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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런 정중한 모습에 여자가 더 좋아지려 한다. 더 열심히 그녀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서 언젠가는 이 여자가 당연히 자신이 주는 것들을 편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말겠다고 그가 단단히 결심했다.
두 사람이 각자 먹은 점심값을 계산하고 그녀가 카운터에서 집어 건네준 박하사탕을 한 개씩 나란히 입에 넣고 밖으로 나섰을 때 일식집으로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중 한눈에 딱 들어오는 웨이브가 굽이치는 긴 머리에 몸에 딱 맞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제일 먼저 진혁을 보고는 알은체를 했다.
“최진혁?”
“최 변호사?”
“어? 어. 안녕하십니까? 식사하러 오셨나 봐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진혁이 들어오는 무리를 알아보고 같은 사무실 형법 전문 법률팀장에게 인사를 했다. 옆에 서 있던 상아는 아는 사람을 만난 듯한 그에게 조용히 말하고 무리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인사하고 나오세요. 저는 나가 있을게요.”
식사 한 번 같이 하자고 권해도 선약이 있다고 무시하던 진혁이 다른 여자와 식사를 한 걸 본 현지가 도도하게 눈을 치켜세우고 그를 향해 물었다.
“방금 나간 여자 누구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뭐?”
사무실에서 현지가 진혁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현지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당사자 진혁뿐이다. 현지가 당당하게 최 변호사는 내 거다라고 표현을 하기에 언젠가는 두 사람이 사귈 것이라는 게 모두의 예상이었는데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챈 법률팀장이 보다가 끼어들었다.
“최 변, 방금 나간 아름다운 분은 누구신가?”
“아, 그게 제가 맘에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부드럽지만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진혁이 살짝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본 법률팀장의 입에서 농이 나온다.
“하하, 최 변, 뭘 그렇게 쑥스러워하고 그러는가? 자고로 남자는 제 여자다 싶으면 밀고 들어가야 해.”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진혁이 넉살 좋은 충고에 진지하게 끄덕였다. 같이 식사하러 온 법률팀 사람들 모두 웃으며 그를 격려했다. 아! 단 한 사람만 빼고.
현지는 지금 속에서 올라오는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잘 손질된 매니큐어가 발린 손톱을 물어뜯으며 분함과 초초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온 상아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낯익은 작은 뒤통수 두 개를 봐 버렸다. 두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두 아이, 머리를 땋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와 모자를 쓰고 청바지를 입은 아이는 분명 상아의 반 학생이다. 상아가 소리쳤다.
“5학년 3반!! 양수빈, 김철민.”
손을 잡고 걸어가다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인 상아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귀신 본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 선생님.”
“어허, 선생님이 밖에서는 뭐라 불러라 했지?”
“네, 네? 언, 언니?”
“그래. 근데 뭐야, 둘이 설마 사귀는 거야?”
“아, 아니요.”
당황한 아이들은 잡고 입는 손을 떼고는 애꿎은 땅만 바라보고 상아의 시선을 피했다. 위에서 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니가 반에서 누군가를 사귀고 하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선생님, 아니 언니에게 먼저 말해야 된다고요.”
“그래. 그럼 다시 물을게. 둘이 사귀니?”
다시 묻는 상아의 물음에 굳게 입을 닫고 있건 남자아이가 조그마하게 대답했다.
“네? ……네.”
상아는 당황과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두 아이에게 말했다.
“오케이. 접수.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길이었어?”
“그게, 학원 친구 생일파티예요.”
“그래? 어디 가지 말고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기다리라 신신당부를 하고 두 아이를 뒤로하고 상아가 나왔던 식당을 향해 뛰어갔다. 마침 식당에서 나오는 진혁을 향해 뛰어온 상아는 그에게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러고는 상아는 재빨리 기다리고 있는 젊은 커플에게 돌아왔다.
“자, 가자. 언니가 데려다 준다. 셋이 손잡고 가자.”
말을 마친 그녀는 중간에 서서 양옆으로 한 손씩 아이들 손을 잡았다. 아이들은 밖에서 선생님을 만난 것도 당황스러운데 둘이 사귄다는 것도 들키고,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이젠 중간에서 선생님 손에 붙잡혀 셋이 같이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야 한다는 것이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쪽팔렸다.
