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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HAPPY END) 8화
2. 화염과 발자취 (2)
용의자라 주장한 사내의 인상착의를 좀 더 자세하게 읊어 주고 그림까지 그렸다. 몇 번 더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통보를 마지막으로 겨우 풀려났다. 이미 출근 시간은 지나 있었고, 배터리가 한 칸 남은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쌍욕을 얻어먹겠구나. 일한 지 보름밖에 안 된 주제에 무단결근이라니. 고 영감을 끼고 있으니 잘리진 않겠지만 대놓고 싫어할 게 분명하다.
세수라도 하고 갈 요량으로 경찰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뼈대 굵은 형사의 주먹으로 얻어맞아 그런지 벌써 퍼렇게 피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입술도 찢어져 입가에 빨갛게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공무원이 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해도 되는 건가. 대한민국은 썩었어. 속으로 투덜거리며 흐르는 물에 세수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사람이 죽은 날치고는 화창하고 상쾌한 날씨였다. 공사장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죽은 아가씨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보다는 범행 방식이 더 찝찝했다. 최소한 재판 과정을 어느 정도 겪은 관계인. ……집까지 찾아올 정도로 의욕적인 원장의 광신도는 누가 있지.
천륜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한 번 버려진 탓에 고아원의 아이들은 소심했고 의젓한 척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고 독립을 시작하면 검은 그림자를 내보이는 놈들이 한둘은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는 나이를 먹은 후에야 제대로 엇나간 놈도 있었다.
하지만 그놈들이 내 주소를 알 리가 없다. 출소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서주영과 하재연이 전부였다. 고 영감은 내 과거를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드러난 피부만 봐도 젊은 남자의 외관이었다. 누구지. 새벽 내내 잠을 설치고 시달렸더니 머리가 쑤셔 왔다. 팔자가 흉악하네.
터덜터덜 걸어가다 택시를 잡고 공사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하자마자 작업반장의 욕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런 씨펄, 때려치워!”
“죄송합니다.”
굽실거리며 허리를 몇 번이나 숙이고 나서야 작업반장은 열이 시뻘겋게 오른 얼굴로 일당은 반만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 시간 지각을 했다고 마음대로 일당을 반 토막 내는 처사가 부당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뒤늦게 남아 있는 궂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건물을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철골 구조를 엮었다. 가랑이 사이에 철골을 끼우고 움직일 때마다 금속이 휘청휘청했다. 몇 개의 철근을 묶고 나서 기어 내려오자 고 영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인이라지?”
“그건 또 언제 들으셨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을 빨리도 안다며 투덜거리자 고 영감이 힐힐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쪽에 아는 놈이 있지.”
“발도 넓으시네요.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지각을 했으니 돈 벌려면 야간이라도 해야지?”
당분간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될 텐데 통나무* 처리를 하라니. 험상궂은 형사의 얼굴을 생각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이 늘 있는 건 아니었다. 할 수 있을 때 잔뜩 해서 돈을 벌어 둬야 한두 달 치 월세를 낼 돈이라도 미리 모아 둘 수 있었다.
아무리 끔직한 일이라도 반복할수록 죄책감은 옅어지게 되어 있었다. 생각을 멈추고 노인과 작업반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거절하거나 발을 빼려고 하면 영감은 분명 내 등을 떠밀어 콘크리트 배합기 안으로 집어넣어 갈아 버릴 것이다. 지금도 보아라,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두 번은 없다고 말하는 듯 눈이 번뜩였다. 혐오하던 인간과 똑같은 색을 띤 눈빛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지난밤은 어땠나?”
“…….”
“두 다리 뻗고 푹 자야 해.”
그렇게 속삭이는 더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긴 망상을 했다. 기계 안에 뻣뻣하게 굳어 우둑거리는 소리가 나는 시체를 밀어 넣으면서, 내 영혼도 이렇게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한번 운명이 바뀌었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는 기분을 떨쳐 낼 순 없었다.
본보기로 죽였을까, 그 아가씨.
코끝에 꽃가루와 먼지 냄새가 다가와 앉았다. 에취, 재채기를 반복하며 코를 훌쩍거렸다. 4월 끄트머리에 안착했으면 날씨만큼 온화해야 할 텐데 바람이 영 차가웠다.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뭄처럼 갈라져 나왔다.
“저 근처에 닭발을 죽이게 하는 곳이 있는데 갈람 가지.”
며칠 같이 일을 했다고 부쩍 친한 척하는 인부 하나가 선뜻 제의했다. 아니요, 거절하기도 전에 작업반장이 어깃장을 놓았다.
“일도 못 하는 새끼를 어디 데려간다 그래?”
술을 마신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보고 인부들이 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짐짓 말없이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자 작업반장이 다시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시펄, 고 영감만 아니어도 안 썼는데.”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연거푸 사과하는데도 작업반장은 들은 눈치가 아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경찰서에 살인 혐의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어 얼굴을 문질렀다. 온종일 목장갑을 끼고 일했더니 손끝이 까칠까칠했다.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벽돌을 날랐더니 허리도 뻐근했다.
