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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10. 무투사Ⅰ(3)
광산 아래 마을에 도착한 울프만은 말을 마구간에 맡기고 광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브란트가 그 옆에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지금 나하고 같이 광산에서 보석이라도 캐내겠단 건가?”
“하하하. 저 안에서 1만 골드만큼 보석을 캐내는 것도 좋은 생각이야.”
“너하고 농담이나 나누려고 여기 온 것은 아니다.”
브란트가 살기 어린 눈으로 울프만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울프만도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너하고 농담하려 여기 온 건 아니거든. 너보고 보석 캐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 걱정 말고 따라오기나 해라.”
울프만은 그 말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 광산에 올라갔다.
광산의 입구가 보이자 울프만은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브란트도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는데 광산 안은 그 입구 쪽에 철창이 처져 있고 경비를 서는 자들이 수십 명이나 서 있었다.
울프만이 뭔가를 꺼내 보이며 경비를 서는 자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자에게 슬그머니 돈주머니를 찔러 넣어 주는 것이 브란트의 눈에 띠었다.
“뭐 이런 걸… 으음, 저자인가. 이번에 참가할 무투사가?”
울프만에게서 돈을 받아 챙기며 경비 책임자가 울프만에게 턱짓으로 브란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하하, 네. 이번에는 확실히 한몫 잡을 생각입니다.”
“쯧. 겉보기로는 비실해 보이는데?”
“그게 덩치만 크다고 강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뭐 그렇기는 하지만, 돈 많이 벌게.”
경비 책임자는 광산 입구 쪽에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자 울프만과 브란트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손짓으로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울프만은 잠시 기다렸다가 브란트와 함께 철창을 통과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어디냐?”
브란트가 묻자 그제야 울프만이 대답했다.
“여긴 일종에 지하 격투장이다.”
“지하 격투장?”
브란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브란트도 수도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며 수도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또 비록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기사 생활도 했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원래 티모시 제국은 격투 시합으로 이름이 높은 나라였다. 초창기 제국은 거의 연중 행사로 격투 시합을 열었다. 하지만 제국이 안정되면서 평민들의 영향력이 커져 감에 따라 너무 잔인한 격투 시합은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100여 년 전 제국의 황제였던 팔레우스 황제가 법적으로 격투 시합을 전면 금지시켰다. 펠레우스 황제는 대신 각 귀족 가문의 기사들의 마상 창 시합을 대중에 공개케 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시합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법을 어겨 가면서 몰래 격투 시합을 벌였다. 이런 음성적인 격투 시합은 제국 전역에 걸쳐서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격투 시합이 있는 곳에서는 거금이 모였다. 그리고 도박꾼들이 몰려들었다.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획득한 도박꾼들은 돈을 물 쓰듯 썼다.
바로 그런 눈 먼 돈을 노리고 상인들이 모여들고, 창녀들이 모여들고, 사기꾼들이 몰렸다.
일부 귀족들은 그런 돈을 노리고 불법적으로 격투장을 만드는 자들도 있었다. 대개 그런 격투장은 법망을 피해 지하에 만들어졌는데 이를 지하 격투장이라 불렀다.
“지, 지금 나보고 격, 격투를 하란 건가?”
브란트는 어이가 없어서 말까지 더듬었다.
“그럼 무슨 수로 하루 아침에 1만 골드를 벌겠나?”
울프만이 오히려 더 큰소리를 쳤다.
브란트는 범죄자를 믿은 게 잘못이란 생각을 하며 광산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울프만이 그런 브란트를 비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그냥 가겠다고?”
“나는 불법을 저지를 생각은 없다.”
“오오, 대단한 애국자 나셨군. 하지만 너 혼자 여길 나갈 순 없어.”
“그게 무슨 소리지?”
“넌 오늘 격투에 참가할 무투사고, 나는 너의 후견인이니까. 나가려면 나하고 같이 나가야만 몸 성히 광산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럼 나가자.”
