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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에어로드 가외로 물러섰음에도 카는 떠나지 않았다.
“고개 숙여.”
빳빳하게 들린 경이의 머리를 꾹 누르며 이 사이로 말을 뱉어 냈다.
“무서운데.”
“입 다물어.”
검게 선팅한 카 안에서 누군가 계속 우리를 주시했다. 길을 막은 우리가 반군인지 아닌지 염탐하려는 것이다. 썩어 빠진 나라, 나는 무거운 손을 올려 경례했다. 그러자 앞쪽 창문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내려갔다. 그 사이로 까만 총구가 나타났다.
“앞길을 막아선 이유는?”
저음에 공기를 울리는 풍부한 목소리.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다툼하다 동생이 길로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총구가 경이에게로 향한다. 몸으로 경이를 가리자 안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분 나쁜 웃음소리다.
“제국교복을 입은 걸 보니 반란군은 아닌 거 같다.”
“이유 불문하고 사살해. 하찮은 벌레들이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의 경이와 마주치자, 그 애가 헤벌쭉 웃었다.
“어린데.”
“이유 불문. 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하지.”
달칵 공이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구로 보건데 작은 악마라는 별명이 붙은 총 M-14가 틀림없었다. 근거리에서 맞으면 머리통이 박살 날 정도로 위력이 강한 총이었다. 그러나 아쉽게 레이저건이 판치는 지금 총알이 한 발밖에 장전되지 않기 때문에 수집용으로밖에 사용되지 않는 권총이었다.
“경아.”
“응.”
“형이 밀면 그대로 뛰어.”
“응.”
총구를 똑바로 주시했다. 총알이 한 발 발사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멍청해.”
싱겁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멍청하다는 걸까, 의구심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창문 틈 사이로 비집고 나온 총구가 사라졌다. 이제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게 되었기에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창문을 주시했다. 등에다 총을 갈기는 치사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제국군들의 악행이라면 이미 들을 만큼 들은 터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간만에 재미난 걸 봤군. 호기심을 끄는 것들은 내 정신에 해로워. 그러니 썩 꺼져!”
부드러운 소음을 내며 유리 창문이 올라갔다. 썩 꺼지란 호통 소리에 경이의 손을 잡고 달렸다. 등이 서늘했다. 아직도 이쪽을 주시하는 느낌. 나는 두려움에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한참을 뛰어 인도에 발을 딛자, 그제야 긴장이 풀어졌다. 다리가 풀려 땅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멀뚱멀뚱 보던 경이는 어서 일어나라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경아, 너를 어쩌면 좋을까. 진심으로 경이가 걱정됐다. 바보 같은 내 동생이. 순수한 내 동생이 살아가기엔 세상은 너무 무자비했다.

***

경이는 며칠 동안 앓았다. 열에 들떠 작은 입을 열심히 중얼거렸다. 나는 경이의 입을 손으로 꾹 막았다. 그 입에서 터져 나올 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 사전에 방지하려 했다. 뜨거운 숨이 손바닥 중앙으로 퍼졌다. 답답한지 경이가 파닥거리며 내 손을 치웠다.
물끄러미 경이를 바라보다 TV를 켰다. 배가 나온 구식 TV에서는 심각한 표정의 아나운서가 또박또박 말을 잇고 있었다. 여자가 뱉어 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속보입니다. 서울 언더지역에 대대적인 철거작업이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주민들의 거센 반항으로 작업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정부대변인은 이들에 대해 반역종자로 인지하고 주시한다는 태도로…….
정리대상 1순위로 떠오른 지역은 분명 헤븐이다. 언더라고 불리는 동네는 그곳밖에 없으니까. 그곳은 어둡고 습했으며 더러웠다. 꼬불꼬불 골목길이 들어선 그곳은 폴리스조차 들어가길 꺼리는 동네였다.
반군들의 거취나 이동로로 악용될 수 있다는 단점 때문에 제국은 그곳을 밀어 버리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주민들의 거센 항의 때문에 무산되었다. 제국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터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제국이 보상안을 내놓았음에도 그 지역을 떠나지 않는 그들은 반란 종자입니다.
헤븐에 사는 사람들은 순박했다. 그런 그들을 반역종자라 일컫는 뉴스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 같은 것들은 기어서 너희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건가. 폴리스가 내 생각을 안다면 개조의 의미로 나를 유치장 안에 처박았겠지. 불손한 생각을 하며 경이를 흔들었다.
“경아, 우리 고향이 사라진데.”
내 중얼거림에 경이의 눈이 살포시 떠졌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이 볼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헤븐이?”
“철거 지역 1순위로 올랐어.”
“아, 안되는데 우리 집 거기 있는데.”
경이는 휘청휘청, 술에 취한 사람처럼 TV 앞으로 기어갔다. 큰 눈을 끔뻑이는 경이는 손가락으로 글자 하나하나 짚으며 읽더니 히잉- 하고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철거된다는 말은 영영 없어진다는 거지?”
“응.”
“이게 다 돈이 없어서 그런 거지?”
“응.”
어째서 생각이 그쪽으로 튈까 싶다가도 99%는 맞는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많이 벌어서 헤븐 살래.”
“그러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데 네가 무슨 수로.”
“오늘부터 찾아볼 거야.”
경이는 의외로 고집이 셌다. 쇠고집도 그런 쇠고집이 없어 나나 어머니나 아버지가 두 손, 두 발을 들 정도였다. 일을 크게 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경이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에 들어간 경이는 의자에 앉는가 싶더니 이내 책상에 뺨을 댔다. 아프긴 아픈가 보다. 저러고 있으면 몸이 더 고생할 텐데. 나는 걱정이 되어 얇은 담요를 경이의 어깨에 올려 주었다.
“형, 진짜 돈만 있으면 다 가질 수 있는 거지?”
“그래.”
경이는 재차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면서도.

