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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5. 토너먼트Ⅱ(2)


언제고 만날 황제였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수 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브란트는 약간 흥분이 되었다.
“백작님께서 공언하신 대로 준결승까지는 마상 창 시합으로 대결을 하고 결승에서는 1대1로 검투 대결을 벌일 것이다. 누가 결승에 오를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싸워서 우리 질풍 기사단의 위상을 한층 더 드높이기 바란다. 알겠나?”
“충성!”
가르딘 단장의 박력 있는 외침에 8명의 기사들도 모두 큰소리로 대답하며 다시 한 번 투지를 불살랐다.
그런 기사들의 모습에 가르딘 단장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이만 물러들 가서 푹 쉬어라.”
가르딘 단장의 해산 명령에 8명의 기사들은 단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서로를 견제하며 눈치를 살피다가 각자 어디론가로 흩어졌다.

브란트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록키가 브란트가 나타나자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단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주인님은 내일 몇 번째 싸우세요? 저도 내일 따라 가면 안 될까요?”
브란트가 그런 록키를 보고 물었다.
“숙제는?”
브란트의 한마디에 록키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브란트가 록키의 숙제를 점검하니 거의 다 했는데 끝부분만 남은 상태였다.
“하다가 멈추면 아니한 것만 못한 법이다.”
브란트의 충고에 록키가 입을 ‘쭈욱’ 내밀며 말했다.
“하다가 멈추면 한 만큼은 이익이죠.”
록키는 요즘 좀 배웠다고 이렇게 말대꾸를 했다.
브란트가 도끼눈을 뜨자 록키가 즉시 몸을 움츠렸다. 브란트는 록키에게 남은 숙제를 시켰다. 숙제를 마저 끝낸 록키가 브란트에게 숙제 검사를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다시 얘기를 꺼내려 했다.
“저…….”
“뭐야, 남자가 할 말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밝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말해 봐.”
“실은 레이첼 아가씨께 내일 마상 창 시합장의 기사 대기실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안 돼.”
브란트는 단번에 거절했다.
기사 대기실은 기사들 이외에 출입이 불가능하며, 또 아이들에게 보여 줄 만한 그런 곳이 아니었다.
실제 마상 창 시합 도중 죽거나 다치는 기사들이 비일비재했다.
크라이머 백작가의 경우 질풍 기사들이 워낙 실력이 출중하니 지금까지 크게 다치거나 죽는 기사는 없었다.
하지만 사고란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이번에도 약속을 못 지키면 전 정말 거짓말쟁이가 된단 말이에요.”
록키가 너무도 간절히 말했다.
“레이첼? 그게 누구지?”
브란트는 록키가 레이첼이란 아가씨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기억 속에 레이첼이란 인물은 없었다. 50명의 가족 중에도 분명 레이첼란 이름은 없었던 것이다.
“레이첼 아가씨는 크라이머 백작가의 손님이세요.”
“손님? 그런 손님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여기 사신 지 벌써 5년이나 되었으니 손님이 아니라 사실 가족과 같아요.”
“5년?”
“레이첼 아가씨는 로베르토 님의 조카세요.”
“로베르토의 조카?”
록키는 계속 충격적인 말을 해댔다. 그때 마다 브란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로베르토 님의 누님이신 헤나 님의 따님이세요. 아가씨께선 헤나 님을 꼭 빼닮으셔서 얼마나 예쁘고 착하신지 몰라요. 헤헤.”
록키의 눈을 보고 브란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록키는 뭔가에 완전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록키의 표정을 브란트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과거 동료 기사들 중 연애에 빠져 정신이 없던 녀석이 항상 지어 보이곤 하던 그 흐리멍덩한 표정이었다.
따악!
브란트가 그런 록키의 이마에 제대로 알밤을 먹였다.
“아야, 왜 때려요?”
발악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록키를 보고 브란트가 말했다.
“침 닦아.”
“에? 쩝.”
록키는 급히 소매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그렇게 좋아?”
“뭐가요?”
“그 레이첼란 여자 아이 말이다.”
“레이첼 님은… 천사 같아요.”
또 몽롱해지는 록키를 보고 브란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니까 쳐다보기라도 해야지요.”
록키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록키는 브란트의 말에 전혀 수긍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런 도전적인 록키는 마치 어린 시절 브란트를 보는 듯했다.
“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다고 생각해요.”
록키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브란트는 그런 록키를 기특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어째서?”
“사다리가 있잖아요.”
브란트는 좀 더 멋지고 철학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록키의 대답도 꽤나 훌륭했다.
단순하지만 아주 명확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사다리의 의미를 록키가 알고 있을지는 브란트로써도 알 수 없었다.
“좋아. 대신 구경만 하고 바로 나가는 거다.”
브란트는 기분이 좋아져서 록키를 위해 약간 무리를 하기로 했다.
8강 토너먼트 참가자인 브란트라면 그 정도는 해 줄 수도 있었다.
“정말요? 하하하. 주인님 고마워요. 쪽!”
브란트는 록키에게 기습 뽀뽀를 당하고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에? 어머니를 빼고 나에게 뽀뽀를 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브란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신나하며 밝게 웃고 있는 록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기사 밀러는 힘겹게 승리를 하고 기사 대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억지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다음 자신의 상대가 유력한 개미 기사 브란트를 쳐다보았다.
브란트는 두 남녀 아이를 데리고 기사 대기실에 나타나서 심사관으로부터 한바탕 주의를 들었다.
그리고 8강 토너먼트가 진행되는 동안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지루했는지, 연신 하품을 해 대고 있었다.
“기사 브란트. 출전 준비하십시오.”
심사관의 말에 브란트는 느릿느릿 시합장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대기 중인 말에 올라탔다.
이번에 브란트가 8강에서 상대할 기사는 파이크로 힘에서 기사 피터슨 다음으로 강한 자였다.
그러나 피터슨도 개미 기사인 브란트에게 날아간 마당이니, 파이크도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쳇! 하필 처음부터 개미와 만나다니.’
브란트가 아닌 다른 기사였다면 어쨌든 4강까지 진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기사 파이크였다.
기사 파이크는 심사관이 부르자 말을 몰고 시합장으로 들어섰다.
“와아아아!”
“앤트! 앤트! 앤트! 앤트!”
시합장은 온통 개미 기사를 응원하는 관객들뿐이었다.
기사 파이크는 입맛을 다시며 전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개미 기사 브란트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말을 탄 채 가만히 서 있지 않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심사관의 기사 소개가 있는 동안 녀석은 기마 위에서 어설프게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심사관의 소개가 끝나고 곧 나팔 소리가 시합장 내에 울려 퍼졌다.
“이랴!”
파이크가 긴장감을 떨쳐 내며 먼저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았는지 브란트도 마주 달려 나왔다.
파이크는 말을 몰아가는 도중, 천천히 자신의 투구에 달린 얼굴 가리개를 내려 썼다. 그러자 이글거리는 살기를 내뿜는 그의 두 눈도 가려졌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파이크는 방패를 들어 몸을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마상 창을 브란트의 방패에 겨누었다.
곧이어 두 필의 말에 탄 기사는 빠른 속도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달려오는 말의 탄력에 힘입어 파이크의 마상 창이 브란트의 방패를 강하게 찔러 들어갔다.
콰쾅!
파이크는 정확히 브란트의 방패를 정통으로 찔렀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방패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에 기겁을 했다.
“헉!”
파이크는 집중해서 힘을 주고 있던 마상 창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온몸의 신경을 방패를 들고 있는 왼팔에 집중시켰다.
“젠장!”
하지만 강철로 된 방패의 한쪽이 찢겨져 나가며, 중심을 잃은 파이크는 기우뚱하더니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쿠웅!
개미 기사 브란트는 거구의 피터슨에 이어서 그에 못지않게 덩치 큰 파이크를 단번에 낙마시켜 버렸다.
땅바닥에 그대로 처박힌 파이크는 낙마의 충격을 이겨 내며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어느새 말을 돌려서 브란트가 그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히히히힝!
관례대로 브란트는 말을 세우더니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장검을 뽑아 들고 여유 있는 걸음으로 파이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젠장! 생긴 건 비리비리하게 생겼는데 뭐가 이렇게 강해!”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던 파이크는 허겁지겁 자신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장검을 꼬나 쥐고 방패를 챙겨서 브란트에게 접근했다.
어느새 파이크에게 다가간 브란트는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고, 파이크는 방패를 들어 결사적으로 막아 갔다.
쩡! 쩌엉!
들고 있던 방패도 이미 오러가 맺힌 브란트의 검에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들고 있던 검마저 부러지자 파이크는 이를 악물로 뒤로 물러났다. 검마저 부러졌으니 이제 공격할 무기는 자신의 몸밖에 없었다.
“우아아악!”
파이크는 괴성을 지르며 브란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것을 보고 브란트가 몸을 틀어 피하며 슬쩍 다리를 걸었다.
“허억!”
파이크의 거구는 허공에 붕 뜨더니, 브란트의 등 뒤쪽 땅바닥에 허무하게 처박혔다.
퍽!
흙먼지가 눈코, 입으로 들어갔지만 파이크는 일어나려 했다. 그때 어느새 다가온 브란트가 파이크의 목에 검을 갖다 댔다.
“이, 이… 졌다!”
넘어져 꼴사납게 쌍코피가 터진 파이크는 이를 갈며 패배를 시인했다.

