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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악마 2화
이제는 놀만큼 놀아서 미드나잇도 생각날 때만 한 번씩 들르지만, 처음 클럽에 갔을 때는 많이 흥미로웠던 것 같다. 간혹 스치기만 했던 천사와 다른 구역의 악마, 하계와 비슷하지만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모든 것들이.
지금은 인간계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걸 더 좋아하지만 그것 역시 즐길 만큼 즐겨서 그렇겠지. 얘는 첫 기억이 어설프게 끝나 버렸고.
“벌써 집에 가기는 아쉽단 말이야.”
천사의 한숨이 더 깊어진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은 이내 소리 없이 웃으며 천사쪽으로 몸을 기울여 앉았다.
“클럽에 가면 뭐 하고 싶었는데?”
“그냥 술도 마시고, 악마는 본 적 없으니까 그것도 궁금했고.”
“그리고?”
“음악 듣고, 춤도 추고, 하룻밤도 보내고…….”
문득 웃음이 터진 이안은 고개를 숙이며 어깨까지 들썩였다. 아, 무슨 저런 얼굴로 하룻밤 같은 말을 하지? 웅얼거리던 입을 꼭 다문 천사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지만 이안은 그 후로 한참이나 더 웃어야 했다.
아, 얘 진짜 재밌네.
여전히 웃음이 가득 섞인 숨을 깊이 들이쉬며 천사와 시선을 엮었다.
“천사도 악마만큼 문란하다더니, 그렇게 아무나 잡고 하룻밤 보내도 벌 안 받아?”
“벌을 왜 받아. 부정적인 기분을 느끼는 것만 아니면 다 괜찮은데. 천사라고 그런 거 안 하는 줄 알아?”
“그래?”
“그래.”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안이 말이 없자 우물쭈물하던 천사는 슬쩍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이랑 하고 싶었다는 뜻은 아니야. 나는 아직 경험도 없고.”
“…….”
“그냥 궁금했다는 거지…….”
말끝을 늘리던 천사는 조용히 웃기만 하는 이안을 보며 민망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고 억울한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술 마시고, 춤추고, 하룻밤 보내고. 뭐 그게 어렵나?
이안은 벤치에 걸치고 있던 팔을 뻗어 천사의 볼을 톡 건드렸다. 시무룩한 얼굴이 느릿느릿 돌아본다.
“술 마시고, 춤추고, 그건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는데. 따라올래?”
“……진짜?”
“진짜.”
“…….”
“그리고 내가 악마니까 나 실컷 보면 되겠네. 됐지?”
천사는 문득 맹한 시선을 굴렸다. 그러더니, 근데 그걸 네가 왜 해 줘? 하면서 어이없는 답을 했다. 너 진짜 이상한 데서 고집 부린다. 이안은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냥 너 재밌어서.”
“…….”
“아니면,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은근한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끝을 늘렸다. 자신을 가만 바라보던 천사는 조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클럽에서 위험했던 건 다 잊어버린 건지, 또 의심 없이 그러겠다는 천사가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이렇게 상대방을 잘 믿어서 어쩐다. 자신이야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지만, 다른 날 클럽에 오면 이 천사는 꼭 오늘처럼 위험할 것 같다.
이안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고 천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야 시무룩한 기운을 털어 낸 천사가 다시 눈을 반짝거리며 손을 마주 잡았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닿아 온 천사의 손을 고쳐 잡고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
유리는 악마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화폐로 익숙하게 계산하고 물건을 챙겨 드는 악마가 신기하기만 하다. 자신은 천사인 게 들킬까 지나가는 인간도 조심조심 피하며 눈치를 보는데 앞에 있는 악마는 자연스럽게 편의점에 들어가 무언가를 샀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악마는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며 가볍게 웃었다.
“신기해서. 너는 겁 안 나?”
“뭐가? 인간이랑 접촉하는 거?”
“응.”
“나는 자주 돌아다니니까.”
악마의 목소리는 어딘지 여유롭게 느껴졌다. 복잡한 길을 막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도 익숙해 보이고. 나도 자주 내려오면 이렇게 되나. 유리의 머릿속에 은근한 기대감이 차올랐지만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사람들을 피하며 주춤거렸다. 악마는 그런 자신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밤거리를 조금 걸어 도착한 건물은 고요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가장 꼭대기 층을 누른 악마는 제일 높은 층에 내려서도 비상계단으로 한 층 더 올라갔다.
“어디까지 가는 건데?”
어둡고 조용하기만 한 비상계단을 따라 오르며 유리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악마는 그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 왔어.”
단단하게 잠겨 있던 문은 악마가 손을 대자마자 찰칵, 하며 잠금 장치가 풀렸고 끼익 하는 녹슨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렸다. 자신을 잡아끄는 악마를 따라 문밖으로 나간 유리는 훤하게 트인 넓은 공간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삐죽거리던 입술이 멍하게 풀어졌다.