“하여튼 이래서 별 단 새끼들은 글러 먹었어. 저 봐, 뭘 했으면 하룻밤 새 얼굴에 피딱지를 달고 왔겠어?”
그 말에 누가 숨 참는 소리를 냈다. 프라이버시가 없다니까. 웃으려고 했지만 입매가 딱딱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간접적으로 내가 전과자라는 걸 떠벌린 작업반장이 흐흐 웃으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입 밖으로 벙긋벙긋 피어나는 담배 연기를 노려봤다.
“뭘 쳐다봐? 확 쳐 죽여 버릴까.”
악의적인 말투에 이쪽이 한 대 쳐 볼까, 고 영감이 얼마나 커버를 쳐 주려나, 고민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각도를 신경 써서 휘두르면 얼굴에 멋진 멍 하나는 달아 줄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는 푼돈을 건 싸움이 간수들의 눈을 피해서 열리곤 했다. 그때는 온갖 변칙 기술이 난무했다. 팔꿈치로 옆구리를 찍고 사타구니를 걷어차면 어지간한 장골도 바로 일어나진 못했다. 그리고 그런 변칙 기술은 전부 몸으로 배워야 했다. 나중에는 맷집만 늘어 오래 버티고 있으면, 빨리 두들겨 맞고 쓰러지라는 욕설이 난무했었다. 눈 먼 주먹에 급소를 잘못 맞아 정신을 반쯤 잃고 바닥에 엎어진 적은 하도 많아 이골이 날 정도였고. 지금 와서 그렇게 배운 걸 복습해 봐도 나쁠 건 없지 않을까.
물론 잔인한 욕망을 실천에 옮길 수는 없었다. 작업반장도, 고 영감도 계속 얼굴을 봐야 할 사이였다. 짜증 나.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화를 삭이는데 경쾌한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형.”
커억, 옆에 있던 작업반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반동으로 싸구려 의자가 풀썩 뒤로 넘어갔다. 공사를 한다고 막아 둔 철조망 건너편에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하재연?”
“공사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놀러 왔어요.”
“갑자기 왜.”
하필 왜, 이 시간에, 지금 여기에. 이틀 사이에 와르르 쏟아진 사건에 이제 와서 숨이 턱 막혔다.
“시험이 오늘 끝났거든요.”
재연이 프린트물을 흔들며 망쳤다고 농을 했다. 앞에 선 하재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발치에 와 닿았다. 그림자끼리 끈적끈적하게 연결된 것 같았다. 친구인가 보네. 인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연의 얼굴을 보며 잡소리를 나누었다. 작업반장이 떠벌렸던 내 과거는 이미 잊은 얼굴이었다.
“어디 갈 곳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요?”
“잔업 있어서 못 가.”
“그럼 기다릴게요.”
“하재연.”
“10시에 끝나든 11시에 끝나든 상관없어요. 기다릴게요.”
범죄 은닉 현장에 타인을 둔다고? 안 될 말이었다. 몇 번 더 재연을 설득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모습에 작업반장이 혀를 차며 가라는 손짓을 했다. 눈에는 재수 없는 놈이라는 욕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일감을 내버려 둔 채 일어났다. 고 영감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노인이 코를 풀면서 침을 퉤 뱉었다.
“두 번은 없어.”
“네.”
“얼른 그 핏덩어리 데리고 가.”
재연은 고 영감이 자신의 앞에 대고 재수 없다고 욕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넉살 좋게 꾸벅 인사까지 하더니 내 손을 잡아끌고 공사 터를 벗어났다. 모퉁이를 돌자 재연은 다짜고짜 나를 끌어안았다. 온종일 땀을 흘려 퀴퀴한 냄새가 날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혀엉, 콧소리가 섞인 애교에 진저리를 쳤다.
“이거 놔.”
“오랜만에 보는 건데 좀 봐줘요. 반갑지 않아요?”
“전혀.”
“너무하네요.”
다 큰 남자애가 칭얼거려 봐야 귀여워 보이지도 않았다. 서글서글 사람 좋게 웃는 재연을 억지로 떨쳐 냈다. 재연이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프린트물을 길가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는 갑자기 팔짱을 껴 왔다. 몇 번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재연에게 한쪽 손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짐에 눌려 빨갛게 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재연이 싱글벙글 웃었다.
“갑자기 어디에 가자고 찾아온 건데?”
“아, 그냥…….”
웃는 얼굴이 미묘했다. 무심코 재연의 온몸을 훑었다. 저기서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끼면 덩치가 비슷해 보일까. 재연은 호리호리한 체격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 덩치를 만들려면 옷을 상당히 껴입어야 할 것이다. 두꺼운 옷을 몇 개나 껴입은 상태에서 길 가던 여자를 제압해서 살해하는 게 가능할까.
“야, 너 어제…….”
“쉿.”
“어?”
“조용히 해요.”
