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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는 로렌의 손등에 입 맞추며 맹세했다. 당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껴 주겠노라고. 사랑을 넘어 존중하겠으며, 매사 당신의 의견을 구하고 귀히 여기겠다고. 당신은 인형, 종달새, 천사 따위가 아니라 로렌이라는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피닉이 로렌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때야 나는 그녀가 맨손임을 깨달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차림을 보고도 피닉은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장갑 중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그녀의 손에 끼워 주었다. 커다란 흰색 장갑이 그녀의 작은 손과 반지를 따뜻하게 감쌌다.
그녀가 돌아간 뒤에야 나는 피닉의 시선을 나눠 받을 수 있었다. 창을 꽂듯 던져진 시선에 움찔하는 사이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조금 전의 열렬함은 간데없는 차가움이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너는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어.”
“그랬었나? 미안하군. 이번에는 진심이야. 나는 앞으로 절대 네게 소원을 빌지 않을 테니까.”
“…….”
“이만큼 놀아 줬으면 충분하지 않나?”
더 볼 것 없다는 양 그는 몸을 돌렸다. 그 길로 집사를 불러 결혼을 알리고, 필요한 것들을 지시했다. 나는 시위하듯 그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방 안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피닉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았다.
하지만 나의 시위는 무용했다. 피닉은 내가 사라진 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그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홀가분하고 즐거워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섣불리 그의 앞에서 모습을 감춘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 날, 나는 새로 단장한 부부 침실에서 술을 마셨다. 인간이 아닌 나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냥 그 기분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꼈고, 이제는 그가 아끼는 비싼 포도주 한 병을 통째로 비우고 몸을 일으켰다.
눈을 깜빡이자 장소가 바뀌었다. 피닉이 너무나 다정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어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내가 아니라, 내 바로 앞에 선 로렌을 위한 눈빛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닉이 로렌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에게 허리 숙여 절하며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당신의 종복이 되겠습니다.”
로렌을 향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피닉을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단순히 그를 옆에 두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얻고 싶은 거였다. 죽음 후에 그를 영원히 갖게 된다고 한들 그것은 어차피 껍데기였다. 그는 절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로렌처럼 애틋하고 소중하게 여겨 줄 일은 영겁이 흘러도 없을 거였다.
로렌이 인형이 아니듯 피닉도 인형이 아니었다. 그는 내 소유가 될 수 없었다. 끔찍하게 증오하는 상대와 영원의 시간을 함께하게 된 피닉은 서서히 망가지겠지. 망가뜨려서 갖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피닉의 말을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앞으로 내게 남은 것은 타 버린 재와 같은 허망함뿐.
내가 들어준 피닉의 두 번째 소원은 피닉으로 하여금 나를 경멸하게 했다.

***

로렌 그라프는 로렌 오데어가 되었다. 첫날밤, 피닉은 아내의 뺨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내 아내가 되었다고 해서 멋대로 굴고 싶지는 않소.”
로렌이 원하지 않는 한 그녀와 잠자리를 갖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기만했다는 죄책감의 발로이자 사랑하는 이에 대한 존중의 표시였다.
그리고 피닉은 정말로 참았다. 로렌이 진실로 마음을 열고 자신을 받아들일 때까지, 한 침대에서 잠들면서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때로 잠든 로렌을 바라보며 곤란한 듯 한숨을 쉬거나 이를 악물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피닉은 성실한 남편이었고, 나는 매일 밤 부부의 침실을 훔쳐보는 도둑고양이였다.
그는 억눌린 욕구를 사냥으로 풀었다. 피닉은 타고난 사수였다. 생명체를 죽이고 목을 비트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정중하고 과묵한 신사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인간 사냥도 잘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로렌을 모욕하는 자들과 몇 번인가 결투를 했고, 전부 이겼다. 패배자들은 목숨을 잃거나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피를 흘리며 실려 나가는 신사들을 보며 나는 피닉이 정말로 죽이고 싶은 이는 바로 내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그보다 월등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바람을 즉시 실행에 옮기고, 또 성공했을 터였다.
안주인을 맞은 오데어 저택에는 활기가 돌았다. 저택은 섬세하고도 화려하게 단장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정찬 모임이 열렸다. 로렌의 재치 있는 메뉴 선택은 언제나 찬탄의 대상이었다.
“오데어 부인, 요즘은 편지를 쓰지 않으십니까?”
“그러게요.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었는데 말이에요.”
“애석하게도 요새는 쓰지 않는답니다. 타인의 치부를 조롱하는 무뢰한을 고발하는 편지라면 언제든지 쓸 의향이 있지만요.”
로렌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사교계의 조소에 의연하게 맞섰다.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그녀는 매 순간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했고, 자신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리고 피닉은 그녀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쳤다.
