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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악마 1화
1.
“와…….”
어둑한 골목의 깊은 곳이었다. 어딘가 흐릿하고 묘하게 이질적인 클럽의 입구를 보며 유리는 들뜬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생겼구나.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본 입구에는 성의 없이 휘갈긴 듯한 글자가 쨍한 연두색과 분홍색의 네온사인으로 빛나고 있었다.
CLUB MIDNIGHT.
두꺼운 문을 한 겹 지난 음악 소리는 베이스의 묵직한 진동이 쿵쿵 흘러나왔다.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은 날개 끝까지 설렘에 떨리는 것 같았다.
“신기하다…….”
이제껏 말로만 들었던 클럽은 천사들이 사는 곳과 악마들이 사는 곳의 중간, 그러니까 인간들의 땅에 숨겨져 있었다.
색다른 유희에 가까웠다.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 서로를 만날 수도 있고 빠르게 들썩이는 음악이나 술까지도 인간들의 밤과 똑같이 돌아가는, 그래서 천사나 악마에게는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 공간.
혼자 인간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기도 했다. 천사든, 악마든.
유리는 다시 들뜬 표정으로 웃었다. 하얀 니트와 까맣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정리하고 입구로 걸어갔다. 클럽의 입구에는 꼭 곰처럼 덩치 큰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남자의 표정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천사?”
……왜 저렇게 보는 걸까. 오면 안 되는 데 온 것처럼. 분명 먼저 다녀온 다른 천사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자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남자는 다행히 몸을 비키며 문을 열어 주었고, 유리는 남자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허리까지 꾸벅 숙여 인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입구에 들어섰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날을 모르고 찾아온 것 같기는 한데……. 뭐 겪어 보고 배우는 것도 괜찮겠지.”
문을 열자마자 훅 풍겨 오는 몽롱한 기운과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에 정신이 팔린 유리에게는 그 말이 귓가에 닿지도 못한 채 흩어졌다. 꼭 다른 세계로 가는 듯 어둑하고 반짝거리는 곳으로 유리가 사라지고, 클럽의 입구는 다시 단단하게 닫혔다.
❤
“진짜 많다…….”
이게 다 천사랑 악마란 말이야?
정신없이 돌아가는 조명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넓은 플로어는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뿌옇고 몽롱한 연기를 들이마실수록 몸이 나른해졌다. 기분은 하늘까지 붕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유리는 이내 아, 하며 술이 가득 줄지어 있는 바의 끄트머리로 다가갔다.
아무거나 시키면 되나……?
술이라고는 포도주 말고 마셔 본 적도 없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어 허리까지 오는 검은 바에 몸을 기울이고 손을 흔들었다. 금방 다가온 여자의 눈은 짙은 화장으로 눈꼬리가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천사?”
그리고 또 유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자꾸 천사냐고 물어보는 걸까. 분명 천사든 악마든 와도 되는 클럽인데. 유리도 얼떨결에 고개를 기울이다가 일단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한참이나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덩달아 당혹스럽게 멈춰 있던 유리는 그냥 여자의 뒤쪽에 붙은 메뉴 중 아무거나 적당히 주문하고 높은 의자에 살며시 앉았다.
“신기하네. 나는 누가 천사고 누가 악마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오는 걸까.
여자가 빠르게 만들어 준 칵테일을 한 모금씩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던 유리는 문득 자신이 살고 있는 천계 변두리의 고요한 집을 떠올렸다. 뭉글하고 하얀 구름 위에 딱 한 채씩 지어진 집은 천사로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할 능력이 됐을 때 자연스럽게 지급됐다. 아직은 인간들이 좋은 꿈을 꾸게 하는 일 정도만 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 신전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쁘지 않았다.
해가 뜨면 조용하게 일어나 신에게 기도하고, 별과 달이 뜨면 잠시 인간계에 내려와 그 날 자신에게 할당된 몇몇 인간들에게 좋은 꿈을 꾸게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오래도록 그런 잔잔한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생명을 보는 것도, 심장까지 쿵쿵 울리는 빠른 음악을 듣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다.
하긴, 내가 사는 구역의 천사도 다 모르는걸.
클럽 안을 천천히 둘러보는 유리의 눈빛은 더욱 흥미롭게 반짝였다.
“혼자 왔어?”
유리는 문득 자신의 앞에 슥 밀려오는 술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진짜 이런 것도 있구나.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던 유리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혼자 왔어요.”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별 의심도 없이 남자가 쥐여 준 술잔을 받아 들었다. 조금 전까지 마시던 것보다 훨씬 진하고 독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것조차 그저 다른 술인가 보다 생각하고 앞에 선 남자를 신기하게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천사일까, 악마일까.
