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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제1장. 운명의 장난이 너라면





오늘은 보영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2학기 개강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상황이었고, 기다리던 연락도 오지 않았다.
착잡해지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잠시 외출을 결심한 보영은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걷는 것이 지루해지자 준비해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리스트를 살폈다. 미끄럽게 움직이던 화면은 보영이 제 취향인 곡을 발견하자 서서히 멈추었다. 이윽고 이어폰에서 잔잔한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무더운 여름에 듣는 느리고 무거운 발라드.
어울리지는 않는 조합이었지만 보영은 그저 걷는 데 열중했다. 잔잔한 발라드가 이어지다 갑작스럽게 요란한 벨소리가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 미간을 좁히던 보영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웃어 보였다.
“응, 진아야.”
—언니, 생일 축하해요!
—누나, 생일인데 뭐 해요? 왜 연락도 안 했어요, 방학에.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보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이어폰을 꽂은 채 통화를 이어 갔다.
“그냥 나와 있어. 진아야, 성현이랑 같이 있어?”
—네. 저희 수강 신청 망해서 정정하려고 대기 타고 있었어요.
—누나, 누나. 오늘 생일인데 뭐 할 거예요? 할 거 없으면 우리랑 밥 먹어요!
—맞아요, 언니. 밥 먹어요!
보영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진아와 성현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정신이 팔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을 쳐다보며 통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다가선 그녀에게 빨간불이 걸음을 멈추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보영은 무의식적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승용차 한 대가 멀리서부터 속력을 높이며 가까워졌다. 뒤늦게 보영을 발견한 운전자가 클랙슨을 울리며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거리가 상당히 좁혀진 상태였다.
무슨 소리지?
보영의 시선이 클랙슨을 울리는 차로 향했다.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더 이상 발을 뗄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꾹 감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것도 생일날, 횡단보도에서?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팔이 누군가에 의해 당겨졌다. 몸은 방향을 틀어 인도로 향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보영에겐 지금 모든 게 슬로우 비디오처럼 다가왔고, 손에 들렸던 휴대폰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게 울리던 클랙슨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대신 소름끼치는 소음을 만들며 승용차가 가까스로 멈추어 섰다.
아, 내가 죽었나 보다. 눈을 뜨면 저승이거나 천국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보영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두 눈에 방금 전까지 자신이 걷던 거리가 담기자 다시 두어 번 깜빡이고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다행히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야! 너 미쳤어? 뭐 하는 거야, 지금! 빨간 불인데 왜 건너?”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화가 난 표정으로 보영을 향해 삿대질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사고라도 나면 어쩔 뻔했어? 이게 정말!”
화가 단단히 난 운전자가 보영을 밀치기라도 하려는지 팔을 뻗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뜨자 운전자의 팔을 잡은 한 남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말하지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나는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였다. 그럼에도 운전자의 팔을 잡은 남자는 검은색의 긴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무거우면서도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휘감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너는 뭐야?”
“폭력은 안 되지.”
“뭐? 이 새끼가 진짜!”
운전자가 대뜸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남자는 주먹질에 그대로 얼굴을 맞았다.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고가 날 뻔한 현장엔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휴대폰을 들어 그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분이 덜 풀린 운전자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보영이 필사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죄, 죄송해요! 저분은 잘못이 없잖아요.”
“죄송하면 다야? 지금 크게 사고가 날 뻔했는데?”
보영의 사과에도 운전자는 언성을 높일 뿐이었다. 점점 횡단보도 주위로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얼른 사과하고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더니 세 사람의 사이로 두 명의 경찰관이 등장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경찰들에게로 향했다.
“신고 접수 받고 왔습니다. 상황 설명 부탁드립니다.”
보영은 난처하다는 듯 경찰을 바라보다 자신을 구해 준 남자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남자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떨리고 있었다.
“아니, 경찰 양반. 글쎄, 이 여자가 갑자기 횡단보도로 튀어나왔다니까? 그것도 빨간 불에?”
운전자는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상황을 설명하였다. 경찰은 보영에게도 상황에 대해 물었지만, 그녀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놀란 나머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쉽게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차 때문에 여기저기서 클랙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고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던 경찰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운전자를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그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서 함께 경찰서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세 분 모두 함께 동행해 주시죠.”
그제야 운전자는 만족한 듯 언성을 줄였다. 하지만 보영은 아니었다.
“네? 겨, 경찰서요?”
경찰서라니. 생일날 경찰서라니!
보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단호한 경찰의 말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기……죄송해요.”
하지만 남자는 보영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피하였다.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여전히 그의 눈은 불안한 듯 떨리고 있었다.

* * *

“자, 그럼 이제 그쪽 남자분. 성함하고 생년월일 말해 봐요.”
경찰의 물음에 남자는 어떠한 말도 내뱉지 않았다. 경찰은 답답하다는 듯 책상을 두드리며 다시 물었다.
“이름하고 생년월일 말하라니까요?”
남자는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상황이 지체되자 운전자는 짜증이 나는 듯 크게 소리쳤다. 답답한 건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보영을 구해 준 남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를 재촉하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뒤쪽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등장했다. 그 등장이 참으로 요란하여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야, 772번!”
772번?
요란한 등장은 물론이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를 부르며 달려온 남자는 경찰서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
“……대장.”
숫자를 부르며 경찰서로 들어온 남자, 그리고 그런 그를 대장이라고 부르는 남자. 도대체 이 둘의 관계가 무슨 관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지만 경찰은 자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남자의 가족 정도로 추측했다.
“이 남자분 가족 되십니까?”
“야, 이 자식아. 너 내가 사고 칠 줄 알았어. 너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야?”
경찰의 물음에 답하기는커녕 경찰서가 마치 자기 집인 양 큰소리를 내뱉는 남자였다.
“이봐요, 내 말 안 들립니까?”
두 남자의 대화를 듣던 경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 남자는 경찰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치는 확인했어?”
“입구에서 왼쪽 벽.”
“하여간. 너 바로 따라 나와.”
“이봐요! 지금 거기 뭐하는…….”
경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경찰서에 해성같이 나타난 남자가 순식간에 입구의 왼쪽 벽으로 향한 것이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형광등 스위치 전원을 내렸다. 찰나의 순간, 불이 꺼졌다 켜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보영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해성같이 등장했던 그 남자도.
“어? 어디 간 거야?”
보영이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곧이어 귀를 의심할 만한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여기서 뭐해?”
“네?”
“그리고 거기 아저씨는 또 뭐예요?”
경찰의 시선은 보영을 칠 뻔한 운전자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경찰과 운전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게. 여기 경찰서 아니야? 나 왜 여기 있지?”
말도 안 돼.
보영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술 먹고 경찰서 오시면 안 됩니다.”
“나 술 안 마셨거든요?”
“하여튼 얼른 가세요. 일도 많은데 왜 온 거야?”
경찰의 말에 운전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영이 급하게 운전자의 옷 끄트머리를 잡았다. 다급한 손길에 운전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아저씨!”
“왜요?”
“저 기억 안 나세요?”
“아가씨, 아가씨야말로 술 마셨어? 젊은 처자가 대낮부터 헛소리를 하고 있어?”
운전자는 보영을 처음 본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다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보영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머리를 굴리던 보영은 뒤에서 들려오는 경찰의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어요?”
“네?”
“없으면 아가씨도 가 봐요. 아니, 무슨 경찰서가 동네 놀이터야? 심심해서 오는 거야, 뭐야?”
보영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서둘러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찾아야 돼. 그 남자들.
보영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그들이라고 생각해 경찰서 주변을 뛰어다니며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