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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8. 실종(3)


그 후 한 시간 쯤 뒤, 록키가 절뚝거리며 크라이머 백작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털썩!
그러다 쓰러지자 록키는 이를 악물고 기었다. 록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계속 피가 흘러내렸고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온몸은 군데군데 옷이 뜯겨 나갔고, 뜯겨 나간 옷 사이로 비치는 속살들은 째진 상처와 시꺼먼 멍투성이였다.
록키는 다리도 부러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록키는 뭔가에 홀린 듯 부러진 다리로 뛰었다. 그러다가 넘어지자 이번에는 두 팔로 기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록키가 계속 중얼거렸다.
“아가씨. 아가씨.”
그렇게 계속 기던 록키는 크라미어 백작가의 정문에 도착했다.
“헉! 너는 록키가 아니냐?”
다행히 정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피투성이에 먼지를 뒤집어쓴 록키를 알아보았다.
“어, 어서 저를 헤나 님께…….”
“무슨 소리야? 부상이 너무 심해! 어서 치료를 받아야…….”
경비병이 록키를 부축하자 록키가 간절히 말했다.
“제발… 헤나 님께…….”
“알았다.”
경비병은 록키를 들쳐 업고 총관인 로베르토가 사용하고 있는 백작가의 건물로 뛰어갔다.
이때 몸살로 하루 동안 심하게 아팠던 레이첼의 모친인 헤나가 정신을 차렸다. 몸이 워낙 허약했던 헤나는 일 년의 절반은 이렇게 병석에 주워 지냈다.
그녀는 평소처럼 정신이 들자 바로 레이첼을 찾았다. 그런데 레이첼의 모습이 백작가 내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아이가 도대체 어딜 간 거지.”
헤나가 걱정하고 있을 때 경비병이 록키를 업고 나타났다. 헤나는 록키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아가씨께서…….”
“레이첼이 어떻게 됐다고?”
헤나가 창백한 얼굴로 록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빈민촌에서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록키가 감히 헤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뭐, 뭐라고?”
안 그래도 연약한 헤나가 그 말에 비틀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헤나의 시녀가 바로 그녀를 부축했다.
“어, 어서 로베르토에게 알려라.”
헤나가 시녀에게 다급히 말하자 시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총관께서는 지금 영지에 가 계시는지라…….”
“오오, 이,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헤나가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슬퍼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이 더 헤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브란트 님, 브란트 님이라면 도와주실 거예요.”
이때 록키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눈물만 흘리고 있던 헤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브란트!”
헤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크라이머 백작의 둘째 아들로 질풍 기사단의 5조 조장이며 올해 토너먼트의 우승자로 황제로부터 직접 작위를 받은 남자.
“그는 지금 어디 있지?”
헤나가 록키에게 물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경비 아저씨 제가 묵고 있는 곳으로 좀…….”
록키를 업은 경비병이 앞장서자 헤나가 벌떡 일어서서 그 뒤를 따랐다.
‘레이첼을 이렇게 잃을 순 없어.’
헤나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이를 꽉 깨물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브란트는 투석기에 이어서 새로운 쇠뇌 개발에 몰두하다가 결국 신형 쇠뇌를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기존의 쇠뇌보다 비거리가 훨씬 향상된 쇠뇌를 들고 브란트가 자신의 방에 도착했을 때 록키는 어디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브란트는 신형 쇠뇌를 록키에게 보여 주려 일부러 공방에서 들고 왔는데 록키가 없자 살짝 기운이 빠졌다.
그때 경비병이 부랴부랴 록키를 업고 나타났다.
“내려주세요.”
경비병이 업고 있는 록키를 내려놓았다.
“록키!”
록키의 몰골에 브란트가 놀라 할 때, 록키가 부러진 다리 때문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기어서 브란트에게 다가가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울부짖으며 말했다.
“제발, 제발 아가씨를 구해주세요!”
“……?”
그게 무슨 소리냐며 브란트가 록키를 쳐다보았다. 그때 록키를 업은 경비병 뒤쪽에서 한 귀족 여인이 나타나서 브란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 님. 부디 제 딸을 구해 주세요.”
“……?”
브란트는 갑작스런 상황에 정신이 없었다. 그의 발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고 브란트가 말했다.
“일단 진정을…….”
그때 그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은 갸름한 얼굴과 큰 눈망울, 어깨 바로 밑까지 내려와 있는 암갈색의 머리카락이 갈색의 눈동자와 함께 조화를 이뤄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브란트도 처음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지금 브란트에게 여자는 사치일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여자의 미모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록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브란트가 록키를 돌아보며 묻자 록키가 레이첼과 함께 빈민촌에 가게 된 이유와 그 과정을 급히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브란트가 록키에게 냉철하게 말했다.
“무모한 짓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흑흑흑.”
록키가 고개를 숙이며 훌쩍였다. 브란트가 다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너무도 간절한 눈빛으로 브란트를 계속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브란트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너무도 닮은 그녀의 눈빛을 보았다.
슬픔을 억누르며 붉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브란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선 온통 슬픔밖에 없었다.
그것이 브란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딸이 실종되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이 브란트는 이해가 되었다.
브란트 역시 꼼짝 없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을 때 지금의 그녀와 같은 상실감과 절망감을 맛보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미울까?’
브란트는 이 여인을 도와주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브란트가 록키를 보고 말했다.
“너는 치료를 받고 있어라. 이 일은 내가 해결하겠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록키가 거듭 고개를 숙였다. 브란트가 직접 나서겠다는 말을 듣고 난 후, 록키는 그제야 조금 안정된 눈빛을 보였다.
“부인께서도 이만 돌아가 계십시오. 제가 레이첼을 찾아오겠습니다.”
브란트의 말에 헤나가 일어서서 브란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오, 감사합니다. 부디 이 가련한 여인에게 딸을 찾아 주세요.”
“…….”
레이첼의 어머니 손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브란트는 문득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헤어졌을 때가 생각났다.
브란트는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로가디스 후작의 부름을 받고 로가디스 후작성으로 떠날 때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본 순간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브란트의 손을 잡고 자식 걱정만 하셨다. 당시를 생각하니 브란트도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브란트는 급히 호흡을 가다듬고 가슴을 진정시킨 후, 헤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한시가 급합니다.”
브란트의 말에 헤나는 잡고 있던 브란트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러자 브란트는 헤나를 지나쳐서 방을 나서 말을 타고 레이첼이 실종되었다는 빈민촌을 향해 달려갔다.