천사라고 해도 날카로운 외모를 가진 이들이 많았고 악마라고 해도 선한 외모를 가진 경우는 많았다. 인간은 정반대라고 생각하는 두 존재는 사실 육안으로 구분되지 않았고, 타고난 분위기로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도 예민한 감각을 가지지 않으면 힘들다.
그리고 태어나서 악마라고는 만나 본 적도 없는 유리는 사실상 이렇게 살펴봐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순한 얼굴로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앞에 선 남자는 음습한 시선을 숨기지 않은 채 유리를 아래위로 훑었다.
여기는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것 같아. 이 남자도 그렇고.
유리는 목덜미에 적나라하게 닿아 오는 남자의 시선과 처음 클럽에 들어올 때부터 여기저기서 닿아 오던 짙은 시선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안 마실 거야?”
가만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는 문득 귓가에 속삭이는 남자를 한번 보고, 남자가 준 술도 내려다보았다.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칵테일 잔에 벌써 물기가 맺히고 있었다.
조금 보채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클럽 안에 가득한 몽롱한 연기 때문인지 남자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얼른 마셔. 손등까지 톡 건드리는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서늘한 유리잔을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댔다.
❤
어두운 클럽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앉아 있던 이안은 꼬았던 다리를 바꾸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관찰하는 듯 날카로운 시선의 끝에는 저 혼자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제 앞에 선 악마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악마의 표정은 딱 봐도 음험하고 난잡했지만 그것도 가늠하지 못하는 듯 순하게.
저런 애가 왜 혼자 여기에 왔을까. 그것도 이런 날에. 이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뿌연 연기를 느릿하게 들이쉬었다.
사실 클럽은 자주 오지 않았다. 오늘같이 악마들만 모이는 날에만 한 번씩 오는 게 다였다. 이른 시간에 와서 술 몇 잔을 마시다, 결국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어 일찍 클럽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이안은 가장 시끄럽고 문란해지는 시간에 입구로 들어오는 하얀 남자를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뭐야, 천사?
날개를 보지 않으면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다지만, 하얀 옷을 입고 들어선 남자는 누가 봐도 천사였다.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 반짝이는 눈은 못내 신기한 걸 보듯 도로록도로록 바쁘게 굴렀고, 술을 한 모금씩 마시며 조금 벌어지는 입술은 야한 짓이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것처럼 맑았다.
저렇게 천사 같은 애는 또 처음 보네. 인간들이 말하는 천사 같다는 의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깨끗하고, 온화하고, 착하고, 뭐 그런 것들. 원래 천사라는 생명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진하거나 착하지만은 않지만, 멀리 앉아 있는 천사는 그 모든 것들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눈치는 조금 없는 것 같고.”
이안은 천사에게 떨어지는 수많은 시선을 천천히 둘러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온통 까맣기만 한 악마들 사이에서 눈송이 하나 떨어진 듯 저 혼자 하얀 천사는 이미 이곳저곳에서 음험한 시선을 한가득 받고 있었다. 저기 서서 천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악마는 아마 혼자가 아닐 테다.
“역시 그렇지.”
이안은 흘긋 시선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어둑한 클럽 한구석에서 자신과 같은 곳을 지켜보고 있는 무리들은 저 순진한 천사를 오늘 다 같이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빛이 번들거렸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오늘은 암묵적으로 악마들만 모이는 날이었고, 알 만한 존재들은 다 알고 있어서 천사의 출입은 거의 없었다. 천사들만 모이는 날에 악마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그건 일종의 룰이었다.
상대 종족의 출입이 금지된 건 아니지만 위험하다. 천사의 날에 악마가 오는 것, 악마의 날에 천사가 오는 것, 그건 곧 자신을 아무렇게나 굴려도 좋다는 뜻이니까. 까놓고 말하면 다수라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지가지 하네.”
물론 자신도 악마니까 그런 음험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관심은 없지만 머릿속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타고나기를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게 악마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천사는 이 클럽의 숨겨진 룰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저 의심스러운 술을 받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겠지. 저 악마는 천사가 룰을 모르고 있다는 걸 벌써 눈치챘고, 머릿속으로는 클럽의 숨겨진 룸에서 순진한 천사 하나를 둔 자기들만의 난교 파티를 벌이고 있을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바짝 태운 담배를 비벼 끄고는 걸터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흰색에 가까운, 부스스한 금발머리를 느긋하게 쓸어 넘기며 악마들 사이를 지났다. 그리고 눈앞에 점점 가까워지는 천사의 뒷모습을 보며 고요하게 웃었다.
이제 막 술잔을 기울이는 천사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허리를 숙였다. 움찔 놀라는 몸짓이 꼭 작은 새를 손에 감싼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사가 들고 있던 술잔에 손을 뻗었다.
