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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한여름 날의 찐득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기분마저도 찝찝하게 만드는 습윤한 공기가 한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폐부 깊숙이 스미자, 이윽고 탁한 호흡으로 내뱉어졌다. 처량하게 내리는 빗줄기만큼이나 묵직한 습기는 어느새 축축이 빗물에 젖어 드는 어깨마저도 힘없이 아래로 처지게 만들었다.
강율은 잠시 걸음을 멈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시선을 던졌다. 넓은 강가에 자리한 도심 속 공원은 낮이건 밤이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나 자전거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매김하면서 공원을 이용하는 인구는 배로 늘어났다.
그로 인해 사건 사고는 늘 끊이지 않고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살인 사건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버젓이 가장 많은 인구가 드나드는 공원 중심에서 말이다.
복잡한 감정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따라, 시선이 멈춘 곳은 늘 봐 오던 익숙한 풍경에서였다. 네모난 모양으로 쳐진 노란색 폴리스 라인 안으로 하얀 방진복을 갖춰 입은 수사관 셋이 연신 한곳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고 있었다. 뒤로 자리한 한가로운 강가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라인 밖으론 알록달록 색색의 옷들을 입고 다들 심각한 얼굴로 수첩에 뭘 적어 넣으며 자신들끼리 토론을 벌여 대는 형사들 열댓 명이 자리했고, 그들을 신기한 눈과 경악에 찬 얼굴로 바라보는 시민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순간 밀려드는 저릿한 통증에 눈을 질끈 감은 그의 잇새로 나른한 신음이 흘렀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심란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하나의 존재 때문에 편두통이 오고 있었다. 비록 숨은 끊어졌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을 그 존재가, 지금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모두를 뜻 모를 불안에 잠기게 하고 있었다.
검시관과 형사들은 단서를 찾으려 그녀에게 무참히도 많은 난도질을 해 댈 것이다. 당연히 여론은 그들을 향해 용의자조차 색출해 내지 못하는 무력함을 꼬집으며 불만을 터트릴 테고.
애당초 이들에게 하루아침에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생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 따위는 사치였다. 어차피 각자의 이기심에 비비며 살아가는 세상이었으니까. 그저 서로를 향해 비난을 퍼부어 대는 것에만 열을 올릴 터였다.
그래서 서글픈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어 서글픔도 많았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대우마저 박탈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풀밭에 누워 있는 여자처럼, 연쇄살인의 피해자는 사람이었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속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도구, 서로를 헐뜯고 공격하기 위한 도구, 개인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
궁지에 몰린 인간만큼 적나라한 것도 없다. 그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아무 감정 없이 그저 자신이 겪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차가운 표정이, 이기심이 무서웠다.
누가 살인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상황이 매일매일 반복되고 있다. 저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살인자는 과연 어떤 무기를 들고 있을까? 망연한 눈으로 뒤엉켜 모여 있는 사람들을 훑는 강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나직한 한숨이 흐르는 얼굴을 마른세수하며, 무력감을 버텨 낸 발걸음이 풀숲으로 향했다. 짙은 안개 때문인지 마치 회색의 지옥 불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답답하고 숨쉬기조차 불가능한 지독한 갈증이 온몸을 휘어 감았다.
“뭐, 좀 발견된 거 있어?”
노란색의 폴리스 라인 밑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강율이 매끈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질문을 받은 신입 형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작은 눈만 바삐 굴릴 뿐이었다.
“어……. 저, 그, 그러니까……. 죄, 죄송! 우웁!”
기어이 속에서 치미는 욕지기를 버티지 못한 그는 황급한 발걸음보다 먼저 쏟아져 나오는 토사물에 어쩔 줄 몰라, 식은땀만 흘려 댔다. 그런 그를 뒤에서 마뜩잖은 눈으로 흘겨보던 희락이 강율에게 다가오며 다른 형사에게 데리고 갈 것을 손짓했다.
“야, 얘 좀 데리고 가라. 증거물 다 훼손되겠다.”
방금 전의 험악한 얼굴과는 달리 이내 강율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이던 희락은 난감함에 일그러진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벅벅 긁으며 신음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강율아……. 이거 큰일이다.”
“뭐가?”
“그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어차피 알게 될 거 속 시원히 좀 말해 봐.”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인 거 같다.”
“뭐?”
