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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HAPPY END) 7화
1. 걸어 둔 시간 (7)


‘씨발, 이거 풀어, 당장 풀어!’
원장이 반쯤 그슬린 얼굴로 욕을 퍼부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는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 원장을 무시하고 밧줄 매듭을 꼼꼼히 둘러보다 책상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익숙한 브랜드의 립스틱이었다.
수백, 수천 번을 입술에 바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 흉내를 냈다. 여자의 옷을 입고 저 무릎에 올라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이게 나쁜 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병신처럼 살다 처음으로 거부를 했더니 때렸다.
죄를 물었더니 살해당했다.
‘27만 5천 원…….’
나보다 덜 사랑하던 아이도 1억은 받았으면서, 뜻을 거슬렀다고 도떼기시장의 폐기물처럼 팔아 치웠다. 돈의 가치로 평가받고 싶진 않았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불티의 거스름이 낀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핑크빛이 도는 립스틱을 익숙하게 입술에 발랐다. 텁텁한 질감이 느껴졌다. 크레파스 향이었다. 몇 번 입술을 부딪쳐 제대로 바르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복종이 겨우 그만한 값어치였다니, 너무하세요. 저를 그렇게 아끼셨잖아요.’
타인의 인생과 영혼을 망가트리기 위한 도구가 되어 삶이 끝난다니, 완벽하기 그지없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대로 두었다면 더 많이 죽었을 형제들을 이번에야말로 구하는 것이다.
어차피 살아남을 생각은 없었다. 남김없이 죽여 버리기 위해 지옥에서 돌아왔다. 안도감이 든다. 불을 잔뜩 먹은 방의 가구와 커튼에서 피어나는 불꽃 소리가 화음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당신을 죽일 거야.’
‘윤이원! 이 씨발년, 개 같은 새끼, 네가 은혜도 모르고!’
원장은 인생 처음으로 만난 악인이었고, 최악의 악인이었다. 죄책감도 없이 부풀어 오른 저 독 같은 얼굴에 삶이 망가졌다.
불이 붙은 몸은 아프지 않았다. 이미 아픈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타인을 아프게 하고 살아왔던 원장만 불붙은 몸을 미친 듯이 흔들며 울부짖었다. 살려 줘, 살려 줘. 그러나 튼튼하게 매듭지어진 끈은 끊어지는 법이 없었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불에 휩싸인 문으로 기어가는 육덕 진 몸을 나와 연결해 붙들고 있었다. 좀 더 편안한 작업을 위해 손에 힘을 줬다. 날카로운 칼이 원장의 정강이를 찢었다.
‘아아악! 아, 아, 아, 아파, 살려 줘!’
‘나도 아팠어.’
눈이 뽑혔어. 정신이 남아 있는데. 당신도 옆에 있었잖아, 내가 비명을 지르는 걸 보았잖아. 그들이 내 눈을 뽑았어. 내 장기도 손톱도 뽑았어. 장기가 텅텅 빈 시체는 찾을 수도 없겠지. 재연이가, 그 애가 나를 아주 오래 찾으며 울다가 지치진 않았을까.
‘정말로 아팠어요, 아버지.’
‘윤이원! 풀어, 살려 줘! 풀어!’
오래전 입양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진 수많은 형제가 나와 똑같은 꼴을 당했겠지. 당신은 정말 개새끼야.
손가락을 쑤셔 넣어 원장의 눈을 뽑았다.
이미 노화된 건물은 불길을 걷잡을 수 없었다. 뼈만 남기고 모두 타고 있었다. 원장이 아이들을 빼돌려 장기밀매를 했었다는 증거도, 그릇된 욕망과 어리석은 애정도 전부 사라질 것이다.
식칼로 허벅다리와 어깨를 찢었다. 무뎌서 잘 잘리진 않아 몇 번이나 칼자루를 고쳐 잡아야 했다.
불로 소독을 하고 나면 깨끗해지겠지. 전부 태워 없앤다면 너는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재연아.
