다. 물론 아직 인벤토리를 정리하지 않아 더 좋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이 이상의 아이템을 내놓을 경우, 내 레벨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음, 무기 같은 경우 롱소드라든지 바스타드 소드라든지, 능력치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자신의 손에 맞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 좋지만, 아직 초반이니까 아무래도 괜찮겠지. 돌아오는 길에 순찰 돌던 녀석들과 부딪히길 잘했는데?
썩은니 오크 부족이라면 이제 사냥할 일 없었는데 말이야.
“앗, 정말 가져도 돼?”
“이거…… 초면에 너무 신세만 지는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둘은 어느새 차고 있던 장비를 집어던진 후였다.
“뭐, 제가 착용할 일도 없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장비가 전부 매직 아이템? 역시 매드 메……, 아니 유명인은 다르군요.”
매직 아이템부터는 은은하게 오라 같은 것이 감돌기에 조금만 눈썰미가 있으면 등급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크, 큰일 날 뻔했군. 정보 공유로 해 놓지 않아 다행이네.
“자, 장비는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고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혹시 생각해 두신 곳이라도?”
“예, 오기 전에 검색해 봤는데 마침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더군요. ‘약탈자의 소굴’이라고.”
약탈자의 소굴이라면 알고 있다. ‘애꾸눈 잭’ 혹은 ‘쌍검의 잭’이라 불리는 네임드 오크 투사가 보스로 있는 북동쪽의 동굴. 부하로 있는 ‘오크 약탈자’들은 40 내외의 높지 않은 레벨인데 비해 잭이란 놈은 63레벨의 꽤 높은 레벨을 지니고 있어 나도 조만간 사냥을 가려 했던 곳이다. 하지만…….
“약탈자의 소굴이라. 잘만 하면 무한 사냥도 가능한 곳이긴 합니다만 위험할지도 모르겠군요.”
그곳에는 ‘오크 주술사’란 놈들이 있다. 말이 주술사이지 뭔가 음침한 기운을 뿜는 이놈들은 마법과 흡사한 몇 가지 공격 주문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이미 죽어 나간 오크 약탈자들을 되살리는 꽤 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처음보다 체력이 많이 깎인 상태이지만, 좀비처럼 느려지지도 않고 그만큼 경험치도 적게 준다. 뭐, 원래의 80%면 아주 적은 편도 아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런 녀석이 둘이나 있어 한 무리씩 놈의 마나가 동날 때까지 상대하자면 무한 사냥도 충분히 가능할 테지만, 동족 의식이 강한 오크들인지라 자칫 다른 무리나 네임드 몬스터를 불러들이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터였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아레스 님께서 간간이 터지는 주술사의 마법 공격만 막거나 상쇄해 주신다면 재미있는 광경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재미있는 광경?”
브라이트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묘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첼.
흠, 이쯤 되면 뺄 수도 없겠군. 캐스팅은 이쪽이 훨씬 빠르니 상쇄 정도야 어렵지 않지.
“좋습니다. 가시죠.”
‘뽑기’를 통해 얻은 53레벨의 프리스트 이시아와 함께 일행은 곧장 약탈자의 소굴로 향했다.
신전에서 구입한(?) 가디언의 레벨이 50대라는 것에 둘이 경악했지만 자세한 사항은 비밀로 했다. 사제 파견은 일반적으로 50레벨쯤에 이르러서 해당 신전 퀘스트를 수행하다 보면 얻을 수 있는 퀘스트지만, 네크로맨서 퀘스트를 통해 훨씬 일찍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고급에 속하는 정보인 것이다.
둘도 고수의 비밀쯤으로 여겼는지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자,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자. 경험치는 균등. 전투가 끝났을 시 아이템 수거는 레이첼이 담당. 사용할 만한 게 나오면 필요한 사람이 쓰지만 그 밖엔 모두 상점행. 수익금은 삼등분. 이상 없지?”
“응. 정확해.”
“그럼 보스가 난입할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다!”
“좋았어. 그럼 들어가자.”