“와…….”
난간 가까이에서 바라본 풍경은 천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훨씬 더 선명했고, 색색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저 멀리 보이는 큰 강은 수많은 자동차 빛이 빠르게 움직였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불빛은 수면에 반사되어 빛났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밤하늘에는 둥근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사이사이 별들도 빛났다. 천계에서 보던 별보다는 훨씬 그 수가 적었지만, 눈앞의 야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마음에 들어?”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 왔다. 유리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돌렸다. 악마의 밝은 머리카락이 강바람에 시원하게 휘날렸다. 유리는 가느다랗게 휘어진 눈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마음에 들어. 악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 바로 밑에 LP 바가 있어. 사람들이 술 마시면서 음악 듣는 곳”
“그렇구나…….”
“이맘때에는 창문을 열어 놔서 음악이 잘 들려. 나만 아는 곳이었는데, 같이 오는 것도 괜찮네.”
유리는 느리게 내밀어진 악마의 손을 잡고 아슬아슬한 난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턱이 높지 않은 난간은 발을 잘못 디디면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만큼 위험했지만 상관없었다. 악마도 자신도 보이지 않는 날개를 숨기고 있으니 괜찮았다.
넓은 옥상에는 하얀 달빛만 떨어졌다. 유리는 까마득한 아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며 발을 살랑살랑 움직였다. 옆에 앉아 있던 악마가 부스럭거리며 봉투를 당겨 오더니 유리에게 맥주 캔을 내밀었다.
유리는 차갑게 식은 캔을 받아 들고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뭔지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이리저리 난감하게 살폈다.
……이거 뭐야, 어떻게 하는 거야.
단단한 마개 쪽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려 보던 유리는 이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턱을 괴고 느긋하게 지켜보던 악마는 유리가 시무룩해지자마자 가벼운 웃음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도 생각한 건데, 너 진짜 손 많이 가는 거 알아?”
웃음 섞인 말투가 꼭 놀리는 것 같다. 유리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린 맥주 캔을 다시 받다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악마를 흘겼다.
“처음이라서 그래. 너는 뭐 처음부터 잘했어?”
“응.”
“…….”
“나는 처음부터 잘했어.”
“씨…….”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옆에서 느긋하게 웃는 이 악마는 정말 처음부터 뭐든지 잘했을 것 같아서 말문이 막혔다.
불만스럽게 입술을 우물거리던 유리는 아직 따지 않은 맥주 캔을 들고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방금 악마가 뚜껑을 열던 움직임을 기억하며 손가락 끝을 세웠다.
마음이야 그랬지만 틱, 틱, 하며 어설프게 튕겨 나가는 손가락은 한참이나 꾸물거렸다. 고개를 기울인 악마가 자신의 손끝을 보며 미묘하게 웃는 것도 모른 채 유리는 오래도록 집중했다.
“내가 할까?”
“아니, 거의 다 됐어. 내가 해 줄 거야.”
“거기 벌어진 틈에 손가락 넣고 조금 더 벌려 봐.”
“……이렇게?”
“그렇지. 그리고 힘줘서, 당겨.”
순간 칙, 하며 탄산이 터졌다. 유리는 하얗게 오르는 거품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세우고 악마에게 캔을 내밀었다. 웃음을 참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악마가 캔을 받아 가며 시선을 마주쳤다.
“잘하네. 고마워.”
웃음이 스민 얼굴을 보며 유리는 어쩐지 신경 쓰이는 귓가를 살살 긁었다. 뭘까, 왜 이렇게 간지럽지……. 처음부터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긴 했지만 방금 본 얼굴은 이상하게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꼭 칭찬하듯 눈을 내리깐 악마의 나른한 표정이 머릿속에 훅, 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뜨끈뜨끈한 볼을 식히던 유리는 문득 자신의 캔에 톡 하고 부딪치는 다른 맥주 캔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짠, 하는 거야.”
“마시기 전에?”
“응.”
살짝 부딪치면서 일어난 엷은 진동이 기분 좋았다. 손가락 끝부터 간질이는 것 같았다. 짠, 하는 거구나. 유리는 맥주 캔을 기울이는 악마에게 환하게 웃으며 다시 캔을 내밀었다.
“한 번 더 하자. 짠, 그거 한 번 더 해.”
머금고 있던 맥주를 느긋하게 삼킨 악마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캔을 내밀었고 유리는 짠, 하고 속삭이며 캔을 부딪쳤다. 처음 마셔 보는 탄산이 톡톡 터지며 입 안을 간질였다.
유리는 한 입씩 마시는 이 신기한 술의 톡 터지는 맛이 지금 악마와 있는 자신의 몸속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간지럽고 찌릿하게 톡, 톡.