늙고 티 많은 살갗을 벗겼다. 피가 너무 많이 말라붙어 칼날이 잘 들지 않아 마지막에는 손으로 직접 벗겼다. 피부 조직도, 혈관과 피도 돈이라고 했었다.
사랑스럽고 예쁜데, 뭐가 그렇게 미워서 네 부모님은 재연이 너를 버렸대. 왜 하필, 이렇게 최악인 고아원을 골라 너를 놔두고 갔을까.
매일 새벽 내가 더러운 줄도 모르고 손을 붙들고 웃던 얼굴이…… 내가 좋다고, 거리낌 없이 안아 주던 네가…… 사랑한다고 말해 주던 모습이,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진 마지막이 입 안의 가시 같았다. 아니, 그랬나?
불이 붙은 손에서 살점과 뼈가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원장이 울부짖으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저 정도로 고통스러운가…… 전혀 아프지 않은데. 온몸이 피와 살점에 더러워져 끈적거렸다.
바깥이 아주 시끄럽고,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났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자살 뉴스를 예로 들며 죽음은 쉽게 결정하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 말했다. 스쳐 지나간 말에 불과했었나 보다.
형이 나를 살렸었죠.
그러니 오래오래 함께 있자고, 재연이 내 어깨와 등을 끌어안으며 청혼했다. 아, 스물이 넘고 청년이 된 그 애는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미소만 지어도 꽃이 흐드러진 것처럼 예뻤다.
나 같은 칙칙한 남자랑 연애해 준다니, 영광이었어. 이제 와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죽어서도 잊히지 않겠지. 감정은 어려우니 잘 모르겠지만, 죽는 이 순간 너를 생각할 만큼 깊게 사랑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오직 죽이기 위해 돌아왔으니, 이렇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마음을 다독거리며 피투성이와 내장으로 질척거리는 칼자루를 놓았다.
누군가 입술을 핥았다. 녹아내린 눈꺼풀 위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영 쓸모없는 짓을 하는구나.」
기회를 주었던 목소리가 쓰러진 내 멱을 잡았다. 피로 범벅이 된 손가락에 새살이 돋고 있었다. 화상과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불꽃의 덩어리에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흰 발등, 검은 가죽신.
「살아라. 살아서 걸어라.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원장이 입과 눈을 크게 벌린 채 타들어 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미 반쯤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의 살점과 내장이 익는 냄새가 역겨웠다.
「살아서, 죗값을 다시 한번 치러 나를 기쁘게 해 다오.」
뜨겁게 타오르는 불을 보며 몇 번이고 강요당했다. 살아남아라, 살아라.
……살아 있으라.
피투성이인 상태로 구출되었지만 화상은 거의 입지 않았다. 너무 멀쩡한 몰골에 다들 기적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들것에 원장의 사체가 실려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입이 딱 다물렸다.
내 손톱 밑에 알알이 박힌 살점, 주머니에 잔뜩 들어 있던 인간의 내장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한 형사가 그 자리에서 구토했다.
당시에는 왜 주머니에 그걸 전리품처럼 집어넣고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왜 죽였어?’
‘죽이고 싶었으니까요.’
‘장기는 왜 꺼냈어?’
‘나한테도 그랬으니까요.’
수사 과정은 곤욕이었다. 생각해 보지도 않은 행위의 이유를 물어보니 짜증이 났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히는 건 한 마디뿐이었다. ‘죽이고 싶었다.’ 원장의 아름다운 평판은 진술한 살인 동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여장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밝혀졌었지만, 신체에 성폭행의 흔적도 없었으니 역시나 의도로는 불충분했다.
수사관들은 심리 검사랍시고 이상한 테스트 몇 개를 하더니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했다.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소용없었다.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을 죽여야만 했어요. 그게 전부입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자 사람들은 나를 공감 능력이 결여된 정신병자로 확정 지었다.
어리다고 관대하게 넘어가기에는 살인 방법이 지나치게 잔인하다. 피해자는 살아 있는 상태로 장기를 뜯기고 불에 탔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은 피해자, 고아원 건물 소실, 큰 재산 피해를 낳은 데다 많은 인명 피해까지 낳을 수 있었던 범죄 행위.