계절이 바뀌고, 피닉이 또 한 번의 결투를 치르고 온 날, 로렌은 그의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었다. 흘러내리는 가운 사이로 희고 매끄러운 살결이 드러났다. 침대에 앉은 피닉은 홀린 듯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약한 꽃을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를 만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입을 맞추고 끊임없는 감탄과 찬사를 보냈다. 뻣뻣하게 굳은 로렌의 몸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마침내 통증 없이 그를 받아들일 때까지 온몸을 애무하며 기다렸다. 인내심이 깊은 피닉다운 행동이었다.
피닉은 매일 밤 로렌을 안았다. 그의 몸짓은 때로는 녹아내릴 듯 달콤했고 또 때로는 태워 버릴 듯 격렬했다. 절정에 달할 때면 로렌을 꼭 끌어안고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아끼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방 밖으로 나가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면 곧 로렌의 높은 교성과 함께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귀가 밝았다. 살결을 빨아들이는 소리와 둘의 속살이 깊게 맞물릴 때 나는 질척한 소음까지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모조리 엿들었다. 이럴 거면 왜 나와 있는 건가 하는 자조가 들 때도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겹쳐 있는 두 몸에 칼을 꽂아 넣는 상상을 했다.
한번 시작된 소리는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나는 피닉의 낮은 신음을 들으며 문밖에서 자위했다. 그들의 몸이 물결치는 리듬에 맞춰 성기를 감싼 손을 움직였다. 피닉이 절정에 달할 때면 나도 함께 사정했다. 손바닥에 묻은 멀건 액은 침실의 방문에 문질러 놓았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 피닉의 머리맡에서 잠들었다. 그럴 때면 이유도 없이 서러워졌다.

해가 바뀌었다. 부쩍 식욕이 줄고 피곤해하는 로렌을 진찰한 가문의 주치의는 그녀가 임신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로렌은 수줍게 웃었고, 피닉은 그런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주변인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깊게 입을 맞췄다. 부부 사이에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시대, 피닉은 그런 관습 따위 깡그리 무시한 지 오래였다. 교양 없이 구는 젊은 백작에 대한 구설수는 이제 새롭지도 않았다.
“아들이면 좋겠지요? 가문에 후사가 없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부인과 내 사이에서 난 아이라면 성별은 상관없소.”
“그래도요.”
피닉이 흠, 헛기침을 했다. 귀까지 빨개져 있다.
“이런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
“나는 그 아이가 부인과 나의……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하오. 그건 내게 후계 따위보다 훨씬 큰 의미요.”
그가 다시 한번 아내의 뺨을 감싸고 소중한 듯 입술을 겹쳤다. 로렌은 부끄러운 농담을 들은 양 웃었지만 피닉은 진심이었다.
로렌의 배가 불러 오자 피닉은 단어 그대로 안절부절못했다. 온종일 그녀의 곁에 붙어 사소한 것까지 본인이 직접 챙겼다. 음식을 먹여 주고, 따뜻한 물을 가져다 손과 발을 씻어 주었다. 무리해서 걸을 필요가 없도록 자신이 식당까지 안고 가겠다고 했을 때는 저택의 모든 사용인이 경악했다. 주치의를 어찌나 들들 볶아 대었는지 풍채 좋던 중년 의사의 피골이 하루가 다르게 상접했다.
하루아침에 혈육을 잃었던 피닉의 가족에 대한 집착은 유난했다. 그는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모든 상처가 보듬어질 것처럼 굴었다. 이미 로렌에게 모든 것을 해 주고 있으면서도 무언가를 더 해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내의 손발톱을 다듬어 주며 자신과 로렌, 그리고 둘의 아이가 꾸려 나갈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피닉은 행복해 보였다.
그 상처를 만든 장본인인 나는 더욱 그의 앞에 나설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삶에 존재하는 배경이고 미물이었다. 언제나 그의 옆에 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공기였다.
그는 정말로 내 존재를 잊은 것 같았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악마가 있었다는 것도, 그 악마 덕분에 지금 자신이 로렌의 곁에 있다는 사실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내가 자신의 옆에 내내 붙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피닉, 오직 아내와 그녀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 옆에서 나는 조용히 도사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다시금 절박해져 또 한 번 나를 찾게 되기를,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

하얀 시트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창백하게 질린 로렌, 피닉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아내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통증을 호소할 힘도 없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돌보는 의사의 손길에서는 짙은 패배감이 묻어났다.
이미 여러 차례 폭풍이 지나간 다음이었다. 조금 전까지 방을 부술 기세로 발악하던 피닉 역시 기력이 다한 듯 망연자실 침대 기둥에 매달려 있다. 품위를 해치는 모습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이 방에서 태연한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곰곰이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탯줄이 아이의 목을 감고 있습니다. 가망이 없어요.’