***

오늘부터 학교에 간다. 아직도 감기가 낫지 않아 코를 훌쩍이는 경이의 배웅을 받으며 자기공영버스를 탔다. 북부 지방이라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산 중간에 남아 있었다. 꺼져 가는 겨울 경치를 보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학교 앞이다. 나는 그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처음은 어렵다. 딱딱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선도부들을 지나쳐 교무실로 들어서자 선량한 얼굴의 선생님이 맞아 주었다.
“네가 윤재구나. 새 학기에 전학 와서 애들이 전학생인지 모를 것 같은데. 비밀로 해 주랴?”
“네.”
“그래, 그래. 고등부로 잘 찾아가고. 전학생인 거 티 내지 말고. 운동과는 교칙이 잘 통하지 않으니까 애들 조심하고. 사격부 애들은 과격하지 않지만, 자존심이 세.”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제국 국기를 올려다보며 의무적으로 짧은 경례를 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술렁거림이 잠시 멈췄다. 적당한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데 앞에 앉은 까까머리 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체술부에서 사격부로 전과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네가 나 좀 챙겨 줄래?”
다짜고짜 챙겨 달라……. 누군가를 챙길 처지도 아니었고 나보다는 이 학교를 오래 다닌 학생이 나을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내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자 앞의 학생, 그러니까 노란 명찰을 찬 이명우가 얼굴을 구겼다. 그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일부러 시비를 걸 거리를 찾는 아이처럼. 으레 신학기 때마다 있는 신년행사와 같은 기선제압이다.
“말 못해? 혀 병신인가? 혹시 귀가 안 들려?”
제국학교에 다닌다는 건 신체 건강하다는 뜻인 걸 알면서도 이명우는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재? 이름도 허접하네.”
“그래서?”
이것 봐라 하는 시선이 내게 따라붙었다.
“말할 줄 알면서 왜 대답 안 해?”
“그냥.”
“와- 이것 봐라. 순 고단수네. 체술부였던 나랑은 어울리기 싫다는 거지.”
여기서 체술부가 왜 나와.
“체술부가 다 무식하다는 편견 버려라. 사격부라고 해서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툭 하면 우리 과 무식하다고 깔보더라.”
이명우가 투덜거렸다. 그 내용이 별 영양가가 없었던지라 귀에 와 닿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너 폰 있냐? 핫스팟 좀 틀어 봐. 어제 게임을 했더니 데이터가 모자라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고가의 물건을 가져 본 적이 없어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깔깔 웃었다.
“구시대에 사는 녀석도 있네. 야, 웬만하면 폰 하나 장만해라. 제국학교에 다니는 거면 너 수발해 주는 부모 정도는 있잖아.”
아쉽게도 없다. 가족관계 조사는 입학 시에만 하므로 지금 부모님이 이혼했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꼭 물었다.
“설마 없냐?”
없냐는 그 한 마디에 열이 받았다. 가진 것이 없어서 화가 났던 거다. 다 가지고 있는 어머니도 없었고, 아버지도 없었고 그 흔한 노트폰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몇 주일 전에는 제국군에게 목숨의 위험을 받아야 됐다.
서럽다.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명우의 얼굴에 서러움에 찬 주먹을 내질렀다. 꽈당, 주먹으로 코를 맞은 이명우의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다지 보기 좋지 않은 광경에 아차 싶었다.
“이 새끼가!”
