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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8. 실종(2)
그러던 중 브란트의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천여 년 전 파르마니안 대륙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 시기로 기록되는 제3차 세계대전시 활약했던 한 지휘관에 대한 기록이었다.
“마르쿠스 R. 로제니!”
그는 평민 출신 기사로써 당시 대국인 로마네스 제국으로부터 자신의 나라인 알제리 왕국을 지킨 명장이었다. 그는 이름보다 별칭이 더 유명했다.
“붉은 여우!”
알제리 왕국은 붉은색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병사들의 전투복도 붉은색이었다고 전해진다. 로제니도 아마 붉은 갑옷을 입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는 파르마니안 대륙 전쟁사에서 최고의 전략가이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전술가였다.
브란트는 그가 주로 사용했던 전술들이 적혀 있는 기록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철저한 정통 용병술을 사용하면서도 변칙적인 전술 변화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이러니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적장도 알 수 없을 수밖에. 과연 여우다운 인물이다.”
당시 로마네스 제국에도 로제니에 못지않은 명장이 있었다. 바로 불패의 명장 케네스 공작이었다.
그러나 케네스 공작과 붉은 여우 로제니의 싸움은 성사되지 못했다. 케네스 공작이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네스 제국은 급작스럽게 황제가 타개함으로써 황자들 간에 치열한 황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때 황태자의 편을 들었던 케네스 공작은 다른 황자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그래서 케네스 공작은 전쟁터에서 죽고 싶다던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저택에서 암살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케네스 공작이 죽고 나자 붉은 여우 로제니를 상대할 만한 지휘관이 없었다. 결국 로마네스 제국은 알제리 왕국에서 철수해야 했다.
“로제니라…….”
브란트는 자신과 같은 평민 출신의 붉은 여우 로제니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가 자주 말했다는 말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그러나 영웅이 필요할 만큼 불운한 시기라는 뜻도 된다. 영웅은 피를 부른다. 때문에 나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다.”
브란트는 한동안 붉은 여우 로제니의 병법들에 심취했다. 그러다가 또 로마네스 제국의 불패의 명장 케네스 공작에게 빠졌다.
케네스 공작은 무기 발명의 천재였다. 그는 적보다 무장이 뛰어나지 않으면 아예 싸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병사들의 훈련도 중요하지만 케네스 공작은 무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병사들도 자신들이 적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기가 높았다고 한다.
개량된 전차와 투석기, 쇠뇌의 발명으로 케네스 공작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명장으로 손꼽혔다.
실제 붉은 여우 로제니도 케네스 공작만큼은 대적하기를 두려워했다고 했다. 케네스 공작이 또 어떤 기막힌 신무기를 개발해 낼지 로제니도 알 수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브란트는 케네스 공작이 만들어서 사용했던 각종 무기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 무기들의 설계도를 찾느라 도서관을 온통 뒤졌다.
그렇게 몇 개의 무기 설계도를 구한 브란트는 그 무기를 직접 제작하겠다며 자신의 방을 크라미어 백작가의 공방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브란트는 연금술 책을 뒤져서 새로운 재질의 금속을 연구하고 직접 무기와 방어구를 제작해 보기도 했다. 해서 훨씬 가볍고 강도도 뛰어난 재질의 금속으로 흉갑을 제작해서 휘하 20명의 기사들에게 입히기까지 했다.
또 각종 공성 병기들과 전차, 쇠뇌, 이동식 망루와 파성퇴 등을 신무기 제작에도 열을 올렸다.
그렇게 브란트는 질풍 기사단의 훈련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통 책과 신무기를 만드는 일에 빠져 살았다.
브란트는 투석기와 공성용 이동식 망루의 경우 그 크기를 1/10로 줄여서 제작했다. 실제 크기로 제작하기에는 재료를 구하는 문제도 그렇고 주위 이목 역시 신경 쓰였기 때문에 일단 작게 만들었다.
브란트는 투석기의 반동을 줄이기 위해 지지대를 세우자 이전의 투석기에 비해 비거리가 더 늘어났다. 그리고 이동식 망루의 경우 그 바퀴를 더 크게 함으로써 훨씬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렇게 브란트는 케네스 공작이 예전에 제작한 무기들의 단점을 하나하나 보완하며 불패의 명장의 신무기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붉은 여우 로제니의 병법도 매일 연구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신무기와 병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후 브란트는 다시 지식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브란트는 다시 제국 도서관을 찾아서 ‘학문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릴 때 읽었던 적이 있던 책들을 보며 브란트는 다시 학문을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이미 30살을 넘지 않았던가?
브란트는 잠시 고심했지만 이내 결심하고 책을 골랐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한 현자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렇게 대책 없이 책을 챙겨 들고 백작가로 돌아온 브란트는 책에 빠졌다. 책을 읽으면서 브란트는 훨씬 더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
‘아!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가?’
어른이 된 후 귀족이 되고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인생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나 자신의 정신이 시공의 장을 초월한 것 같으며 이렇게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구나. 누가 그랬던가? 배움에는 그 끝이 없다고 말이다.”
책에 빠져 들면서 브란트는 점차 포기했던 학문을 다시 시작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들은 브란트에게 세상과 삶이 새롭게 보이는 경이로운 느낌을 주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아니라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마다 삶을 해석하는 수준과 방법이 엄연히 다르니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좁은 시야에 갇혀 자신의 경험을 뛰어넘는 해석을 하기 어렵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사회의 통념을 벗어나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지.”
좋은 책은 브란트의 경험과 사회의 통념을 벗어나 보다 높은 자유로운 정신을 접하도록 이끌어 주었고, 위대한 정신에 부딪쳐 마음이 열릴 때 또 다른 눈을 뜨며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내 앞을 가로막는 그 모든 부조리와 싸우며 힘찬 변화를 시작할 것이다.”
