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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10. 무투사Ⅰ(2)


뜬금없는 울프만의 말에 브란트가 얼굴을 찌푸리자 울프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를 보니 흡사 지금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어떻게 범죄자와 제국의 기사이자 귀족인 브란트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브란트는 미친놈 쳐다보듯 울프만을 보며 다소 큰소리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
“나는 야심이 많아. 지금은 이렇게 인신매매나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더 큰 무대에서 만인을 우러러 보는 위치에 설 거다.”
울프만의 말에 메타모 백작의 총관을 비롯해서 레이첼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기사까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쳤군.”
브란트의 짧은 혹평에 울프만이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맞아, 난 미쳤어. 때문에 성공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지. 하하하하!”
실컷 통쾌하게 웃고 난 울프만은 언제 웃었냐는 듯 바로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서 브란트에게 말했다.
“다시 묻지. 정말 돈이 필요하지 않나?”
브란트는 울프만에게서 비열한 범죄자 따위는 내보일 수 없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끼고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자다. 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
브란트는 이미 본능적으로 울프만과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쁜 친구에게 더 끌리듯 브란트는 울프만에게 관심이 생겼다. 악연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돈이 필요하다면?”
브란트의 대답에 울프만의 입가가 실룩였다.
“그렇다면 나하고 손을 잡아야지. 그럼 내일까지 1만 골드의 절반을 너에게 주겠다.”
“지금 나보고 인신매매범 따위와 동업을 하란 건가?”
“뭐 싫으면 관두지. 대신 저 여자아이는 영영 볼 수 없게 되겠지만.”
울프만이 품속에서 숏 소드를 꺼냈다. 횃불에 비친 숏 소드의 날은 시퍼렇게 잘 벼려져 있었다.
문득 브란트는 울프만이 1만 골드란 거금을 내일까지 어떻게 구할지 그것이 궁금했다.
“설마 나를 이용해서 내일까지 1만 골드를 벌겠단 건가?”
“맞아. 그 실력만큼이나 머리도 똑똑하군. 이거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언제 동업자한테 칼침 맞을지 모를 테니 말이야.”
울프만이 피 칠갑을 한 채 서 있는 브란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재미있군.”
브란트는 더욱 울프만의 얘기에 관심이 생겼다. 브란트도 결국 출세가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력이 필요했고, 그 세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재 브란트가 받는 기사 조장의 월급으로는 세력을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였다. 기사 한 명에 1년 동안 들어가는 경비만 100골드가 넘었다.
브란트가 휘하 5조 기사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려면 일 년에 적어도 2천 골드는 필요했다.
브란트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이 10골드였으니 차마 꿈도 꿀 수 없었다.
특히 최근에 공방에서 각종 신무기를 개발하면서 브란트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까지 몽땅 다 써 버린 뒤였다.
그런 점에서 울프만이 제시한 5천 골드란 돈은 확실히 브란트에게 구미가 당기는 금액이었다.
“내가 그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정말 내일 내게 5천 골드를 줄 수 있는 건가?”
“물론이지.”
울프만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때 메타모 백작의 총관이 울프만과 브란트의 대화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울프만에게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그러자 울프만이 뒤를 돌아 메타모 백작의 총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긴 네가 지금 죽는단 소리지.”
파앗!
울프만은 몸을 틀어 들고 있던 숏 소드로 메타모 백작의 총관의 목을 그었다. 그리고 숏 소드를 레이첼의 목에 검을 대고 있던 기사를 향해 던졌다.
퍽!
울프만이 던진 숏 소드는 기사의 이마 한복판에 박혔다. 기사는 눈을 까뒤집고 그대로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까아악!”
레이첼은 그녀의 눈앞에 목이 베여 피를 뿜고 쓰러지는 메타모 백작의 총관을 보고 비명과 함께 충격에 혼절하고 말았다.
쓰러지는 레이첼을 언제 나타났는지 브란트가 나타나서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역시 빠르군.”