❤
발아래 반짝이는 야경이 갈수록 더 몽롱하게 번져 갔다. 유리는 맥주 한 캔에 붕붕 떠오르는 기분을 한껏 느끼며 허공에 떠 있는 발을 달랑달랑 움직였다. 어느새 새벽으로 넘어간 하늘은 별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공기는 맑고 시원했다. 은은한 음악이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기분 좋아. 유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문득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몸을 지탱하려 바닥을 짚은 손이 악마의 손가락 끝과 살짝 닿아 있었다. 하얗고 긴 손이 꼭 장난치듯 자신의 손가락 끝을 톡 건드렸다. 주춤 손가락을 움츠리던 유리는 고개 돌린 악마를 가만 보다가 이내 부끄럽게 웃었다.
“저기, 너는 이런 데 어떻게 알았어?”
“그냥 음악이 들리는 곳 찾다가 우연히.”
“클럽도 음악 나오잖아.”
“그렇긴 한데 많이 시끄럽지. 늘 가고 싶은 곳은 아니야.”
악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리는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앞의 악마에겐 이런 고요한 곳보다는 번쩍거리는 클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구불거리는 하얀 머리카락에 화려한 조명이 떨어지는 것도 예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익숙해 보이는 행동도 그렇고.
머릿속은 그랬지만 눈으로 보는 악마의 매끄러운 옆모습은 달빛이 떨어지는 이곳도 퍽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유리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와 나란히 걸터앉아 밤바람을 쐬며 야경을 구경했다. 까만 하늘을 메운 별과 달도 보고, 또 끊이지 않는 음악까지 듣다 보니 어느새 맥주 한 캔이 다 비어 있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훌쩍 마신 악마가 텅 비어 버린 캔을 한 손으로 찌그러트렸다. 그것조차 신기하게 보던 유리도 자신의 캔을 뽀작뽀작 구겼다. 더 이상 찌그러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구기고 나서 뿌듯하게 웃자마자 악마의 휘어진 눈매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또 귓가가 간질거린다. 조금 부끄럽게 웃던 유리는 뜨거운 목덜미를 살살 만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뭐가?”
“그냥, 나는 여기 놀러 온 게 처음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나쁜 기억만 남을 뻔했잖아. 그런데 너랑 만나서 이렇게 반짝거리는 데도 오고, 음악도 듣고, 술도 마시고 하니까 좋아서.”
춤 못 춘 건 조금 아쉽지만. 유리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못 한 건 있지만 지금도 충분히 좋았다. 이대로 천계에 돌아가더라도 좋은 기억만 남을 것 같았다.
나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악마는 조용히 웃었다. 그러고는 느슨하게 기울어져있던 허리를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유리에게 천천히 몸을 기울이고 손을 내밀었다.
“나랑 춤출까?”
“어, 여기서?”
유리는 멍하게 풀어진 표정으로 더듬더듬 물어봤지만 손은 이미 악마의 여유로운 손끝에 닿아 있었다. 주춤거리며 손바닥까지 닿도록 맞잡자마자 악마는 가벼운 몸짓으로 유리를 일으켜 세웠다.
“아, 잠깐만.”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중심을 잃은 유리가 조금 비틀거렸다. 그때 허리에 단단하게 감겨 온 팔이 휘청거리는 유리의 몸을 안정감 있게 당겨 갔다. 유리는 가까이 있는 악마의 눈을 보며 잠깐 숨을 참았다.
“뭐 어때. 여긴 플로어도 넓고…….”
꼭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악마가 달빛이 훤한 옥상을 빙 둘러보았다.
“마침 음악도 좋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마주치며 매끄럽게 웃었다.
바람 소리처럼 익숙해져서 들리지 않던 음악이 악마의 그 나긋한 말 하나로 다시 귓가에 은은하게 흘러들었다. 옅은 휘파람 소리가 짧게 지나가고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유리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악마의 팔을 한번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코앞에 있는 악마의 은은한 미소도 빤히 보다가 이내 작게 웃어 버렸다.
“다른 손은 내 어깨에 올리고, 그렇지.”
마주잡은 손이 어깨 높이의 허공에서 흔들린다. 느린 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따라 손을 올리고 나서는 꼭 바람을 타는 것처럼 몸이 움직였다. 손과 허리를 부드럽게 감싼 악마의 몸짓을 어색하게 쫓아가는 것뿐이었지만, 살랑살랑 흔들리는 몸은 기분 좋았다.
“여기 힘을 더 풀어 봐.”
문득 허리에 닿아 있던 악마의 손이 피부를 은근하게 간질였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은 악마가 톡 건드린 허리부터 스르르 늘어졌다.
“뭐야, 간지럽잖아…….”
