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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악마의 왕을 불러내지 않는 한 피닉이 하는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것이었다. 설령 우리 왕이 온대도 나는 피닉의 앞을 막아설 작정이었다. 영혼이 부서진 인간에게는 어떠한 미래도 없으니까.
이 사실을 모르는 피닉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꾸준히 시도했고, 끊임없이 좌절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시도해 볼 방법이 없을 때에, 그는 총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물론 피닉의 그 시도 역시 실패했다. 그의 곁엔 내가 있었으므로. 그가 발포한 탄환은 피닉의 머리카락조차 스치지 못하고 애꿎은 종달새 장식만 박살 낸 뒤 벽에 박혔다. 하지만 그의 심정만은 제대로 내게 전해졌다. 그가 내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 시위한 것이라면 성공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피닉의 절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로렌을 되살리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총성에 놀란 사용인들이 달려왔다. 그들을 손짓 한 번으로 물린 피닉이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관리하지 않아 푸석한 머리카락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근 1년간 불면에 시달린 피부는 거칠거칠했다. 그가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물었다.
“불행해?”
“너무나.”
“아내가 죽어서?”
“아니. 너 때문에.”
내 가족을 죽이고, 억지로 아내를 취했다는 죄책감을 갖게 하고, 끝내 그녀까지 데려간 너 때문에. 그가 끊어질 듯 중얼거리는 말을 나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의 옆에 누워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격정에 시달리는 그였지만 심장 소리만은 평온했다. 내 가슴에 손을 올려 보았다. 쿵, 쿵, 쿵……. 터질 듯 뛰어 대고 있다.
“……피닉.”
아무리 나라도 스틱스 강을 건너간 영혼을 도로 데려올 수는 없다. 이는 모든 악마와 천사에게 내려진 금기니까. 그러니 족쇄가 필요하다. 피닉이 요구하는 어떤 것이라도 내 마음대로 물리거나 거부할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채우는 족쇄. 이 족쇄가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는 비겁한 내 등을 떠밀어 줄 테다.
“내 심장을 먹어.”
“…….”
“그러면 나를 지배할 수 있어. 네게 가는 모든 저주와 횡액은 내가 대신 가져가게 될 거야. 네 소원도 모두 들어줄게. 그러니까…….”
“…….”
“네가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는 소원을 빌어.”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마지막 말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 말은 신뢰가 없었다. 지금 피닉이 겪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나인데, 그런 내가 행복을 운운하다니.
피닉이 몸을 일으켰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쉬는 뜨거운 숨이 내 이마에 닿았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낱 인간의 방패가 되겠다는 말에도 그는 무심했다. 내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미동 없는 그의 눈동자에 나는 절망을 느꼈다. 전부를 던져도 그를 흔들 수 없음에.
그가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이지?”
“…….”
“좋아, 속아 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구구절절 변명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가슴에 손을 넣어 심장을 뽑아냈다. 끔찍한 광경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생피가 뚝뚝 흐르는 심장을 그에게 건넸다. 피닉이 그것을 받아 들고 천천히 씹어 넘겼다. 피범벅의 내장을 먹으면서도 구역질 한번 하지 않았다. 나의 힘, 나의 지위, 나의 영혼― 내 모든 것이 그의 배 속으로 넘어갔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입가에 묻은 피를 우아하게 닦아 낸 그가 입을 열었다. 간만에 보는 귀족다운 몸짓이었다.
“내 소원은 단 하나야.”
“…….”
“아내를 돌려줘.”
그의 남색 눈이 나를 직시했다. 순수한 열망을 담은 눈이다. 찬찬히 그의 동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눈시울을 깜빡일 때마다 짙은 속눈썹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밤의 바다 같은 어두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수면에 내가 비쳤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매혹당했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것이 설령 나를 죽이는 일이라 해도.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어. 아내만 살려 준다면.”
“……네가 원한다면.”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그의 손을 붙들었다.
“말했듯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정말 어려워.”
“…….”
“그러니까 나도 대가를 받아야겠어.”
피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수긍하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단단히 맞잡았다.
“안아 줘. 네 부인에게 했던 것처럼. 그러면 그녀를 살려 줄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
가파른 침묵이 베고 지나가고 그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조소였다. 마주 잡은 손을 뿌리치고는 주저앉은 내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그대로 침대까지 끌려갔다. 저항하지 않았다. 거칠게 떠밀리는 와중에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피닉에게 처음으로 빈 소원은 그로 하여금 나를…….
***
그가 내 몸을 침대에 처박았다. 한때 로렌과 그가 누웠던 침대였다. 오랫동안 빨지 않은 시트에는 죽은 로렌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몸을 돌리려 하자 뒤통수를 잡아 누른다. 엉덩이만 쳐들게 하고는 허벅지를 찢을 듯 벌렸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헐떡였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숨이 가빴다.
피닉의 낮은 숨이 귓전을 들쑤셨다. 흘긋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의 눈에는 나를 향한 경멸이 선명했다. 그 시선이 창처럼 나를 찔렀다.