친구들이 놀릴 텐데. 두 아이는 조례 시간에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하시던 말씀이 진심인 줄 정말로 몰랐다.
‘학급 내에서 누군가를 사귀거나 하면 무조건 선생님에게 말해 주세요. 혹시나 선생님에게 말을 안 하다 들킨다! 애인도 없어서 시간도 많은 이 선생님이 친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같이 놀아 줄게요.’
이런! 아이들이 상아 선생님을 너무 약하게 봤군요.
[데이트의 정석 마지막 챕터 6! 데이트를 마치고 꼭 여자를 집에 데려다 주는 매너를 발휘해라. 집 앞까지 간 그녀와 로맨틱한 키스를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
인사만 하고 가 버리는 그녀에게 마지막 챕터대로 데려다 주겠다고 따라갔던 진혁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데이트의 정석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손으로 웃음을 막아 봤지만 웃음이 손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는데도 저 여자만 보면 큰 소리로 웃어 버리고 만다. 평생 이렇게 소리 내서 웃어 본 적이 몇 번 안 되는데. 모두 저 여자를 보고 나온 웃음이다.
그에게로 즐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에게 그 즐거운 바람을 선사한 여자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유유히 사라졌다.
버라이어티한 만남을 마치고 누나의 집으로 들어온 진혁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허리에 손을 올리고 물음표를 띄운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누나를 맞이했다.
“이 주말에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누구 좀 만나러.”
“설마…… 데이트한 거야?”
“그게 데이트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침에 집에서 나갈 때만 해도 분명히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부푼 마음으로 나갔는데 집으로 돌아온 지금 오늘 하루 종일 여자와의 만남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밥을 같이 먹긴 했으니 데이트이긴 한가?
같이 식사 한 번 같이 한 것뿐인데 그녀가 더 좋아졌다. 누나가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어제 밤새 딸딸 외워 버린 데이트의 정석이라 적힌 책을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데이트의 정석? 웃기시네.”
이 책대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었다. 데이트의 정석이라더니 정석이 안 통하는 여자였다.
평범하고 보통의 여자와는 조금 다른 그녀였다. 어쩌면 그런 그녀여서 첫눈에 흥미를 느꼈고 다시 만나고 싶었고 지금 이렇게 또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운 그의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기 시작했다.
*
오늘은 웬일로 상아의 눈이 개운하게 떠졌다. 그 이유에 ‘금요일’을 든다면 다들 알아들으시려나…… 교직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상아조차도 월요일은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일주일 중에서 가장 기다리는 요일이 금요일이다. 직장인들에게는 일주일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요일. 오늘은 금요일이다.
상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씻고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그녀는 계속 흥얼거리며 기분 좋을 때만 꺼내 입는 다홍색 원피스를 입었다. 벨트 아래로 길게 늘어진 플레어스커트가 살랑거렸다. 주말을 함께할 드라마도 예약 녹화해 놨겠다 학교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이 가볍다.
드르륵.
학교에 도착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소리에 벌써 일찍부터 와 있던 아이들이 선생님을 보고는 물어 왔다.
“우와. 선생님 치마 입으셨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있지. 오늘이 금요일이잖아. 나 완전 행복하잖아.”
“크크. 진짜 예뻐요. 선생님 이제 치마만 입고 다니세요.”
“그래?”
상아가 아이들의 칭찬에 치마 끝을 잡고 한 바퀴 돌고는 미스코리아처럼 무릎을 굽히고 손을 까딱했다. 그 모습에 아이들이 더 크게 웃었다.
아이들의 칭찬은 항상 그녀를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녀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고 딱 맞춰 종소리가 울렸다. 금요일 1교시 국어 수업. 그녀의 클래스가 시작된다.
“반장 인사.”
“차렷 경례.”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국어 읽기 40쪽을 펴세요.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시를 하나 들려주겠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 보세요.”
상아가 준비해 온 시를 담담하고 진지하게 낭송하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상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서 시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비가 오면 네 생각이 난다.
너는 무엇이 그리 슬프길래
그 많은 눈물을 쏟아 내었나.
나는
너의 눈물을 맛본다.
노을 맛이 난다.
너의 곱슬머리는 엉켜 뭉쳐 있다.