입술에 가만히 검지를 댄 재연이 뒤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사장이 있는 방향이라 덩달아 뒤로 고개를 돌렸다. 간이 철골 위에 묶어 둔, 보기만 해도 묵직한 철근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릿느릿하게 끈이 풀리고, 묵직한 쇳덩어리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 입 안에서 숨죽인 비명이 나지막하게 나왔다.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철근 몇 개가 일시에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누구야! 다친 사람 없어? 고함과 비명이 공사장을 뒤흔들었다. 뿌옇게 올라오는 모래 먼지를 보면서 입을 막아 목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차단했다. 저곳은 내 담당 구역이었다. 놀라 뛰어가려는데 팔이 잡혔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재연이 못처럼 박혀서 팔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거 놔.”
“안 돼요.”
“사고 났잖아.”
팔을 빼기 위해 손을 흔들었지만 하재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형적일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뼈와 근육을 뚫어 버릴 것처럼 손가락 끝까지 힘을 꽉 준 재연이 나를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못 가요.”
“뭐?”
하재연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사고가 나 누군가가 다쳤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형이 없어서 저 정도로 끝난 거니까, 가면 안 된다고요.”
이 애는, 도대체.
순간적인 공포가 발끝부터 치고 올라왔다. 오싹한 한기에 성대가 얼어붙었다. 붙잡힌 팔의 손끝이 얼얼하게 저렸다. 곤란하게 되었네. 재연이 소곤거리더니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우측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프렌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구석의 낮은 의자에 몸을 묻고 나서야 숨이 터졌다. 춥다. 몸을 웅크리고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재연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죠?”
“어떻게…….”
출소 후 카페는 처음이었다. 내 커피 취향은 서주영도 몰랐다. 누구에게 들었다고 둘러댈 수도 없을 텐데 재연은 태연하게 앞자리에 앉아 커피를 건넸다. 여러 사람이 앉았던 의자는 쿠션이 꺼져 딱딱하고 불편했다. 몇 번 몸을 틀다 바깥을 향해 비스듬하게 몸을 기댔다. 창은 밤공기에 식어 싸늘했다.
무거운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재연은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았다. 얼음이 가득 든 잔 표면이 축축했다. 얼음이 달랑거리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이상한 표정 짓지 마세요.”
하재연이 먼저 운을 뗐다.
“옛날부터 단 건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추측한 거예요.”
저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입술을 열고 험한 말을 쏟아 내는 대신 빨대를 물었다. 차갑다. 기억에서 잊혔던 씁쓸한 커피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 이전에는 블랙커피를 좋아했다. 직접 내려 마실 정도로 좋아해서, 아침마다 큰 컵 가득 채운 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옷도 장신구도 관심이 없었지만 비싼 커피 머신에 욕심을 냈다. 백만 원이 훌쩍 넘는 고급 기계를 사기 위해 야금야금 비상금도 모으고 있었다. 재연은 내게 주는 선물로 새로운 원두를 한 달에 한 번씩 사 들고 돌아왔다. 아침마다 졸린 눈으로 기계를 돌리면 퍼져 나오던 고소한 원두 향과 그 옆에서 잠을 좀 깨야겠다며 막 내린 커피가 담긴 머그컵에 얼음을 몇 조각 집어넣던 하재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미 사라진 미래다. 하재연이 그 시간들을 알 리가 없다. 심장 부근을 꽉 눌렀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아프게 자극했다.
“아까 했던 말, 뭐야?”
“벌써 본론으로 넘어가려고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야기나…….”
“하재연.”
조금만 더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라도 내뱉으며 기절할 것 같았다. 스물네 시간 가까이 정신이 혹사당했다. 여기서 사건이 하나만 더 일어나도 미쳐 버릴지 모른다. 스트레스가 골을 내리치며 부족한 정신력 대신 체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달팽이처럼 시간이 느리게 미끄러졌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재연이 한숨을 쉬었다.
“형을 보러 온 건 맞아요.”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저번에 잠깐 마주쳤잖아요?”
고 영감을 만나러 왔다가 공원에서 마주쳤던 때를 이야기하는 건가. 최소한 믿을 수 있는 변명을 해야지. 고개를 흔들며 바깥을 쳐다봤다. 형. 재연이 불렀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해가 진 거리에는 퇴근하는 직장인과 하교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많은 인파 사이에는 드문드문 가로등처럼 박힌 귀신들도 보였다. 그것들은 우울한 눈이나,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쳐다본다. 붙박이처럼 서 있는 귀신들도 많지만 움직이는 것들도 있었다. 도로에 붙어 길을 건너는 사람의 발목을 붙들어 사고를 유발하거나, 괜히 서 있는 사람의 등을 밀어 넘어트리고, 껌처럼 어깨와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괴롭히는 것들.
“……너 만나기 거북해.”
“왜요?”
“속이 시커먼 것 같으니까.”
“아주 순수한 마음인걸요?”
순수하다니. 뻔뻔한 단어 선택에 웃음이 나왔다. 가릴 생각도 없이 대놓고 비웃자 재연이 따라 웃었다. 깨끗한 미소였다.