브란트의 움직임을 보고 울프만이 말했다.
“이 아이가 내 손에 들어왔는데 내가 두렵지 않나?”
브란트가 살기 어린 눈으로 울프만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울프만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무섭지. 하지만 동업자니 무섭지 않아. 아직 돈도 없는데 네가 나를 죽일 이유가 없잖아?”
“그 말은 돈만 생기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야 사람이 배신하는 게 아니라 돈이 배신하는 거지.”
그것은 돈이 생기고 나서 생각할 문제라는 소리였다.
“가겠다.”
브란트가 레이첼을 보듬은 채 뒤돌아서자 울프만이 말했다.
“잠깐.”
“뭐냐?”
브란트는 걸음을 멈췄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동업자끼리 이름도 모른 데서야 말이 안 되잖아?”
“브란트다.”
“나는 울프만이다. 그럼 이따 밤에 마을 입구에서 만나지. 밤 동안에 돈을 벌어야 하니 말이야.”
“…….”
브란트는 대답 없이 레이첼과 함께 지하 창고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브란트가 창고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울프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진짜 죽을 뻔했군.”
울프만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손으로 죽인 메타모 백작의 총관과 기사의 시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납치당했던 아이들이 풀려 난 이상 현재 아지트는 안전하지 못했다. 아마 곧 자경대가 들이닥칠 터였다.
울프만은 수하들의 시신은 그대로 두더라도 메타모 백작의 총관과 그 기사의 시체만은 어떻게든 인신매매단의 아지트에서 발견되게 만들 수 없었다.
수도의 치안감인 메타모 백작가의 사람이 인신매매단의 소굴에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메타모 백작의 정적들이 가만있지 않으려 들 터였다.
그렇게 되면 메타모 백작이 울프만을 가만 내버려 둘리 없었다. 두말할 것 없이 울프만은 더 이상 제국의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게 될 터였다.
눈치 빠른 울프만이 그런 최악의 선택을 할 리 없었다.
울프만은 힘겹게 두 구의 시신을 들쳐 매고 인신매매단의 아지트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두 구의 시신을 암매장한 후 다시 아지트를 찾았을 때, 아니나 다를까 자경대가 그의 아지트를 온통 들쑤시고 있었다.
“젠장!”
이로써 울프만은 자신의 사업장을 잃었다. 또 조직 수하들까지 브란트에게 몽땅 제거된 상태였으니 사실상 그는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기반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 밤 그는 오늘 잃은 것을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안 그래도 합법적인 사업을 생각 중이었다. 이로써 나 울프만도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기회를 얻은 셈인가?”
브란트란 자만 잘 이용한다면 울프만은 이제 곧 새로운 삶을 얻게 될 터였다.

브란트가 레이첼을 보듬어 안고 빈민촌 밖으로 나왔을 때 입구에 세워 두었던 그의 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다른 곳도 아닌 빈민촌 입구에 말을 세워 두었으니 그 말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게 더 이상했다.
별수 없이 브란트는 레이첼을 들고 뛰어서 크라미어 백작가로 달렸다.
혹시 기절해 있는 레이첼에게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백작가로 가서 치료술사에게 진료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때 백작가의 정문에 헤나가 초조하게 브란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록키도 응급처치만 받고 정문에 와 있었다.
“헤나 님, 너무 염려 마십시오. 브란트 님께서 꼭 레이첼 아가씨를 구출해 오실 겁니다.”
“…….”
록키가 헤나를 위로했지만 헤나는 초조해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저기……!”
그때 경비병이 정문 맞은편 큰길 쪽으로 손짓을 했다. 록키와 헤나가 놀라 그쪽을 바라보자 브란트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의 품에 누군가 안겨 있었다.
“레이첼!”
레이첼의 어머니인 헤나가 가장 먼저 레이첼을 알아보았다. 브란트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의 옷 색깔이 오늘 아침에 레이첼이 입었던 옷 색깔과 같았던 것이다.