마치 우리의 사이도 그러할까?
네가 그리워
비오는 날 널 목 놓아 부른다.
이모 여기 라면 하나요!]
한 아이가 작은 웃음을 터뜨린다. 작은 웃음이 시작이 되어 교실 안에 웃음이 퍼져 나갔다. 아이들의 웃음은 순백색 같다. 맛도 향도 색도 없다. 어른이 되면서 갖가지 색과 향기를 덧입게 될 것이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멋진 일이라 기대가 됐다. 상아가 한참 웃던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질문을 시작했다.
“선생님이 들려준 시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어디였습니까?”
아이들이 손을 한 명씩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노을 맛이 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라면을 재치 있게 표현해 재밌었습니다.”
대답한 아이들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잊지 않고 해 주고는 상아가 다시 질문했다.
“여기서 나오는 ‘눈물’은 무엇을 나타낸 것 같습니까?”
“네, 선생님 라면 국물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라면의 면발은 무엇으로 표현했나요?”
“곱슬머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잘했습니다. 시에서는 인상적인 부분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각자 공책에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찾아서 적어 봅시다.”
책을 읽고는 공책에 써 내려가는 소리가 가득했다.
1교시가 마치는 종이 울리자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교탁 위에 몰려들었다.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아이들에게 자세히 설명이 끝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개구쟁이 창식이 물었다.
“선생님 아까 읽은 시 누가 지은 거예요?”
“종이랑 펜 가져와 봐.”
창식은 어리둥절해하며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꿈 많던 학창시절 시인이 되고 싶었던 상아는 재주가 없음을 재빨리 인정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맛있는 음식을 접하게 되면 창작의 혼이 넘쳐날 때가 있다. 아까 그 시는 비 오는 날 넘쳐나는 창작의 혼을 주체 못 해 분식집에서 지은 시이다. 상아는 아이돌 가수들이 하는 양 휘갈겨 사인을 해서는 창식이 손에 들려 줬다.
“영광인 줄 알아.”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상아는 유유히 교실 문을 나갔다.
“에이, 뭐야?”
상아가 자랑스럽게 휘갈겨 쓴 종이를 보며 창식이 어이없어했다. 아까부터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원이가 다가와 말했다.
“너 안 가질 거면 나 줘.”
기원은 상아의 사인을 받아 조심스레 품 안에 안았다.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 누구에게는 소중한 것이라니 세상에 참 모를 일들이 많다. 그것의 답은 ‘누구의’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면 저절로 우리는 무릎을 탁 치게 될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기 전 4교시 마치는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허리 펴고 바른 자세로!”
“선생님! 우리는 언제 밥 먹으러 가요?”
“수업이 끝나야 가지.”
수업이 끝나야 급식을 먹으러 갈 텐데 아이들은 뿔난 송아지처럼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배고파요.”
“선생님 당 떨어져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부터 당 떨어진다니 상아가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직 팔팔한 것들이 늙은 선생님 앞에서…….”
아이들이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니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상아가 책을 덮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손 씻고 번호 순대로 서세요.”
아이들을 인솔해 급식실로 내려갔다. 전교생이 급식실을 이용하다 보니, 아무리 큰 급식소라도 한 번에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년별로 배식 시간을 달리해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피이…… 우리 반이 오늘 1등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 내일은 더 빨리 내려와요. 네?”
상아는 고등학교 때 점심을 조금이라도 일찍 먹으려고 ‘1초, 2초’를 세고 있었던 자신이 기억났다. 그리고 종이 치면 전속력으로 내달렸던 그 걸음도, 친구들의 그 웃음소리도 기억의 수면 위에 솟아올랐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급식은 그리 맛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밥을 먹고 나서는 항상 매점에 들러 빵이며 라면을 사 먹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게 어디로 다 들어갔을까? 라고 감탄을 마지않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도 다 추억이 되니 ‘학창시절은 참 좋은 때구나’ 싶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빛나는 때의 아이들을 보기 위해, 무엇이든 꿈꾸고 바라는 그 마음이 눈이 시리게 아름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내일은 1등으로 밥 먹자.”
“와아아아아.”
이 별것도 아닌 한마디에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상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남은 수업을 마치고는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주말에 뭘 할 건지 이야기하면서 상아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교실을 뛰어 나갔다.