“정말인데.”
“거짓말하지 마.”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스스로 생각해.”
“아아, 싫은데.”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을 돌리는 저 화법이 짜증 났다. 하재연의 얼굴을 흘끗 노려봤다. 흰 뺨은 곡선이 둥글게 지어져 있었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선과 면을 잘 조합해 붙여 놓은 것 같은 얼굴이다. 잘 찾아보면 오른쪽 눈 바로 밑에 점이 있었다. 번진 것처럼 흐린 갈색 점이라 뭐가 묻었다고 생각해서 곧잘 손으로 문지르곤 했었던, 옛날에는 좋아했던 외모의 한 부분이었다.
까만 눈을 반짝이며 재연이 웃는다.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이 붉은 남자 귀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접착제를 붙인 것처럼 눈을 움직일 수 없었다. 피눈물을 줄줄 흘리던 귀신이 허공에서 발버둥을 쳤다. 어둠의 구석구석 닦여 나가지 못한 찌꺼기처럼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었다.
“너 도대체 뭐야?”
입은 움직였지만 여전히 그 귀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골이 상접한 귀신이 행악질을 하면서 귀곡성을 내질렀다. 마이너스 파동을 가진 비명에 귀가 따끔거렸다.
“뭐라뇨?”
“너 이상해.”
“이상한 건 형도…….”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귀신은 스스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나사못처럼 빙글빙글 돌아간 목 가죽이 손톱 사이에서 짓이겨지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훌렁 벗겨졌다. 살점의 절단면이 그대로 드러났다. 욱, 입술을 씹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제야 눈이 돌아갔다. 재빨리 커피를 입에 넣었지만 이미 비위가 상한 뒤였다.
바닥에 고인 커피를 전부 마셔 버리고 난 뒤에야 숨이 돌아왔다. 가끔 저렇게 끔찍하게 자학하는 놈들이 있었다. 괴롭히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인지라 끝나기 전까지는 눈을 뗄 수도 없어서 더 고약했다. 여러모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팔뚝에 올라온 소름을 슬슬 문질렀다.
“……방금 전 사고, 제대로 대답해.”
턱을 괸 채 잠시 얼굴만 바라보던 재연이 다 마셔 버린 컵에서 얼음을 하나 꺼내 깨물었다. 입 안에서 와드득하는 시원한 소리가 났다.
“제가 촉이 좋아요.”
촉이라. 예상보다도 못한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 얼굴을 보니 전혀 안 믿는 것 같네요.”
“너라면 믿겠어?”
“믿어야죠. 커피 한 잔 더 사 올게요.”
“필요 없어.”
“형 얼굴, 지금 창백한 건 알아요?”
비웃는 것처럼 토막 난 웃음을 흘린 재연이 빈 컵을 치우고는 계산대로 갔다. 지갑을 꺼내고 주문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굴을 문질렀다. 유리창에 반사된 내 모습은 피를 뺏긴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재연이 다시 사 온 커피를 전부 마시고 나서야 속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의자에 푹 기댄 채 차갑게 식은 손끝을 꾹꾹 눌렀다. 손발이 차가워서 아플 정도였다. 저린 손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재연이 제 컵에서 얼음을 꺼내 입 안에 넣고 굴리며 입을 열었다.
“촉이 좋다는 게 농담은 아니에요. 가끔 꿈을 꾸거나,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거나…….”
“…….”
“저도 새삼 신기하네요. 선조가 유명한 무당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당 좋아하시네. 확실히 재연은 어릴 때 울음을 터트리면서 잠에서 깨어나던 적이 많았다. 무슨 꿈을 꿨는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칭얼거리며 안겨 들었었다. 그 귀여운 악몽은 어릴 때로 끝이었고, 다 자란 하재연은 아주 드물게나 악몽을 꿨다며 애처럼 품 안에서 골골거렸다.
“그럼 내가 이미 알았겠지. 어릴 때는 없던 능력이 스물이 넘어서 갑자기 생겼다고?”
“형, 왜 이렇게 날카로워요?”
테이블 위로 빛이 반사돼서 날카로운 윤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위장이 따끔거렸다. 온종일 고생해 편도가 부었는지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쓰라렸다.
“아까 뭔가 보기라도 했어요?”
“…….”
재연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무릎을 잡아 왔다. 차갑게 식은 손이 무릎뼈를 꽉 움켜쥐었다 놓았다. 순간 몸 안에 무쇠 막대가 틀어박힌 것 같았다. 꼬챙이로 관통당해 늘어진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 말만 들으면, 마치 형도 그런 영감이 있다는 것 같잖아요.”
“…….”
“그래요?”
“아니, 아니야.”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꺾인 고개 사이로 얼음이 잔뜩 녹아 물처럼 변한 커피잔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잔을 손안에 꽉 쥐었다. 조금씩 떨리는 잇새를 내리 물었다. 손끝부터 서서히 체온이 식었다. 온몸에 한겨울에 내린 서리처럼 소름이 돋았다. 앞에 앉은 재연이 공포의 상징물처럼 느껴졌다.
