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리셋월드 1권(20화)
9. 마나 포스 컨트롤(2)
화르르륵.
내 분노를 닮은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휘몰아치는 마나. 어느새 내 두 손엔 두 개의 화염구가 들려져 있었다.
“파이어 볼, 더블!”
“키아아악!”
콰과과광!
이미 만신창이가 된 잭의 몸이 터져 나가며 귀곡성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 어떻게…….”
“네깟 놈에겐 시체를 남기는 것도 사치다. 파이어 월.”
화르르륵.
놈을 중심으로 솟아오른 불꽃은 뼛조각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다.
“으으윽.”
스르륵.
털썩.
놈을 해치우고 긴장이 풀리자 피로와 함께 엄청난 공백감이 밀려왔다. 가지고 있던 마나를 일시에 쏟아 버린 탓이다.
“끄응, 죽겠군.”
마나를 한계치까지 소모하면 잘 회복도 되지 않을뿐더러 극심한 두통을 동반한다. 마나 포스 컨트롤을 수동으로 놓았을 때만 해당되는 페널티지만 몇 번 겪어 봐서 낯설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한 거지? 더블 스펠이나 파이어 월은 분명……!”
그때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가설이 있었다.
“설마?”
나는 황급히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마나 포션을 들이킨 뒤 메디테이션을 활성화시켰다. 빠르게 차오르는 마나. 마나 포션의 효과까지 본 덕에 마나 보유량은 금세 절반까지 차올랐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마저도 아주 더디게만 느껴졌다.
“됐다.”
그리고 마침내 마나 보유량이 80%를 넘어서자 나는 재빨리 일어나서 마나를 운용했다. 제법 익숙한 경로였지만 리셋 후에는 시도해 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던 마법이었다.
“파이어 스트라이크!”
화르르륵.
콰과광―!
4서클의 강력한 화염 작렬 주문이 작렬하자 약탈자의 소굴이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크, 크하하핫!”
또다시 느껴지는 극심한 공백감과 반대로 등줄기를 타고 솟구치는 희열에 미친 듯한 광소를 터트렸다.
“요는, 마나의 경로만 알면 시스템상으로 배우지 않은 마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렷다? 크크크크.”
마나만 충분하다면, 내가 몸으로 알고 있는 마법이라면 배우지 않은 마법이라도, 설령 레벨이 그에 못 미치더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위력은 조금 약해지고, 확인해 보니 사용되는 마나양도 무려 1.5배에 달했지만 강제로 마나를 경로에 따라 움직이면 사용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일전에 테스란 녀석이 행했던 ‘회오리 베기’에 대한 의문도 단번에 풀렸다. 녀석도 수동 능력치 사용 유저였던 거겠지. 호, 생각보다 제법인 녀석이었나 본데?
콰앙―
콰앙―
콰과광―!
배우지 않은 고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나의 실험은 계속됐다. 현재 내가 가진 마나로 어느 수준의 마법을, 어느 정도만큼 사용할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차, 레이첼!”
삐질.
한참을 연구하던 중에 수십 통이나 쌓인 쪽지를 발견했다.
“……죽었다.”
처음 열 몇 통은 걱정이 가득 담긴 내용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나의 소식 없음에 화가 난 듯 온갖 협박의 내용이 주를 이뤘다. 황급히 답장을 쓰려 했지만 이미 레이첼과 브라이트 모두 로그아웃 상태. 마지막 쪽지에 재접속해서 만날 시간 약속이 적혀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끄응. 망했다.
10. 상인 쥬안(1)
레이첼들과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간은 다음 날이라 아무래도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 얻은 이 획기적인 정보를 활용할 방법에 대해 연구도 했고 레벨이 60을 넘기면서 배울 수 있게 된 3서클 마법들도 배워 뒀다. 비록 배우지 않아도 어지간한 주문은 모두 기억하고 있고 3서클에는 생각보다 쓸 만한 마법이 적은 편이지만,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마나 소모량도 문제이고 해서 아낌없이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겸사겸사 애꾸눈 잭을 몇 번이고 사냥해서 세트 아이템인 ‘잭의 쌍검’도 두 자루 다 확보해 놓았다.
이도류 전사를 선택하는 유저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성능이 뛰어나니 장사가 어렵지는 않겠지.