“대신 더 즐거워졌잖아.”
……악마는 다 이렇게 말을 잘하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악마를 보며 유리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우물거렸다. 하지만 확실히 몸은 아까보다 더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고, 결국 마음도 몸처럼 스르르 풀어졌다. 발갛게 물든 유리의 얼굴을 보며 악마도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자, 손 놓지 말고 그대로.”
어, 어? 허공에 떠 있던 손이 문득 머리 위로 올라가고 익숙하게 끌어가는 악마의 손길을 따라 몸이 빙글 돌아갔다. 당혹스럽게 깜빡이는 시선 안으로 주변의 풍경이 한 번에 들어왔다. 저 멀리 흐르는 강, 강에 비치는 가로등의 조명, 반짝이는 야경, 하늘에 떠 있는 하얀 달과 별까지.
그리고 다시 부드럽게 몸이 끌려가며 잘했다는 듯 웃어 주는 악마의 얼굴도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허리가 다시 안기면서 한 손을 마주 잡은 처음의 자세로 돌아왔지만 심장은 처음보다 더욱 세게 뛰었다.
음, 방금 했던 게 많이 재밌었나 봐.
유리는 가슴속에서 간질거리는 감정을 곱씹으며 그저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다시 몸을 좌우로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조차 아까보다 훨씬 즐거운 것 같았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악마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쇳소리가 살짝 섞이는데도 맑고 부드러웠다. 유리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며 엷게 흥얼거리는 악마를 가만 바라보았다. 밝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도, 귓가에 빼곡하게 걸린 귀걸이도 반짝인다. 그리고 긴 속눈썹이 드리운 눈은 다른 것보다 더욱 은은하게 반짝였다.
확실히 천사랑은 달라. 훨씬 더 눈길이 가고 빠져드는 것 같아. 유리는 악마의 어깨에 올라간 손을 꾸물거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
문득 부드럽게 흥얼거리던 악마의 노랫소리가 끊어지고, 유리를 자연스럽게 리드하던 몸도 멈칫했다. 왜? 유리는 아직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의아하게 물었다. 악마는 바람 빠지는 듯 웃으며 눈을 감았다.
“왜 그러는데…… 아, 어……!”
순간 허리에 닿아 있던 악마의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유리는 다급한 손길로 악마의 어깨를 붙잡았다. 허공에 반쯤 누워 눈을 동그랗게 뜨자마자 악마가 나른한 미소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로 있다가는 사고 칠 것 같아서.”
악마는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역시 악마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게 뭐야. 유리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봤지만 악마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것도 춤추는 거야.”
“이게?”
“응.”
“……안 무거워?”
“너 천사잖아.”
가벼워. 깃털 같아. 악마의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괜히 부끄럽게 터지는 웃음을 삼켰다. 뒤로 기울어져 있던 몸이 다시 세워졌다. 이번에도 충분히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역시 조금 휘청거리던 유리는 가까이 있던 악마의 목덜미를 덥석 끌어안았다.
온몸이 맞닿은 자세탓에, 안 그래도 쿵쿵거리던 심장이 더욱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괜찮아.”
“…….”
“이대로 있어.”
악마는 허리에 팔을 감고 속삭였다. 그리고 주춤 떨어지려던 유리를 가만 멈추게 했다. 이것도 춤추는 거야? 유리는 말간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조용하던 악마는 이내 가볍게 웃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천계에도 이런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기분 좋은데 왜 없지? 아, 그래서 다들 인간계로 놀러오는 건가? 유리는 저 혼자 생각하던 궁금증의 답을 내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꼭 안고 있던 악마의 어깨에 볼을 기대 눈을 감았다.
잘하네. 웃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허리를 감싼 악마의 팔은 더욱 단단해졌다. 안정감을 느낄 만큼의 힘에, 유리는 마음을 놓고 안겨 있었다.
“……있잖아.”
“응.”
“클럽에서 나 이상한 술 마실 뻔했을 때…… 생각해 보니까 만약에 마셨다고 해도, 너라면 괜찮았을 것 같아.”
“…….”
“……좋았을 것 같기도 해.”
악마는 말갛게 웃는 유리의 허리를 고쳐 안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위험한 말을 하네.”
“뭐가 위험해. 너는 하나도 안 위험한데.”
“그래, 고마워.”
그래도 다른 악마한테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따라붙는 얕은 한숨에 웃음이 스며 있었다. 유리는 악마의 어깨에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몰래 입술을 올렸다. 손끝을 세워 라이더 재킷에 장식된 아일렛을 톡톡 만지다가 다시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몸은 시원한 밤바람을 타듯 살랑살랑 흔들리고, 동동 떠오르는 기분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는 음악처럼 두근거렸다. 맞닿은 몸으로 따뜻한 체온이 가득 번졌다.