“십 년 전, 그림자 연쇄 살인 사건. 이번엔 진범이 나타난 것 같다.”
희락의 말을 들은 강율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이번엔 단순한 모방 범죄가 아니란 거야?”
“너도 지금 사체 상태를 보면 알겠지만 수법이 너무 동일해. 손발을 리본으로 포박한 거 하며 치아도 전부 뽑혀 있고. 아, 손톱 발톱 또한 찾을 수가 없어. 이 주변 일대를 수색하고는 있지만 발견 가능성도 희박하고.”
“그 정도의 모방 범죄는 늘 있어 왔어.”
“알아. 하지만 빗속에 버려진 거라 이미 우리가 확보 가능한 증거는 전부 씻겨 내려가고 없는 상태야. 더구나 사체에 아무런 흔적이 없어. 입술에 번진 립스틱과 손목 발목에 있는 긴박의 흔적 말고는 아무것도.”
강율은 잠시 희락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검시관들은 뭐래?”
“우리 의견과 같아. 우리도 처음엔 설마 했는데 국과수 쪽에서 먼저 의견이 나왔어. 부검을 해 봐야 정확하겠지만 육안상으론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어디선가 둥둥둥…… 소리 없는 메아리가 발끝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처음 초동 수사의 미비했던 태도 탓에 지금까지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그’가 나타났다. 이제야 맨 처음 형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이자 목표가, 떠들썩하게 언론사별 1면에 대서특필될 터였다.
검은 그림자의 등장.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지고 답답했던 마음속 갈증이 풀려 간다. 베일에 감춰졌던 ‘그’가 나타난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형사로서의 삶이 그렇게 갑갑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여실이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궁극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차갑게 식어 버린 여인의 사체를 바라보는 얼굴에 언뜻 결연의 빛이 스쳤다.
□ ◆ □
아침부터 우중충한 날씨 탓에 어느덧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간임에도 밖은 어두웠다. 세상의 모든 색은 오로지 회색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밖은 한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고즈넉했다.
아무런 의지도, 목표도, 그럴 만한 가치도 남아 있지 않은 종이 인형과 닮아 있는 도헌은 무감각한 얼굴로 연신 창밖에 머무는 시선에 고개를 따라 움직였다. 그저 자꾸만 머릿속을 메워 드는 상념에 자각하지 못한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온통 흰색의 공간 때문인지 등 뒤로 풍겨 오는 분위기는 사뭇 살을 에는 얼음장보다 더 날카로웠다.
흰색의 벽과 천장, 그리고 흰색의 대리석 바닥. 어찌 보면 세련된 이미지의 공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호색을 띠듯 그 안의 모든 집기와 가구들조차 흰색의 것들이라 이 공간에 처음 발을 들인 사람들은 모두들 특유의 기이한 분위기에 질려 버리곤 했다.
작가 관리 차원에서 직접 계약서를 들고 찾아온 출판사 직원이 거실 바닥에 흘리고 간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들고 항의 전화를 하던 도헌의 모습은 흡사 광적이기까지 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과도한 결벽증도, 정리벽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모든 흔적들에 집요한 집착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김나리’라는 존재의 증발이 가져온 커다란 후유증이었지만, 아직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도헌은 무심한 눈으로 하얀 온기가 피어오르던 커피 잔을 바라봤다. 손에 들린 커피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십 년 전, 싸늘히 사라져 간 나리의 온기를 닮은 잔을 바라보고 있으니 온몸에 소름이 이는 것만 같았다. 곁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현재의 외로움만큼이나 시리고 아팠다.
그녀를 무자비한 괴물의 손에 잃고 단 하루도 제정신으로 살았던 적이 없었다. 늘 수면제를 먹어야 쪽잠이라도 잘 수 있었고, 주변의 흔적을 잘 볼 수 있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흰색으로 바꿔 놓는 습관 또한 날이 갈수록 강박증에 가까워져 갔다.
그럴 때마다 하나둘…… 그나마 남아 있던 지인들도 떠나고, 이제는 누가 죽은 자이고 산 자인지 구분이 서지 않게 자신을 조그만 새장에 가두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덧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뿐인 연인 나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갈수록, 그는 더욱더 십 년 전의 그때로 되돌아가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이어 갔다.