❤
“어……?”
유리는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손에서 슥 빠져나가는 술잔을 눈으로 따라가며 고개를 돌렸다. 클럽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술은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 낯선 남자의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허락도 없이 가져간 술을 한 번에 마셔 버린 남자는 나른하게 웃으며 술을 준 남자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독하게도 탔네.”
“…….”
“기절이라도 시켜서 데려가려고 한 거야?”
“……아, 씨발.”
“딱 봐도 뭣 모르는 애잖아. 적당히 하지?”
혀까지 꺼내 입맛을 다시며 입술 끝을 올리던 남자는 어딘가 서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술을 줬던 남자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욕을 짓씹었다.
무슨 상황이지.
유리는 허공에서 어색하게 떠 있던 손가락을 움츠렸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듯 뒤에 선 남자와 언짢은 얼굴로 휙 가 버리는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
여기는 원래 분위기가 이런가. 신기하긴 한데 도무지 적응하기가 힘들다. 다른 천사들한테 들었을 때는 마냥 재밌기만 할 줄 알았는데.
유리는 어색한 숨을 삼키며 꾸물꾸물 손장난을 치다가 흘긋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얼음물을 마시다가 반쯤 남은 물을 자신에게 건넸다. 색이 엷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가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딘지 흥미로운 것 같기도 했다.
유리는 남자가 건넨 차가운 물을 조심스럽게 받아 단번에 들이켜고는 젖은 입가를 닦았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 빤히 바라보는 금발의 남자를 자신도 가만 바라보았다.
“너 여기 처음 왔지?”
……어떻게 알았지.
웃음 섞인 남자의 말투는 당연한 걸 말하듯 담담하고 나긋했다. 유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응, 하고 대답했다. 뿌연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기분이 점점 더 몽롱해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왔지만 남자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소리 내 웃었다. 쇳소리가 조금 섞여 있었지만 퍽 맑은 느낌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낯선 악마가 주는 술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마시려고 했겠지.”
“…….”
“오늘 같은 날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고개를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남자의 얼굴 위로 화려한 조명이 반짝인다. 눈부시지도 않은지 느긋한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악마구나, 이 남자. 어딘가 교태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둔한 유리가 보기에도 딱 악마 같았다.
잔뜩 찢어진 검은 바지에 헐렁하게 걸친 라이더재킷도 그렇고 귀에 주렁주렁 매달린 은색 피어싱과 엷게 구불거리는 백금발 머리카락도, 그 아래로 보이는 나른한 시선까지 천사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꼭 놀리듯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붉은 입술도, 모두 다.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멍하게 훑어보던 유리는 어쩐지 숨이 가빴다. 왜 이렇게 숨이 차지. 잔에 남아 있던 얼음 하나를 입 안에서 굴리며 볼을 볼록하게 만들다가 이내 작아진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삼켰다.
정신이 들었던 것도 잠시, 얼음이 사라지고 나니 다시 몽롱해진다. 몸이 점점 늘어지는 것 같다. 꼭 흐늘흐늘하게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높은 의자를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며 멍하니 입을 다물고 있던 유리는 문득 손목에 감겨 오는 하얀 손을 보며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더 있으면 기절 하겠네.”
“…….”
“일단 나가자.”
“……어디로?”
“어디든.”
“왜?”
“나가서 이야기해 줄게.”
“여기서는 안 돼?”
“와, 이거 은근 고집 있네.”
말갛게 생겨서는 말 잘 들을 줄 알았더니. 남자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지만 자신을 비웃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지. 유리의 머릿속에 흐릿한 망설임이 둥실 떠올랐지만 몽롱한 기분 속으로 금방 흩어졌다.
남자는 다시 멈춰 버린 유리를 보며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긋한 움직임으로 손을 뻗었다. 허리에 남자의 손이 감기며 갑작스럽게 일으켜 세워진 유리는 흡, 하고 숨을 삼켰다.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몽롱했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남자는 비틀거리는 유리의 허리를 얇고 단단한 팔로 감싸 안았다.
똑바로 서서 바라본 남자는 자신보다 키가 아주 조금 더 컸고, 그래서 비슷하게 마주한 두 눈은 한없이 나른해 보였다.
“손 되게 많이 간다, 너.”
천사는 원래 이런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느긋하다. 유리는 힘이 빠진 몸을 멍하게 기대 있다가 문득 억울한 표정으로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넘어지지 않으려 붙잡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꾹꾹 밀어 냈다.
“갑자기 일으켜서 비틀거린 거잖아.”
“뭐야, 나 때문이야?”
“……그래.”
“그래.”
유리의 억지에도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며 웃더니 손을 잡아끌었다.