이제는 놀만큼 놀아서 미드나잇도 생각날 때만 한 번씩 들르지만, 처음 클럽에 갔을 때는 많이 흥미로웠던 것 같다. 간혹 스치기만 했던 천사와 다른 구역의 악마, 하계와 비슷하지만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모든 것들이.
지금은 인간계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걸 더 좋아하지만 그것 역시 즐길 만큼 즐겨서 그렇겠지. 얘는 첫 기억이 어설프게 끝나 버렸고.
“벌써 집에 가기는 아쉽단 말이야.”
천사의 한숨이 더 깊어진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은 이내 소리 없이 웃으며 천사쪽으로 몸을 기울여 앉았다.
“클럽에 가면 뭐 하고 싶었는데?”
“그냥 술도 마시고, 악마는 본 적 없으니까 그것도 궁금했고.”
“그리고?”
“음악 듣고, 춤도 추고, 하룻밤도 보내고…….”
문득 웃음이 터진 이안은 고개를 숙이며 어깨까지 들썩였다. 아, 무슨 저런 얼굴로 하룻밤 같은 말을 하지? 웅얼거리던 입을 꼭 다문 천사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지만 이안은 그 후로 한참이나 더 웃어야 했다.
아, 얘 진짜 재밌네.
여전히 웃음이 가득 섞인 숨을 깊이 들이쉬며 천사와 시선을 엮었다.
“천사도 악마만큼 문란하다더니, 그렇게 아무나 잡고 하룻밤 보내도 벌 안 받아?”
“벌을 왜 받아. 부정적인 기분을 느끼는 것만 아니면 다 괜찮은데. 천사라고 그런 거 안 하는 줄 알아?”
“그래?”
“그래.”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안이 말이 없자 우물쭈물하던 천사는 슬쩍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이랑 하고 싶었다는 뜻은 아니야. 나는 아직 경험도 없고.”
“…….”
“그냥 궁금했다는 거지…….”
말끝을 늘리던 천사는 조용히 웃기만 하는 이안을 보며 민망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고 억울한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술 마시고, 춤추고, 하룻밤 보내고. 뭐 그게 어렵나?
이안은 벤치에 걸치고 있던 팔을 뻗어 천사의 볼을 톡 건드렸다. 시무룩한 얼굴이 느릿느릿 돌아본다.
“술 마시고, 춤추고, 그건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는데. 따라올래?”
“……진짜?”
“진짜.”
“…….”
“그리고 내가 악마니까 나 실컷 보면 되겠네. 됐지?”
천사는 문득 맹한 시선을 굴렸다. 그러더니, 근데 그걸 네가 왜 해 줘? 하면서 어이없는 답을 했다. 너 진짜 이상한 데서 고집 부린다. 이안은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냥 너 재밌어서.”
“…….”
“아니면,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은근한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끝을 늘렸다. 자신을 가만 바라보던 천사는 조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클럽에서 위험했던 건 다 잊어버린 건지, 또 의심 없이 그러겠다는 천사가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이렇게 상대방을 잘 믿어서 어쩐다. 자신이야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지만, 다른 날 클럽에 오면 이 천사는 꼭 오늘처럼 위험할 것 같다.
이안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고 천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야 시무룩한 기운을 털어 낸 천사가 다시 눈을 반짝거리며 손을 마주 잡았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닿아 온 천사의 손을 고쳐 잡고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
유리는 악마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화폐로 익숙하게 계산하고 물건을 챙겨 드는 악마가 신기하기만 하다. 자신은 천사인 게 들킬까 지나가는 인간도 조심조심 피하며 눈치를 보는데 앞에 있는 악마는 자연스럽게 편의점에 들어가 무언가를 샀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악마는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며 가볍게 웃었다.
“신기해서. 너는 겁 안 나?”
“뭐가? 인간이랑 접촉하는 거?”
“응.”
“나는 자주 돌아다니니까.”
악마의 목소리는 어딘지 여유롭게 느껴졌다. 복잡한 길을 막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도 익숙해 보이고. 나도 자주 내려오면 이렇게 되나. 유리의 머릿속에 은근한 기대감이 차올랐지만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사람들을 피하며 주춤거렸다. 악마는 그런 자신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밤거리를 조금 걸어 도착한 건물은 고요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가장 꼭대기 층을 누른 악마는 제일 높은 층에 내려서도 비상계단으로 한 층 더 올라갔다.
“어디까지 가는 건데?”
어둡고 조용하기만 한 비상계단을 따라 오르며 유리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악마는 그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 왔어.”
단단하게 잠겨 있던 문은 악마가 손을 대자마자 찰칵, 하며 잠금 장치가 풀렸고 끼익 하는 녹슨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렸다. 자신을 잡아끄는 악마를 따라 문밖으로 나간 유리는 훤하게 트인 넓은 공간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삐죽거리던 입술이 멍하게 풀어졌다.