예상대로 브란트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기사 밀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반대편 기사 대기실로 이동했다. 이제 오후면 4강에서 개미 기사 브란트를 상대해야 했다.
간단하게 오전 8강을 통과한 브란트는 환호하는 관객들 중에서 록키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록키의 옆에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깜직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브란트는 아침에 록키가 데리고 온 레이첼이란 여자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브란트도 많은 귀족 영애들을 보아 왔지만, 레이첼만큼 인형처럼 예쁜 여자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아저씨가 그 개미 기사야?”
레이첼은 왕방울만 한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브란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레이디.”
레이첼을 보고 브란트는 그만 장난이 치고 싶어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합 출전을 위해 은빛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브란트는 꽤나 멋있어 보이는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과 기사의 명예를 아는 이여.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레이첼은 제법 진지하게 브란트에게 물었다. 어린 여자아이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 예상치 못했던 브란트가 되려 당혹해하며 대답했다.
“저, 저는 기사 브란트입니다.”
“좋아요. 기사 브란트. 그대가 나 레이첼의 기사가 되는 것을 허락하겠어요.”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고 브란트에게 다가와서 브란트의 볼에 뽀뽀를 했다.
쪽!
어제 록키에 이어 레이첼에게까지 기습 뽀뽀를 당한 브란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기분은 사실 많이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다. 한마디로 그는 정신이 없었다.
“오늘 잘 싸우세요. 내가 응원할게요.”
레이첼이 앙증맞게 두 주먹을 쥐어 보이며 브란트에게 말했다.
“아!”
그 모습을 본 브란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오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브란트는 록키와의 약속대로 레이첼과 록키에게 마상 창 시합장의 기사 대기실을 보여 주었다.
대신 심사관에게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실격시키겠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말이다.
기사 파이크를 꺾은 후, 브란트는 기사 대기실로 가서 일단 풀 플레이트 메일을 벗었다.
어차피 점심 이후 오후에 4강 토너먼트가 펼쳐지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2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