그때였다.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어지러운 상념들을 부수며 소란스럽게 울어 댔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휴대전화에서 밝은 빛이 퍼지며 드릴로 박아 대는 진동 소리까지 더해지자 도헌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박강율’이란 이름이 액정에 둥둥 떠오르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내 마뜩잖은 기분을 떨쳐 낸 얼굴이 아까완 달리 조금은 편안해졌다.
“어. 형.”
― 작업하고 있었냐?
“아니. 잠깐 쉬고 있었어. 무슨 일이야?”
― 오늘 시간 좀 내라.
“전화상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야?”
― 좀 복잡한 사건이 터졌다. 이번에는 내 느낌도 달라.
수화기 너머로 간간이 들리는 강율의 깊은 숨소리에 도헌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엔, 모방 범죄가 아니란 거야?”
― 응.
“알겠어. 이따 저녁에 잠깐 봐.”
끊어진 전화를 복잡한 눈으로 훑던 그는 이내 냉장고로 빠르게 향했다. 혼자 생활하는 공간을 작업실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가정집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반쯤 열린 문을 벗어나자 이내 널따란 거실이 나왔다. 복도식으로 이뤄진 그곳을 지나쳐 싱크대와 식탁이 놓인 식당에 이르자 흰색뿐인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의 냉장고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헌은 잠시 그 앞에 서서 혼란에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쫄 거 없어. 십 년 만에 나타났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죽어 나가겠지. 모방 범죄든 그림자가 저질렀든, 나리처럼…….
나리를 떠올리자 또다시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들어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너무 거친 몸짓에 벌컥 열려 버린 냉장고가 쿠웅 소리를 내며 요란스레 진동했다. 마치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에 깨어진 평온처럼 주변의 고요가 삽시간에 전율하는 것 같았다.
도헌은 차가운 기운과 함께, 텅 비어 있는 내부에 시선을 던졌다. 안을 살펴볼 것도 없이 유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생수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벌컥벌컥. 관자놀이가 뻐근해질 정도로 차가운 냉수 탓에,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조금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찰나의 평정도 잠시였다. 긴 복도를 지나 서둘러 책상으로 향한 발걸음은 서랍을 뒤적이며 빠르게 황색 파일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두 개의 길고 넓은 책상을 붙여 모니터 두 대를 놓고 남은 공간은 전부 작은 책꽂이를 두어 각종 자료집을 정리해 놓은 곳에, 남은 자리라곤 태블릿 옆의 세 뼘 정도의 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법의학 서적들로 그득해 빈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하지만 용케도 여분의 틈 사이 위로 간략한 라벨링이 전부인 서류철들을 쏙쏙 얹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책상 밑 열쇠로 걸어 잠근 서랍의 첫 번째 칸을 전부 들어내도, 뒤이어 두 번째 칸을 비워 내도 원하는 자료는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로 인해 도헌의 조급증은 점점 중증을 넘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내 중요 파일을 보관하는 서랍 여섯 개 중 다섯 개를 모두 바닥에 쏟아 놓고는 마지막 남은 서랍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도대체 그 전화가 뭐라고. 냉철하기로는 전국 톱을 달리는 자신을 어쩌면 이렇게 멍청하게 만들어 놓는지 당최 모를 일이었다. 분명 한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왜 지금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것보다 어려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늘 빠릿빠릿하던 몸짓은 오늘따라 더디고 굼떠 속이 터질 지경이기도 했고.
정작 본인은 이런 다급한 모습을 모르고 있겠지만, 그를 마주하고 있는 진수는 달랐다. 도헌의 모습에 놀라 그저 동그란 눈을 들어 그를 직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작가님. 뭐 하세요?”
“자료 찾아.”
“세이브 콘티까지 전부 끝난 마당에 갑자기 무슨 자료요?”
진수의 물음에 도헌은 짜증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봤다.
“자료에 이름이라도 붙었냐? 뭔 말이 많아. 신경 꺼.”
“그래도 명색이 어시인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죠.”
거들먹거리는 대답에 도헌은 서랍을 향해 숙였던 허리를 다시 들어 차가운 눈초리로 진수를 직시했다.
“지난달부터 이제 네 이름도 올라간다 이거냐?”
“그렇죠. 이제 저도 어엿한 프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프로답게 원고에나 신경 써. 너, 채색 한 번만 더 그따위로 하면 당장에 잘라 버릴 거야.”