“와…….”
난간 가까이에서 바라본 풍경은 천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훨씬 더 선명했고, 색색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저 멀리 보이는 큰 강은 수많은 자동차 빛이 빠르게 움직였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불빛은 수면에 반사되어 빛났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밤하늘에는 둥근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사이사이 별들도 빛났다. 천계에서 보던 별보다는 훨씬 그 수가 적었지만, 눈앞의 야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마음에 들어?”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 왔다. 유리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돌렸다. 악마의 밝은 머리카락이 강바람에 시원하게 휘날렸다. 유리는 가느다랗게 휘어진 눈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마음에 들어. 악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 바로 밑에 LP 바가 있어. 사람들이 술 마시면서 음악 듣는 곳”
“그렇구나…….”
“이맘때에는 창문을 열어 놔서 음악이 잘 들려. 나만 아는 곳이었는데, 같이 오는 것도 괜찮네.”
유리는 느리게 내밀어진 악마의 손을 잡고 아슬아슬한 난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턱이 높지 않은 난간은 발을 잘못 디디면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만큼 위험했지만 상관없었다. 악마도 자신도 보이지 않는 날개를 숨기고 있으니 괜찮았다.
넓은 옥상에는 하얀 달빛만 떨어졌다. 유리는 까마득한 아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며 발을 살랑살랑 움직였다. 옆에 앉아 있던 악마가 부스럭거리며 봉투를 당겨 오더니 유리에게 맥주 캔을 내밀었다.
유리는 차갑게 식은 캔을 받아 들고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뭔지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이리저리 난감하게 살폈다.
……이거 뭐야, 어떻게 하는 거야.
단단한 마개 쪽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려 보던 유리는 이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턱을 괴고 느긋하게 지켜보던 악마는 유리가 시무룩해지자마자 가벼운 웃음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도 생각한 건데, 너 진짜 손 많이 가는 거 알아?”
웃음 섞인 말투가 꼭 놀리는 것 같다. 유리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린 맥주 캔을 다시 받다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악마를 흘겼다.
“처음이라서 그래. 너는 뭐 처음부터 잘했어?”
“응.”
“…….”
“나는 처음부터 잘했어.”
“씨…….”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옆에서 느긋하게 웃는 이 악마는 정말 처음부터 뭐든지 잘했을 것 같아서 말문이 막혔다.
불만스럽게 입술을 우물거리던 유리는 아직 따지 않은 맥주 캔을 들고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방금 악마가 뚜껑을 열던 움직임을 기억하며 손가락 끝을 세웠다.
마음이야 그랬지만 틱, 틱, 하며 어설프게 튕겨 나가는 손가락은 한참이나 꾸물거렸다. 고개를 기울인 악마가 자신의 손끝을 보며 미묘하게 웃는 것도 모른 채 유리는 오래도록 집중했다.
“내가 할까?”
“아니, 거의 다 됐어. 내가 해 줄 거야.”
“거기 벌어진 틈에 손가락 넣고 조금 더 벌려 봐.”
“……이렇게?”
“그렇지. 그리고 힘줘서, 당겨.”
순간 칙, 하며 탄산이 터졌다. 유리는 하얗게 오르는 거품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세우고 악마에게 캔을 내밀었다. 웃음을 참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악마가 캔을 받아 가며 시선을 마주쳤다.
“잘하네. 고마워.”
웃음이 스민 얼굴을 보며 유리는 어쩐지 신경 쓰이는 귓가를 살살 긁었다. 뭘까, 왜 이렇게 간지럽지……. 처음부터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긴 했지만 방금 본 얼굴은 이상하게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꼭 칭찬하듯 눈을 내리깐 악마의 나른한 표정이 머릿속에 훅, 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뜨끈뜨끈한 볼을 식히던 유리는 문득 자신의 캔에 톡 하고 부딪치는 다른 맥주 캔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짠, 하는 거야.”
“마시기 전에?”
“응.”
살짝 부딪치면서 일어난 엷은 진동이 기분 좋았다. 손가락 끝부터 간질이는 것 같았다. 짠, 하는 거구나. 유리는 맥주 캔을 기울이는 악마에게 환하게 웃으며 다시 캔을 내밀었다.
“한 번 더 하자. 짠, 그거 한 번 더 해.”
머금고 있던 맥주를 느긋하게 삼킨 악마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캔을 내밀었고 유리는 짠, 하고 속삭이며 캔을 부딪쳤다. 처음 마셔 보는 탄산이 톡톡 터지며 입 안을 간질였다.
유리는 한 입씩 마시는 이 신기한 술의 톡 터지는 맛이 지금 악마와 있는 자신의 몸속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간지럽고 찌릿하게 톡, 톡.