“어디 가는 건데. 나 오늘 클럽에 놀러 온 거라고…….”
남자는 유리의 부루퉁한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입구로 앞장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머리가 어지러웠던 유리는 금방 불만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남자의 뒤를 비틀비틀 따라 걸었다.
❤
번화가에 숨겨진 작은 공원은 시끄러운 거리와 동떨어진 듯 고요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몇몇 연인들만 은근한 분위기를 풍기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방금 공원에 들어온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이안은 나뭇잎 소리가 스치는 공원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벤치에 푹 늘어진 천사의 옆자리에 기대앉았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색색 숨을 몰아쉬던 천사가 고요해진다. 몽롱하게 풀려 있던 얼굴도 점점 맑아졌다.
턱을 괸 채로 천사를 가만 바라보던 이안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천사는 그런 이안을 보며 주춤 자세를 바꿔 앉았다.
“정신이 좀 들어?”
“……응.”
“이제 고집 안 부리고 이야기 들을 수 있어?”
놀리는 듯 장난기 실린 말에 천사의 얼굴이 다시 부루퉁하게 물든다. 이안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너 거기서 더 있었으면 기절했어.”
이안의 말을 듣던 천사는 의아한 빛을 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멍하게 물어보는 표정이 얼마나 순진한지 이안은 혀끝에 걸린 웃음을 간신히 삼켜야 했다.
“오늘은 악마들만 모이는 날이야. 인간들 개념으로 수요일. 천사들만 오는 날은 목요일이고 나머지 날들은 다들 섞여 있고.”
“아무 날이나 가도 된다고 그랬는데……. 나는 그렇게 들었어.”
“상관은 없지. 네가 문란하게 놀고 싶다면.”
“…….”
“네가 클럽에 오자마자 들이마시던 연기, 그거 다 최음제고 환각제야. 악마들한테는 기분 좋을 정도지만 너 같은 천사한테는 강도가 세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몽롱하게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클럽이 가장 시끄러워지는 시간부터 새벽까지 뿜어 대는 뿌연 연기는 악마들의 몸속을 은근히 달아오르게 만든다. 천사에게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 만큼 독하고, 또 치명적이고.
문제될 건 없었다. 어차피 수요일은 같은 악마들뿐이다. 애초부터 음란한 걸 좋아하는 종족이니까 하룻밤 질펀하게 논다고 해도 전혀 나쁠 게 없다. 천사들과 섞이는 날에는 다른 종족을 만난다는 호기심만 지닌 존재도 있지만, 악마들만 모이는 날은 어차피 그걸 바라고 모이는 것이다. 다만 그런 날에 천사가 떨어지면 흥분감이 증폭될 뿐이었다.
악마들 사이에도 소문은 넘쳐흘렀다. 악마의 날에 천사가 왔는데 죽여주더라, 천사가 작정하면 악마보다 음란하다더라, 모두가 섞이는 날보다 수요일에 만나는 천사가 훨씬 더 즐겁다 등등. 호기심에 모호한 소문까지 더해지니 다들 입맛을 다실 수밖에.
이안은 눈앞의 천사 외에도 수요일에 나타나는 천사를 본 적이 있다. 그 천사는 자신을 둘러싼 악마들 사이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뻗어 오는 손길에 몸을 맡기는 천사는 나름 눈길을 끌었지만, 어차피 이안은 애초에 천사라는 종족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사실 악마와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고, 악마 특유의 날카롭고 서늘한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천사도 어울리지 않게 할 말을 하는 것 말고는 자신의 취향과 정반대다. 그런데도 계속 시선이 가고 흥미로운 걸 보면 자신도 악마이긴 한 건가 싶었다.
이안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천사를 보며 조용히 입술을 올렸다.
“그러니까, 네가 뭣 모르고 얻어 마시려고 했던 술도 위험했다고. 그것까지 마셨으면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걸.”
“……너는 악마라서 마셔도 괜찮고?”
“돌아가면서 강간당할 뻔한 마당에 그게 궁금해?”
천사는 거기까진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멍한 얼굴로 아, 하며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이안은 괜히 시선이 가는 천사의 가느다란 손끝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어쨌든 갑작스럽게 클럽에서 끌려 나온 천사가 이 상황을 이해할 만큼은 설명한 것 같다. 낮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벤치에 몸을 기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반쯤 눈을 감던 이안은 문득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얘는 또 뭐가 문제야.
천사는 말간 얼굴을 시무룩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부루퉁해진 입술로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엄청 기대했는데 이게 뭐야. 하필이면 날도 잘못 선택하고…….”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
“그렇긴 한데, 난 처음이었잖아. 재밌기만 할 줄 알았는데 놀지도 못하고, 악마들 날이니까 클럽에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안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나는 처음에 어땠더라?