상아도 남은 잡무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주말 동안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밀린 드라마 복습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걸음이 더 빨라졌다. 오피스텔에 도착해 입구로 들어서는데 경비 아저씨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1004호 아가씨, 이제 퇴근하는 거야?”
“네, 지금 퇴근해요.”
“일찍 퇴근했구만, 어서 들어가 봐.”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저씨.”
아저씨와 잠시 인사를 나눈 상아는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더 빨리해서 걸어가는데 뒤통수 쪽으로 아저씨의 외침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빨리 걸으면 남자들이 말을 걸어 보고 싶어도 못 따라와!!”
아,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남자가 없었구나! 아니지, 그 변호사 있잖아. 내가 뛸 때마다 뒤에서 쫓아왔었지.
상아의 머릿속에 그의 반질반질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내 머리를 흔들고는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현관에 들어선 그녀는 아무렇게 힐을 벗어 던지고는 순식간에 추리닝을 꿰어 입었다. 그러고는 냉장고에 있는 맥주와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서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이제 깁스 님을 영접할 시간이다. 녹화된 미드를 선택하고 시청하려 리모컨을 누르는 순간, 전화기가 울렸다.
마치 며칠을 굶은 상태에서 급하게 라면을 다 끓이고 한 입 넣으려는 순간 방해를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
“뭐야.”
상아는 발신자에 뜨는 이름을 보고 재빠르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 상아 씨?
선이의 남편 현재다. 선이야 기침만 해도 전화를 하지만 현재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웬만하면 전화를 하지 않는다. 거기다 장모님이라면서 놀리는 게 일반적인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보다.
“네, 선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그게, 선이가 열이 심한데 병원에 갔다 올 동안 쌍둥이 잠시만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할아버지랑 어머님은 어디 가셨어요?”
― 네, 지방에 가셨습니다. 집사람은 혼자서 병원 갔다 온다고 저보고 얘들 보고 있어라는데 걱정이 돼서…….
“알겠어요. 손자들 장모가 봐야지 누가 봐요.”
― 감사합니다.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한 삼십 분 후면 도착할 것 같아요.
전화를 끊자마자 상아는 거실을 둘러보고 빛의 속도로 치우기 시작했다. 널려 있던 수건이며 옷들은 전부 세탁기에 집어넣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식탁에 널린 과자봉지, 아이스크림통,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맥반석 계란의 껍질까지 전부 쓰레기통으로 직행시키고 나서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깨끗이 헹궈서는 정리하고 허리를 톡톡 두드렸다.
얼추 삼십 분이 지난 것 같아 서둘러 밑으로 내려갔다. 마침 현재의 외제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현재가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부탁할 데가 없어서요.”
“괜찮아요. 선이가 많이 아픈가 봐요?”
“네, 열이 많이 나는데 미련하게.”
며칠 부산에 출장을 갔다 왔더니 안방 침대에서 열이 올라 앓고 있는 하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고 현재가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선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의 말투에 다 드러나고 있었다.
결혼한 지 좀 지났고 아이들도 태어났지만 현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의 아내인가 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소울메이트를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현재와 선이는 서로의 영혼에 꼭 맞는 짝을 찾아내었다. 친구가 조금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차 안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시트에 앉아 창문 밖으로 상아를 알아보고 아이들이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상아가 아이들을 반겼다.
“린이, 빈이 잘 있었어?”
쌍둥이들이 상아를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현재가 차 트렁크에서 유모차를 꺼내 아이들을 앉혔다. 그리고 상아에게 당부했다.
“애들이 많이 칭얼거릴 겁니다. 그럼 유모차에 태워서 산책하면 바로 잠잠해집니다.”
“걱정 마세요. 제 직업이 애들 가르치는 건데, 이 정도쯤이야.”
상아가 괜찮다며 가 보라고 선이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쌍둥이들을 두고 가는 게 맘에 안 내키는지 머뭇거리는 선이를 현재가 억지로 끌어다가 차에 태웠다. 아직은 엄마, 아빠가 사라진 것을 눈치를 못 챘는지 방긋방긋 웃는 아이들을 두고 선이를 태운 현재의 차는 쌩하고 부리나케 사라졌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런 정중한 모습에 여자가 더 좋아지려 한다. 더 열심히 그녀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서 언젠가는 이 여자가 당연히 자신이 주는 것들을 편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말겠다고 그가 단단히 결심했다.