우당탕탕. 의자가 쓰러지면서 이명우가 일어났다. 체술부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일어선 그의 몸은 근육으로 잘 짜여 있었다. 안 봐도 지는 게임. 이럴 때는 몸을 웅크려 최대한 충격이 덜 받도록 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었다. 나는 등을 동그랗게 말고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손을 올리기 무섭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이 쏟아졌다. 상대의 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주먹은 매서웠지만, 오랜 시간 단련되어 온 내 맷집도 만만치 않았다. 일방적인 구타였다. 말리는 이 없이 누가 이 싸움에서 이길지 호기심에 찬 시선들만 옹기종기 모였다.
“이 호로 새끼들이!”
싸움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와서야 끝이 났다. 그는 매서운 손바닥으로 내 뺨과 이명우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치더니 자숙할 것을 명령했다.
“내 평가점수를 잘도 깎아 먹으려고. 감히 내 시간에 쌈박질을 해?”
괜찮냐는 물음은 없었다. 평가 시점이 다가온 지금 학생주임에게 필요한 건 평가점수뿐이었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은 그는 썩 꺼지라고 고함을 쳤다. 나는 그대로 교실에서 나와 수돗가로 갔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맑은 물에 피 묻은 얼굴을 씻었다.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쏟아질 할머니의 호통보다는 울먹일 경이 때문에 가슴이 쓰라렸다. 한참 어푸어푸- 소리를 내며 얼굴을 헹구고 있는데 누군가가 엉덩이를 쳤다. 고개를 들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명우가 보였다.
“개새끼. 너 학교생활 끝난 줄 알아.”
끝이란 게 뭔지 알고 중얼거리는 걸까. 끝이란 건 이런 건데. 4.5㎜ 구경의 공기총을 꺼내들었다. 사격부에서 연습용으로 쓰는 공기총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쏜다면 사람을 죽이기에도 충분했다.
“끝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야.”
그에게 총을 겨누자 이명우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다시는 눈을 뜰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
“야! 이 새끼야! 운동부라도 살인은 범죄라는 거 몰라. 너 그러다 사형대로 끌려갈 수 있어!”
공이를 잡아당기자 철컥 하면서 탄피가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말이 많았던 이명우의 입이 다물어지더니 목울대가 움직였다.
“너 진짜 쏠 거야?”
철컥, 대답 대신 천천히 방아쇠에 검지를 놓았다.
“너 진짜 쏘는 거야?”
“…….”
“너! 너!”
빵. 굉음이 운동장을 채웠다.
“하하하, 미친년.”
하얗게 얼어붙은 이명우는 웃었다. 웃는 입술 끝이 달달달 떨렸다. 방아쇠를 당겼는데도 이명우는 멀쩡했다. 그가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기총 안에 탄피가 없어서.
“탄피는 연습 때 정확히 세서 연습실에 반납하고 와. 없는 게 당연하지. 사격부라면 다 아는 사실이니까 너도 명심해 둬.”
“이 쌍년, 나 놀려먹은 거지?”
“근데 다음부터는 채워 넣고 다니려고.”
“이 새끼가!”
이명우는 소리를 지를 뿐 달려들지 않았다. 한번 공포를 느껴 본 강아지가 다시 주인에게 달려들지 못하는 것처럼, 이명우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욕을 퍼붓다 갔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기가 묻은 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넘기자 경이와 닮은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항상 이 유순한 얼굴 때문에 운동부에서 종종 시비가 걸려 왔다. 이렇게 굴지 않으면 얕잡아 보고 한번 두번 건들 터고, 결국엔 그들의 발바닥을 핥는 시늉까지 해야 되겠지.
왜 운동부에 발을 들였을까. 그건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다. 운동부를 나와야 군인이나 폴리스에 지원할 수 있으니까. 경이가 부족해 부모님의 기대는 내게 쏟아졌다. 기대를 안은 나는 떠밀리듯 사격을 전공해야 했다. 이렇게 버려질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하지 말 것을. 후회는 늘 늦다.