나는 벌어진 로렌의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의사의 말 그대로였다. 아이는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신의 품에 안기게 될 테다. 피닉 오데어와 로렌 오데어의 사랑의 결실이 이대로 죽어 버린다……. 웃음이 나왔다.
의사가 피닉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남은 건 신의 자비를 구하는 일뿐이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산모에게 더 나을 거라고 했다. 때맞춰 로렌이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간신히 눈을 떠 가녀린 손으로 남편의 팔을 잡고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멍하니 있던 피닉이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물린 입술 사이로 미소가 비집고 나왔다. 피닉이 자기 앞에 선 의사를 밀어 냈다. 땀에 젖은 로렌의 이마를 쓸어 준 그가 등을 돌렸다.
“백작님?”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게.”
후다닥 방을 나선 피닉이 옆방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주먹을 꽉 말아 쥔다. 나는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턱밑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여유를 가장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스엘.”
피닉이 내 이름을 불렀다. 정제되지 않은 희열이 온몸을 내달렸다.
“이스엘!”
피닉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연호하도록 잠시 내버려 두었다. 그가 미치광이처럼 허공을 더듬으며 나를 찾는 모습을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제발 나타나, 이스엘…….”
마침내 그가 좌절하며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릴 때에, 나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현듯 나타난 나를 피닉이 신기루를 보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나를 전율하게 했다. 모른 척 눈을 내리뜨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이를…….”
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피닉이 급하게 내 팔목을 붙들었다. 내가 이대로 사라지기라도 할까 두려운 듯 무서운 힘으로 조여 온다. 갈구하는 눈동자가 내 눈과 맞춰지려 필사적이었다.
“아이를 살려 줘.”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고민하는 양 턱을 쓸자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똑바로 마주쳐 오는 푸른 눈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저 눈빛에 홀려 모든 것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지난 두 번은 내게 있어 참혹한 실패였다. 피닉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얻은 것은 저주와 혐오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이번엔 정말로 그를 만족시키는 데 성공해서, 그래서 피닉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내게 찬사를 보낸대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지난 3년간 그러했듯 나 없이 행복한―심지어 이번에는 아이까지 더해진― 피닉의 모습을 보며 속을 끓이는 것뿐이겠지.
좋다. 네가 나를 악마로 본다면 정말 악마처럼 행동해 주겠다.
“이번이 마지막 소원인 것은 알고 있어?”
“……알아.”
“이번 소원을 들어주면 난 네 옆에 계속 있을 텐데, 그래도 좋아? 더는 멋대로 내게 사라지라거나, 저리 가 버리라고 말할 수 없어. 죽을 때까지 네 옆에 붙어 있다가 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바로 네 영혼을 받아 갈 거야.”
“상관없어.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아. 지금 당장 내 목숨을 가져간대도 기꺼이 내어 주겠어. 그러니 제발…….”
“……진심이야?”
“진심이야.”
“좋아, 아이를 살려 줄게.”
“…….”
“네가 원한다면.”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주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엔 여전히 땀과 피에 젖어 쌕쌕이는 로렌과 무능한 인간들이 있었다. 날듯이 걸어오는 나를 로렌이 흐릿한 눈으로 보았다. 그녀의 부푼 배에 손을 댔다. 젖은 피부가 촉촉하게 감겨 온다. 피닉이 매일 밤 느꼈을 바로 그 감촉. 나도 모르게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로렌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내가 먼저였다.
태아의 목에 감겼던 탯줄이 스르르 풀리고 쑤욱, 아이가 빠져나왔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기적처럼 태어난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린 뒤 성별을 확인하고,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는 걸 보며 기뻐했다.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는 백작 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없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피닉을 제외하고. 의사가 아이를 보여 주었지만 피닉은 제일 먼저 로렌부터 챙겼다. 피닉이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뺨에 손을 대었다.
툭, 그녀의 목이 꺾였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이게, 무슨…….”
그제야 나를 돌아보는 그의 머리채를 쥐고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그렇게 겪어 보고도 나를 몰라? 소원은 제대로 빌어야지.”
추스를 새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렌의 뺨 위에서 굳어 있는 피닉의 손등에 내 손을 겹치고 힘주어 떼어 냈다. 그의 손으로 직접 아내의 눈을 감길 수 있도록.
“다시는 나한테 사라지라고 하지 마. 그동안 정말 힘들었거든.”
무연한 피닉의 눈빛이 멍하니 내게로 붙박였다. 곧 저 눈이 나를 향한 증오와 분노로 물들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그런 눈빛 따위, 그간 그의 옆에서 완전히 소외당하며 느꼈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히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되새겨 주었다.
“네가 원했던 거잖아.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아이를 살리는 것.”