브란트는 책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꿈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면서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사상을 갖게 되었고, 그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브란트가 책에 빠져 있는 동안 누구보다 행복한 건 록키였다. 물론 브란트가 내주는 숙제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브란트는 뭔가를 제작한다며 공방에서 아주 살았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은 록키에게 공휴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록키는 그 노는 시간 대부분을 레이첼을 만나는데 소비했다.
브란트에게 글을 배운 록키는 자신이 글을 안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 레이첼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 책은 브란트가 록키에게 책 읽은 즐거움을 알게 하기 위해 추천한 동화였다. 브란트의 예상대로 록키는 정말 재미있게 그 동화책을 읽었다.
동화의 내용은 어느 나라의 왕자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얼굴이 똑같은 거지가 서로 의복을 바꾸어 입고 왕자는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자가 되어 각기 이상한 체험을 하는 이야기였다.
록키가 왕자 얘기를 읽고 거지 주인공의 얘기를 읽고 있을 때였다. 다소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이첼이 불쑥 물었다.
“록키. 빈민촌을 알아?”
거지 주인공이 사는 빈민촌을 레이첼이 궁금해 했다.
“빈민촌은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에요.”
록키는 그곳에 대해 잘 아는 척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레이첼이 눈빛을 빛냈다.
“록키도 그곳에 가봤어?”
“빈민촌이요? 물론 가봤죠. 저도 한때 그곳에서 살았는걸요. 그곳에 대해서라면 저에게 다 물어보세요.”
빈민촌에 산 것이 자랑은 아닐 텐데 록키는 레이첼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래? 잘됐다. 나 좀 그곳에 데리고 가줘.”
“네? 안 돼요.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요.”
록키가 펄쩍 뛰며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아앙,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가 보자. 응?”
레이첼이 애교를 피웠지만 이번만큼 록키는 확고했다.
“절대 안 돼요. 거긴 아가씨처럼 고귀한 분이 가실 곳이 못돼요.”
“아이, 그러지 말고 가자. 그럼 나도 록키의 소원을 들어줄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레이첼의 말에 록키가 슬쩍 반응을 보였다.
“거, 거긴 왜 가시려는 건데요?”
“동화책에 보면 빈민촌이라는 데가 꼭 나오잖아. 그곳이 어떤 곳인지 꼭 보고 싶어.”
레이첼의 대답에 록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록키는 들고 있던 동화책을 가리키며 레이첼에게 물었다.
“혹시 이 책도 읽으셨어요?”
“응. 재미있어서 10번도 더 읽었어.”
록키는 레이첼이 10번도 더 읽은 책을 레이첼에게 읽어 주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혼자서 열심히 삽질을 한 것이다.
레이첼은 록키가 많이 실망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록키가 읽어 주니 재미있는 걸.”
레이첼의 말에 록키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말이요?”
“그래. 하지만 빈민촌은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 그곳이 위험하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빨리 가서 구경만 하고 돌아오면 되잖아. 록키, 가자. 응?”
레이첼이 록키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록키는 레이첼이 자신의 팔을 잡자 살짝 얼굴을 붉혔다.
록키는 점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 레이첼이 너무도 간절하게 빈민촌을 가 보고 싶어 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빨리 구경만하고 돌아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록키가 반승낙한 듯 말하자 레이첼이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냉큼 대답했다.
“당연하지. 언제 데리고 가 줄 거야?”
브란트가 내일이면 공방에서 나올 거란 얘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록키에게도 자유 시간은 오늘 뿐이다. 다행스럽게 이때 레이첼의 외삼촌인 로베르토도 수도를 떠나 있었다.
로베르토는 총관으로 크라이머 백작령의 각 영지를 돌며 세금을 거두고 또 각종 민원을 해결해 주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레이첼의 모친인 헤나도 오늘은 몸이 안 좋은지 자신의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록키에게나 레이첼에게 빈민촌에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지금 갈까요?”
“지금?”
레이첼도 생각해 봤는데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좋아, 가.”
그렇게 12살인 록키와 10살인 레이첼은 록키가 잘 아는 개구멍을 통해 크라이머 백작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빈민촌으로 향했다.
록키와 레이첼이 막 빈민촌 입구에 들어서자 먼저 시궁창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레이첼은 코를 부여잡으며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록키. 이게 무슨 고약한 냄새야?”
록키는 대답 대신 그냥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알게 된다고 말하고 빈민촌 안으로 들어갔다. 록키는 불과 3년 전만 해도 이곳 빈민촌에 살았다. 아버지가 노름빚 때문에 어머니와 록키를 노예상에 팔기 전까진 말이다.
록키와 록키의 어머니는 운 좋게 크라이머 백작가의 총관인 로베르토로 인해 노예로 팔리기 전 크라이머 백작가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열심히 일해서 로베르토에게 진 빚도 다 갚은 상태였다.
이곳 빈민촌은 록키에게 다시 오고 싶지 않은 최악의 장소이면서 한때 단란했던 시절 가족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록키는 레이첼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이첼은 빈민촌에 들어서면서 그 지독한 냄새가 시궁창 냄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거지?”
레이첼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여건인데도 불구하고 더덕더덕 붙은 집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화책에서는 이런 모습까지 세세히 설명해 주진 않았던 것이다.
“가서 빨리 보고 나오는 겁니다.”
“응.”
그런 레이첼을 데리고 록키는 빈민촌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거지로 보이는 한 아이가 길모퉁이에 숨어서 록키와 레이첼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그들이 빈민촌 안으로 들어서자,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