브란트가 울프만의 소매를 잡자 울프만이 즉시 뿌리쳤다.
“싫어.”
“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돈을 벌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 원대한 꿈은 끝이거든. 그 꿈이 끝나면 나도 끝장이고 말이야. 오늘 여기서 돈을 벌지 못하면 나는 오늘 이곳에서 죽을 생각이다.”
고집을 피우는 울프만 때문에 브란트는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이 내 아지트를 박살 내고 내 수하들을 다 죽였잖느냐?”
울프만이 으르렁대며 브란트에게 원망을 해댔다.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울프만과 브란트의 뒤로 손님들이 철창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울프만이 뒤쪽을 힐끗 쳐다보고 광산 안쪽으로 걸어갔다. 브란트도 얼떨결에 분위기에 편승되어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와아아아!”
광산 안쪽에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의 천장과 벽에는 마법 등이 밝혀져 있어 내부는 환했다. 그리고 그 주위는 온통 시합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로 가득했다.
“따라와.”
북적대는 인파를 뚫고 울프만이 안으로 들어갔다.
“손 이리 줘 봐.”
울프만이 손을 내밀자 브란트도 별수 없이 울프만의 손을 잡았다. 울프만은 브란트의 손을 쥐고 광산 속 광장 오른편으로 걸어갔다.
브란트가 지나가며 광장 주위를 둘러보니 군데군데 격투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건장한 청년들이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결투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승부 자체에 연연해하고들 있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사람이 처참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열광하고 있었다.
‘완전히 미쳤군.’
브란트가 어이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울프만은 지하 격투장의 운영 본부에 도착했다.
울프만은 브란트는 밖에 두고 혼자 운영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대진표 한 장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 비자금을 오늘 다 너에게 걸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세 번의 결투 모두 이겨야 한다.”
울프만이 대진표를 브란트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진표에 누구랑 싸운다고 나와 있지만 그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 봐야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브란트가 건성으로 물었다.
“그 비자금이 얼만데?”
울프만이 바로 대답했다.
“300골드!”
300골드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 돈을 다 내게 걸었단 말이지?”
“그래. 그리고 네가 이길 경우 받게 되는 승리 수당도 다 네게 걸 거다.”
한마디로 올인하겠다는 소리였다.
‘허어. 세상에 소드 마스터에게 격투장이라니.’
브란트는 자신이 기사가 된 후 이런 일을 겪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이런 곳에 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그때 울프만이 투구 하나를 자져와 브란트에게 던졌다.
턱!
브란트가 얼결에 그 투구를 받았다. 투구는 성체 모양의 밋밋한 일자형에 둥근 눈구멍이 달랑 두 개 뚫려 있었다. 그것을 뒤집어쓰면 누구도 브란트를 알아 볼 수 없을 터였다.
“써. 그래야 정체가 안 들키지.”
브란트는 마치 자신을 생각해 주는 척 말하는 울프만이 가증스럽게 여겨졌다.
브란트는 누가 보기 전에 둘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잽싸게 투구를 뒤집어썼다. 그러자 울프만이 이번에는 가죽으로 만든 어깨와 가슴을 가리는 갑옷을 던졌다.
검날에 베는 것은 어느 정도 방어가 되겠지만 참격이나 찌르는 공격에는 무방비한 갑옷이었다. 괜히 운영 본부에서 싸우는 선수들이 좀 세어 보이게 만들기 위해 제공하는 갑옷이었다.
“웃옷 벗고 그걸 착용해.”
브란트는 막상 투구를 뒤집어쓰고 나자 살짝 투지가 생겼다. 그래서 울프만의 말대로 상의를 벗고 가죽 갑옷을 착용했다. 그렇게 근육질이지는 않지만 보기 좋은 브란트의 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울프만은 그런 브란트를 쳐다보고 있다가 브란트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브란트에게 나무 방패와 검집도 없는 롱 소드 한 자루를 건넸다.