두 사람이 각자 먹은 점심값을 계산하고 그녀가 카운터에서 집어 건네준 박하사탕을 한 개씩 나란히 입에 넣고 밖으로 나섰을 때 일식집으로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중 한눈에 딱 들어오는 웨이브가 굽이치는 긴 머리에 몸에 딱 맞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제일 먼저 진혁을 보고는 알은체를 했다.
“최진혁?”
“최 변호사?”
“어? 어. 안녕하십니까? 식사하러 오셨나 봐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진혁이 들어오는 무리를 알아보고 같은 사무실 형법 전문 법률팀장에게 인사를 했다. 옆에 서 있던 상아는 아는 사람을 만난 듯한 그에게 조용히 말하고 무리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인사하고 나오세요. 저는 나가 있을게요.”
식사 한 번 같이 하자고 권해도 선약이 있다고 무시하던 진혁이 다른 여자와 식사를 한 걸 본 현지가 도도하게 눈을 치켜세우고 그를 향해 물었다.
“방금 나간 여자 누구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뭐?”
사무실에서 현지가 진혁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현지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당사자 진혁뿐이다. 현지가 당당하게 최 변호사는 내 거다라고 표현을 하기에 언젠가는 두 사람이 사귈 것이라는 게 모두의 예상이었는데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챈 법률팀장이 보다가 끼어들었다.
“최 변, 방금 나간 아름다운 분은 누구신가?”
“아, 그게 제가 맘에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부드럽지만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진혁이 살짝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본 법률팀장의 입에서 농이 나온다.
“하하, 최 변, 뭘 그렇게 쑥스러워하고 그러는가? 자고로 남자는 제 여자다 싶으면 밀고 들어가야 해.”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진혁이 넉살 좋은 충고에 진지하게 끄덕였다. 같이 식사하러 온 법률팀 사람들 모두 웃으며 그를 격려했다. 아! 단 한 사람만 빼고.
현지는 지금 속에서 올라오는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잘 손질된 매니큐어가 발린 손톱을 물어뜯으며 분함과 초초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온 상아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낯익은 작은 뒤통수 두 개를 봐 버렸다. 두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두 아이, 머리를 땋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와 모자를 쓰고 청바지를 입은 아이는 분명 상아의 반 학생이다. 상아가 소리쳤다.
“5학년 3반!! 양수빈, 김철민.”
손을 잡고 걸어가다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인 상아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귀신 본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 선생님.”
“어허, 선생님이 밖에서는 뭐라 불러라 했지?”
“네, 네? 언, 언니?”
“그래. 근데 뭐야, 둘이 설마 사귀는 거야?”
“아, 아니요.”
당황한 아이들은 잡고 입는 손을 떼고는 애꿎은 땅만 바라보고 상아의 시선을 피했다. 위에서 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니가 반에서 누군가를 사귀고 하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선생님, 아니 언니에게 먼저 말해야 된다고요.”
“그래. 그럼 다시 물을게. 둘이 사귀니?”
다시 묻는 상아의 물음에 굳게 입을 닫고 있건 남자아이가 조그마하게 대답했다.
“네? ……네.”
상아는 당황과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두 아이에게 말했다.
“오케이. 접수.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길이었어?”
“그게, 학원 친구 생일파티예요.”
“그래? 어디 가지 말고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기다리라 신신당부를 하고 두 아이를 뒤로하고 상아가 나왔던 식당을 향해 뛰어갔다. 마침 식당에서 나오는 진혁을 향해 뛰어온 상아는 그에게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러고는 상아는 재빨리 기다리고 있는 젊은 커플에게 돌아왔다.
“자, 가자. 언니가 데려다 준다. 셋이 손잡고 가자.”
말을 마친 그녀는 중간에 서서 양옆으로 한 손씩 아이들 손을 잡았다. 아이들은 밖에서 선생님을 만난 것도 당황스러운데 둘이 사귄다는 것도 들키고,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이젠 중간에서 선생님 손에 붙잡혀 셋이 같이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야 한다는 것이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쪽팔렸다.