1.
“와…….”
어둑한 골목의 깊은 곳이었다. 어딘가 흐릿하고 묘하게 이질적인 클럽의 입구를 보며 유리는 들뜬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생겼구나.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본 입구에는 성의 없이 휘갈긴 듯한 글자가 쨍한 연두색과 분홍색의 네온사인으로 빛나고 있었다.
CLUB MIDNIGHT.
두꺼운 문을 한 겹 지난 음악 소리는 베이스의 묵직한 진동이 쿵쿵 흘러나왔다.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은 날개 끝까지 설렘에 떨리는 것 같았다.
“신기하다…….”
이제껏 말로만 들었던 클럽은 천사들이 사는 곳과 악마들이 사는 곳의 중간, 그러니까 인간들의 땅에 숨겨져 있었다.
색다른 유희에 가까웠다.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 서로를 만날 수도 있고 빠르게 들썩이는 음악이나 술까지도 인간들의 밤과 똑같이 돌아가는, 그래서 천사나 악마에게는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 공간.
혼자 인간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기도 했다. 천사든, 악마든.
유리는 다시 들뜬 표정으로 웃었다. 하얀 니트와 까맣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정리하고 입구로 걸어갔다. 클럽의 입구에는 꼭 곰처럼 덩치 큰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남자의 표정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천사?”
……왜 저렇게 보는 걸까. 오면 안 되는 데 온 것처럼. 분명 먼저 다녀온 다른 천사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자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남자는 다행히 몸을 비키며 문을 열어 주었고, 유리는 남자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허리까지 꾸벅 숙여 인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입구에 들어섰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날을 모르고 찾아온 것 같기는 한데……. 뭐 겪어 보고 배우는 것도 괜찮겠지.”
문을 열자마자 훅 풍겨 오는 몽롱한 기운과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에 정신이 팔린 유리에게는 그 말이 귓가에 닿지도 못한 채 흩어졌다. 꼭 다른 세계로 가는 듯 어둑하고 반짝거리는 곳으로 유리가 사라지고, 클럽의 입구는 다시 단단하게 닫혔다.
❤
“진짜 많다…….”
이게 다 천사랑 악마란 말이야?
정신없이 돌아가는 조명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넓은 플로어는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뿌옇고 몽롱한 연기를 들이마실수록 몸이 나른해졌다. 기분은 하늘까지 붕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유리는 이내 아, 하며 술이 가득 줄지어 있는 바의 끄트머리로 다가갔다.
아무거나 시키면 되나……?
술이라고는 포도주 말고 마셔 본 적도 없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어 허리까지 오는 검은 바에 몸을 기울이고 손을 흔들었다. 금방 다가온 여자의 눈은 짙은 화장으로 눈꼬리가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천사?”
그리고 또 유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자꾸 천사냐고 물어보는 걸까. 분명 천사든 악마든 와도 되는 클럽인데. 유리도 얼떨결에 고개를 기울이다가 일단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한참이나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덩달아 당혹스럽게 멈춰 있던 유리는 그냥 여자의 뒤쪽에 붙은 메뉴 중 아무거나 적당히 주문하고 높은 의자에 살며시 앉았다.
“신기하네. 나는 누가 천사고 누가 악마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오는 걸까.
여자가 빠르게 만들어 준 칵테일을 한 모금씩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던 유리는 문득 자신이 살고 있는 천계 변두리의 고요한 집을 떠올렸다. 뭉글하고 하얀 구름 위에 딱 한 채씩 지어진 집은 천사로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할 능력이 됐을 때 자연스럽게 지급됐다. 아직은 인간들이 좋은 꿈을 꾸게 하는 일 정도만 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 신전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쁘지 않았다.
해가 뜨면 조용하게 일어나 신에게 기도하고, 별과 달이 뜨면 잠시 인간계에 내려와 그 날 자신에게 할당된 몇몇 인간들에게 좋은 꿈을 꾸게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오래도록 그런 잔잔한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생명을 보는 것도, 심장까지 쿵쿵 울리는 빠른 음악을 듣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다.
하긴, 내가 사는 구역의 천사도 다 모르는걸.
클럽 안을 천천히 둘러보는 유리의 눈빛은 더욱 흥미롭게 반짝였다.
“혼자 왔어?”
유리는 문득 자신의 앞에 슥 밀려오는 술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진짜 이런 것도 있구나.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던 유리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혼자 왔어요.”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별 의심도 없이 남자가 쥐여 준 술잔을 받아 들었다. 조금 전까지 마시던 것보다 훨씬 진하고 독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것조차 그저 다른 술인가 보다 생각하고 앞에 선 남자를 신기하게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천사일까, 악마일까.