***

첫날부터 땡땡이를 쳤다. 할머니가 알면 기함을 할 일이었지만 발이 멈추지 않았다. 제12 제국학교가 위치한 번화가는 시골치곤 꽤 번잡했다. 오전에 돌아다니는 학생이 신기한지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벤치에 앉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구경하다 벤치에 등을 기댔다. 비둘기들이 분수대 위에 앉아 사람들이 흘리고 간 음식을 주워 먹고 있었다.
순간순간을 눈으로 훑어 내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시선에 들어왔다. 이름이 재라서 그런가. 웃기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재를 좋아했다. 형태도 없이 부서져 회색 눈같이 날리는 그것을 말이다.
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장신의 하얀 담배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이렇게 조금만 기다리면 저 손가락 사이에서 회색 눈이 내린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지게 담뱃재를 바라보았다. 살랑이는 작은 바람에 일렁이며 흩어지는 회색 눈을. 나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태우다 보면 언젠가 나도 형체 없이 사라지겠지. 늘 그것을 소리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땅으로 담뱃재가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일찍 하교한 김에 경이가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이나 사러 가기 위해. 그런데 자꾸 누군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뒤를 돌아보니 오래도록 담배를 태우던 그 남자였다. 필터까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아직 손에 든 남자는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시켜 준 남자를 위해 고개를 숙이자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인사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나대로 고마움의 표시를 한 거니까. 뒤돌아서는 시선으로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렸던 담배가 짓밟히는 게 보였다. 회색 눈을 뿌리던 하얀 나신이.

***

경이가 좋아하는 딸기 구슬 아이스크림을 담은 종이가방이 한쪽 손에서 달랑거렸다. 지친 내 그림자가 석양에 길게 늘어진 만큼 걸음이 느려졌다.
“재 형! 재 형!”
지친 얼굴로 돌아온 나를 맞이하는 건 경이었다. 마당에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상추씨앗을 뿌리던 경은 활짝 웃으며 달려오다 이내 중간에서 멈춰 섰다.
“맞았어?”
“아니, 신나게 때려 줬어.”
허세를 부리는 내 앞에서 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더니 몸을 틀어 뛰어간다. 그러곤 마당 한가운데에 쭈그리고 앉아 씨를 뿌린다. 나는 왜 경이가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다. 이맘때면 그걸로 다투었으니까.
“화났어?”
“웅.”
가만히 옆에가 서서 묻자 입술을 툭 내민 경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왜?”
“그러다 형마저 떠나면 난 정말 혼자잖아. 나는 멍청해서 형 아니면 아무도 밥을 주지 않을걸. 할머니도 사실 날 싫어해.”
경은 내 귀에만 들리게 소곤거렸다. 그 작은 목소리가 애처로워 나는 까만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동생에게 있어 나는 그저 밥을 물어다 주는 어미새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로 인해 삶을 찾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날 쳐다보지 않아서.
“속상했겠네.”
원래 할머님 성격이 그렇다. 싫은 것도 싫다. 좋은 것도 싫다. 그런 분이 겁먹고 살살 피하는 경이에게 다정히 대해 줄 리 없었다. 경이는 투덜거리며 꽃삽을 세워 흙에 퍽퍽 꽂았다. 내가 제 편을 들어 주자 경이는 신이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욕을 고운 입으로 쏟아 냈다.
“할머니 말미잘, 바보. 흥.”
그게 퍽 웃겨 픽- 웃자 경이도 따라 웃는다.
“오늘 뭐 했어?”
“온종일 상추씨 심었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이런 거 말고 나도 형처럼 학교 다니고 싶어. 부러워.”
나는 네가 부러웠다. 아무 걱정 없이 그저 받기만 하고 어리광 부리기만 하면 되는 경이가 항상 부러웠다.
“학교 가면 친구도 있고 새 책도 받고 좋지?”
“아니.”
“왜?”
“애들이 거칠어서 싸우자고 달려들고, 땀내 나는 남자들뿐이라 별로야.”
“진짜?”
“응.”
별로 좋지 않아. 나는 학교에 대한 단점을 계속 늘어놨다. 듣다 지친 경이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그냥 학교 안 갈래. 진짜 별로다. 형도 학교 가지 말고 나랑 같이 놀자.”
나는 싱긋 웃었다.
“나중에 경이 먹여 살리려면 부지런히 다녀야지. 졸업하면 그때는 여기 벗어나서 헤븐 근처로 가자. 거기서 너 좋아하던 문어발도 사 주고 딱지도 사 줄게.”
“정말? 정말이지?”
아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행복하게 웃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마당 한가운데서 우리는 헤븐으로 돌아가자 약속했다.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는 경이를 보니 가슴이 서글퍼졌다. 그래, 언젠가 돌아가자, 행복했던 그곳으로.