내 뒤에 자리 잡은 그가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옷을 모두 입은 채였다. 열린 앞섶 사이로 비어져 나온 그의 것이 조금씩 힘을 받는다. 나와는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만 이루어지는 흥분.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곧장 일그러졌다.
“얼굴 보이지 마.”
나는 순순히 그의 말대로 했다. 짐승처럼 엉덩이를 들고 기다리자 곧 뜨겁게 발기한 그의 남성이 느껴졌다. 들어갈 곳을 찾는 듯 몇 번 짙게 문질러지더니 이내 습격처럼 짓쳐들어온다. 메마른 입구를 풀어 주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는 채였다.
움찔할 틈도 없이 단단한 기둥이 몸을 찢었다. 투둑, 살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꽉 다물린 구멍의 주름이 벌어지는 소리였다. 피닉이 내 안에 자신의 성기를 쑤셔 넣는 소리였다. 내 다리 사이에 칼을 박아 넣듯 힘주어, 단번에, 자신의 것을 삽입하는 소리였다.
“아, 으……!”
“힘 빼.”
파드득 몸을 굳혔지만 그에게 자비란 없었다. 느릿하게 성기를 뒤로 물린 그가 다시 한번 힘주어 콱 찔러 넣었다. 퍽, 퍽, 퍽…….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마다 아픔에 굳어지는 내 반응이 그에게는 일종의 희열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나를 망치고, 내게 고통을 준다는 데서야 비로소 그는 내게 성욕을 느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가쁘게 호흡하며 힘을 빼려 노력했다. 배 속이 둥둥 울리고 뒷골까지 아파 왔다. 피닉이 계속해서 아래를 치댔다. 내 골반을 부술 듯 세게 쥐고 마구 찔러 올렸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과 달구어진 살결,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나를 흥분시켰다. 그가 내게 아무런 쾌감을 주지 않았음에도 나는 홀로 발기했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시트에 허리를 비볐다.
그 언젠가 보았던 다정한 피닉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이와 알몸을 겹치고 피부를 빨며 달콤한 말을 흘려 넣던 모습을. 그 밑에 누워 솜털 같은 쓰다듬을 받고 있는 것이 나라고 상상했다. 그때의 로렌을 흉내 내며 가는 숨을 뱉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피닉. 내 삶의 빛.
“하읏…….”
돌연 피닉의 삽입이 부드러워진다. 고문하듯 가혹하게 꿰뚫어 대던 것을 멈추고 뭉근하게 허리를 돌린다. 그의 손끝이 등줄기를 쓸었다. 녹여 버릴 듯 다감하게 매만지고는 몸을 숙여 깊게 입을 맞춘다. 다가온 그의 혀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그의 성기가 재차 몸을 파고들었다. 속살이 맞물렸다.
그가 다시 한번 자신을 밀어 넣었다. 커다란 몸이 뜨겁게 나를 덮었다. 흐윽, 몸을 떨며 신음하자 귀엽다는 듯 웃는다. 그가 시트 위로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쥐고는 재차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등줄기가 움찔 굳었다. 파도처럼 쾌락이 밀려왔다. 피닉은 여전히 내 등 뒤에 있었다. 귓불에 혀를 문지른 그가 낮게 속삭였다.
“로렌…….”
피가 식었다.
심장이 얼음처럼 딱딱해졌다. 내게 심장이 남아 있었다면 반드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또 한 번 로렌, 하고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내 귀와 머리카락을 질근질근 씹으며 보드랍게 애무한다. 나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뒤로 뻗어 그의 아랫배를 밀었다.
“아니……야.”
“…….”
“나는 로렌이 아니야.”
“너…….”
몽롱하던 피닉의 표정이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변했다.
“나, 는…… 이스엘이야.”
“읏……!”
말과 함께 아래를 조였다. 황급히 빠져나가려던 그가 분신에 가해지는 자극에 신음하며 입술을 물었다.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허벅지 안쪽의 연한 살을 그의 옷이 쓸고 지나갔다.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았다. 양팔과 양다리로 피닉의 몸을 결박하고 빠져나갈 수 없도록 조였다.
그가 도로 나를 뒤집으려 했지만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맞물린 피닉의 몸이 혐오로 굳어지는 것이 선연했다. 모르는 척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물고 있는 그의 성기를 뽑을 듯 씹어 대자 작게 욕설을 뱉은 그가 급하게 들이받기 시작했다.
다정한 애무나 입맞춤 같은 것은 없었다. 행위는 차라리 폭력에 가까웠다. 그는 내게 칼을 박아 넣는다는 심정으로 내 안에 성기를 찌르고 있었다. 칼을 쓸 수 없으니 성기를 쓰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흉기 대신 사용하면서 피닉은 끊임없이 구역질했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삼키면서도 하지 않던 헛구역질을 나와 몸을 섞으면서 하고 있다. 나와 살을 섞는 일을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미치거나 토하지 않고는 이 역겨운 행위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상처 주기 위해 그 자신이 함께 상처 입는 짓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의 귓전에 대고 내 이름을 소곤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가 토악질하듯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그의 배에 내 것을 문지르기까지 했다.
