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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9. 악연도 인연(2)
빈민촌의 입구에 도착한 브란트는 말에서 내려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빈민촌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가장 먼저 브란트를 반겼다.
“이런 곳에 또 오게 될 줄 몰랐군.”
브란트가 갓 레잔 영지에서 기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는 영지 자치대에서 일을 했었다. 보통 영지 기사들은 영지의 영주인 영주를 보필하면서 영지 병사들을 이끌었다.
영지 기사들이 하는 일 중 대표적인 일은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과 영지 치안 유지였다. 그러나 몬스터 토벌의 경우, 제국의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하다 보니 요즘은 몬스터를 구경하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간혹 몬스터들이 나타났고 그럴 때면 영주가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몬스터 사냥에 나섰다.
평화로운 시기에 영주가 그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것 중에 몬스터 사냥만큼 쉬운 것도 없었다.
영주는 몬스터를 사냥한 후 몬스터 시체를 영지 민들에게 내보이며 너희들의 생명을 내가 지키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과시했다.
이렇게 영주와 몬스터를 사냥하는 중요한 일은 대개 선임 기사들이 맡았다. 신참 기사들은 대부분 자치대에 배치되어 영지 치안을 유지에 힘썼다.
브란트 역시 신참으로 자치대에서 다른 기사들이 가장 꺼리는 범죄자를 체포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브란트는 이런 빈민촌을 자주 찾아갔다.
영지 범죄의 대부분은 빈민촌과 연관이 있었다. 범죄자들 대부분이 빈민촌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완전 초보 기사였던 브란트는 딴엔 공을 세워 보겠다고 열정적으로 영지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빈민촌을 뒤져서 범죄자들을 찾아냈다.
그런 브란트의 공을 인정한 레잔 영지의 영주 키로프 남작은 브란트를 영주성에 근무하게 했다. 하지만 후일 알고 보니 그가 영주성으로 가게 된 것은 범죄자들과 레잔 영지의 관리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 관리들은 수시로 영주인 키로프 남작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고 있었는데 브란트가 설치는 통에 범죄자들로부터 들어오던 뒷돈이 적어지자, 이를 키로프 남작에게 항의했고 결국 키로프 남작이 브란트를 자치대 일에서 손 떼게 만든 것이다.
그때 당시 브란트는 혼자서 하루에 10여 명의 범죄자들을 잡아 낼 만큼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브란트는 그때를 상기하며 빈민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왼쪽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헉!”
골목의 길모퉁이에 있던 거지 아이 하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브란트를 보고 기겁을 하며 놀랐다. 그리고 뒤돌아 도망치려 했지만 그때 브란트의 손이 거지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사, 살려 주세요!”
브란트는 귀족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귀족이 평민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한 상황에 거지 아이 하나 죽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브란트가 거지 아이의 목을 비틀어 버린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단지 언제 죽을지 모를 거지 아이 하나가 골목에서 죽었을 뿐이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거지 아이는 무턱대고 살려달라고 외쳤다.
“너 어디 꼬붕이지?”
꼬붕은 범죄자들이 부하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브란트의 물음에 거지 아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 무슨 말이신지?”
뒷골목의 생리를 잘 아는 브란트는 범죄자들이 빈민촌 곳곳에 어린아이들을 거지로 분장시켜서 정보원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이들은 절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지 말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브란트가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할 리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이게 뭘까?”
브란트는 동전 하나를 꺼냈다. 그냥 흔한 구리 동전일 뿐이지만 그 동전을 본 거지 아이는 눈빛이 변하며 군침을 삼켰다.
아이에게 은화나 금화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자칫 범죄자나 다른 어른들의 눈에 띄면 죽거나 다칠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해 흔해 빠진 구리 동전은 어디서든 사용이 가능했다. 브란트는 그런 생리까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한 가지만 묻겠어.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어딘지 손짓만 하면 돼. 그럼 이 동전은 네 것이다.”
“…….”
거지 아이는 대답 대신 동전만 쳐다봤다.
“너희 아지트가 어디지?”
거지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짓을 했다. 그리고 브란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동전을 가로채서는 골목 밖으로 휑하니 달아났다. 거지 아이가 손짓으로 가리킨 곳은 골목 한쪽 벽이었다.
브란트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거지 아이가 가리킨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벽에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그 표식을 따라 브란트는 그쪽 골목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아직 날이 지지 않았음에도 골목은 어두웠다.
개미굴과 같이 좁은 길이 이리저리 뻗어 있는 수도의 빈민가 거리는 수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가끔씩 길을 잃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러나 브란트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표식이 나 있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심지어는 길로도 보이지 않는 집과 집 사이에 나 있는 틈 사이로도 그 표식은 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표식이 끝나는 어느 빈민촌의 집 앞에 도달한 브란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저곳이군.”
브란트의 직감이 맞다면 아마 저곳에 레이첼이 있을 것이다. 원래 납치란 하루 이상을 넘기면 구하기 어려웠다.
레이첼을 납치한 자들은 아마 인신매매범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점 조직망을 갖추고 있어서 하루 만에 납치한 아이를 노예상에게 팔아 넘겼다. 때문에 하루가 지나면 일이 훨씬 어렵고 복잡해졌다.
그런 점에서 레이첼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납치된 지 불과 반나절도 안 돼서 브란트가 이렇게 찾아 나섰으니 말이다.
끼이익!