❤
발아래 반짝이는 야경이 갈수록 더 몽롱하게 번져 갔다. 유리는 맥주 한 캔에 붕붕 떠오르는 기분을 한껏 느끼며 허공에 떠 있는 발을 달랑달랑 움직였다. 어느새 새벽으로 넘어간 하늘은 별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공기는 맑고 시원했다. 은은한 음악이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기분 좋아. 유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문득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몸을 지탱하려 바닥을 짚은 손이 악마의 손가락 끝과 살짝 닿아 있었다. 하얗고 긴 손이 꼭 장난치듯 자신의 손가락 끝을 톡 건드렸다. 주춤 손가락을 움츠리던 유리는 고개 돌린 악마를 가만 보다가 이내 부끄럽게 웃었다.
“저기, 너는 이런 데 어떻게 알았어?”
“그냥 음악이 들리는 곳 찾다가 우연히.”
“클럽도 음악 나오잖아.”
“그렇긴 한데 많이 시끄럽지. 늘 가고 싶은 곳은 아니야.”
악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리는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앞의 악마에겐 이런 고요한 곳보다는 번쩍거리는 클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구불거리는 하얀 머리카락에 화려한 조명이 떨어지는 것도 예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익숙해 보이는 행동도 그렇고.
머릿속은 그랬지만 눈으로 보는 악마의 매끄러운 옆모습은 달빛이 떨어지는 이곳도 퍽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유리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와 나란히 걸터앉아 밤바람을 쐬며 야경을 구경했다. 까만 하늘을 메운 별과 달도 보고, 또 끊이지 않는 음악까지 듣다 보니 어느새 맥주 한 캔이 다 비어 있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훌쩍 마신 악마가 텅 비어 버린 캔을 한 손으로 찌그러트렸다. 그것조차 신기하게 보던 유리도 자신의 캔을 뽀작뽀작 구겼다. 더 이상 찌그러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구기고 나서 뿌듯하게 웃자마자 악마의 휘어진 눈매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또 귓가가 간질거린다. 조금 부끄럽게 웃던 유리는 뜨거운 목덜미를 살살 만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뭐가?”
“그냥, 나는 여기 놀러 온 게 처음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나쁜 기억만 남을 뻔했잖아. 그런데 너랑 만나서 이렇게 반짝거리는 데도 오고, 음악도 듣고, 술도 마시고 하니까 좋아서.”
춤 못 춘 건 조금 아쉽지만. 유리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못 한 건 있지만 지금도 충분히 좋았다. 이대로 천계에 돌아가더라도 좋은 기억만 남을 것 같았다.
나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악마는 조용히 웃었다. 그러고는 느슨하게 기울어져있던 허리를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유리에게 천천히 몸을 기울이고 손을 내밀었다.
“나랑 춤출까?”
“어, 여기서?”
유리는 멍하게 풀어진 표정으로 더듬더듬 물어봤지만 손은 이미 악마의 여유로운 손끝에 닿아 있었다. 주춤거리며 손바닥까지 닿도록 맞잡자마자 악마는 가벼운 몸짓으로 유리를 일으켜 세웠다.
“아, 잠깐만.”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중심을 잃은 유리가 조금 비틀거렸다. 그때 허리에 단단하게 감겨 온 팔이 휘청거리는 유리의 몸을 안정감 있게 당겨 갔다. 유리는 가까이 있는 악마의 눈을 보며 잠깐 숨을 참았다.
“뭐 어때. 여긴 플로어도 넓고…….”
꼭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악마가 달빛이 훤한 옥상을 빙 둘러보았다.
“마침 음악도 좋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마주치며 매끄럽게 웃었다.
바람 소리처럼 익숙해져서 들리지 않던 음악이 악마의 그 나긋한 말 하나로 다시 귓가에 은은하게 흘러들었다. 옅은 휘파람 소리가 짧게 지나가고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유리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악마의 팔을 한번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코앞에 있는 악마의 은은한 미소도 빤히 보다가 이내 작게 웃어 버렸다.
“다른 손은 내 어깨에 올리고, 그렇지.”
마주잡은 손이 어깨 높이의 허공에서 흔들린다. 느린 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따라 손을 올리고 나서는 꼭 바람을 타는 것처럼 몸이 움직였다. 손과 허리를 부드럽게 감싼 악마의 몸짓을 어색하게 쫓아가는 것뿐이었지만, 살랑살랑 흔들리는 몸은 기분 좋았다.
“여기 힘을 더 풀어 봐.”
문득 허리에 닿아 있던 악마의 손이 피부를 은근하게 간질였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은 악마가 톡 건드린 허리부터 스르르 늘어졌다.
“뭐야, 간지럽잖아…….”