한순간이나마 이대로 로렌인 척 그의 거짓된 애정을 받아 볼까 고민했던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미워서, 내가 나를 죽여 버리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향하는 경멸을 지우려 피닉의 몸에 기생식물처럼 들러붙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이름을 흘려 넣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도록.
“하나만…… 물어볼게.”
“…….”
“그 여자, 아윽, 그 여자를 사랑…해?”
“……네가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해?”
“흣! 아파, 흑, 아, 아파!”
“그래, 사랑해.”
“아……! 조, 조금만 천천, 하아……!”
“사랑하니까 이 짓, 을, 하고 있지. 후읏…… 안 그래?”
“…….”
“…….”
“아……!”
“……큭……!”
절정이 다가오는 듯 그의 움직임이 격해졌다. 거세게 들락거리던 성기가 속살에 깊숙이 박혔다. 내벽을 가득 채운 그의 성기가 바르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내 배와 맞닿은 피닉의 복근이 펄떡였다. 그의 사정에 맞추어 나도 사정을 했다. 끈적한 정액 냄새가 훅 끼친다.
나는 그제야 그의 몸을 놓아 주었다. 피닉의 팔과 어깨, 허리에 시뻘겋게 눌린 자국이 남았다. 멍이 들 것 같았다. 그는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즉시 성기를 빼냈다. 커다란 살덩이가 빠져나간 곳에서 격통이 밀려왔다.
그는 내 피와 자신의 씨물로 번들거리는 분신을 시트로 대충 닦아 내곤 곧장 나가 버렸다. 방을 나서는 그의 표정이 처참했다. 그것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원수와 몸을 섞은 자신을 향해 건네는 염오와 애도였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다리 사이로 정액이 흘렀다.
피투성이가 된 아래를 헤집어 뒤처리하는 일에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혼자 힘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곳의 상태를 보기 위해 나는 거울 앞에서 다리를 벌려야 했다. 상처 난 입구에 손가락을 집어넣을 때는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엉망으로 헤진 내벽에 손톱이 스칠 때마다 베는 듯한 쓰라림이 몸을 그었다. 겨우 빼낸 손가락에 벌건 피가 묻어 나왔다.
“우욱…….”
나는 끝내 울고 말았다.
나는 섹스를 배웠다. 가난한 섹스였다.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섹스였다. 그것은 내가 익히 알아 온 쾌락의 행위와는 달랐다. 그것은 아프고, 또 서러운 것이었다.
상처가 쉽게 낫지 않았다. 심장이 빠져나간 후유증인 듯했다. 시시때때로 피가 흐르는 뒤를 가리기 위한 최선의 선택은 옷을 입는 것이었다. 저택이 바쁜 틈을 타 사용인 숙소에서 옷을 훔쳐 입었다. 하인의 검은 정복은 내게 조금 컸다. 상의의 단추를 잠그고 장갑까지 끼자 갓 들어온 막내 하인처럼 보였다. 생전 입지 않던 옷을 걸친 나를 본 피닉은 슬쩍 인상을 썼지만, 말을 붙이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피닉은 간만에 저택을 벗어나 정원을 산책했다. 하녀장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방으로 하녀들을 끌고 들이닥쳤다. 가련한 어린 소녀들은 이상해진 주인의 방에 정말 시체라도 있을까 두려워했다. 손을 휘저어 혹시 남았을지 모르는 냄새와 핏자국을 지웠다. 안도하는 하녀들의 표정을 확인한 뒤 피닉을 따라나섰다. 그는 호수에 설치된 석조 다리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영국식 정원이었다. 불규칙한 형태의 거대한 호수 주변에 송이가 큰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로렌이 살아 있을 적 정원사에게 명해 심은 프랑스산 하이브리드 티 장미였다. 가시가 많고, 향기가 진한. 죽은 후에도 여전히 가문을 장악하고 있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품종이었다. 유심히 장미를 들여다보는 피닉 역시 같은 인간을 떠올리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바람이 수면을 흔든다. 뚝뚝 떨어진 흰 꽃잎이 투명한 물낯 위로 흐른다. 그녀가 고른 꽃은 천국을 상징하는 흰색이었다. 흰 장미의 꽃말은 결백, 비밀, 그리고…… 사랑의 한숨.
정말 하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뒤에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입을 열었다.
“아들 이름 제대로 지어 줘. 사교계에도 얼굴 비추고.”
침묵하는 등을 두고 연이어 말했다.
“네 평판, 바닥까지 떨어진 건 알아?”
“…….”
“그라프 공작이 편지를 보냈어. 꾸짖는 내용이 절반이지만 일단은 파티 초대야. 우선 거기부터 참석해. 안 좋은 소문 같은 건 내가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
“기껏 로렌이 돌아왔는데…… 엉망이 된 가문 상태에 놀라서 도로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내내 무반응이던 피닉은 로렌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몸을 돌려 나를 마주했다. 청옥 같은 그의 눈이 느릿느릿 내 얼굴을 훑고는 이내 떨어졌다. 엄정한 시선의 의미는 명백했다.