도헌의 으름장에 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만.”
황당한 얼굴로 진수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던 도헌은 한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숨을 골랐다.
“하! 문제가 없다? 그럼 지난주 연재분에 주인공이 입고 있던 옷, 컷마다 디자인이 전부 달라지는데 옷 색깔은 그대로인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내가 웹하드에 올리기 전에 한 번 더 검토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네가 무서워 벌벌 떠는 악플이 백만 개는 달렸을 거다.”
“그, 그거야. 디자인은 달라도 옷 색깔은 똑같을 수도 있는 거죠.”
당황함에 말을 더듬는 진수를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보던 도헌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너랑 입씨름해서 뭐하겠냐. 하지만 한 가지만 확실히 해 두자. 한 번만 더 클럽 가느라 일 소홀히 하면 정말 아웃이야.”
“혀, 혀엉. 히잉. 그렇게 매서운 눈초리는 너무 무서운데…….”
서랍을 향해 허리를 숙였던 도헌은 진수의 울먹거림에 미간을 구기며 다시금 허리를 곧게 폈다.
“형이 아니고 작가님. 이것도 다시 한 번 실수하면 얄짤없다.”
경고하듯 낮게 읊조리는 그의 귓가로 날카로운 초인종이 울렸다. 딱히 택배가 올 것도 없고, 손님이 오기로 한 것도 아니었던지라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한 손길은 책상 위를 가득 메운 서류철들로 향했다.
애당초 자신과 깊은 관련이 없는 일엔 관심이 없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시간이 없었다. 강율과의 전화가 온 신경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내면을 알 길이 없던 진수는 비죽 튀어나온 입술을 달싹이며 가늘게 뜬 눈으로 도헌을 흘겨봤다.
“하여간 차가운 건 알아줘야 해요. 누가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관심 없다.”
“제가 나가 봐요?”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얌전히 원고 채색이나 해라.”
가지런하게 손안에서 정리되는 황색 파일에 시선을 고정한 입에서 무미건조한 대답이 흘렀다. ‘피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모니터를 향해 돌아앉은 진수를 슬쩍 곁눈질한 그의 귓가로 또다시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1.
한여름 날의 찐득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기분마저도 찝찝하게 만드는 습윤한 공기가 한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폐부 깊숙이 스미자, 이윽고 탁한 호흡으로 내뱉어졌다. 처량하게 내리는 빗줄기만큼이나 묵직한 습기는 어느새 축축이 빗물에 젖어 드는 어깨마저도 힘없이 아래로 처지게 만들었다.
강율은 잠시 걸음을 멈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시선을 던졌다. 넓은 강가에 자리한 도심 속 공원은 낮이건 밤이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나 자전거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매김하면서 공원을 이용하는 인구는 배로 늘어났다.
그로 인해 사건 사고는 늘 끊이지 않고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살인 사건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버젓이 가장 많은 인구가 드나드는 공원 중심에서 말이다.
복잡한 감정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따라, 시선이 멈춘 곳은 늘 봐 오던 익숙한 풍경에서였다. 네모난 모양으로 쳐진 노란색 폴리스 라인 안으로 하얀 방진복을 갖춰 입은 수사관 셋이 연신 한곳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고 있었다. 뒤로 자리한 한가로운 강가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라인 밖으론 알록달록 색색의 옷들을 입고 다들 심각한 얼굴로 수첩에 뭘 적어 넣으며 자신들끼리 토론을 벌여 대는 형사들 열댓 명이 자리했고, 그들을 신기한 눈과 경악에 찬 얼굴로 바라보는 시민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순간 밀려드는 저릿한 통증에 눈을 질끈 감은 그의 잇새로 나른한 신음이 흘렀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심란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하나의 존재 때문에 편두통이 오고 있었다. 비록 숨은 끊어졌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을 그 존재가, 지금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모두를 뜻 모를 불안에 잠기게 하고 있었다.
검시관과 형사들은 단서를 찾으려 그녀에게 무참히도 많은 난도질을 해 댈 것이다. 당연히 여론은 그들을 향해 용의자조차 색출해 내지 못하는 무력함을 꼬집으며 불만을 터트릴 테고.
애당초 이들에게 하루아침에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생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 따위는 사치였다. 어차피 각자의 이기심에 비비며 살아가는 세상이었으니까. 그저 서로를 향해 비난을 퍼부어 대는 것에만 열을 올릴 터였다.
