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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5. 토너먼트Ⅱ(3)


풀 플레이드 갑옷을 벗고 일반 사복으로 차려입자, 누구도 브란트가 개미 기사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브란트는 곧장 관람석의 록키와 레이첼을 찾아갔다.
“자, 식사하러 가자.”
브란트는 록키와 레이첼을 데리고 시합장 주위에 임시로 차려진 음식점으로 갔다. 그리고 맛있게 점심을 먹었는데 갑자기 레이첼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입니까, 마이 레이디?”
브란트가 레이첼에게 묻자 레이첼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실은 엄마한테 거짓말하고 나왔어요.”
“…….”
브란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록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록키도 많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헤나 님께서 여기 온 걸 모른단 말이에요?”
록키가 창백한 얼굴로 레이첼에게 물었다.
“응.”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자 록키도 막상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라고 말하고 온 거니?”
브란트가 묻자 레이첼이 더욱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외삼촌하고 놀러가기로 했다고…….”
그런 레이첼을 보고 브란트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어릴 때였어. 몇 달 사이 나는 무려 세 번이나 책을 잃어 버린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 혼날까 겁이 난 나는 거짓말을 했지. 친구에게 빌려 줬다고 말이야. 그러고 나서 몇 날 며칠 잃어 버린 책을 찾기 위해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지. 그동안 나는 어머니께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대느라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어. 결국 엉엉 울며 어머니 앞에 사실을 털어놓던 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지. 거짓말은 결국 나를 옭아매는 덫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브란트의 얘기가 끝나자 레이첼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알았어요. 지금 엄마한테 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게요.”
“그래. 록키, 너도 잘못이 없다고 볼 수 없어. 따라가서 사과 드리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방에서 숙제하고 기다려라.”
브란트의 말에 록키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네.”
그때 레이첼이 깜찍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의 기사 브란트여. 비록 나는 시합장에 없겠지만 그대가 우승할 것을 믿어요.”
앙증맞게 웃어 보이는 레이첼에게 브란트는 어색하게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레이첼과 록키를 시합장에서 내보내고 나서 브란트는 다시 기사 대기실로 향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준결승 토너먼트가 시작되었다. 브란트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다시 장착하고 기사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시합장에 브란트의 모습이 보이자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저기 개미 기사 브란트다!”
“와아아아!”
이제 제법 관중의 연호에 익숙해진 브란트는 준비된 말에 천천히 올라탔다. 그리고 방패와 마상 창을 챙겨 든 브란트는 심사관의 신호를 기다렸다.
푸르, 투르르!
브란트는 연신 투레질을 하는 말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이내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심사관의 목소리가 끝나고,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브란트의 귀에 들려왔다.
브란트는 본능적으로 말고삐를 당겼다.
“가자!”
히히히힝!
말이 소리를 지르며 두 발을 치켜세우고는 앞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준결승의 브란트의 상대 기사 밀러가 마주 달려 나왔다.
기사 밀러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 왼팔의 힘이 셌다. 그는 일반적으로 기사들이 사용하는 방패보다 두께가 두꺼운 방패를 사용했다. 그러니 당연히 그 무게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왼팔은 그 무게를 충분히 지탱해 냈다.
밀러가 무거운 방패를 사용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방패를 단지 막기 위한 방어구가 아닌 공격용 무기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가 묵직한 방패로 한 번 후려치면 어지간한 상대는 중심을 잃고 나가떨어졌다.
두두두두!
말들이 점차 속도를 높이면서 두 기사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졌다.
밀러는 얼굴 가리개를 내리고는 마상 창을 들어 창끝을 브란트 몸통을 향해 겨냥했다.
어차피 브란트가 방패로 막을 테지만 밀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밀러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마상 창 공격보다 브란트의 첫 번째 공격을 어떻게 막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브란트는 두 번의 시합에서 거구의 기사 두 명을 낙마시킬 정도로 굉장한 차징을 선보였다.