‘네가 그녀를 들먹일 자격이 있나?’
나는 모른 척 그의 발부리만 바라보았다.
호수의 겉면이 저무는 해를 눈부시게 반사할 때까지 그는 거기에 서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 그는 장미 한 송이를 꺾어 품에 넣었다. 억지로 꽃을 잡아 뜯은 그의 손에 생채기가 남았다. 고쳐 주려 했지만 그가 거부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피닉은 집사와 영지 관리인을 불렀다. 그동안 버려두었던 영지의 상태를 묻고 한숨을 쉬고는 이것저것 명령을 내린다. 간만에 일을 하게 된 하녀들이 종종걸음으로 저택의 이곳저곳을 오갔다. 방마다 달린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고, 가구 위에 씌워진 장식 천을 벗겨 밟아 빨고, 집 안 곳곳에 놓인 섬세한 장식품들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그동안 피닉은 자신의 방에 처박혀 있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는 조금 망설이다 자신의 아이를 데려오라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유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는 낯을 가리는 듯 쭈뼛거렸다.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우는 아이를 무연히 바라보던 피닉은 부지중에 그 애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과 똑 닮은 하얀 이마에, 아내를 빼다 박은 둥그런 눈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 그가 아이의 옷 주머니에 가시를 제거한 흰 장미를 넣어 주는 것을 못 본 척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교양과 체면에 목숨을 거는 이 시대 사람들은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저버린 피닉을 상종 못 할 사람 취급했다. 한때 오데어 백작 부인이 되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던 숙녀들도, 한 해에 3만 파운드를 버는 부유한 남자와 안면을 트려 혈안이 되었던 신사들도 모조리 그를 외면했다. 미합중국 출신의 한 상속녀만이 우수 어린 얼굴을 한 그에게 관심을 두어 다가왔다가, 주변인들의 언질을 듣고 황급히 물러날 뿐이었다.
그런 피닉을 위해 나는 그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의 기억을 자르고 깎아 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거나, 임신한 아내 탓에 좀 오래 두문불출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기억을 왜곡하거나, 혹은 그에 관련된 기억 전체를 뭉개 흐릿하게 만들거나.
다시 사교계에 등장한 피닉을 두고 소문은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그 불길을 잡기 위해 나선 존재는 오직 나 하나였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귀족들의 회색 뇌세포를 파고들어 정신의 틈을 억지로 벌리고, 살아 돌아올 로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리하게 힘을 쓴 탓에 매일이 피곤하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피닉의 사교 활동에 따라갔다가 돌아올 때면 현기증이 밀려오기도 했다.
간만에 볕이 좋은 날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는 피닉의 옆얼굴로 따스한 햇살이 부서졌다. 시중드는 하인을 모두 물린 식당은 고요했다. 아침 식탁을 장식한 크리스털 화병의 흰 장미꽃 향기만이 공기 중을 은은하게 떠돌았다. 아침저녁으로 정원의 장미 덤불을 들여다보는 주인을 위한 하녀장의 배려였다.
나도 피닉의 옆에 앉아 이것저것 집어먹었다. 부유한 오데어 가의 사용인들은 언제나 식탁을 풍성하게 차렸다. 아침 식사의 기본 메뉴인 수프와 브리오슈 외에도 저녁 만찬에서나 볼 수 있는 요리들― 버섯 소스를 뿌린 도요새 고기와 샤블리 포도주에 삶은 혀가자미 등이 혓바닥을 달게 적셨다.
음식을 집었던 손가락에 붉고 걸쭉한 소스가 진하게 묻어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에 묻은 그것을 쪽쪽 빨아 먹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정신없이 볼이 미어져라 음식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부터 피닉의 식기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
그가 걸신들린 양 먹어 대는 나를 경멸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입 안 가득 꾸역꾸역 욱여넣었던 음식이 통째로 넘어갔다. 사레가 들렸다. 컥컥거리는 나를 잠시 바라보던 그가 포크를 놓고 식당을 나가 버린다. 가슴을 쾅쾅 치며 유리잔의 물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기침한 뒤에는 토기가 올라왔다.
“우욱…….”
황급히 저택 밖으로 이동했다. 일전에 나를 물어뜯으려 했던 사냥개 앞에 오물을 쏟아 냈다. 커다란 검은 개는 이제 나를 보아도 짖지 않는다. 한껏 토악질을 해 대고 나니 댕댕 머리가 울렸다. 장식이 새겨진 지붕 위에 올라 등을 대고 누웠다.
올려다본 한낮의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피닉과 내가 처음 만났던 해, 내가 피닉의 아버지와 형을 죽이던 날, 화창한 날씨를 즐기며 천사들조차 나의 솜씨에 놀란 게 아니냐고 으쓱하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아득한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천사들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면 틀림없이 비웃겠지.