친구들이 놀릴 텐데. 두 아이는 조례 시간에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하시던 말씀이 진심인 줄 정말로 몰랐다.
‘학급 내에서 누군가를 사귀거나 하면 무조건 선생님에게 말해 주세요. 혹시나 선생님에게 말을 안 하다 들킨다! 애인도 없어서 시간도 많은 이 선생님이 친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같이 놀아 줄게요.’
이런! 아이들이 상아 선생님을 너무 약하게 봤군요.
[데이트의 정석 마지막 챕터 6! 데이트를 마치고 꼭 여자를 집에 데려다 주는 매너를 발휘해라. 집 앞까지 간 그녀와 로맨틱한 키스를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
인사만 하고 가 버리는 그녀에게 마지막 챕터대로 데려다 주겠다고 따라갔던 진혁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데이트의 정석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손으로 웃음을 막아 봤지만 웃음이 손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는데도 저 여자만 보면 큰 소리로 웃어 버리고 만다. 평생 이렇게 소리 내서 웃어 본 적이 몇 번 안 되는데. 모두 저 여자를 보고 나온 웃음이다.
그에게로 즐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에게 그 즐거운 바람을 선사한 여자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유유히 사라졌다.
버라이어티한 만남을 마치고 누나의 집으로 들어온 진혁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허리에 손을 올리고 물음표를 띄운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누나를 맞이했다.
“이 주말에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누구 좀 만나러.”
“설마…… 데이트한 거야?”
“그게 데이트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침에 집에서 나갈 때만 해도 분명히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부푼 마음으로 나갔는데 집으로 돌아온 지금 오늘 하루 종일 여자와의 만남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밥을 같이 먹긴 했으니 데이트이긴 한가?
같이 식사 한 번 같이 한 것뿐인데 그녀가 더 좋아졌다. 누나가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어제 밤새 딸딸 외워 버린 데이트의 정석이라 적힌 책을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데이트의 정석? 웃기시네.”
이 책대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었다. 데이트의 정석이라더니 정석이 안 통하는 여자였다.
평범하고 보통의 여자와는 조금 다른 그녀였다. 어쩌면 그런 그녀여서 첫눈에 흥미를 느꼈고 다시 만나고 싶었고 지금 이렇게 또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운 그의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기 시작했다.
*
오늘은 웬일로 상아의 눈이 개운하게 떠졌다. 그 이유에 ‘금요일’을 든다면 다들 알아들으시려나…… 교직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상아조차도 월요일은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일주일 중에서 가장 기다리는 요일이 금요일이다. 직장인들에게는 일주일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요일. 오늘은 금요일이다.
상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씻고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그녀는 계속 흥얼거리며 기분 좋을 때만 꺼내 입는 다홍색 원피스를 입었다. 벨트 아래로 길게 늘어진 플레어스커트가 살랑거렸다. 주말을 함께할 드라마도 예약 녹화해 놨겠다 학교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이 가볍다.
드르륵.
학교에 도착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소리에 벌써 일찍부터 와 있던 아이들이 선생님을 보고는 물어 왔다.
“우와. 선생님 치마 입으셨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있지. 오늘이 금요일이잖아. 나 완전 행복하잖아.”
“크크. 진짜 예뻐요. 선생님 이제 치마만 입고 다니세요.”
“그래?”
상아가 아이들의 칭찬에 치마 끝을 잡고 한 바퀴 돌고는 미스코리아처럼 무릎을 굽히고 손을 까딱했다. 그 모습에 아이들이 더 크게 웃었다.
아이들의 칭찬은 항상 그녀를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녀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고 딱 맞춰 종소리가 울렸다. 금요일 1교시 국어 수업. 그녀의 클래스가 시작된다.
“반장 인사.”
“차렷 경례.”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국어 읽기 40쪽을 펴세요.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시를 하나 들려주겠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 보세요.”
상아가 준비해 온 시를 담담하고 진지하게 낭송하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상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서 시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비가 오면 네 생각이 난다.
너는 무엇이 그리 슬프길래
그 많은 눈물을 쏟아 내었나.
나는
너의 눈물을 맛본다.
노을 맛이 난다.
너의 곱슬머리는 엉켜 뭉쳐 있다.