2. 화염과 발자취 (2)
용의자라 주장한 사내의 인상착의를 좀 더 자세하게 읊어 주고 그림까지 그렸다. 몇 번 더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통보를 마지막으로 겨우 풀려났다. 이미 출근 시간은 지나 있었고, 배터리가 한 칸 남은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쌍욕을 얻어먹겠구나. 일한 지 보름밖에 안 된 주제에 무단결근이라니. 고 영감을 끼고 있으니 잘리진 않겠지만 대놓고 싫어할 게 분명하다.
세수라도 하고 갈 요량으로 경찰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뼈대 굵은 형사의 주먹으로 얻어맞아 그런지 벌써 퍼렇게 피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입술도 찢어져 입가에 빨갛게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공무원이 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해도 되는 건가. 대한민국은 썩었어. 속으로 투덜거리며 흐르는 물에 세수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사람이 죽은 날치고는 화창하고 상쾌한 날씨였다. 공사장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죽은 아가씨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보다는 범행 방식이 더 찝찝했다. 최소한 재판 과정을 어느 정도 겪은 관계인. ……집까지 찾아올 정도로 의욕적인 원장의 광신도는 누가 있지.
천륜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한 번 버려진 탓에 고아원의 아이들은 소심했고 의젓한 척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고 독립을 시작하면 검은 그림자를 내보이는 놈들이 한둘은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는 나이를 먹은 후에야 제대로 엇나간 놈도 있었다.
하지만 그놈들이 내 주소를 알 리가 없다. 출소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서주영과 하재연이 전부였다. 고 영감은 내 과거를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드러난 피부만 봐도 젊은 남자의 외관이었다. 누구지. 새벽 내내 잠을 설치고 시달렸더니 머리가 쑤셔 왔다. 팔자가 흉악하네.
터덜터덜 걸어가다 택시를 잡고 공사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하자마자 작업반장의 욕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런 씨펄, 때려치워!”
“죄송합니다.”
굽실거리며 허리를 몇 번이나 숙이고 나서야 작업반장은 열이 시뻘겋게 오른 얼굴로 일당은 반만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 시간 지각을 했다고 마음대로 일당을 반 토막 내는 처사가 부당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뒤늦게 남아 있는 궂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건물을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철골 구조를 엮었다. 가랑이 사이에 철골을 끼우고 움직일 때마다 금속이 휘청휘청했다. 몇 개의 철근을 묶고 나서 기어 내려오자 고 영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인이라지?”
“그건 또 언제 들으셨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을 빨리도 안다며 투덜거리자 고 영감이 힐힐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쪽에 아는 놈이 있지.”
“발도 넓으시네요.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지각을 했으니 돈 벌려면 야간이라도 해야지?”
당분간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될 텐데 통나무* 처리를 하라니. 험상궂은 형사의 얼굴을 생각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이 늘 있는 건 아니었다. 할 수 있을 때 잔뜩 해서 돈을 벌어 둬야 한두 달 치 월세를 낼 돈이라도 미리 모아 둘 수 있었다.
아무리 끔직한 일이라도 반복할수록 죄책감은 옅어지게 되어 있었다. 생각을 멈추고 노인과 작업반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거절하거나 발을 빼려고 하면 영감은 분명 내 등을 떠밀어 콘크리트 배합기 안으로 집어넣어 갈아 버릴 것이다. 지금도 보아라,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두 번은 없다고 말하는 듯 눈이 번뜩였다. 혐오하던 인간과 똑같은 색을 띤 눈빛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지난밤은 어땠나?”
“…….”
“두 다리 뻗고 푹 자야 해.”
그렇게 속삭이는 더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긴 망상을 했다. 기계 안에 뻣뻣하게 굳어 우둑거리는 소리가 나는 시체를 밀어 넣으면서, 내 영혼도 이렇게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한번 운명이 바뀌었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는 기분을 떨쳐 낼 순 없었다.
본보기로 죽였을까, 그 아가씨.
코끝에 꽃가루와 먼지 냄새가 다가와 앉았다. 에취, 재채기를 반복하며 코를 훌쩍거렸다. 4월 끄트머리에 안착했으면 날씨만큼 온화해야 할 텐데 바람이 영 차가웠다.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뭄처럼 갈라져 나왔다.
“저 근처에 닭발을 죽이게 하는 곳이 있는데 갈람 가지.”
며칠 같이 일을 했다고 부쩍 친한 척하는 인부 하나가 선뜻 제의했다. 아니요, 거절하기도 전에 작업반장이 어깃장을 놓았다.
“일도 못 하는 새끼를 어디 데려간다 그래?”
술을 마신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보고 인부들이 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짐짓 말없이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자 작업반장이 다시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시펄, 고 영감만 아니어도 안 썼는데.”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연거푸 사과하는데도 작업반장은 들은 눈치가 아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경찰서에 살인 혐의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어 얼굴을 문질렀다. 온종일 목장갑을 끼고 일했더니 손끝이 까칠까칠했다.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벽돌을 날랐더니 허리도 뻐근했다.