악마의 왕을 불러내지 않는 한 피닉이 하는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것이었다. 설령 우리 왕이 온대도 나는 피닉의 앞을 막아설 작정이었다. 영혼이 부서진 인간에게는 어떠한 미래도 없으니까.
이 사실을 모르는 피닉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꾸준히 시도했고, 끊임없이 좌절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시도해 볼 방법이 없을 때에, 그는 총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물론 피닉의 그 시도 역시 실패했다. 그의 곁엔 내가 있었으므로. 그가 발포한 탄환은 피닉의 머리카락조차 스치지 못하고 애꿎은 종달새 장식만 박살 낸 뒤 벽에 박혔다. 하지만 그의 심정만은 제대로 내게 전해졌다. 그가 내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 시위한 것이라면 성공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피닉의 절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로렌을 되살리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총성에 놀란 사용인들이 달려왔다. 그들을 손짓 한 번으로 물린 피닉이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관리하지 않아 푸석한 머리카락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근 1년간 불면에 시달린 피부는 거칠거칠했다. 그가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물었다.
“불행해?”
“너무나.”
“아내가 죽어서?”
“아니. 너 때문에.”
내 가족을 죽이고, 억지로 아내를 취했다는 죄책감을 갖게 하고, 끝내 그녀까지 데려간 너 때문에. 그가 끊어질 듯 중얼거리는 말을 나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의 옆에 누워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격정에 시달리는 그였지만 심장 소리만은 평온했다. 내 가슴에 손을 올려 보았다. 쿵, 쿵, 쿵……. 터질 듯 뛰어 대고 있다.
“……피닉.”
아무리 나라도 스틱스 강을 건너간 영혼을 도로 데려올 수는 없다. 이는 모든 악마와 천사에게 내려진 금기니까. 그러니 족쇄가 필요하다. 피닉이 요구하는 어떤 것이라도 내 마음대로 물리거나 거부할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채우는 족쇄. 이 족쇄가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는 비겁한 내 등을 떠밀어 줄 테다.
“내 심장을 먹어.”
“…….”
“그러면 나를 지배할 수 있어. 네게 가는 모든 저주와 횡액은 내가 대신 가져가게 될 거야. 네 소원도 모두 들어줄게. 그러니까…….”
“…….”
“네가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는 소원을 빌어.”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마지막 말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 말은 신뢰가 없었다. 지금 피닉이 겪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나인데, 그런 내가 행복을 운운하다니.
피닉이 몸을 일으켰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쉬는 뜨거운 숨이 내 이마에 닿았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낱 인간의 방패가 되겠다는 말에도 그는 무심했다. 내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미동 없는 그의 눈동자에 나는 절망을 느꼈다. 전부를 던져도 그를 흔들 수 없음에.
그가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이지?”
“…….”
“좋아, 속아 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구구절절 변명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가슴에 손을 넣어 심장을 뽑아냈다. 끔찍한 광경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생피가 뚝뚝 흐르는 심장을 그에게 건넸다. 피닉이 그것을 받아 들고 천천히 씹어 넘겼다. 피범벅의 내장을 먹으면서도 구역질 한번 하지 않았다. 나의 힘, 나의 지위, 나의 영혼― 내 모든 것이 그의 배 속으로 넘어갔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입가에 묻은 피를 우아하게 닦아 낸 그가 입을 열었다. 간만에 보는 귀족다운 몸짓이었다.
“내 소원은 단 하나야.”
“…….”
“아내를 돌려줘.”
그의 남색 눈이 나를 직시했다. 순수한 열망을 담은 눈이다. 찬찬히 그의 동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눈시울을 깜빡일 때마다 짙은 속눈썹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밤의 바다 같은 어두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수면에 내가 비쳤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매혹당했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것이 설령 나를 죽이는 일이라 해도.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어. 아내만 살려 준다면.”
“……네가 원한다면.”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그의 손을 붙들었다.
“말했듯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정말 어려워.”
“…….”
“그러니까 나도 대가를 받아야겠어.”
피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수긍하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단단히 맞잡았다.
“안아 줘. 네 부인에게 했던 것처럼. 그러면 그녀를 살려 줄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
가파른 침묵이 베고 지나가고 그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조소였다. 마주 잡은 손을 뿌리치고는 주저앉은 내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그대로 침대까지 끌려갔다. 저항하지 않았다. 거칠게 떠밀리는 와중에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피닉에게 처음으로 빈 소원은 그로 하여금 나를…….
***
그가 내 몸을 침대에 처박았다. 한때 로렌과 그가 누웠던 침대였다. 오랫동안 빨지 않은 시트에는 죽은 로렌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몸을 돌리려 하자 뒤통수를 잡아 누른다. 엉덩이만 쳐들게 하고는 허벅지를 찢을 듯 벌렸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헐떡였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숨이 가빴다.
피닉의 낮은 숨이 귓전을 들쑤셨다. 흘긋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의 눈에는 나를 향한 경멸이 선명했다. 그 시선이 창처럼 나를 찔렀다.