‘피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음, 그 사람도 지옥에 갔으면 좋겠는데요.’
그리고, 반성의 태도가 없는 행동을 모두 고려해서 판사는 12년 형을 선고했다.
삶이 망가졌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때는 푼돈을 모아 혼자 국내 여행도 갔었는데 어딜 갔는지 잊었다. 대학교 생활이 어땠는지, 전공이 뭐였는지, 재연이와 나눴던 섹스나 키스가 어땠는지도 이젠 모른다.

***

“…….”
처음 살인을 저지르던 그 순간의 희열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가 죽었던 과정을 똑같이 따라 했다. 두 손 가득 잡히던 눈알의 끈적거리고 미끄덩한 감촉이 떠올랐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눈 한쪽이 툭 불거진 귀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반들거리는 눈동자에 내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귀신이 흥미로운 얼굴로 눈을 데굴 굴렸다.
“야, 너네 빨리 성불해.”
귓등으로도 안 들을 내용이지만 되는 대로 지껄였다.
“내가 가 봤는데, 지옥 거긴 오래 있을 곳이 안 된다니까.”
끼이익. 입술이 없는 남자 귀신 하나가 금속 마찰음을 흉내 내며 낄낄 웃었다.
“진짜야. 거긴 1초라도 덜 있는 놈이 승자야.”
애써 충고를 해줬더니 다 같이 비웃는다. 이놈들이 사람 말을 안 믿네. 뒷골이 당겼지만 인내심을 가지기로 하고 다시 한번 설득했다.
“씨발, 내 집에 있을 거면 월세라도 내든가.”
설득을 하려고 했는데 진심이 나왔다. 우울해서 이불 안으로 고개를 처박자 누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까부터 점점 튀어나오던 귀신의 눈이 이제 가는 신경으로만 겨우 연결된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귀신이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찌르면서 웃는다. 나름의 위로인 것 같긴 한데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정말 싫거든…….”
습기를 먹어 축축한 이불을 발로 걷어차고 벌렁 누웠다.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귀신 하나가 갑자기 창문 쪽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덜컹, 집에 유일하게 하나 난 창문이 흔들렸다. 누운 채로 고개만 슬쩍 들어 손가락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상 위로 두 뼘 정도 올라간 창문을 통해 누군가가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주먹이 울끈 쥔 쇠창살을 몇 번 더 거세게 흔들었다. 눈 아래까지 올려 쓴 마스크와 푹 눌러쓴 모자 때문에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텐데, 교도소에 살면서 손바닥만 한 창을 휙휙 열어젖히고 소리를 지르던 간수들 탓에 저런 관음증이야 익숙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배를 긁적거렸다.
“뭘 봐, 불났냐.”
태연하게 대하자 변태 같은 놈이 움찔하더니 새카만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기 시작했다.
“인기가 많아서 곤란하다니까. 난 스토커랑 연애할 마음이 없거든.”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놈이 어깨를 부풀리며 입 안으로 무슨 말을 웅얼거리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집 안으로 툭 던져 넣었다.
코가 저절로 찌푸려질 만큼 고약한 냄새가 났다. 가까이 다가가 보자 이미 구더기가 꼬인 들쥐 사체였다. 이런 걸 주머니 안에 넣고 있다니, 비위도 좋은 놈일세. 다른 의미로 감탄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깔짝거리지 말고 꺼져.”
맨손으로 쥐 사체를 움켜쥐고 창문 밖으로 다시 던지자, 놈이 이상한 비명을 지르면서 창문에서 떨어져 나갔다.
사체에서 굴러떨어진 구더기 몇 마리가 바닥과 창문틀을 기어 다녔다. 허겁지겁 도망가는 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노려봤다. 분명히 저 자식, 왼쪽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발돋움해서 바깥으로 난 쇠창살 부분을 매만졌다. 흠집이 우둘투둘하게 나 있었다. 칼로 몇 번 그어 댄 자국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꺽다리 귀신이 입을 쩍 벌리고 기어 다니는 벌레를 꿀꺽 집어삼켰다.