헤나와 록키가 정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잠시 후 브란트와 헤나가 서로 만났다.
헤나는 브란트의 품속에서 혼절해 있는 레이첼을 보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레이첼! 레이첼!”
헤나가 거듭 딸의 이름을 불러도 레이첼이 반응이 없자 헤나가 두 눈을 부릅뜨고 브란트를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 설마 레이첼이…….”
“의식을 잃었을 뿐입니다.”
“아!”
헤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탄식을 터뜨렸다. 그때 뒤쪽에서 부러진 다리로 절뚝이며 록키가 달려왔다.
“아가씨!”
록키가 소리치자 그 소리에 레이첼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보고서 헤나도 록키도 굳은 안색이 풀렸다.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르니 어서 치료술사를 부르십시오.”
브란트의 말에 헤나가 시녀에게 급히 치료술사를 불러오게 했다.
브란트는 레이첼을 그녀의 방까지 보듬고 가서 그녀의 침대에 눕혔다.
그러자 곧 레이첼이 정신을 차렸다.
“레이첼, 정신이 드니?”
“어, 엄마!”
레이첼이 벌떡 일어나 헤나를 껴안았다. 그리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브란트는 두 모녀만 있게 록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록키를 향해 말했다.
“네 상처가 낫고 나면 그때 가서 너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결정하겠다.”
“네…….”
록키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브란트는 잔뜩 풀이 죽은 록키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얼마 후 헤나의 시녀가 브란트를 찾아왔다.
“마님께서 브란트 님과 록키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초대는 고마우나 오늘 저녁은 두 모녀 모두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전해 주게.”
브란트가 봤을 때 헤나도 레이첼도 많이 지쳐 있었다. 오늘 무리를 한다면 두 사람 모두 좋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순수하게 두 모녀가 걱정이 돼서 브란트는 헤나의 저녁 식사 초대를 거절했던 것이다.
또 저녁에 울프만과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초대에 갈 처지도 못됐다. 시녀가 돌아간 후, 또 얼마 뒤 시녀가 다시 찾아 왔다.
시녀는 헤나가 두 모녀에게 세세하게 신경 써 준 점에 대해 무척 고마워하며, 며칠 후 총관인 로베르토가 돌아오면 그때 정식으로 다시 초대하겠다는 말을 브란트에게 전했다.

날이 지기 시작하자 브란트는 다시 말을 몰아 빈민촌으로 향했다. 그리고 빈민촌 입구 근처에 숨어 있던 울프만과 다시 만났다. 울프만도 말을 타고 있었다. 울프만이 브란트에게 다가오자 브란트가 말했다.
“내가 안 왔으면 어쩔 생각이었지?”
그 말을 듣고 울프만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내 사람 보는 눈이 틀렸으니 내 눈을 파냈겠지.”
“말해라. 어떻게 돈을 벌지.”
브란트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친구 성격도 급하군.”
“나는 네 친구가 아니다.”
브란트가 딱 끊어 얘기하자, 울프만이 머쓱해 하며 브란트을 향해 뭔가를 던졌다. 브란트는 그것을 받아 들며 울프만에게 이게 뭐냐는 눈빛을 보냈다.
“입어. 신분이 들통 나기 싫으면.”
울프만이 던진 것은 통이 넓은 로브였다. 특히 머리에 쓰는 후드는 안이 깊어 둘러쓰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냐?”
브란트가 로브를 걸치며 물었다. 그러자 울프만이 여전히 웃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가 보면 안다.”
브란트가 로브를 입자 울프만이 앞장을 서서 말을 몰았다. 울프만이 브란트를 데리고 간 곳은 북쪽 수도 외곽 쪽이었다.
“저긴 광산이 있는 곳이 아닌가?”
브란트가 울프만을 보고 말했다.
“맞아. 하지만 지금은 폐광으로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지.”
울프만은 그렇게 말하고 광산 쪽으로 말을 몰았다. 브란트도 별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