“검이면 되지?”
울프만의 물음에 브란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에 나무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롱 소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울프만에게 물었다.
“이렇게 돈을 벌 거면 네가 직접 싸워도 되지 않나. 네가 볼 때 너도 충분히 강해 보이는데?”
“두 차례까지는 어떻게든 이기겠지. 하지만 세 번째 시합에서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판돈은 세 번째 시합이 제일 크거든.”
울프만이 브란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하 격투장은 격투에 참가한 자들을 흔히 무투사라 부른다. 대개 지하 격투장에 참가하게 되면 그들 중 태반이 죽고 살아남은 자들 중 또 태반은 병신이 되었다. 그런 만큼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라면 결코 지하 격투장에서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 격투장을 찾아 싸우겠다는 무투사들은 많았다. 사람 중에는 목숨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목숨보다 돈이 더 급한 자들은 한몫을 잡기 위해 무투사가 되었다.
지하 격투장의 관객들은 대부분 잔인한 장면에 열광하는 변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경기를 관람함에 있어 일절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격투에 이기게 되면 받는 승리 수당은 상당히 많았다. 더욱이 자신의 돈을 걸고 싸워 이기게 되면 엄청난 돈을 챙길 수 있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싸움깨나 한다는 자들은 기꺼이 무투사가 되어 오늘도 지하 격투장을 찾았다.
많은 관객들이 격투가 벌어진 격투장 주위로 모여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저기가 무투사 대기실이야. 거기 있으면 네 차례가 되면 운영 측에서 너를 데리러 올 거다.”
울프만이 손짓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브란트는 일단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브란트를 따라온 울프만이 브란트의 뚫린 투구 앞에 얼굴을 드밀며 말했다.
“딱 세 번이다. 세 번만 싸우고 나서 여길 나가면 돼. 그러니 반드시 이겨라. 참, 네 이름은 라이거다.”
‘라이거?’
브란트는 자신의 짐승 같은 이름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이곳에서 싸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려 지금 그는 마치 고대 노예 검투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라이거!”
브란트가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운영 측에서 보낸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무투사 라이거, 따라오시오.”
브란트는 그 사람을 따라 싸우게 될 격투장으로 이동했다.
브란트가 막 자신이 싸우게 될 격투장에 도착 했을 때 그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크락수스, 최고다.”
격투장은 6각형의 격투장으로 주위는 철제 휀스가 둘러져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는 오직 한 군데로 브란트는 운영 측 사람과 그 입구 앞에 섰다. 입구 주위에 사람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브란트는 격투장 내부를 쳐다보았다. 격투장 바닥은 완전히 피바다였다. 그리고 그 격투장 한가운데 건장한 덩치의 무투사 한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에도 처참했다.
먼저 오른쪽 다리가 꺾여 있었고, 목도 돌아가서 엎드려 있지만 그의 얼굴을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팔 역시 모두 반대로 꺾여 있었다. 얼굴도 코와 턱이 짓뭉개져 원래 얼굴이 어땠는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목이 완전히 돌아갔으니 산 사람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런 상태에서 주위 관객들은 연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크락수스! 크락수스!”
그때 브란트의 눈에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무투사를 비릿하게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자가 눈에 띄었다.
그자는 격투장을 돌며 환호성을 내지르다가 자신이 죽인 무투사에게 다가가서 그의 등에 한 발을 올려놓고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몬스터를 사냥한 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몬스터를 잡았다고 자랑하는 듯한 포즈였다.
그는 브란트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육중한 덩치를 지닌, 누가 봐도 강해 보이는 자였다.
얼굴 역시 눈이 날카롭게 찢어지고 송곳니가 짐승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삐져나온 것이 첫눈에 보기에도 아주 잔인해 보였다.
크락수스는 지하 격투장에서도 꽤 유명한 존재였다. 그가 지하 격투장에서 시합을 벌인 것이 벌써 3년째였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가 강하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