착하다, 남은 구더기 하나를 마저 던져 줬더니 구더기를 삼킨 혓바닥이 쭉 늘어나며 날름 발가락을 핥았다. 귀신 중 하나쯤은 벌레잡이로 키워도 좋을 거 같은데. 고개를 끄덕이면서 쇠창살의 흠집을 반복해서 만졌다.
주영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놈은 많아. 하재연 주위에 최근 들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대.
아니다. 하재연이라고 보기에는 체구가 달랐다. 물론 체구를 속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놈이 도망친 골목 끝이 이상하게 어두웠다.
다음 날, 경찰이 문을 두드렸다. 살인 사건이었다



2. 화염과 발자취 (1)


어제 새벽 늦게 근처 골목길에서 사람이 한 명 죽었다. 여자였다. 첫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시체는 꽤 잔인한 몰골이었는데, 피 묻은 발자국이 내 집 앞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범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흉기도 그 앞에서 발견 되었다고 한다.
자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어쩌란 말인가. 씻지도 못하고 강제로 서까지 끌려왔던지라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 범인이 저다, 이런 말씀은 아니시죠?”
“그럼 그게 왜 너희 집 앞에 있어?”
“형사님, 제가 대가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은 그렇게 멍청하겐 안 하는데요…….”
“10년 더 살고 싶어서 그랬는지 누가 알아?”
형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서류철로 머리를 후려쳤다. 짜증 나게. 입 안으로 욕설을 굴렸다.
“이거 안 보여? 이거?”
내 앞에는 달갑지 않은 식칼 한 자루가 있었다. 굳은 피가 손바닥 모양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칼자루와 무딘 칼끝을 보았다. 많이 본 모양이네.
“이게 왜요?”
“네가 예전에 사용했던 범행 도구랑 똑같잖아!”
“아, 추억 팔이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이 새끼가 진짜!”
또 머리를 한 대 휘갈겨 맞았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참았다. 흉기에 이어 사체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꽤 잔인한 수법에 뺨을 긁적였다.
“제가 죽였던 방식이랑 비슷하군요.”
“그래.”
“하지만 그때랑 다른 게 하나 있는 것 같은데요.”
“뭐가?”
고아원을 태웠던 불. 원장을 비롯한 더러운 모든 것을 소각시켜 이 땅 위에서 지워 내고 싶어 불을 질렀다. 나 자신조차도 더러워 불 속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순간 이유 없는 불쾌감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불을 쓰지 않았으니 저는 아닙니다.”
“개새끼가, 그 입 안 닥쳐?”
뺨을 한 대 후려 맞았다. 두개골이 다 흔들릴 정도로 얼얼했다. 손바닥으로 화끈거리는 부위를 감싸 쥐었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형사의 얼굴 전체에 짜증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비위를 거스르면 반항도 못 하게 두들겨 팰 기세라 한숨을 삼켰다. 짜증 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사회생활 시작한 지 얼마나 된다고, 갑자기 이상한 놈이 나타나 단순한 트릭에 살해 협박이라니. 재수가 없어도 이보다 안 좋을 수는 없었다.
“저기요, 농담 아니고 저 아니라고요.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거든요.”
“개수작 부리지 마! 그럼 누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여?”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죠.”
개구멍 같은 창문 너머에서 방 안을 노려보던 살의 가득한 눈동자가 기억났다. 과거의 적의는 어제처럼 선명했다. 불이 타던 그날 밤, 손에 남은 끈적거리는 장기의 감촉.
다리를 한 바퀴 휙 꼬아서 무릎에 두 손을 턱 얹었다. 건방진 자세에 화가 난 형사가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장판으로 흐트러진 책상 모서리에 쌓여 있던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혈압을 올리고 그러시네.
“잘 아시잖아요. 제 사건은 유명해요. 뉴스에도 나왔고, 원한 관계도 확실하니 그쪽을 알아보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너 이 새끼, 하필 우리 구역이라…….”