내 뒤에 자리 잡은 그가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옷을 모두 입은 채였다. 열린 앞섶 사이로 비어져 나온 그의 것이 조금씩 힘을 받는다. 나와는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만 이루어지는 흥분.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곧장 일그러졌다.
“얼굴 보이지 마.”
나는 순순히 그의 말대로 했다. 짐승처럼 엉덩이를 들고 기다리자 곧 뜨겁게 발기한 그의 남성이 느껴졌다. 들어갈 곳을 찾는 듯 몇 번 짙게 문질러지더니 이내 습격처럼 짓쳐들어온다. 메마른 입구를 풀어 주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는 채였다.
움찔할 틈도 없이 단단한 기둥이 몸을 찢었다. 투둑, 살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꽉 다물린 구멍의 주름이 벌어지는 소리였다. 피닉이 내 안에 자신의 성기를 쑤셔 넣는 소리였다. 내 다리 사이에 칼을 박아 넣듯 힘주어, 단번에, 자신의 것을 삽입하는 소리였다.
“아, 으……!”
“힘 빼.”
파드득 몸을 굳혔지만 그에게 자비란 없었다. 느릿하게 성기를 뒤로 물린 그가 다시 한번 힘주어 콱 찔러 넣었다. 퍽, 퍽, 퍽…….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마다 아픔에 굳어지는 내 반응이 그에게는 일종의 희열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나를 망치고, 내게 고통을 준다는 데서야 비로소 그는 내게 성욕을 느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가쁘게 호흡하며 힘을 빼려 노력했다. 배 속이 둥둥 울리고 뒷골까지 아파 왔다. 피닉이 계속해서 아래를 치댔다. 내 골반을 부술 듯 세게 쥐고 마구 찔러 올렸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과 달구어진 살결,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나를 흥분시켰다. 그가 내게 아무런 쾌감을 주지 않았음에도 나는 홀로 발기했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시트에 허리를 비볐다.
그 언젠가 보았던 다정한 피닉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이와 알몸을 겹치고 피부를 빨며 달콤한 말을 흘려 넣던 모습을. 그 밑에 누워 솜털 같은 쓰다듬을 받고 있는 것이 나라고 상상했다. 그때의 로렌을 흉내 내며 가는 숨을 뱉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피닉. 내 삶의 빛.
“하읏…….”
돌연 피닉의 삽입이 부드러워진다. 고문하듯 가혹하게 꿰뚫어 대던 것을 멈추고 뭉근하게 허리를 돌린다. 그의 손끝이 등줄기를 쓸었다. 녹여 버릴 듯 다감하게 매만지고는 몸을 숙여 깊게 입을 맞춘다. 다가온 그의 혀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그의 성기가 재차 몸을 파고들었다. 속살이 맞물렸다.
그가 다시 한번 자신을 밀어 넣었다. 커다란 몸이 뜨겁게 나를 덮었다. 흐윽, 몸을 떨며 신음하자 귀엽다는 듯 웃는다. 그가 시트 위로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쥐고는 재차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등줄기가 움찔 굳었다. 파도처럼 쾌락이 밀려왔다. 피닉은 여전히 내 등 뒤에 있었다. 귓불에 혀를 문지른 그가 낮게 속삭였다.
“로렌…….”
피가 식었다.
심장이 얼음처럼 딱딱해졌다. 내게 심장이 남아 있었다면 반드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또 한 번 로렌, 하고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내 귀와 머리카락을 질근질근 씹으며 보드랍게 애무한다. 나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뒤로 뻗어 그의 아랫배를 밀었다.
“아니……야.”
“…….”
“나는 로렌이 아니야.”
“너…….”
몽롱하던 피닉의 표정이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변했다.
“나, 는…… 이스엘이야.”
“읏……!”
말과 함께 아래를 조였다. 황급히 빠져나가려던 그가 분신에 가해지는 자극에 신음하며 입술을 물었다.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허벅지 안쪽의 연한 살을 그의 옷이 쓸고 지나갔다.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았다. 양팔과 양다리로 피닉의 몸을 결박하고 빠져나갈 수 없도록 조였다.
그가 도로 나를 뒤집으려 했지만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맞물린 피닉의 몸이 혐오로 굳어지는 것이 선연했다. 모르는 척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물고 있는 그의 성기를 뽑을 듯 씹어 대자 작게 욕설을 뱉은 그가 급하게 들이받기 시작했다.
다정한 애무나 입맞춤 같은 것은 없었다. 행위는 차라리 폭력에 가까웠다. 그는 내게 칼을 박아 넣는다는 심정으로 내 안에 성기를 찌르고 있었다. 칼을 쓸 수 없으니 성기를 쓰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흉기 대신 사용하면서 피닉은 끊임없이 구역질했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삼키면서도 하지 않던 헛구역질을 나와 몸을 섞으면서 하고 있다. 나와 살을 섞는 일을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미치거나 토하지 않고는 이 역겨운 행위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상처 주기 위해 그 자신이 함께 상처 입는 짓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의 귓전에 대고 내 이름을 소곤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가 토악질하듯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그의 배에 내 것을 문지르기까지 했다.