문을 여니 녹슨 문에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누가 봐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곳이야말로 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아지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위험한 곳이었지만 브란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브란트는 발아래 발자국들을 보고 이곳에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흔적을 찾아냈다. 브란트가 그 발자국을 쫓아 시선을 둔 곳은 집 왼편 벽이었다.
“누구냐?”
그때 그 벽 속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브란트는 태연하게 왼쪽 벽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거 며칠 안 왔다고 나를 잊은 모양이군. 두목은 잘 있지?”
“누, 누구십니까?”
벽 속에서 적잖이 긴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운이 좋군.’
브란트는 감시자가 초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브란트는 그 벽으로 가서 벽을 툭툭 차며 말했다.
“어서 열어. 두목하고 할 얘기가 있다.”
“…….”
잠시 망설이던 감시자는 결국 벽을 돌려 문을 열었다. 브란트는 성큼 안으로 들어가서 여전히 의심스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감시자에게 말했다.
“넌 사람 보는 눈이 있군. 그래서 살았다.”
퍽!
브란트의 주먹이 어느새 감시자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브란트의 주먹에 맞은 감시자는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다.”
브란트는 쓰러진 감시자를 힐끗 보고는 안으로 나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그렇게 50여 걸음을 걸어갔을까? 또다시 벽하나가 나왔다. 그 벽을 보고 브란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 두목 녀석은 더럽게 의심도 많은 자로군.’
“문 열어!”
브란트가 대놓고 큰소리로 외쳤다.
“뭐야! 어떤 새끼가 큰소리야?”
벽속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브란트는 그 목소리만으로 벽 안에 있는 자가 녹록치 않은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자는 벽에 뚫린 구멍으로 브란트의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이 모르는 자라는 것을 알자 즉시 비상 장치에 손을 가져갔다. 이때 브란트의 손이 벽을 향해 뻗고 있었다.
파직!
브란트의 손이 번개처럼 벽을 뚫고 안으로 파고들어 가 안에 있던 남자의 목을 움켜잡았다.
“컥!”
그 남자는 기겁을 하며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숏 소드를 뽑아 브란트의 팔목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약간 빠르게 브란트는 벽에 박힌 자신의 손을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콰지직!
“케애액!”
브란트의 손에 목을 잡힌 남자가 벽을 부수며 딸려 왔다. 그 남자는 목이 꺾인 상태로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휘익!
쿵!
브란트는 그 남자를 아무렇게나 옆으로 집어 던져 두고 부서진 벽 사이로 들어갔다. 또 다른 통로가 나왔다. 브란트는 거침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통로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주춤!
그때 브란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아주 가지가지를 하는군.”
소드 마스터인 브란트의 눈에 좁은 벽 양쪽에 동전만 한 구멍이 몇 군데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브란트는 발치에 있던 돌 하나를 주어 앞쪽으로 던졌다.
툭!
슈슈슈슉!
소리에 반응에서 양쪽 벽에서 십여 개의 창이 튀어나왔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통로이기 때문에 멋모르고 들어섰다가는 창에 꿰어 죽음을 면키 어려웠을 터였다. 악독한 장치에 브란트의 눈에서 광망이 뿜어졌다.
스르렁!
허리에 차고 있던 롱 소드가 천천히 뽑혀 밖으로 나왔다. 브란트가 검 자루에 힘을 주자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그의 검에 맺혔다.
우우우웅!
보는 눈도 없으니 브란트가 자신의 실력을 감출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아이를 납치하는 인신매매범들이었다.
“타앗!”
브란트는 검을 양쪽으로 휘두르며 5미터 정도 거리의 통로를 눈 깜짝할 사이 통과했다.
브란트의 검은 번쩍이며 양쪽 벽을 파고 들어가서 그 안을 휘저어 놓았다.
“크아아악!”
브란트가 통로를 통과한 후, 양쪽 벽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란트의 오러 블레이드가 벽을 가르고, 그 안에 숨죽이고 있던 십여 명의 범죄자들을 토막 내 놓았던 것이다. 벽 양쪽에 브란트의 검이 스쳐 지난 흔적이 보였다.
“으으으으!”
“사, 살려줘!”
운 없는 자들은 머리와 몸통이 잘려 즉사했지만 운이 좋은 자들은 다리가 잘린 채 아직 목숨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당장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몇 분 되지 않아 과다 출혈로 죽을 것이 뻔했다.
브란트는 미련 없이 코너를 돌았다.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은 레이첼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레이첼을 구하기 전까지 브란트의 살육 또한 멈추지 않을 터였다.
십여 걸음을 걸어가던 브란트가 갑자기 검을 천장을 향해 찔렀다.
푹!
“컥!”
천장에 숨어 브란트에게 독침을 쏘려 했던 자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천장이 부서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털썩!
“으으으윽!”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브란트의 검에 찔린 듯 그자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브란트는 악착같이 살겠다고 손으로 가슴을 지혈하고 있는 그자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물론 그자는 그런 브란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브란트는 그자에게 다가가서 대뜸 발을 들어 남자의 가슴을 밟았다.
“아아아악!”
그자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죽진 않아. 심장을 뚫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두두둑!
브란트가 발에 힘을 주자 그자의 가슴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며 죽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사람 죽네!”
“죽을 테냐, 두목에게 안내할 테냐?”
“크윽! 안내하겠소…….”
그자는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브란트가 천천히 그의 가슴에 올려져 있던 자신의 발을 치웠다.
대체로 악당들은 의리가 없다. 목숨과 두목의 위치를 두고 선택하라면 나쁜 놈일수록 더 빨리 두목의 위치를 밝혔다. 브란트는 그런 나쁜 놈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앞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