중범죄자는 늘 관리의 대상이다. 범행 도구가 현관문 앞에 처박혀 있었으니 보고서를 잔뜩 작성해야 할 게 분명했다. 물론, 나더러 쓰라고 시키는 게 아닌 이상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왜 뻔한 이유로 사람을 불러다 괴롭히는가, 그게 더 중요하지.
“지문, DNA, 행적, 범행 동기.”
“…….”
“뭐 하나도 저랑 맞는 거 없을 텐데, 땀 빼지 마시고 보내 주세요.”
날씨가 느긋하고 좋았다. 오늘은 바람도 좀 선선하고 날씨도 화창하고. 곁들인 말에 형사가 거품을 물었다. 뒷자리에서 계속해서 코를 풀던 다른 형사 하나가 쌍욕을 했다. 저 씨발 새끼!
욕을 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범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다들 의욕만 과하다. 애초부터 골목에 그 흔한 CCTV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치안이 문제 아닌가.
“똑바로 대답 안 해? 이 새끼 이거 진짜.”
내 잘못도 아닌데 욕을 듣고 있자니 조금 억울해졌다. 벽에 걸린 둥근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똑딱똑딱 흐르는 시침이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0시까지는 출근해야 했다.
“새벽에 어떤 미친놈이 저희 집 창문에 붙어서 칼 들고 설치고 있더라고요.”
“뭐라고?”
“쥐 사체까지 던져 주던데요.”
형사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는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인데 가까이서 보니 달갑지가 않았다. 질색하며 얼굴을 밀어 내자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욕을 마구 쏟아 냈다. 강력계 형사들은 왜 다 성격이 이따위야.
“직접 확인하셔도 됩니다. 바깥으로 난 창문 쇠창살에 칼로 긁힌 자국 있을 거예요.”
“정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생겼는데?”
“마스크 끼고 모자 눌러쓰고 있어서 안 보였어요. 덩치는 제법 있었고, 키는 180 정도?”
“또?”
“쥐 사체를 선물로 주는 건 너무하다 싶어서 다시 던져 줬더니, 앞쪽 골목으로 도망가더라고요.”
“그게 말이 돼?”
“그럼 안 됩니까?”
형사의 어깨 위를 쓱 올려다보았다. 검은 구름 같은 물체가 뭉실뭉실 피어올라 있었다. 원래 원귀들은 자기를 죽인 놈에게 붙기도 하지만, 자아를 상실하면 사리 판단이 되지 않으니 아무한테나 붙는 경우도 있다.
살인 현장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대부분의 형사는 재수 없이 원한을 살 일이 많았다. 이쪽 어깨까지 넘보면서 슬금슬금 타고 넘어오는 놈을 손바닥으로 슬쩍 후려쳤다. 어깨 좀 뭉치셨겠어.
“그 새끼가 범인이라고?”
“똑같이 생긴 칼을 들고 있었으니까요.”
나무 손잡이를 단 식칼을 가리키며 대답하자 형사의 얼굴이 발로 밟은 요구르트 병처럼 구겨졌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 못생겨질 수 있다니. 원장 탓에 대부분의 중년 남자에게 거부감을 느끼는지라 눈썹을 찌푸리면서 의자 뒤로 엉덩이를 바싹 붙여 앉았다.
“왜 신고를 안 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직접 칼을 휘두르면서 위협을 하지도 않았으니 신고를 할 필요는 없죠. 해 봤자 이렇게 추궁만 당할 거고.”
“말하는 거 봐라.”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그만 보내 주실래요. 이제 출근해야 하거든요.”
아, 좀 태워 주세요. 뻔뻔하게 요구하며 심술궂게 웃자마자 몇 대를 또 두들겨 맞았다. 쓰레기라고 욕을 하는 형사들의 얼굴에는 살인자의 딱지가 달린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용의자가 따로 있다고 이야기를 해 줘도 그들은 아직도 나를 감옥에 집어 처넣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빨간 줄이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