그래서 서글픈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어 서글픔도 많았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대우마저 박탈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풀밭에 누워 있는 여자처럼, 연쇄살인의 피해자는 사람이었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속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도구, 서로를 헐뜯고 공격하기 위한 도구, 개인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
궁지에 몰린 인간만큼 적나라한 것도 없다. 그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아무 감정 없이 그저 자신이 겪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차가운 표정이, 이기심이 무서웠다.
누가 살인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상황이 매일매일 반복되고 있다. 저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살인자는 과연 어떤 무기를 들고 있을까? 망연한 눈으로 뒤엉켜 모여 있는 사람들을 훑는 강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나직한 한숨이 흐르는 얼굴을 마른세수하며, 무력감을 버텨 낸 발걸음이 풀숲으로 향했다. 짙은 안개 때문인지 마치 회색의 지옥 불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답답하고 숨쉬기조차 불가능한 지독한 갈증이 온몸을 휘어 감았다.
“뭐, 좀 발견된 거 있어?”
노란색의 폴리스 라인 밑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강율이 매끈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질문을 받은 신입 형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작은 눈만 바삐 굴릴 뿐이었다.
“어……. 저, 그, 그러니까……. 죄, 죄송! 우웁!”
기어이 속에서 치미는 욕지기를 버티지 못한 그는 황급한 발걸음보다 먼저 쏟아져 나오는 토사물에 어쩔 줄 몰라, 식은땀만 흘려 댔다. 그런 그를 뒤에서 마뜩잖은 눈으로 흘겨보던 희락이 강율에게 다가오며 다른 형사에게 데리고 갈 것을 손짓했다.
“야, 얘 좀 데리고 가라. 증거물 다 훼손되겠다.”
방금 전의 험악한 얼굴과는 달리 이내 강율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이던 희락은 난감함에 일그러진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벅벅 긁으며 신음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강율아……. 이거 큰일이다.”
“뭐가?”
“그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어차피 알게 될 거 속 시원히 좀 말해 봐.”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인 거 같다.”
“뭐?”
“십 년 전, 그림자 연쇄 살인 사건. 이번엔 진범이 나타난 것 같다.”
희락의 말을 들은 강율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이번엔 단순한 모방 범죄가 아니란 거야?”
“너도 지금 사체 상태를 보면 알겠지만 수법이 너무 동일해. 손발을 리본으로 포박한 거 하며 치아도 전부 뽑혀 있고. 아, 손톱 발톱 또한 찾을 수가 없어. 이 주변 일대를 수색하고는 있지만 발견 가능성도 희박하고.”
“그 정도의 모방 범죄는 늘 있어 왔어.”
“알아. 하지만 빗속에 버려진 거라 이미 우리가 확보 가능한 증거는 전부 씻겨 내려가고 없는 상태야. 더구나 사체에 아무런 흔적이 없어. 입술에 번진 립스틱과 손목 발목에 있는 긴박의 흔적 말고는 아무것도.”
강율은 잠시 희락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검시관들은 뭐래?”
“우리 의견과 같아. 우리도 처음엔 설마 했는데 국과수 쪽에서 먼저 의견이 나왔어. 부검을 해 봐야 정확하겠지만 육안상으론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어디선가 둥둥둥…… 소리 없는 메아리가 발끝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처음 초동 수사의 미비했던 태도 탓에 지금까지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그’가 나타났다. 이제야 맨 처음 형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이자 목표가, 떠들썩하게 언론사별 1면에 대서특필될 터였다.
검은 그림자의 등장.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지고 답답했던 마음속 갈증이 풀려 간다. 베일에 감춰졌던 ‘그’가 나타난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형사로서의 삶이 그렇게 갑갑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여실이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궁극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차갑게 식어 버린 여인의 사체를 바라보는 얼굴에 언뜻 결연의 빛이 스쳤다.
□ ◆ □
아침부터 우중충한 날씨 탓에 어느덧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간임에도 밖은 어두웠다. 세상의 모든 색은 오로지 회색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밖은 한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고즈넉했다.