마치 우리의 사이도 그러할까?
네가 그리워
비오는 날 널 목 놓아 부른다.
이모 여기 라면 하나요!]
한 아이가 작은 웃음을 터뜨린다. 작은 웃음이 시작이 되어 교실 안에 웃음이 퍼져 나갔다. 아이들의 웃음은 순백색 같다. 맛도 향도 색도 없다. 어른이 되면서 갖가지 색과 향기를 덧입게 될 것이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멋진 일이라 기대가 됐다. 상아가 한참 웃던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질문을 시작했다.
“선생님이 들려준 시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어디였습니까?”
아이들이 손을 한 명씩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노을 맛이 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라면을 재치 있게 표현해 재밌었습니다.”
대답한 아이들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잊지 않고 해 주고는 상아가 다시 질문했다.
“여기서 나오는 ‘눈물’은 무엇을 나타낸 것 같습니까?”
“네, 선생님 라면 국물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라면의 면발은 무엇으로 표현했나요?”
“곱슬머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잘했습니다. 시에서는 인상적인 부분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각자 공책에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찾아서 적어 봅시다.”
책을 읽고는 공책에 써 내려가는 소리가 가득했다.
1교시가 마치는 종이 울리자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교탁 위에 몰려들었다.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아이들에게 자세히 설명이 끝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개구쟁이 창식이 물었다.
“선생님 아까 읽은 시 누가 지은 거예요?”
“종이랑 펜 가져와 봐.”
창식은 어리둥절해하며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꿈 많던 학창시절 시인이 되고 싶었던 상아는 재주가 없음을 재빨리 인정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맛있는 음식을 접하게 되면 창작의 혼이 넘쳐날 때가 있다. 아까 그 시는 비 오는 날 넘쳐나는 창작의 혼을 주체 못 해 분식집에서 지은 시이다. 상아는 아이돌 가수들이 하는 양 휘갈겨 사인을 해서는 창식이 손에 들려 줬다.
“영광인 줄 알아.”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상아는 유유히 교실 문을 나갔다.
“에이, 뭐야?”
상아가 자랑스럽게 휘갈겨 쓴 종이를 보며 창식이 어이없어했다. 아까부터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원이가 다가와 말했다.
“너 안 가질 거면 나 줘.”
기원은 상아의 사인을 받아 조심스레 품 안에 안았다.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 누구에게는 소중한 것이라니 세상에 참 모를 일들이 많다. 그것의 답은 ‘누구의’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면 저절로 우리는 무릎을 탁 치게 될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기 전 4교시 마치는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허리 펴고 바른 자세로!”
“선생님! 우리는 언제 밥 먹으러 가요?”
“수업이 끝나야 가지.”
수업이 끝나야 급식을 먹으러 갈 텐데 아이들은 뿔난 송아지처럼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배고파요.”
“선생님 당 떨어져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부터 당 떨어진다니 상아가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직 팔팔한 것들이 늙은 선생님 앞에서…….”
아이들이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니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상아가 책을 덮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손 씻고 번호 순대로 서세요.”
아이들을 인솔해 급식실로 내려갔다. 전교생이 급식실을 이용하다 보니, 아무리 큰 급식소라도 한 번에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년별로 배식 시간을 달리해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피이…… 우리 반이 오늘 1등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 내일은 더 빨리 내려와요. 네?”
상아는 고등학교 때 점심을 조금이라도 일찍 먹으려고 ‘1초, 2초’를 세고 있었던 자신이 기억났다. 그리고 종이 치면 전속력으로 내달렸던 그 걸음도, 친구들의 그 웃음소리도 기억의 수면 위에 솟아올랐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급식은 그리 맛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밥을 먹고 나서는 항상 매점에 들러 빵이며 라면을 사 먹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게 어디로 다 들어갔을까? 라고 감탄을 마지않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도 다 추억이 되니 ‘학창시절은 참 좋은 때구나’ 싶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빛나는 때의 아이들을 보기 위해, 무엇이든 꿈꾸고 바라는 그 마음이 눈이 시리게 아름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내일은 1등으로 밥 먹자.”
“와아아아아.”
이 별것도 아닌 한마디에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상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남은 수업을 마치고는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주말에 뭘 할 건지 이야기하면서 상아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교실을 뛰어 나갔다.