“하여튼 이래서 별 단 새끼들은 글러 먹었어. 저 봐, 뭘 했으면 하룻밤 새 얼굴에 피딱지를 달고 왔겠어?”
그 말에 누가 숨 참는 소리를 냈다. 프라이버시가 없다니까. 웃으려고 했지만 입매가 딱딱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간접적으로 내가 전과자라는 걸 떠벌린 작업반장이 흐흐 웃으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입 밖으로 벙긋벙긋 피어나는 담배 연기를 노려봤다.
“뭘 쳐다봐? 확 쳐 죽여 버릴까.”
악의적인 말투에 이쪽이 한 대 쳐 볼까, 고 영감이 얼마나 커버를 쳐 주려나, 고민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각도를 신경 써서 휘두르면 얼굴에 멋진 멍 하나는 달아 줄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는 푼돈을 건 싸움이 간수들의 눈을 피해서 열리곤 했다. 그때는 온갖 변칙 기술이 난무했다. 팔꿈치로 옆구리를 찍고 사타구니를 걷어차면 어지간한 장골도 바로 일어나진 못했다. 그리고 그런 변칙 기술은 전부 몸으로 배워야 했다. 나중에는 맷집만 늘어 오래 버티고 있으면, 빨리 두들겨 맞고 쓰러지라는 욕설이 난무했었다. 눈 먼 주먹에 급소를 잘못 맞아 정신을 반쯤 잃고 바닥에 엎어진 적은 하도 많아 이골이 날 정도였고. 지금 와서 그렇게 배운 걸 복습해 봐도 나쁠 건 없지 않을까.
물론 잔인한 욕망을 실천에 옮길 수는 없었다. 작업반장도, 고 영감도 계속 얼굴을 봐야 할 사이였다. 짜증 나.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화를 삭이는데 경쾌한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형.”
커억, 옆에 있던 작업반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반동으로 싸구려 의자가 풀썩 뒤로 넘어갔다. 공사를 한다고 막아 둔 철조망 건너편에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하재연?”
“공사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놀러 왔어요.”
“갑자기 왜.”
하필 왜, 이 시간에, 지금 여기에. 이틀 사이에 와르르 쏟아진 사건에 이제 와서 숨이 턱 막혔다.
“시험이 오늘 끝났거든요.”
재연이 프린트물을 흔들며 망쳤다고 농을 했다. 앞에 선 하재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발치에 와 닿았다. 그림자끼리 끈적끈적하게 연결된 것 같았다. 친구인가 보네. 인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연의 얼굴을 보며 잡소리를 나누었다. 작업반장이 떠벌렸던 내 과거는 이미 잊은 얼굴이었다.
“어디 갈 곳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요?”
“잔업 있어서 못 가.”
“그럼 기다릴게요.”
“하재연.”
“10시에 끝나든 11시에 끝나든 상관없어요. 기다릴게요.”
범죄 은닉 현장에 타인을 둔다고? 안 될 말이었다. 몇 번 더 재연을 설득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모습에 작업반장이 혀를 차며 가라는 손짓을 했다. 눈에는 재수 없는 놈이라는 욕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일감을 내버려 둔 채 일어났다. 고 영감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노인이 코를 풀면서 침을 퉤 뱉었다.
“두 번은 없어.”
“네.”
“얼른 그 핏덩어리 데리고 가.”
재연은 고 영감이 자신의 앞에 대고 재수 없다고 욕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넉살 좋게 꾸벅 인사까지 하더니 내 손을 잡아끌고 공사 터를 벗어났다. 모퉁이를 돌자 재연은 다짜고짜 나를 끌어안았다. 온종일 땀을 흘려 퀴퀴한 냄새가 날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혀엉, 콧소리가 섞인 애교에 진저리를 쳤다.
“이거 놔.”
“오랜만에 보는 건데 좀 봐줘요. 반갑지 않아요?”
“전혀.”
“너무하네요.”
다 큰 남자애가 칭얼거려 봐야 귀여워 보이지도 않았다. 서글서글 사람 좋게 웃는 재연을 억지로 떨쳐 냈다. 재연이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프린트물을 길가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는 갑자기 팔짱을 껴 왔다. 몇 번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재연에게 한쪽 손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짐에 눌려 빨갛게 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재연이 싱글벙글 웃었다.
“갑자기 어디에 가자고 찾아온 건데?”
“아, 그냥…….”
웃는 얼굴이 미묘했다. 무심코 재연의 온몸을 훑었다. 저기서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끼면 덩치가 비슷해 보일까. 재연은 호리호리한 체격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 덩치를 만들려면 옷을 상당히 껴입어야 할 것이다. 두꺼운 옷을 몇 개나 껴입은 상태에서 길 가던 여자를 제압해서 살해하는 게 가능할까.
“야, 너 어제…….”
“쉿.”
“어?”
“조용히 해요.”