천사라고 해도 날카로운 외모를 가진 이들이 많았고 악마라고 해도 선한 외모를 가진 경우는 많았다. 인간은 정반대라고 생각하는 두 존재는 사실 육안으로 구분되지 않았고, 타고난 분위기로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도 예민한 감각을 가지지 않으면 힘들다.
그리고 태어나서 악마라고는 만나 본 적도 없는 유리는 사실상 이렇게 살펴봐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순한 얼굴로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앞에 선 남자는 음습한 시선을 숨기지 않은 채 유리를 아래위로 훑었다.
여기는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것 같아. 이 남자도 그렇고.
유리는 목덜미에 적나라하게 닿아 오는 남자의 시선과 처음 클럽에 들어올 때부터 여기저기서 닿아 오던 짙은 시선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안 마실 거야?”
가만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는 문득 귓가에 속삭이는 남자를 한번 보고, 남자가 준 술도 내려다보았다.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칵테일 잔에 벌써 물기가 맺히고 있었다.
조금 보채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클럽 안에 가득한 몽롱한 연기 때문인지 남자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얼른 마셔. 손등까지 톡 건드리는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서늘한 유리잔을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댔다.
❤
어두운 클럽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앉아 있던 이안은 꼬았던 다리를 바꾸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관찰하는 듯 날카로운 시선의 끝에는 저 혼자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제 앞에 선 악마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악마의 표정은 딱 봐도 음험하고 난잡했지만 그것도 가늠하지 못하는 듯 순하게.
저런 애가 왜 혼자 여기에 왔을까. 그것도 이런 날에. 이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뿌연 연기를 느릿하게 들이쉬었다.
사실 클럽은 자주 오지 않았다. 오늘같이 악마들만 모이는 날에만 한 번씩 오는 게 다였다. 이른 시간에 와서 술 몇 잔을 마시다, 결국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어 일찍 클럽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이안은 가장 시끄럽고 문란해지는 시간에 입구로 들어오는 하얀 남자를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뭐야, 천사?
날개를 보지 않으면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다지만, 하얀 옷을 입고 들어선 남자는 누가 봐도 천사였다.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 반짝이는 눈은 못내 신기한 걸 보듯 도로록도로록 바쁘게 굴렀고, 술을 한 모금씩 마시며 조금 벌어지는 입술은 야한 짓이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것처럼 맑았다.
저렇게 천사 같은 애는 또 처음 보네. 인간들이 말하는 천사 같다는 의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깨끗하고, 온화하고, 착하고, 뭐 그런 것들. 원래 천사라는 생명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진하거나 착하지만은 않지만, 멀리 앉아 있는 천사는 그 모든 것들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눈치는 조금 없는 것 같고.”
이안은 천사에게 떨어지는 수많은 시선을 천천히 둘러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온통 까맣기만 한 악마들 사이에서 눈송이 하나 떨어진 듯 저 혼자 하얀 천사는 이미 이곳저곳에서 음험한 시선을 한가득 받고 있었다. 저기 서서 천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악마는 아마 혼자가 아닐 테다.
“역시 그렇지.”
이안은 흘긋 시선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어둑한 클럽 한구석에서 자신과 같은 곳을 지켜보고 있는 무리들은 저 순진한 천사를 오늘 다 같이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빛이 번들거렸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오늘은 암묵적으로 악마들만 모이는 날이었고, 알 만한 존재들은 다 알고 있어서 천사의 출입은 거의 없었다. 천사들만 모이는 날에 악마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그건 일종의 룰이었다.
상대 종족의 출입이 금지된 건 아니지만 위험하다. 천사의 날에 악마가 오는 것, 악마의 날에 천사가 오는 것, 그건 곧 자신을 아무렇게나 굴려도 좋다는 뜻이니까. 까놓고 말하면 다수라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지가지 하네.”
물론 자신도 악마니까 그런 음험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관심은 없지만 머릿속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타고나기를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게 악마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천사는 이 클럽의 숨겨진 룰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저 의심스러운 술을 받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겠지. 저 악마는 천사가 룰을 모르고 있다는 걸 벌써 눈치챘고, 머릿속으로는 클럽의 숨겨진 룸에서 순진한 천사 하나를 둔 자기들만의 난교 파티를 벌이고 있을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바짝 태운 담배를 비벼 끄고는 걸터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흰색에 가까운, 부스스한 금발머리를 느긋하게 쓸어 넘기며 악마들 사이를 지났다. 그리고 눈앞에 점점 가까워지는 천사의 뒷모습을 보며 고요하게 웃었다.
이제 막 술잔을 기울이는 천사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허리를 숙였다. 움찔 놀라는 몸짓이 꼭 작은 새를 손에 감싼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사가 들고 있던 술잔에 손을 뻗었다.