***

인생이란 길이 항상 평평한 것만은 아니었다. 평평한 길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기도 했다. 인생의 굴곡은 늘 존재했다. 할머니에게 온 이후로 우리 형제는 계속 평평한 길이었다. 경이는 어쩐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집을 나가면 배를 굶어야 했던 그 시절보다는 지금이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고등부 후반으로 들어서자 통학을 포기하고 기숙사로 들어가야 했다. 기숙사에 가는 날, 경이도 따라가겠다고 내 팔목을 잡고 엉엉 울었다. 주말마다 꼭 오겠다는 약속에도 아랑곳없이 고개를 흔들던 경이는 할머니의 매서운 호통에 입을 겨우 입을 다물었다. 가느다란 어깨를 파들파들 떨며 우는 경이가 안쓰러웠다.
나는 경이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한 번씩 심술이 나 경이를 괴롭히긴 했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의미 있는 것을 꼽으라면 경이를 꼽았을 테니까. 경이는 내가 재로써 흩어지지 않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경이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그렇게 경이를 사랑했다.
고등부 3학년부터 기숙사가 의무가 아니었다면 통학을 했을 거다. 입술을 꾹 물고 우는 경이를 뒤로하고 이 구렁텅이 같은 기숙사에 들어온 지도 이제 1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학 때 미친 짓을 한 덕분에 학교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대신 미친놈이란 별명이 따라다녀 그 흔한 친구 하나 사귀어보지 못하고 졸업할 예정이었다.
스무 살의 기로에 선 나는 폴리스로 진학하기 위해 대학교에 갈지 말지 고민했다. 경이를 위해서라면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폴리스 쪽으로 가야 했지만, 그들의 사상이 나와 맞지 않았다. 알량한 충성심을 가진 내가 폴리스가 되는 건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을 들고 있는 것과 같았다.
손 안에서 펜을 빙그르르 돌리는 사이, 기숙사 소속의 우체로봇이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을 놓고 갔다. 수신인을 보지 않아도 경이란 걸 알기에 나는 약간 성급하게 편지봉투를 뜯었다. 아마 이 편지에는 빨리 오라고 칭얼대는 글들이 한가득 들어 있겠지. 조금 웃음이 났다.
경이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런 경이 보고 지능이 떨어진다고 판정을 내린 새끼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발전 가능성이 없다던 내 동생이 이렇게나 좋아졌다고. 이번 주말엔 꼭 올라가겠다는 답장을 써 줘야겠단 들뜬 마음을 안고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편지는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뇌졸중으로 인한 뇌사. 수많은 글 중 눈에 박히는 내용은 뇌사였다. 그 뒤로 만만찮은 금액이 적혀 있었다. 편지 봉투를 보니 제국병원 마크가 찍혀 있었다.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돈은 걱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호자를 잃는다는 건 미성년자인 우리에게 치명타였다. 제국법으로 우리는 24살까지 미성년자였고 뇌사 판정을 받은 이는 법정 보호인이 될 수 없었다. 할머니와 우리의 법정보호인 자격은 자연스럽게 큰아버지께 돌아갈 것이고 우리를 마땅찮게 여겼던 큰아버지는 우리의 법정 보호인 자격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법정 보호인을 잃는다는 건 보호법에 따라 제국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기숙사 1층으로 뛰어갔다. 고물이나 마찬가지인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자 안내문이 흘러나왔다.
-제12 제국학교 학생 여러분, 학업의 열중을 위해 밤 10시 이후부터 통신매체 사용이 제한됩니다.
“제길!”
공중전화는 넣었던 동전을 반환했다. 손바닥으로 공중전화를 내리친 나는 ‘제길’을 연신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야 했다. 기숙사 현관도 통금시간이 넘어 굳게 잠겨 있었다. 결국, 아침까지 무력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초초하게 입술을 물어뜯으며 로비를 맴돌았다.
“거기 누구야?”
탕. 회초리가 벽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사감이 고함을 질렀다.
“4학년 윤잽니다.”
“탈주하는 놈이면 가만 안 둔다.”
“할머니께서 쓰러지셔서 집과 연락을 취하려 잠시 내려왔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하자 치켜 올라갔던 사감의 눈초리가 내려갔다.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연락할 방도가 없어. 급한 일이 아니면 내일 연락을 취하도록 해.”
“네.”
입술을 악물고 올라갔다. 그의 말대로 기숙사 내부에서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고 내가 알고 있는 번호도 집 번호가 고작이다. 집에 누군가 있을 리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자. 마음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불안을 애써 눌러 가며 계단을 올랐다. 타는 마음에 반복적으로 입술을 핥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초조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역시 사감에게 말을 해서 집에 가 보는 게 나을까? 집에 가서 내가 성년이 될 때까지만, 우리의 호적을 잡고 있어 달라고 부탁할까. 아니, 큰아버지도 그렇게 모질지 않은 분이니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어. 나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