9. 악연도 인연(1)


이제 열 살인 레이첼은 심한 두통에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깜깜한 어둠이었다.
“아!”
손발이 묶여 있어 그녀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점차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그녀는 곧 이곳이 좁은 밀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누, 누구 없어요? 아무도 없나요?”
레이첼이 고함을 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레이첼은 왈칵 두려움에 눈물이 났다.
록키가 위험하다고 그렇게 경고를 했건만 결국 그를 부추겨 빈민촌에 온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 몰랐다.
레이첼과 록키가 빈민촌의 한복판에 도착했을 때 이제 그만 돌아가자는 록키를 레이첼은 빈민촌에서 선다는 시장만은 꼭 좀 보고 가자고 졸랐다.
그렇게 빈민촌 내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시장으로 가게 된 레이첼은 그곳을 구경하다가 록키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때 많은 인파에 몰려 레이첼이 계속 앞쪽으로 밀려갔고, 그곳에서 웬 중년의 음흉한 아저씨가 그녀를 향해 손짓하며 웃고 있었다.
그가 곁에 있던 자에게 뭐라고 하자 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서 레이첼을 포위했다.
“멈춰!”
그때 록키가 나타났다.
“이분이 어떤 분…….”
퍽!
록키가 뭐라 말하기 전에 록키의 뒤쪽에서 나타난 거지 아이가 돌멩이로 록키의 머리를 내려쳤다.
“아악!”
록키가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레이첼이 비명을 질렀다.
“밟아!”
레이첼을 포위하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주위에 명령을 내리자 빈민촌 사람들이 일제히 록키를 밟고 걷어찼다.
“아, 아가씨!”
록키는 정신없이 맞는 가운데도 레이첼을 찾았다.
“이, 이거 놔!”
앙탈을 부리는 레이첼을 향해 건장한 남자 중 하나가 가볍게 레이첼의 뒷머리를 쳤다. 그러자 레이첼이 맥없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깨어 보니 밀실에 감금된 상태였다.
어둠 속에서 레이첼은 오만 가지 끔찍한 상상을 했다. 록키가 말하길 빈민촌에는 노예 상인이 있다고 했다. 그 노예 상인에게 잡히면 어디로 팔려갈지 모른다고 했다. 또 어린 여자아이를 특별히 좋아하는 귀족들도 있다고 했다.
어떤 경우든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감당해 내기 어려운 공포였다.
드드드드!
그때 밀실 문이 낮은 소음과 함께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레이첼에게 음흉하게 미소를 짓던 그 아저씨가 두 사람과 함께 밀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 아이입니다.”
“으음, 괜찮군. 백작께서 기뻐하시겠어.”
“하하하. 기뻐하다 뿐입니까? 저 정도 물건이면 어디서도 구하기 어려운 특급 중 특급이지요.”
“크음. 특급은 무슨, 돈을 올려 받을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네.”
“하지만 저런 물건은 그 값을 좀 후하게 쳐 주셔야…….”
“10골드. 더는 안 돼.”
“보십시오. 곱게 자린 티가 나지 않습니까? 뭐 더 안 되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이런 예쁘장하게 생긴 여아를 좋아하시는 분이 또 계시니… 크음.”
“좋아, 12골드. 정말 더는 안 돼.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울프만.”
협박이 가미되자 효과가 있었던지 음흉하게 생긴 남자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백작께 내 말 좀 잘 말해 주십시오.”
“그야 물론이지. 그럼 계약은 성사된 건가?”
“네.”
“어디… 물건이 어떤지 자세히 좀 볼까?”
음흉한 아저씨가 비켜서자 귀족 복장의 한 중년 남자와 그의 호위 기사로 보이는 자가 레이첼에게 다가왔다.
레이첼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비명을 지르려 할 때 외부에서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누구냐?”
“침입자다! 잡아라!”
레이첼에 접근하던 귀족 복장의 중년 남자가 뒤를 돌아 음흉하게 생긴 남자를 보고 말했다.
“무슨 일인가?”
“걱정 마십시오. 별일 아닐 겁니다.”
그러면서 음흉하게 생긴 남자는 밀실 밖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때 비명 소리가 더 가까이에서 울려 퍼지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