나는 지옥의 귀족이며 질투와 역병의 아들이다. 질투의 배를 찢고 세상에 나왔고 왕을 제외한 모든 악마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런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휘둘렸다. 피닉의 곁에서 배경처럼 지냈던 지난 몇 년은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였고 지울 수 없는 쓰라림이었다. 상처를 받고, 그 상처가 터져 피가 나고 진물이 흐르고, 그것이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바늘로 찔리고 칼로 그이고…….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생각한 건 오직 로렌 오데어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던 피닉의 웃음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쉬웠다. 애틋한 포옹도 사랑 가득한 눈빛도 모두 그녀의 차지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로렌의 시체를 보며 나는 그녀가 더는 피닉의 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끈적하게 젖은 그녀의 이마를 토닥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가 들어준 피닉의 세 번째 소원은 피닉으로 하여금 나를 혐오하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슬프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질투의 아들이었다.
피닉은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잘 차려입은 그의 비단 셔츠가 찢어지고 목소리에 쇳기가 맺혔다. 의사가 아이를 안겨 주려 했지만 그는 손을 저어 거부했다. 그토록 원했던 아이였건만 한번 돌아보지조차 않는다.
그는 죽은 아내의 몸에 자신의 몸을 겹치고 뺨과 손바닥에 정신없이 입술을 비벼 댔다. 그렇게 하면 온기가 전해져 식어 가는 몸이 다시 깨어날 거라 믿는 사람처럼. 하녀장이 황급히 사용인들을 내보냈다.
방문이 닫히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피닉은 여전히 로렌을 끌어안고 부질없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들고 억지로 몸을 돌렸다. 피닉이 숨을 헐떡였다.
“아내를 살려 줘.”
“불가능해.”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지,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잖아?”
그것은 그의 아버지와 형제가 죽던 날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였다. ‘스틱스 강을 건넌 영혼을 다시 데려오는 건 우리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일이야.’ 그가 나와의 대화를 여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부러 못되게 대답했다.
“그래도 안 돼. 넌 이미 세 가지 소원을 전부 썼으니까.”
“아하, 볼 장 다 봤다는 거로군.”
피닉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좋아, 그럼 다른 악마와 계약을 맺겠어.”
직접 악마를 소환해 보는 건 처음인데, 처녀를 한 스무 명쯤 잡아 와서 그 피로 목욕을 하면 되나? 그가 비아냥거렸다. 넌지시 그에게 경고했다.
“그렇게 하면 네 영혼은 부서져.”
그가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잘됐군. 그러면 죽어서 네게 갈 일도 없을 테니.”
네 소유물이 되느니 차라리 소멸하는 게 나아.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로렌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춘 뒤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혔다. 나는 멀뚱히 서서 죽은 로렌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죽은 그녀의 시체를 난도질하면 어떻게 될까.

피닉은 자신의 말을 정말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젊은 여인을 잡아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제물로 쓸 수 있는 소와 양은 백 마리도 넘게 죽였다. 로렌과 그가 함께 쓰던 침실의 푸른 비단 벽지에 비릿한 쇠 냄새가 배었다. 벽과 소파, 침대 기둥엔 미처 닦지 못한 핏자국이 남았다.
그는 악마와 마녀에 관련된 서적도 모두 뒤졌다. 이성과 논리의 지배를 받게 된 인간 사회에 아직까지 그런 책이 그토록 많이 남아 있는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사교계에는 오데어 가의 젊은 백작이 아내를 잃고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평판에 끔찍하게 신경 쓰던 시대에 그런 추문은 치명적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저택으로 배달되던 초대장과 편지가 하나둘 끊겼다. 하지만 정작 피닉은 그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몰두하는 것은 오로지 아내를 되살리는 법 하나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았다. 매일 독주를 마셨고, 식사를 걸렀으며, 잠조차 제대로 자지 않았다.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백작가의 충성스러운 사용인들이 아니었다면 가련한 아이는 진작 죽어 버렸을 테다.
나는 잠자코 피닉의 옆에서 망가져 가는 그를 지켜보았다. 로렌을 치워 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로렌이 곁에 있든 없든 피닉은 오직 그녀만 생각했다. 오히려 그녀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피닉의 머릿속에 영원히 자리 잡은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 이유는 로렌이 곁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에 내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 바보같이 잊어버렸었다.
“왜…… 왜 나타나지 않지?”
“…….”
“너는 나타났잖아.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서 내 인생을 망쳤잖아. 그렇게 멋대로 들이닥칠 땐 언제고, 부를 때는 오지 않느냔 말이야…….”
“피닉. 이제 그만해.”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피닉이 시도한 수십 가지 방법 중엔 제법 쓸 만한 것도 있었다. 실제로 악마를 불러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소환된 악마들은 피닉의 앞에 채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그의 옆에 들러붙은 나를 보고 조용히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