한순간이나마 이대로 로렌인 척 그의 거짓된 애정을 받아 볼까 고민했던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미워서, 내가 나를 죽여 버리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향하는 경멸을 지우려 피닉의 몸에 기생식물처럼 들러붙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이름을 흘려 넣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도록.
“하나만…… 물어볼게.”
“…….”
“그 여자, 아윽, 그 여자를 사랑…해?”
“……네가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해?”
“흣! 아파, 흑, 아, 아파!”
“그래, 사랑해.”
“아……! 조, 조금만 천천, 하아……!”
“사랑하니까 이 짓, 을, 하고 있지. 후읏…… 안 그래?”
“…….”
“…….”
“아……!”
“……큭……!”
절정이 다가오는 듯 그의 움직임이 격해졌다. 거세게 들락거리던 성기가 속살에 깊숙이 박혔다. 내벽을 가득 채운 그의 성기가 바르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내 배와 맞닿은 피닉의 복근이 펄떡였다. 그의 사정에 맞추어 나도 사정을 했다. 끈적한 정액 냄새가 훅 끼친다.
나는 그제야 그의 몸을 놓아 주었다. 피닉의 팔과 어깨, 허리에 시뻘겋게 눌린 자국이 남았다. 멍이 들 것 같았다. 그는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즉시 성기를 빼냈다. 커다란 살덩이가 빠져나간 곳에서 격통이 밀려왔다.
그는 내 피와 자신의 씨물로 번들거리는 분신을 시트로 대충 닦아 내곤 곧장 나가 버렸다. 방을 나서는 그의 표정이 처참했다. 그것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원수와 몸을 섞은 자신을 향해 건네는 염오와 애도였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다리 사이로 정액이 흘렀다.
피투성이가 된 아래를 헤집어 뒤처리하는 일에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혼자 힘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곳의 상태를 보기 위해 나는 거울 앞에서 다리를 벌려야 했다. 상처 난 입구에 손가락을 집어넣을 때는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엉망으로 헤진 내벽에 손톱이 스칠 때마다 베는 듯한 쓰라림이 몸을 그었다. 겨우 빼낸 손가락에 벌건 피가 묻어 나왔다.
“우욱…….”
나는 끝내 울고 말았다.
나는 섹스를 배웠다. 가난한 섹스였다.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섹스였다. 그것은 내가 익히 알아 온 쾌락의 행위와는 달랐다. 그것은 아프고, 또 서러운 것이었다.
상처가 쉽게 낫지 않았다. 심장이 빠져나간 후유증인 듯했다. 시시때때로 피가 흐르는 뒤를 가리기 위한 최선의 선택은 옷을 입는 것이었다. 저택이 바쁜 틈을 타 사용인 숙소에서 옷을 훔쳐 입었다. 하인의 검은 정복은 내게 조금 컸다. 상의의 단추를 잠그고 장갑까지 끼자 갓 들어온 막내 하인처럼 보였다. 생전 입지 않던 옷을 걸친 나를 본 피닉은 슬쩍 인상을 썼지만, 말을 붙이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피닉은 간만에 저택을 벗어나 정원을 산책했다. 하녀장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방으로 하녀들을 끌고 들이닥쳤다. 가련한 어린 소녀들은 이상해진 주인의 방에 정말 시체라도 있을까 두려워했다. 손을 휘저어 혹시 남았을지 모르는 냄새와 핏자국을 지웠다. 안도하는 하녀들의 표정을 확인한 뒤 피닉을 따라나섰다. 그는 호수에 설치된 석조 다리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영국식 정원이었다. 불규칙한 형태의 거대한 호수 주변에 송이가 큰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로렌이 살아 있을 적 정원사에게 명해 심은 프랑스산 하이브리드 티 장미였다. 가시가 많고, 향기가 진한. 죽은 후에도 여전히 가문을 장악하고 있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품종이었다. 유심히 장미를 들여다보는 피닉 역시 같은 인간을 떠올리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바람이 수면을 흔든다. 뚝뚝 떨어진 흰 꽃잎이 투명한 물낯 위로 흐른다. 그녀가 고른 꽃은 천국을 상징하는 흰색이었다. 흰 장미의 꽃말은 결백, 비밀, 그리고…… 사랑의 한숨.
정말 하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뒤에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입을 열었다.
“아들 이름 제대로 지어 줘. 사교계에도 얼굴 비추고.”
침묵하는 등을 두고 연이어 말했다.
“네 평판, 바닥까지 떨어진 건 알아?”
“…….”
“그라프 공작이 편지를 보냈어. 꾸짖는 내용이 절반이지만 일단은 파티 초대야. 우선 거기부터 참석해. 안 좋은 소문 같은 건 내가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
“기껏 로렌이 돌아왔는데…… 엉망이 된 가문 상태에 놀라서 도로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내내 무반응이던 피닉은 로렌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몸을 돌려 나를 마주했다. 청옥 같은 그의 눈이 느릿느릿 내 얼굴을 훑고는 이내 떨어졌다. 엄정한 시선의 의미는 명백했다.