밀러는 그 강력한 공격을 방패로 빗겨 흘려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브란트의 마상 창이 찔러 들어오는 각도를 잘 살펴야 했다.
소드 마스터인 브란트의 눈에는 투구를 썼지만 돌격해 오는 상대 기사의 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데 기사 밀러가 온통 자신의 마상 창만 집중하고 있자 브란트는 기사 밀러의 의중을 대충 파악했다.
‘제법 머리를 굴렸군.’
브란트는 마상 창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약간 뒤쪽으로 당겨 잡았다.
두 기사의 마상 창이 막 교차하는 순간 갑자기 브란트가 마상 창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밀러가 찌른, 힘없는 차징을 마상 창을 방패로 가볍게 튕겨 냈다. 그리고 두 말이 교차하는 순간 브란트가 들고 있는 마상 창을 검처럼 휘둘렀다.
부웅!
퍽!
브란트의 마상 창이 투구를 쓰고 있던 기사 밀러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얼마나 강하게 휘둘렀던지 나무로 제작된 마상 창이 박살이 났다.
나무 파편들과 함께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밀러는 완전히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털썩!
파격적인 브란트의 변칙 공격에 관중석은 또 일시 정적에 휩싸였다.
개미 기사 브란트에 매료된 앤드류 황태자는 오늘 일부러 시합장을 찾았다.
브란트가 마상 창으로 상대를 찌르지 않고 때려서 낙마를 시키는 것을 보고 앤드류 황태자는 입을 딱 벌렸다.
“저, 저런 식으로 싸우다니.”
그러나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말에서 낙마한 기사 밀러였다.
그는 아직도 뒷머리가 뻐근한 것이 정신이 없었지만 이를 악물로 몸을 일으켰다.
“크윽!”
그의 수중에는 아직 육중한 방패가 쥐어져 있었고 허리에는 검이 차여 있었다.
스릉!
밀러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야.’
마상 창에서는 패했지만 아직 검투 승부가 남아 있었다. 밀러는 천천히 브란트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브란트는 이미 말에서 뛰어내려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밀러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번에는 브란트의 검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브란트의 검에 푸른 오러가 맺히는 것을 보고 밀러는 자신의 방패에 마나를 주입시켰다.
‘기회는 한번뿐이다.’
밀러는 브란트가 자신을 공격하면 방패로 막는 척하면서 검으로 그의 시선을 끈 후 마나를 주입시킨 육중한 방패로 브란트의 검을 후려친다면 브란트의 검이 견디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앞선 경기에서 브란트는 기사 파이크의 방패를 걸레로 만들어 놓았다. 아마 이번에도 브란트가 그런 식으로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다.
브란트가 공격 거리까지 접근하자 밀러는 방패로 몸을 가리며 자신의 검을 크게 휘둘렀다.
“타앗!”
브란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밀러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데 밀러의 검에 오러가 맺혀 있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브란트가 밀러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밀러의 방패 쪽으로 마나가 쏠리는 것을 감지한 브란트는 밀러가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무슨 속셈인지 알아볼까?’
브란트는 빠른 속도로 몸을 날리며 오러가 맺힌 검을 휘둘렀다.
캉! 캉! 캉!
파상적인 브란트의 공격을 밀러는 방패를 들어 막았다. 그러나 오러가 맺힌 브란트의 검에 오러를 주입시킨 방패의 곳곳에 흠집이 생기자 밀러는 초조하게 눈빛을 빛내며 기회를 엿보았다.
검에 비해 방패에 주입되는 마나량이 너무 많았다. 이러다가 곧 마나가 고갈될 것이 뻔했다.
그러다가 약간 지친 듯 브란트의 검이 주춤거리는 것을 포착한 밀러가 브란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슈욱!
오러도 맺히지 않은 검이었지만 일방적으로 방어만 하던 밀러가 불쑥 내민 검은 브란트를 충분히 놀라게 했다.