아무리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도 전력을 다하면 해 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레이첼뿐인 것도 아니고 브라이트라는 정체 모를 사내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는 무빙 캐스팅, 무(無)스펠 캐스팅은 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 방법을 안다고 해서 당장에 뭘 어찌해 볼 수 있는 사람도 없겠지만 리셋 전부터 이것은 고급 중에 고급인 정보인 것이다. 매드 메이지로 불리던 시절 무스펠 무빙 캐스팅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그것도 나와 붙어 본 사람들에 한해서고, 그들 중에도 비밀을 알아낸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하지만 실상 그리 복잡한 방법이 아니기에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때문에 이곳에서도 보통의 마법사인 척할 생각이었다.
“앗, 나왔다. 내가 맡을게!”
아직까진 일방통행인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한 마리씩의 오크 약탈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스타트를 끊기 위해 레이첼이 먼저 달려들었다.
“못 말리겠군. 이시아, 저 녀석 전담 마크해.”
“예, 알겠습니다. 퀵 무브, 스트랭스, 홀리 인챈트…….”
전문 프리스트라서 이아손 때보다 다양한 보조 주문들이 레이첼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서포트에 탄력 받았는지 달려가는 레이첼의 움직임에 큰 활력이 더해졌다.
“더블 소드!”
우웅.
레이첼이 스킬 명을 외치자 오크 약탈자의 머리를 쪼개 가던 시미터가 잔 떨림과 함께 두 자루로 분열했다.
“꾸룩?”
아직 레벨도 낮고 숙련도도 낮아 잠깐 초점이 흐려진 정도의 작은 변화에 불과했지만 역시 머리 나쁜 오크인지라 날아오는 것이 무엇인지도 잊은 채 마냥 신기하게 검 날을 지켜보고 있었다.
푸욱!
“꽥!”
검 날이 어깨에 박히고 나서야 놈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단순한 오크답게 느닷없는 고통과 피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광분을 터트렸지만, 레이첼의 검은 이미 놈의 어깨를 빠져나와 허벅지를 훑고 있었다.
“끄르룩!”
하지만 헛된 저항일 뿐이다. 이미 어깨와 허벅지를 내줌으로써 전투 능력을 대폭 상실당한 녀석이 이어지는 레이첼의 공격을 받아 낼 수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휘리리릭.
털썩.
가볍게 오크 약탈자를 요리한 레이첼이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흠, 생각보다 컨트롤이 제법인걸. 오크족은 무리 지어 다닌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레벨에 비해 개인의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자기 레벨보다 높은 녀석을 이 정도로 간단히 요리하다니. 익스퍼트급까지 갔다는 게 거짓은 아닌가 보군.
“이제 입구야. 겨우 한 마리 해치운 걸로 들뜨면 곤란해.”
“치. 잘했다 소리 한 번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레이첼은 투덜대면서도 다시 자세를 낮추며 안쪽으로 전진해 갔다.
다음에 만난 오크 약탈자는 세 마리가 한 무리인 녀석들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관조의 입장을 취하자 브라이트가 나서서 레이첼과 멋진 협공을 선보였다.
그의 컨트롤도 익스퍼트급이라고 보기엔 어려웠지만 둘의 호흡이 생각보다 잘 맞아서 오크 약탈자 세 마리쯤을 상대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물며 그들의 뒤에 견습 프리스트인 이시아가 버티고 있음에야…….
“이야! 역시 수입은 이쪽이 월등하군요. 좀비의 눈알 따위 백날 팔아 봐야 포션 값도 벌기 어려웠는데.”
오크 약탈자들이 남긴 장비를 나눠 착용하며 브라이트가 감탄했다.
그런데 왜 언데드만 잡은 거지? 그쪽이 경험치 면에서 더 낫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상대하기 더 쉬운 것도 아닐 텐데?
“그렇죠, 뭐. 헌데 어째서 언데드만 사냥하신 겁니까? 특별한 이유라도?”
“하하. 그건 조금 뒤에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브라이트는 또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어물쩍 넘어갔다.
나 원 참. 뭔지 알아야 돕던가 하지.
“어느 쪽으로 먼저 갈까?”