입술에 가만히 검지를 댄 재연이 뒤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사장이 있는 방향이라 덩달아 뒤로 고개를 돌렸다. 간이 철골 위에 묶어 둔, 보기만 해도 묵직한 철근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릿느릿하게 끈이 풀리고, 묵직한 쇳덩어리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 입 안에서 숨죽인 비명이 나지막하게 나왔다.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철근 몇 개가 일시에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누구야! 다친 사람 없어? 고함과 비명이 공사장을 뒤흔들었다. 뿌옇게 올라오는 모래 먼지를 보면서 입을 막아 목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차단했다. 저곳은 내 담당 구역이었다. 놀라 뛰어가려는데 팔이 잡혔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재연이 못처럼 박혀서 팔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거 놔.”
“안 돼요.”
“사고 났잖아.”
팔을 빼기 위해 손을 흔들었지만 하재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형적일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뼈와 근육을 뚫어 버릴 것처럼 손가락 끝까지 힘을 꽉 준 재연이 나를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못 가요.”
“뭐?”
하재연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사고가 나 누군가가 다쳤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형이 없어서 저 정도로 끝난 거니까, 가면 안 된다고요.”
이 애는, 도대체.
순간적인 공포가 발끝부터 치고 올라왔다. 오싹한 한기에 성대가 얼어붙었다. 붙잡힌 팔의 손끝이 얼얼하게 저렸다. 곤란하게 되었네. 재연이 소곤거리더니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우측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프렌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구석의 낮은 의자에 몸을 묻고 나서야 숨이 터졌다. 춥다. 몸을 웅크리고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재연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죠?”
“어떻게…….”
출소 후 카페는 처음이었다. 내 커피 취향은 서주영도 몰랐다. 누구에게 들었다고 둘러댈 수도 없을 텐데 재연은 태연하게 앞자리에 앉아 커피를 건넸다. 여러 사람이 앉았던 의자는 쿠션이 꺼져 딱딱하고 불편했다. 몇 번 몸을 틀다 바깥을 향해 비스듬하게 몸을 기댔다. 창은 밤공기에 식어 싸늘했다.
무거운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재연은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았다. 얼음이 가득 든 잔 표면이 축축했다. 얼음이 달랑거리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이상한 표정 짓지 마세요.”
하재연이 먼저 운을 뗐다.
“옛날부터 단 건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추측한 거예요.”
저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입술을 열고 험한 말을 쏟아 내는 대신 빨대를 물었다. 차갑다. 기억에서 잊혔던 씁쓸한 커피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 이전에는 블랙커피를 좋아했다. 직접 내려 마실 정도로 좋아해서, 아침마다 큰 컵 가득 채운 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옷도 장신구도 관심이 없었지만 비싼 커피 머신에 욕심을 냈다. 백만 원이 훌쩍 넘는 고급 기계를 사기 위해 야금야금 비상금도 모으고 있었다. 재연은 내게 주는 선물로 새로운 원두를 한 달에 한 번씩 사 들고 돌아왔다. 아침마다 졸린 눈으로 기계를 돌리면 퍼져 나오던 고소한 원두 향과 그 옆에서 잠을 좀 깨야겠다며 막 내린 커피가 담긴 머그컵에 얼음을 몇 조각 집어넣던 하재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미 사라진 미래다. 하재연이 그 시간들을 알 리가 없다. 심장 부근을 꽉 눌렀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아프게 자극했다.
“아까 했던 말, 뭐야?”
“벌써 본론으로 넘어가려고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야기나…….”
“하재연.”
조금만 더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라도 내뱉으며 기절할 것 같았다. 스물네 시간 가까이 정신이 혹사당했다. 여기서 사건이 하나만 더 일어나도 미쳐 버릴지 모른다. 스트레스가 골을 내리치며 부족한 정신력 대신 체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달팽이처럼 시간이 느리게 미끄러졌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재연이 한숨을 쉬었다.
“형을 보러 온 건 맞아요.”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저번에 잠깐 마주쳤잖아요?”
고 영감을 만나러 왔다가 공원에서 마주쳤던 때를 이야기하는 건가. 최소한 믿을 수 있는 변명을 해야지. 고개를 흔들며 바깥을 쳐다봤다. 형. 재연이 불렀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해가 진 거리에는 퇴근하는 직장인과 하교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많은 인파 사이에는 드문드문 가로등처럼 박힌 귀신들도 보였다. 그것들은 우울한 눈이나,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쳐다본다. 붙박이처럼 서 있는 귀신들도 많지만 움직이는 것들도 있었다. 도로에 붙어 길을 건너는 사람의 발목을 붙들어 사고를 유발하거나, 괜히 서 있는 사람의 등을 밀어 넘어트리고, 껌처럼 어깨와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괴롭히는 것들.
“……너 만나기 거북해.”
“왜요?”
“속이 시커먼 것 같으니까.”
“아주 순수한 마음인걸요?”
순수하다니. 뻔뻔한 단어 선택에 웃음이 나왔다. 가릴 생각도 없이 대놓고 비웃자 재연이 따라 웃었다. 깨끗한 미소였다.