❤
“어……?”
유리는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손에서 슥 빠져나가는 술잔을 눈으로 따라가며 고개를 돌렸다. 클럽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술은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 낯선 남자의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허락도 없이 가져간 술을 한 번에 마셔 버린 남자는 나른하게 웃으며 술을 준 남자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독하게도 탔네.”
“…….”
“기절이라도 시켜서 데려가려고 한 거야?”
“……아, 씨발.”
“딱 봐도 뭣 모르는 애잖아. 적당히 하지?”
혀까지 꺼내 입맛을 다시며 입술 끝을 올리던 남자는 어딘가 서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술을 줬던 남자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욕을 짓씹었다.
무슨 상황이지.
유리는 허공에서 어색하게 떠 있던 손가락을 움츠렸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듯 뒤에 선 남자와 언짢은 얼굴로 휙 가 버리는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
여기는 원래 분위기가 이런가. 신기하긴 한데 도무지 적응하기가 힘들다. 다른 천사들한테 들었을 때는 마냥 재밌기만 할 줄 알았는데.
유리는 어색한 숨을 삼키며 꾸물꾸물 손장난을 치다가 흘긋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얼음물을 마시다가 반쯤 남은 물을 자신에게 건넸다. 색이 엷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가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딘지 흥미로운 것 같기도 했다.
유리는 남자가 건넨 차가운 물을 조심스럽게 받아 단번에 들이켜고는 젖은 입가를 닦았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 빤히 바라보는 금발의 남자를 자신도 가만 바라보았다.
“너 여기 처음 왔지?”
……어떻게 알았지.
웃음 섞인 남자의 말투는 당연한 걸 말하듯 담담하고 나긋했다. 유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응, 하고 대답했다. 뿌연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기분이 점점 더 몽롱해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왔지만 남자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소리 내 웃었다. 쇳소리가 조금 섞여 있었지만 퍽 맑은 느낌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낯선 악마가 주는 술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마시려고 했겠지.”
“…….”
“오늘 같은 날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고개를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남자의 얼굴 위로 화려한 조명이 반짝인다. 눈부시지도 않은지 느긋한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악마구나, 이 남자. 어딘가 교태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둔한 유리가 보기에도 딱 악마 같았다.
잔뜩 찢어진 검은 바지에 헐렁하게 걸친 라이더재킷도 그렇고 귀에 주렁주렁 매달린 은색 피어싱과 엷게 구불거리는 백금발 머리카락도, 그 아래로 보이는 나른한 시선까지 천사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꼭 놀리듯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붉은 입술도, 모두 다.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멍하게 훑어보던 유리는 어쩐지 숨이 가빴다. 왜 이렇게 숨이 차지. 잔에 남아 있던 얼음 하나를 입 안에서 굴리며 볼을 볼록하게 만들다가 이내 작아진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삼켰다.
정신이 들었던 것도 잠시, 얼음이 사라지고 나니 다시 몽롱해진다. 몸이 점점 늘어지는 것 같다. 꼭 흐늘흐늘하게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높은 의자를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며 멍하니 입을 다물고 있던 유리는 문득 손목에 감겨 오는 하얀 손을 보며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더 있으면 기절 하겠네.”
“…….”
“일단 나가자.”
“……어디로?”
“어디든.”
“왜?”
“나가서 이야기해 줄게.”
“여기서는 안 돼?”
“와, 이거 은근 고집 있네.”
말갛게 생겨서는 말 잘 들을 줄 알았더니. 남자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지만 자신을 비웃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지. 유리의 머릿속에 흐릿한 망설임이 둥실 떠올랐지만 몽롱한 기분 속으로 금방 흩어졌다.
남자는 다시 멈춰 버린 유리를 보며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긋한 움직임으로 손을 뻗었다. 허리에 남자의 손이 감기며 갑작스럽게 일으켜 세워진 유리는 흡, 하고 숨을 삼켰다.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몽롱했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남자는 비틀거리는 유리의 허리를 얇고 단단한 팔로 감싸 안았다.
똑바로 서서 바라본 남자는 자신보다 키가 아주 조금 더 컸고, 그래서 비슷하게 마주한 두 눈은 한없이 나른해 보였다.
“손 되게 많이 간다, 너.”
천사는 원래 이런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느긋하다. 유리는 힘이 빠진 몸을 멍하게 기대 있다가 문득 억울한 표정으로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넘어지지 않으려 붙잡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꾹꾹 밀어 냈다.
“갑자기 일으켜서 비틀거린 거잖아.”
“뭐야, 나 때문이야?”
“……그래.”
“그래.”
유리의 억지에도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며 웃더니 손을 잡아끌었다.