드디어 갈림길이 나오자 레이첼이 돌아서서 물었다. 리셋 전의 명성이나 이시아의 존재 때문에라도 이 파티의 암묵적 리더는 나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여기에서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주술사와 약탈자 무리가 하나씩 있을 테고 그들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니까. 그런 다음엔 네임드 보스인 잭에게 향하는 길과 연결되고. 즉, 잭에게 가는 것이든 우리처럼 뱅글뱅글 돌며 주술사와 약탈자 무리만 사냥하는 것이든 상대해야 할 적은 똑같다라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선택해서 왼쪽 길로 들어서자 주술사를 중심으로 종교의식 같은 걸 갖고 있는 약탈자 무리가 보였다. 약탈자의 숫자는 여섯. 보통의 파티였다면 조금 버거울 수 있었지만 어차피 한 무리로 지정돼 있어서 곶감 빼먹듯 나눠 상대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다행이라면…….
“난 말이지, 이런 놈들이 제일 좋아. 파이어 볼!”
“취륵?”
콰앙!
브라이트의 시선을 의식해 주문을 외는 시늉을 한 뒤 무리의 가운데로 시뻘건 화염의 구를 집어던졌다. 혼비백산 충격파 때문에라도 사방으로 흩어지는 오크들.
“스트라이크!”
“우우. 나도 질 수 없지.”
기습의 효과로 두 마리나 되는 오크 약탈자가 전투 불능에 가까운 상태로 바뀌었음을 확인하고 소리치자 레이첼도 질 수 없다는 듯 뛰쳐나갔다.
“핫! 연격!”
검을 휘두를 때마다 105%, 110%, 이런 식으로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 해 주는 연격 스킬.
아직 레벨도, 숙련도도 낮아 두 번의 칼질에 효력이 다하고 말았지만 허둥대며 바닥을 기고 있는 오크 약탈자들에겐 천신의 검보다도 무서운 공격이었다.
저 기술도 스킬에 몸을 맡기지 않고 스킬 사용을 수동으로 설정해 놓으면 변화를 가미할 수 있어서 훨씬 무서운 스킬이 되지, 아마.
“강격!”
브라이트도 지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스킬을 보아하니 노멀 클래스 기사인 듯.
대체 뭐가 특이하단 거야?
“@$*%^%#……. 귀혼 강림의 술!”
촤라랑.
그때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리치는 주술사의 외침에 죽었던 오크 약탈자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귀찮은 놈들, 어디 대갈통을 박살 내도 되살아날 수 있는지 볼까?”
“앗, 아레스 님, 기다려 주십시오!”
좀비와는 또 다른 형태로 되살아나는 녀석들에게 다분히 학문적인 고찰과 연구를 적용해 보려는 순간, 브라이트가 펄쩍 뛰며 만류했다.
아 참, 무한 사냥이 목적이었지.
“레이첼! 한 번도 죽지 않았던 녀석들을 맡아 줘.”
“알았어요. 더블 소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아직 한 번도 죽지 않은 놈이 둘이나 있고 나머지 넷도 차례로 일어서고 있는 마당에 브라이트는 휘두르던 검을 집어넣고 때가 반질반질한 목검을 꺼냈다.
“앗! 아레스 님!”
화르륵.
그때 어느새 죽어 있던 모두를 되살린 주술사가 잔뜩 골이 나서 우리를 향해 화염구를 쏘아 냈다.
음, 같은 화염구지만 파이어 볼보다는 박력이 없군.
“겉멋만 잔뜩 들었어.”
쐐액.
콰앙!
이따위 주문에는 파이어 볼까지도 필요 없다. 가볍게 지팡이를 휘둘러 파이어 애로우로 응수하자 두 마법이 중간에서 마주쳐 작은 폭발을 만들었다.
“으읏.”
그 덕에 접전 중이던 레이첼과 브라이트가 약간의 충격과 함께 그을리고 말았지만 피해는 오크들 쪽이 더 컸다.
“레서 힐! 레서 힐!”
같은 데미지라도 이쪽에는 프리스트가 있었으니까.
“너어∼ 일부러 그랬지!”
“그, 그럴 리가. 실수야, 실수!”
찌릿.
갑작스런 충격파에 산발이 된 레이첼이 따끔따끔한 살기를 쏘아 냈다.
끄응, 레이첼이 있다는 걸 깜박했군.
“흥!”
삐질.
역시 이 녀석과 파티 한 게 실수였어.
“자, 그럼 갑니다.”
탁.
“끼에에엑∼!”
풀썩.
“엥?”
나와 레이첼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되살아난 오크 약탈자들에게 덤벼든 브라이트가 가볍게 목검은 휘두르자 오크들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눈 까뒤집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