“정말인데.”
“거짓말하지 마.”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스스로 생각해.”
“아아, 싫은데.”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을 돌리는 저 화법이 짜증 났다. 하재연의 얼굴을 흘끗 노려봤다. 흰 뺨은 곡선이 둥글게 지어져 있었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선과 면을 잘 조합해 붙여 놓은 것 같은 얼굴이다. 잘 찾아보면 오른쪽 눈 바로 밑에 점이 있었다. 번진 것처럼 흐린 갈색 점이라 뭐가 묻었다고 생각해서 곧잘 손으로 문지르곤 했었던, 옛날에는 좋아했던 외모의 한 부분이었다.
까만 눈을 반짝이며 재연이 웃는다.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이 붉은 남자 귀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접착제를 붙인 것처럼 눈을 움직일 수 없었다. 피눈물을 줄줄 흘리던 귀신이 허공에서 발버둥을 쳤다. 어둠의 구석구석 닦여 나가지 못한 찌꺼기처럼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었다.
“너 도대체 뭐야?”
입은 움직였지만 여전히 그 귀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골이 상접한 귀신이 행악질을 하면서 귀곡성을 내질렀다. 마이너스 파동을 가진 비명에 귀가 따끔거렸다.
“뭐라뇨?”
“너 이상해.”
“이상한 건 형도…….”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귀신은 스스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나사못처럼 빙글빙글 돌아간 목 가죽이 손톱 사이에서 짓이겨지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훌렁 벗겨졌다. 살점의 절단면이 그대로 드러났다. 욱, 입술을 씹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제야 눈이 돌아갔다. 재빨리 커피를 입에 넣었지만 이미 비위가 상한 뒤였다.
바닥에 고인 커피를 전부 마셔 버리고 난 뒤에야 숨이 돌아왔다. 가끔 저렇게 끔찍하게 자학하는 놈들이 있었다. 괴롭히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인지라 끝나기 전까지는 눈을 뗄 수도 없어서 더 고약했다. 여러모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팔뚝에 올라온 소름을 슬슬 문질렀다.
“……방금 전 사고, 제대로 대답해.”
턱을 괸 채 잠시 얼굴만 바라보던 재연이 다 마셔 버린 컵에서 얼음을 하나 꺼내 깨물었다. 입 안에서 와드득하는 시원한 소리가 났다.
“제가 촉이 좋아요.”
촉이라. 예상보다도 못한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 얼굴을 보니 전혀 안 믿는 것 같네요.”
“너라면 믿겠어?”
“믿어야죠. 커피 한 잔 더 사 올게요.”
“필요 없어.”
“형 얼굴, 지금 창백한 건 알아요?”
비웃는 것처럼 토막 난 웃음을 흘린 재연이 빈 컵을 치우고는 계산대로 갔다. 지갑을 꺼내고 주문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굴을 문질렀다. 유리창에 반사된 내 모습은 피를 뺏긴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재연이 다시 사 온 커피를 전부 마시고 나서야 속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의자에 푹 기댄 채 차갑게 식은 손끝을 꾹꾹 눌렀다. 손발이 차가워서 아플 정도였다. 저린 손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재연이 제 컵에서 얼음을 꺼내 입 안에 넣고 굴리며 입을 열었다.
“촉이 좋다는 게 농담은 아니에요. 가끔 꿈을 꾸거나,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거나…….”
“…….”
“저도 새삼 신기하네요. 선조가 유명한 무당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당 좋아하시네. 확실히 재연은 어릴 때 울음을 터트리면서 잠에서 깨어나던 적이 많았다. 무슨 꿈을 꿨는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칭얼거리며 안겨 들었었다. 그 귀여운 악몽은 어릴 때로 끝이었고, 다 자란 하재연은 아주 드물게나 악몽을 꿨다며 애처럼 품 안에서 골골거렸다.
“그럼 내가 이미 알았겠지. 어릴 때는 없던 능력이 스물이 넘어서 갑자기 생겼다고?”
“형, 왜 이렇게 날카로워요?”
테이블 위로 빛이 반사돼서 날카로운 윤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위장이 따끔거렸다. 온종일 고생해 편도가 부었는지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쓰라렸다.
“아까 뭔가 보기라도 했어요?”
“…….”
재연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무릎을 잡아 왔다. 차갑게 식은 손이 무릎뼈를 꽉 움켜쥐었다 놓았다. 순간 몸 안에 무쇠 막대가 틀어박힌 것 같았다. 꼬챙이로 관통당해 늘어진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 말만 들으면, 마치 형도 그런 영감이 있다는 것 같잖아요.”
“…….”
“그래요?”
“아니, 아니야.”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꺾인 고개 사이로 얼음이 잔뜩 녹아 물처럼 변한 커피잔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잔을 손안에 꽉 쥐었다. 조금씩 떨리는 잇새를 내리 물었다. 손끝부터 서서히 체온이 식었다. 온몸에 한겨울에 내린 서리처럼 소름이 돋았다. 앞에 앉은 재연이 공포의 상징물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