“어디 가는 건데. 나 오늘 클럽에 놀러 온 거라고…….”
남자는 유리의 부루퉁한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입구로 앞장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머리가 어지러웠던 유리는 금방 불만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남자의 뒤를 비틀비틀 따라 걸었다.
❤
번화가에 숨겨진 작은 공원은 시끄러운 거리와 동떨어진 듯 고요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몇몇 연인들만 은근한 분위기를 풍기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방금 공원에 들어온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이안은 나뭇잎 소리가 스치는 공원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벤치에 푹 늘어진 천사의 옆자리에 기대앉았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색색 숨을 몰아쉬던 천사가 고요해진다. 몽롱하게 풀려 있던 얼굴도 점점 맑아졌다.
턱을 괸 채로 천사를 가만 바라보던 이안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천사는 그런 이안을 보며 주춤 자세를 바꿔 앉았다.
“정신이 좀 들어?”
“……응.”
“이제 고집 안 부리고 이야기 들을 수 있어?”
놀리는 듯 장난기 실린 말에 천사의 얼굴이 다시 부루퉁하게 물든다. 이안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너 거기서 더 있었으면 기절했어.”
이안의 말을 듣던 천사는 의아한 빛을 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멍하게 물어보는 표정이 얼마나 순진한지 이안은 혀끝에 걸린 웃음을 간신히 삼켜야 했다.
“오늘은 악마들만 모이는 날이야. 인간들 개념으로 수요일. 천사들만 오는 날은 목요일이고 나머지 날들은 다들 섞여 있고.”
“아무 날이나 가도 된다고 그랬는데……. 나는 그렇게 들었어.”
“상관은 없지. 네가 문란하게 놀고 싶다면.”
“…….”
“네가 클럽에 오자마자 들이마시던 연기, 그거 다 최음제고 환각제야. 악마들한테는 기분 좋을 정도지만 너 같은 천사한테는 강도가 세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몽롱하게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클럽이 가장 시끄러워지는 시간부터 새벽까지 뿜어 대는 뿌연 연기는 악마들의 몸속을 은근히 달아오르게 만든다. 천사에게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 만큼 독하고, 또 치명적이고.
문제될 건 없었다. 어차피 수요일은 같은 악마들뿐이다. 애초부터 음란한 걸 좋아하는 종족이니까 하룻밤 질펀하게 논다고 해도 전혀 나쁠 게 없다. 천사들과 섞이는 날에는 다른 종족을 만난다는 호기심만 지닌 존재도 있지만, 악마들만 모이는 날은 어차피 그걸 바라고 모이는 것이다. 다만 그런 날에 천사가 떨어지면 흥분감이 증폭될 뿐이었다.
악마들 사이에도 소문은 넘쳐흘렀다. 악마의 날에 천사가 왔는데 죽여주더라, 천사가 작정하면 악마보다 음란하다더라, 모두가 섞이는 날보다 수요일에 만나는 천사가 훨씬 더 즐겁다 등등. 호기심에 모호한 소문까지 더해지니 다들 입맛을 다실 수밖에.
이안은 눈앞의 천사 외에도 수요일에 나타나는 천사를 본 적이 있다. 그 천사는 자신을 둘러싼 악마들 사이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뻗어 오는 손길에 몸을 맡기는 천사는 나름 눈길을 끌었지만, 어차피 이안은 애초에 천사라는 종족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사실 악마와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고, 악마 특유의 날카롭고 서늘한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천사도 어울리지 않게 할 말을 하는 것 말고는 자신의 취향과 정반대다. 그런데도 계속 시선이 가고 흥미로운 걸 보면 자신도 악마이긴 한 건가 싶었다.
이안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천사를 보며 조용히 입술을 올렸다.
“그러니까, 네가 뭣 모르고 얻어 마시려고 했던 술도 위험했다고. 그것까지 마셨으면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걸.”
“……너는 악마라서 마셔도 괜찮고?”
“돌아가면서 강간당할 뻔한 마당에 그게 궁금해?”
천사는 거기까진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멍한 얼굴로 아, 하며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이안은 괜히 시선이 가는 천사의 가느다란 손끝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어쨌든 갑작스럽게 클럽에서 끌려 나온 천사가 이 상황을 이해할 만큼은 설명한 것 같다. 낮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벤치에 몸을 기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반쯤 눈을 감던 이안은 문득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얘는 또 뭐가 문제야.
천사는 말간 얼굴을 시무룩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부루퉁해진 입술로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엄청 기대했는데 이게 뭐야. 하필이면 날도 잘못 선택하고…….”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
“그렇긴 한데, 난 처음이었잖아. 재밌기만 할 줄 알았는데 놀지도 못하고, 악마들 날이니까 클럽에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안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나는 처음에 어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