“그러고 보니 팔지 못한 마법 아이템이 꽤 모였는데 게시판에 경매라도 올려 볼까?”
‘경매장’ 시스템은 아무래도 사용 조건이 100레벨 이상이라 당분간은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될 터였다.
“게시판 경매의 문제점이라면 현금으로 사겠다는 녀석들이 많이 들러붙는다는 건데……. 그냥 팔아서 계정비나 댈까?”
레벨이 곧 껑충껑충 뛰어오를 테니 장비에 돈을 투자하기보단 몬스터가 떨어뜨리는 것을 주워 사용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게다가 마법을 배우기 위해 소모하는 골드도 이제 최소화할 수 있을 테고. 즉, 여윳돈이 꽤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현금화도 구미가 당겼다.
“에이, 일단은 놔둬 보자. 마땅히 돈이 궁한 것도 아니니까.”
지난 학기 성적이 나오면 또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용돈이며 생활비가 꼬박꼬박 부쳐지고 있었다. 성적이 공개돼도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한계상황까지 가진 않을 테고, 여차하면 재정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미희에게 돈을 좀 꾸면 버틸 만했다. 그러니 아직은 굳이 현금화에 손을 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금화에 안 좋은 기억 따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썩 기분이 내키는 편은 아니었다.
“꽤 늦는데?”
약속 시간에서 이미 15분이나 지났지만 레이첼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접속은 30분 전에 했음에도 ‘잠시만’이라는 쪽지만 보내 놓고 함흥차사인 것이다. 그렇다고 화를 낼 입장도 못 되니……
쩝! 마냥 기다릴 수밖에.
“앗, 저기 있다. 아레스, 여기야!”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레이첼이 손을 흔들며 날 부르고 있었다.
어럽쇼? 이것들 봐라?
“뭐야. 날 버려두고 둘만 재정비하고 온 거야?”
둘의 장비가 말끔한 것이 포션 구입을 비롯해 장비의 수선까지 마치고 온 듯싶었다. 물론 나도 혼자 접속해 있는 동안 재정비를 마쳤고 이제는 재정비 따위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무한 사냥을 즐길 수 있을 테지만 볼이 부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안, 미안. 브라이트 오빠가 떠난다고 해서 도와주고 왔어. 설마 남자가 쫀쫀하게 숙녀가 몇 분 늦은 것 가지고 삐친 건 아니지?”
“크흠! 삐치긴 누가 삐쳤다 그래? 그런데 떠난다고?”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레이첼의 핀잔에 찔끔했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되물었다.
“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일전에 아레스 님이 언급하신 퇴마사로 전직해 볼까 합니다. 쉽게 얻을 수 있을진 모르지만 레벨도 이제 50으로 올랐고 지금이 딱 적기라고 생각되는군요.”
눈빛을 보니 나름의 결의가 선 듯했다.
뭐, 굳이 말릴 필요는 없겠지.
“무운을 빌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 유명한 아레스 님과 파티를 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하죠. 그럼 가 봐야겠군요. 갈 길도 멀고 이별은 짧을수록 좋으니까요. 레이첼도 잘 지내렴.”
레이첼과는 이미 인사를 마쳤는지 브라이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서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가 버렸네.”
“응. 가 버렸어.”
넷이나 되던 파티가 둘로 줄어 버리자 썰렁한 느낌과 함께 왠지 기운이 빠졌다.
얼른 신전부터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레이첼이 짝 하고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 그럼 우리도 가 볼까?”
“어디로?”
“짜잔!”
레이첼이 내민 것은 의뢰가 적힌 양피지였다.
“라임산의…… 산적 소탕? 이게 뭐야?”
“뭐긴 뭐야. 퀘스트지.”
끄응, 누가 퀘스트인 걸 몰라서 그러나.
“에휴, 내가 못 살아.”
라임산은…… 칼라일에서 무려 하루 반 거리였다.
“히잉. 미안해∼.”
퀘스트 내용은 라임산 곳곳에 출몰하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레벨의 ‘삐쩍 마른 산적’과 ‘비실거리는 산적’을 30명 이상 죽이는 것으로 소탕하는 산적 수만큼 추가 수당이 붙는 제법 짭짤한 퀘스트였지만, 도시와 동떨어진 곳이었기에 보급이 힘들었다. 일반적인 파티로는 자칫 하루 반 거리를 몇 번이고 왕복해야 할 일명 ‘노가다 퀘스트’인 것이다.