바로 그 순간 밀러는 방패에 오러를 최대한 흘려 넣고는 있는 힘껏 브란트를 향해 휘둘렀다.
부웅!
밀러의 검에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던 브란트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밀러의 육중한 방패에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피하지 못한다.’
밀러의 생각대로 브란트는 더 물러나지 못하고 우선 들고 있던 검으로 밀러의 육중한 방패를 막으려 했다.
‘됐다.’
밀러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브란트의 검이 자신의 방패에 박살이 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터엉!
그런데 브란트는 방패가 날아오는 각도에 맞춰서 검을 비스듬히 세워 다른 방향으로 흘려 버렸다.
방패 공격에 온 힘을 집중시켰던 밀러는 균형이 완벽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그런 밀러를 브란트는 검을 잡지 않은 왼손을 툭 밀쳤다.
“헉!”
밀러는 옆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십 여 걸음을 내딛고 나서야 겨우 몸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관중석이 일제히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하하. 완전히 옆으로 걷는 게 바다 크랩(게)이로군.”
“뭐야, 그럼 기사 밀러는 크랩 기사가 되는 거야?”
하지만 그 덕분에 관중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된 기사 밀러는 얼굴이 뻘겋게 상기되었다.
‘이런 수치가 있나!’
“타앗!”
이판사판, 밀러는 몸을 방패로 가리며 그대로 브란트를 향해 돌진했다.
브란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밀러를 전면에서 기다리다가 방패가 몸에 닿을 때쯤,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피했다. 그러면서 왼 다리로 슬쩍 밀러의 다리를 걸었다.
“헉!”
그러자 맹렬히 달려들던 밀러의 몸이 허공에 붕 뜨더니, 이내 바닥에 꼬꾸라졌다.
쿠웅!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서던 밀러는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앞에 서서 자신의 투구를 향해 건틀렛에 싸인 주먹을 내지르는 브란트를 물끄러미 지켜봐야만 했다.
퍼억!
브란트의 주먹은 밀러의 투구를 일그러뜨리고, 그의 안면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컥!”
엄청난 충격을 받은 밀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로 의식을 잃고 모로 쓰러졌다.
털썩!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심사관이 달려 나와 외쳤다.
“기사 브란트, 승! 결승 진출!”
심사관의 선언에 수많은 관객들이 일제히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브란트는 가볍게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며 기사 대기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최종 토너먼트의 결승에 오른 기사는 개미 기사 브란트와 광속 기사 가렌이었다.
브란트는 덩치에 비해 강력한 힘과 지칠 줄 모르는 오러 검으로 유명했고, 광속 기사 가렌은 빠른 움직임과 빛처럼 빠른 검격이 일품이었다.
두 기사의 대결은 황제가 직접 관전하는 가운데 저녁에 벌어질 예정이었다.
기사 대기실에서 무거운 풀 플레이트 메일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브란트가 막 밖으로 나갔을 때, 총관인 로베르토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첼의 일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 아이와 만나지 마십시오.”
로베르토의 싸늘한 말에 브란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총관이 그 아이의 아버지인 것처럼 말하는군요.”
브란트의 말에 로베르토가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 아이의 보호자니 아버지나 마찬가지요. 다시 말해 두는데 내 누님와 레이첼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마시오. 그랬다가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장담할 수 없소.”
로베르토는 그 말을 끝내자 바로 뒤돌아섰다. 로베르토의 이런 민감한 반응에 브란트는 다소 놀랐다.
‘의외군.’
브란트가 아는 총관 로베르토는 이렇게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조카인 레이첼 때문에 로베르토는 브란트 앞에서 참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역시 사람은 완벽할 수는 없는 모양이야.”
브란트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로베르토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어떻게 됐어요?”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던 록키가 브란트가 나타나자 득달같이 달려 나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