아무런 의지도, 목표도, 그럴 만한 가치도 남아 있지 않은 종이 인형과 닮아 있는 도헌은 무감각한 얼굴로 연신 창밖에 머무는 시선에 고개를 따라 움직였다. 그저 자꾸만 머릿속을 메워 드는 상념에 자각하지 못한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온통 흰색의 공간 때문인지 등 뒤로 풍겨 오는 분위기는 사뭇 살을 에는 얼음장보다 더 날카로웠다.
흰색의 벽과 천장, 그리고 흰색의 대리석 바닥. 어찌 보면 세련된 이미지의 공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호색을 띠듯 그 안의 모든 집기와 가구들조차 흰색의 것들이라 이 공간에 처음 발을 들인 사람들은 모두들 특유의 기이한 분위기에 질려 버리곤 했다.
작가 관리 차원에서 직접 계약서를 들고 찾아온 출판사 직원이 거실 바닥에 흘리고 간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들고 항의 전화를 하던 도헌의 모습은 흡사 광적이기까지 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과도한 결벽증도, 정리벽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모든 흔적들에 집요한 집착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김나리’라는 존재의 증발이 가져온 커다란 후유증이었지만, 아직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도헌은 무심한 눈으로 하얀 온기가 피어오르던 커피 잔을 바라봤다. 손에 들린 커피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십 년 전, 싸늘히 사라져 간 나리의 온기를 닮은 잔을 바라보고 있으니 온몸에 소름이 이는 것만 같았다. 곁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현재의 외로움만큼이나 시리고 아팠다.
그녀를 무자비한 괴물의 손에 잃고 단 하루도 제정신으로 살았던 적이 없었다. 늘 수면제를 먹어야 쪽잠이라도 잘 수 있었고, 주변의 흔적을 잘 볼 수 있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흰색으로 바꿔 놓는 습관 또한 날이 갈수록 강박증에 가까워져 갔다.
그럴 때마다 하나둘…… 그나마 남아 있던 지인들도 떠나고, 이제는 누가 죽은 자이고 산 자인지 구분이 서지 않게 자신을 조그만 새장에 가두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덧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뿐인 연인 나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갈수록, 그는 더욱더 십 년 전의 그때로 되돌아가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이어 갔다.
그때였다.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어지러운 상념들을 부수며 소란스럽게 울어 댔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휴대전화에서 밝은 빛이 퍼지며 드릴로 박아 대는 진동 소리까지 더해지자 도헌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박강율’이란 이름이 액정에 둥둥 떠오르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내 마뜩잖은 기분을 떨쳐 낸 얼굴이 아까완 달리 조금은 편안해졌다.
“어. 형.”
― 작업하고 있었냐?
“아니. 잠깐 쉬고 있었어. 무슨 일이야?”
― 오늘 시간 좀 내라.
“전화상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야?”
― 좀 복잡한 사건이 터졌다. 이번에는 내 느낌도 달라.
수화기 너머로 간간이 들리는 강율의 깊은 숨소리에 도헌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엔, 모방 범죄가 아니란 거야?”
― 응.
“알겠어. 이따 저녁에 잠깐 봐.”
끊어진 전화를 복잡한 눈으로 훑던 그는 이내 냉장고로 빠르게 향했다. 혼자 생활하는 공간을 작업실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가정집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반쯤 열린 문을 벗어나자 이내 널따란 거실이 나왔다. 복도식으로 이뤄진 그곳을 지나쳐 싱크대와 식탁이 놓인 식당에 이르자 흰색뿐인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의 냉장고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헌은 잠시 그 앞에 서서 혼란에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쫄 거 없어. 십 년 만에 나타났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죽어 나가겠지. 모방 범죄든 그림자가 저질렀든, 나리처럼…….
나리를 떠올리자 또다시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들어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너무 거친 몸짓에 벌컥 열려 버린 냉장고가 쿠웅 소리를 내며 요란스레 진동했다. 마치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에 깨어진 평온처럼 주변의 고요가 삽시간에 전율하는 것 같았다.