‘네가 그녀를 들먹일 자격이 있나?’
나는 모른 척 그의 발부리만 바라보았다.
호수의 겉면이 저무는 해를 눈부시게 반사할 때까지 그는 거기에 서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 그는 장미 한 송이를 꺾어 품에 넣었다. 억지로 꽃을 잡아 뜯은 그의 손에 생채기가 남았다. 고쳐 주려 했지만 그가 거부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피닉은 집사와 영지 관리인을 불렀다. 그동안 버려두었던 영지의 상태를 묻고 한숨을 쉬고는 이것저것 명령을 내린다. 간만에 일을 하게 된 하녀들이 종종걸음으로 저택의 이곳저곳을 오갔다. 방마다 달린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고, 가구 위에 씌워진 장식 천을 벗겨 밟아 빨고, 집 안 곳곳에 놓인 섬세한 장식품들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그동안 피닉은 자신의 방에 처박혀 있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는 조금 망설이다 자신의 아이를 데려오라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유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는 낯을 가리는 듯 쭈뼛거렸다.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우는 아이를 무연히 바라보던 피닉은 부지중에 그 애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과 똑 닮은 하얀 이마에, 아내를 빼다 박은 둥그런 눈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 그가 아이의 옷 주머니에 가시를 제거한 흰 장미를 넣어 주는 것을 못 본 척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교양과 체면에 목숨을 거는 이 시대 사람들은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저버린 피닉을 상종 못 할 사람 취급했다. 한때 오데어 백작 부인이 되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던 숙녀들도, 한 해에 3만 파운드를 버는 부유한 남자와 안면을 트려 혈안이 되었던 신사들도 모조리 그를 외면했다. 미합중국 출신의 한 상속녀만이 우수 어린 얼굴을 한 그에게 관심을 두어 다가왔다가, 주변인들의 언질을 듣고 황급히 물러날 뿐이었다.
그런 피닉을 위해 나는 그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의 기억을 자르고 깎아 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거나, 임신한 아내 탓에 좀 오래 두문불출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기억을 왜곡하거나, 혹은 그에 관련된 기억 전체를 뭉개 흐릿하게 만들거나.
다시 사교계에 등장한 피닉을 두고 소문은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그 불길을 잡기 위해 나선 존재는 오직 나 하나였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귀족들의 회색 뇌세포를 파고들어 정신의 틈을 억지로 벌리고, 살아 돌아올 로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리하게 힘을 쓴 탓에 매일이 피곤하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피닉의 사교 활동에 따라갔다가 돌아올 때면 현기증이 밀려오기도 했다.
간만에 볕이 좋은 날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는 피닉의 옆얼굴로 따스한 햇살이 부서졌다. 시중드는 하인을 모두 물린 식당은 고요했다. 아침 식탁을 장식한 크리스털 화병의 흰 장미꽃 향기만이 공기 중을 은은하게 떠돌았다. 아침저녁으로 정원의 장미 덤불을 들여다보는 주인을 위한 하녀장의 배려였다.
나도 피닉의 옆에 앉아 이것저것 집어먹었다. 부유한 오데어 가의 사용인들은 언제나 식탁을 풍성하게 차렸다. 아침 식사의 기본 메뉴인 수프와 브리오슈 외에도 저녁 만찬에서나 볼 수 있는 요리들― 버섯 소스를 뿌린 도요새 고기와 샤블리 포도주에 삶은 혀가자미 등이 혓바닥을 달게 적셨다.
음식을 집었던 손가락에 붉고 걸쭉한 소스가 진하게 묻어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에 묻은 그것을 쪽쪽 빨아 먹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정신없이 볼이 미어져라 음식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부터 피닉의 식기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
그가 걸신들린 양 먹어 대는 나를 경멸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입 안 가득 꾸역꾸역 욱여넣었던 음식이 통째로 넘어갔다. 사레가 들렸다. 컥컥거리는 나를 잠시 바라보던 그가 포크를 놓고 식당을 나가 버린다. 가슴을 쾅쾅 치며 유리잔의 물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기침한 뒤에는 토기가 올라왔다.
“우욱…….”
황급히 저택 밖으로 이동했다. 일전에 나를 물어뜯으려 했던 사냥개 앞에 오물을 쏟아 냈다. 커다란 검은 개는 이제 나를 보아도 짖지 않는다. 한껏 토악질을 해 대고 나니 댕댕 머리가 울렸다. 장식이 새겨진 지붕 위에 올라 등을 대고 누웠다.
올려다본 한낮의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피닉과 내가 처음 만났던 해, 내가 피닉의 아버지와 형을 죽이던 날, 화창한 날씨를 즐기며 천사들조차 나의 솜씨에 놀란 게 아니냐고 으쓱하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아득한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천사들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면 틀림없이 비웃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