“대신 더 즐거워졌잖아.”
……악마는 다 이렇게 말을 잘하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악마를 보며 유리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우물거렸다. 하지만 확실히 몸은 아까보다 더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고, 결국 마음도 몸처럼 스르르 풀어졌다. 발갛게 물든 유리의 얼굴을 보며 악마도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자, 손 놓지 말고 그대로.”
어, 어? 허공에 떠 있던 손이 문득 머리 위로 올라가고 익숙하게 끌어가는 악마의 손길을 따라 몸이 빙글 돌아갔다. 당혹스럽게 깜빡이는 시선 안으로 주변의 풍경이 한 번에 들어왔다. 저 멀리 흐르는 강, 강에 비치는 가로등의 조명, 반짝이는 야경, 하늘에 떠 있는 하얀 달과 별까지.
그리고 다시 부드럽게 몸이 끌려가며 잘했다는 듯 웃어 주는 악마의 얼굴도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허리가 다시 안기면서 한 손을 마주 잡은 처음의 자세로 돌아왔지만 심장은 처음보다 더욱 세게 뛰었다.
음, 방금 했던 게 많이 재밌었나 봐.
유리는 가슴속에서 간질거리는 감정을 곱씹으며 그저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다시 몸을 좌우로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조차 아까보다 훨씬 즐거운 것 같았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악마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쇳소리가 살짝 섞이는데도 맑고 부드러웠다. 유리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며 엷게 흥얼거리는 악마를 가만 바라보았다. 밝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도, 귓가에 빼곡하게 걸린 귀걸이도 반짝인다. 그리고 긴 속눈썹이 드리운 눈은 다른 것보다 더욱 은은하게 반짝였다.
확실히 천사랑은 달라. 훨씬 더 눈길이 가고 빠져드는 것 같아. 유리는 악마의 어깨에 올라간 손을 꾸물거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
문득 부드럽게 흥얼거리던 악마의 노랫소리가 끊어지고, 유리를 자연스럽게 리드하던 몸도 멈칫했다. 왜? 유리는 아직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의아하게 물었다. 악마는 바람 빠지는 듯 웃으며 눈을 감았다.
“왜 그러는데…… 아, 어……!”
순간 허리에 닿아 있던 악마의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유리는 다급한 손길로 악마의 어깨를 붙잡았다. 허공에 반쯤 누워 눈을 동그랗게 뜨자마자 악마가 나른한 미소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로 있다가는 사고 칠 것 같아서.”
악마는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역시 악마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게 뭐야. 유리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봤지만 악마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것도 춤추는 거야.”
“이게?”
“응.”
“……안 무거워?”
“너 천사잖아.”
가벼워. 깃털 같아. 악마의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괜히 부끄럽게 터지는 웃음을 삼켰다. 뒤로 기울어져 있던 몸이 다시 세워졌다. 이번에도 충분히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역시 조금 휘청거리던 유리는 가까이 있던 악마의 목덜미를 덥석 끌어안았다.
온몸이 맞닿은 자세탓에, 안 그래도 쿵쿵거리던 심장이 더욱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괜찮아.”
“…….”
“이대로 있어.”
악마는 허리에 팔을 감고 속삭였다. 그리고 주춤 떨어지려던 유리를 가만 멈추게 했다. 이것도 춤추는 거야? 유리는 말간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조용하던 악마는 이내 가볍게 웃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천계에도 이런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기분 좋은데 왜 없지? 아, 그래서 다들 인간계로 놀러오는 건가? 유리는 저 혼자 생각하던 궁금증의 답을 내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꼭 안고 있던 악마의 어깨에 볼을 기대 눈을 감았다.
잘하네. 웃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허리를 감싼 악마의 팔은 더욱 단단해졌다. 안정감을 느낄 만큼의 힘에, 유리는 마음을 놓고 안겨 있었다.
“……있잖아.”
“응.”
“클럽에서 나 이상한 술 마실 뻔했을 때…… 생각해 보니까 만약에 마셨다고 해도, 너라면 괜찮았을 것 같아.”
“…….”
“……좋았을 것 같기도 해.”
악마는 말갛게 웃는 유리의 허리를 고쳐 안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위험한 말을 하네.”
“뭐가 위험해. 너는 하나도 안 위험한데.”
“그래, 고마워.”
그래도 다른 악마한테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따라붙는 얕은 한숨에 웃음이 스며 있었다. 유리는 악마의 어깨에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몰래 입술을 올렸다. 손끝을 세워 라이더 재킷에 장식된 아일렛을 톡톡 만지다가 다시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몸은 시원한 밤바람을 타듯 살랑살랑 흔들리고, 동동 떠오르는 기분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는 음악처럼 두근거렸다. 맞닿은 몸으로 따뜻한 체온이 가득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