물론 내가 합류한 이상 둘뿐이라도 ‘일반적인 파티’의 범주 따위에 속하지는 않겠지만 오고 가는 하루 반, 왕복 3일의 거리는 제아무리 나라 해도 좁힐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왕에 가는 거 산적 놈들 씨를 말리고 오는 수밖에.”
급수가 꽤 되는 퀘스트인지라 취소했다간 레이첼이 받는 페널티 또한 커서 결국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모험가 길드에 들러 라임산 근방의 지도를 구하고 간이 수리 도구인 숫돌과 기름, 가죽 수선 키트를 몇 개나 챙긴 다음 마지막으로 포션과 사제 파견까지 준비를 마치자, 어느새 주머니가 약탈자의 소굴을 털기 전 상태로 돌아갔다.
“이젠 정말 대충할 수 없겠어.”
어설프게 했다간 배보다 배꼽이 더 클 판이라 다시 한 번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라면 라임산으로 이동하는 동안 레이첼이 무척이나 고분고분해졌다는 것이다. 내가 가끔 길을 잘못 들어 빙 돌아갈 때도 화를 내지 않았고 휴식을 취할 때는 알아서 음식을 준비했다. 비록 쿠킹 스킬의 부재로 상태 이상을 일으키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의 난감한 맛이었지만.
“후아! 드디어 도착인가? 이제부터가 문제군.”
가까스로 라임산에 도착했지만 내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정보에 의하면 산적들은 라임산의 ‘곳곳에’ 포진해 있었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음’이라는 것이다.
“아레스, 저거 아닌가?”
결국 라임산을 뒤지고 다닌 지 10분여. 간신히 산적 비스무리한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의뢰 내용대로라면 라임산에 있는 건 삐쩍 마른 산적과 비실거리는 산적이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산채를 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와 동떨어진 데다 교역의 통로도 아닌지라 식량을 얻기가 무척 힘든 것이다. 그나마 약탈할 만한 곳도 몇몇의 작은 약초꾼 마을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이곳의 산적들은 가진 바 힘의 절반이나 낼까 싶은 영양실조 상태라는 설정이다.
그런데 저놈들은…….
“혈색이 너무 좋은 거 아냐?”
“살까지 피둥피둥 올랐는걸.”
정정해야 할 것 같다. ‘포동포동한 산적’과 ‘혈색 좋은 산적’으로.
“……이 산이 아닌가벼?”
“누구냐!”
멍하니 흘려낸 작은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삼인조 산적들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쳇, 귀도 밝군.”
“흐흐흐, 오랜만에 손님이군. 가진 것 다 내놓아라.”
자신감인 걸까? 나와 레이첼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녀석들은 여유를 부렸다.
“할 수 없지. 후딱 해치우고 다른 산을 뒤져 보자.”
“응.”
스르릉.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첼이 잭의 쌍검을 빼들었다. 비록 세트 아이템으로 두 자루 모두 갖추어야 진정한 위력이 발휘되지만 세트 효과가 없더라도 레이첼이 가지고 있던 무기보다는 성능이 좋아 내가 선물한 것이다. 레이첼도 처음 잭의 쌍검을 받아 들고 깜짝 놀랐지만 이어진 나의 설명에 곧 수긍했다. 왜인지 어느 정도 옛날의 힘을 쓸 수 있다는 부분에선 표정이 굳었지만.
“조심해. 우리가 찾는 놈들보다는 레벨이 높을 것 같으니까.”
“응.”
“자, 그럼 시작해 보실까?”
화르르륵.
그 말과 동시에 양손에서 피어오른 불꽃들이 놈들을 덮쳐 갔다.
“이런, 마법사다!”
콰광!
반응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놈들이 공격을 알아채고 움직이려 할 때는 이미 두 발의 파이어 볼이 붉은 입술을 날름거리며 지척으로 다가온 다음이었다.
“끄억.”
한 놈이 통구이가 되는 사이 나머지 두 녀석도 그 충격파에 밀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물론 그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날 너무 늦게 만난 게 네놈들의 실수다.”
콰과광!
녀석의 머리통에 두 발의 라이트닝 볼트가 내리꽂히며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이제 남은 것은 레이첼과 맞붙은 한 녀석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