도헌은 차가운 기운과 함께, 텅 비어 있는 내부에 시선을 던졌다. 안을 살펴볼 것도 없이 유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생수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벌컥벌컥. 관자놀이가 뻐근해질 정도로 차가운 냉수 탓에,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조금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찰나의 평정도 잠시였다. 긴 복도를 지나 서둘러 책상으로 향한 발걸음은 서랍을 뒤적이며 빠르게 황색 파일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두 개의 길고 넓은 책상을 붙여 모니터 두 대를 놓고 남은 공간은 전부 작은 책꽂이를 두어 각종 자료집을 정리해 놓은 곳에, 남은 자리라곤 태블릿 옆의 세 뼘 정도의 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법의학 서적들로 그득해 빈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하지만 용케도 여분의 틈 사이 위로 간략한 라벨링이 전부인 서류철들을 쏙쏙 얹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책상 밑 열쇠로 걸어 잠근 서랍의 첫 번째 칸을 전부 들어내도, 뒤이어 두 번째 칸을 비워 내도 원하는 자료는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로 인해 도헌의 조급증은 점점 중증을 넘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내 중요 파일을 보관하는 서랍 여섯 개 중 다섯 개를 모두 바닥에 쏟아 놓고는 마지막 남은 서랍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도대체 그 전화가 뭐라고. 냉철하기로는 전국 톱을 달리는 자신을 어쩌면 이렇게 멍청하게 만들어 놓는지 당최 모를 일이었다. 분명 한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왜 지금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것보다 어려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늘 빠릿빠릿하던 몸짓은 오늘따라 더디고 굼떠 속이 터질 지경이기도 했고.
정작 본인은 이런 다급한 모습을 모르고 있겠지만, 그를 마주하고 있는 진수는 달랐다. 도헌의 모습에 놀라 그저 동그란 눈을 들어 그를 직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작가님. 뭐 하세요?”
“자료 찾아.”
“세이브 콘티까지 전부 끝난 마당에 갑자기 무슨 자료요?”
진수의 물음에 도헌은 짜증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봤다.
“자료에 이름이라도 붙었냐? 뭔 말이 많아. 신경 꺼.”
“그래도 명색이 어시인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죠.”
거들먹거리는 대답에 도헌은 서랍을 향해 숙였던 허리를 다시 들어 차가운 눈초리로 진수를 직시했다.
“지난달부터 이제 네 이름도 올라간다 이거냐?”
“그렇죠. 이제 저도 어엿한 프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프로답게 원고에나 신경 써. 너, 채색 한 번만 더 그따위로 하면 당장에 잘라 버릴 거야.”
도헌의 으름장에 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만.”
황당한 얼굴로 진수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던 도헌은 한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숨을 골랐다.
“하! 문제가 없다? 그럼 지난주 연재분에 주인공이 입고 있던 옷, 컷마다 디자인이 전부 달라지는데 옷 색깔은 그대로인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내가 웹하드에 올리기 전에 한 번 더 검토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네가 무서워 벌벌 떠는 악플이 백만 개는 달렸을 거다.”
“그, 그거야. 디자인은 달라도 옷 색깔은 똑같을 수도 있는 거죠.”
당황함에 말을 더듬는 진수를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보던 도헌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너랑 입씨름해서 뭐하겠냐. 하지만 한 가지만 확실히 해 두자. 한 번만 더 클럽 가느라 일 소홀히 하면 정말 아웃이야.”
“혀, 혀엉. 히잉. 그렇게 매서운 눈초리는 너무 무서운데…….”
서랍을 향해 허리를 숙였던 도헌은 진수의 울먹거림에 미간을 구기며 다시금 허리를 곧게 폈다.
“형이 아니고 작가님. 이것도 다시 한 번 실수하면 얄짤없다.”
경고하듯 낮게 읊조리는 그의 귓가로 날카로운 초인종이 울렸다. 딱히 택배가 올 것도 없고, 손님이 오기로 한 것도 아니었던지라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한 손길은 책상 위를 가득 메운 서류철들로 향했다.
애당초 자신과 깊은 관련이 없는 일엔 관심이 없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시간이 없었다. 강율과의 전화가 온 신경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내면을 알 길이 없던 진수는 비죽 튀어나온 입술을 달싹이며 가늘게 뜬 눈으로 도헌을 흘겨봤다.
“하여간 차가운 건 알아줘야 해요. 누가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관심 없다.”
“제가 나가 봐요?”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얌전히 원고 채색이나 해라.”
가지런하게 손안에서 정리되는 황색 파일에 시선을 고정한 입에서 무미건조한 대답이 흘렀다. ‘피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모니터를 향해 돌아앉은 진수를 슬쩍 곁눈질한 그의 귓가로 또다시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