상아도 남은 잡무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주말 동안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밀린 드라마 복습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걸음이 더 빨라졌다. 오피스텔에 도착해 입구로 들어서는데 경비 아저씨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1004호 아가씨, 이제 퇴근하는 거야?”
“네, 지금 퇴근해요.”
“일찍 퇴근했구만, 어서 들어가 봐.”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저씨.”
아저씨와 잠시 인사를 나눈 상아는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더 빨리해서 걸어가는데 뒤통수 쪽으로 아저씨의 외침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빨리 걸으면 남자들이 말을 걸어 보고 싶어도 못 따라와!!”
아,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남자가 없었구나! 아니지, 그 변호사 있잖아. 내가 뛸 때마다 뒤에서 쫓아왔었지.
상아의 머릿속에 그의 반질반질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내 머리를 흔들고는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현관에 들어선 그녀는 아무렇게 힐을 벗어 던지고는 순식간에 추리닝을 꿰어 입었다. 그러고는 냉장고에 있는 맥주와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서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이제 깁스 님을 영접할 시간이다. 녹화된 미드를 선택하고 시청하려 리모컨을 누르는 순간, 전화기가 울렸다.
마치 며칠을 굶은 상태에서 급하게 라면을 다 끓이고 한 입 넣으려는 순간 방해를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
“뭐야.”
상아는 발신자에 뜨는 이름을 보고 재빠르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 상아 씨?
선이의 남편 현재다. 선이야 기침만 해도 전화를 하지만 현재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웬만하면 전화를 하지 않는다. 거기다 장모님이라면서 놀리는 게 일반적인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보다.
“네, 선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그게, 선이가 열이 심한데 병원에 갔다 올 동안 쌍둥이 잠시만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할아버지랑 어머님은 어디 가셨어요?”
― 네, 지방에 가셨습니다. 집사람은 혼자서 병원 갔다 온다고 저보고 얘들 보고 있어라는데 걱정이 돼서…….
“알겠어요. 손자들 장모가 봐야지 누가 봐요.”
― 감사합니다.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한 삼십 분 후면 도착할 것 같아요.
전화를 끊자마자 상아는 거실을 둘러보고 빛의 속도로 치우기 시작했다. 널려 있던 수건이며 옷들은 전부 세탁기에 집어넣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식탁에 널린 과자봉지, 아이스크림통,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맥반석 계란의 껍질까지 전부 쓰레기통으로 직행시키고 나서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깨끗이 헹궈서는 정리하고 허리를 톡톡 두드렸다.
얼추 삼십 분이 지난 것 같아 서둘러 밑으로 내려갔다. 마침 현재의 외제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현재가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부탁할 데가 없어서요.”
“괜찮아요. 선이가 많이 아픈가 봐요?”
“네, 열이 많이 나는데 미련하게.”
며칠 부산에 출장을 갔다 왔더니 안방 침대에서 열이 올라 앓고 있는 하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고 현재가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선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의 말투에 다 드러나고 있었다.
결혼한 지 좀 지났고 아이들도 태어났지만 현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의 아내인가 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소울메이트를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현재와 선이는 서로의 영혼에 꼭 맞는 짝을 찾아내었다. 친구가 조금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차 안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시트에 앉아 창문 밖으로 상아를 알아보고 아이들이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상아가 아이들을 반겼다.
“린이, 빈이 잘 있었어?”
쌍둥이들이 상아를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현재가 차 트렁크에서 유모차를 꺼내 아이들을 앉혔다. 그리고 상아에게 당부했다.
“애들이 많이 칭얼거릴 겁니다. 그럼 유모차에 태워서 산책하면 바로 잠잠해집니다.”
“걱정 마세요. 제 직업이 애들 가르치는 건데, 이 정도쯤이야.”
상아가 괜찮다며 가 보라고 선이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쌍둥이들을 두고 가는 게 맘에 안 내키는지 머뭇거리는 선이를 현재가 억지로 끌어다가 차에 태웠다. 아직은 엄마, 아빠가 사라진 것을 눈치를 못 챘는지 방긋방긋 웃는 아이들을 두고 선이를 태운 현재의 차는 쌩하고 부리나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