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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처음엔 한 번만 울리고 잠잠했던 그 소리는 이윽고 온 집 안을 뒤흔들 듯 거세게 요동치며 과격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 바람에 귀에서 먹먹한 통증을 느끼던 도헌은 미간을 구기며 입으로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도저히 현관으로 발걸음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지독한 문밖의 존재에게 짙은 살의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불퉁하게 입을 웅얼거렸다. 귀찮음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거실화를 직직 끌며 아이보리색의 4인용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거실을 지나쳐 현관으로 이어진 복도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물음을 듣지 못한 것인지, 시끄럽게 울려 대는 여자의 고함 소리가 부서질 듯 흔들리는 현관문과 함께 귓가로 파고들었다.
“작가님! 작가님!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있더라도 원고는 끝마치시고 생기셔야 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세요? 작가님! 혹시 쓰러지신 건 아니죠? 쓰러지셨더라도 원고는 끝내신 거죠? 작가님! 이러면 안 돼요! 작가님 원고에 제 목숨이 달렸다고요! 이번에도 마감 펑크 내시면 제 밥줄 끊긴다고요! 그건 알고 계시는 거죠? 뭐라 말 좀 해 보세요! 말하기 곤란하면 공이라도 문을 향해 던져 보시든가요! 제발요! 저 진짜 죽을 만큼 간절해요!”
이 여자가 진짜.
신경질적으로 벌컥 열려 버린 문 탓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 바람에 당장에라도 터질 듯 요동치던 귓가가 고요해지며 반쯤 열린 문틈으로 가느다란 여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적잖이 놀랐는지 두 눈만 껌뻑이는 여자의 얼굴은 어딘지 멍해 보였다. 하지만 멍청한 표정은 문고리를 잡고 있는 도헌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십 년 만에 마주한 얼굴이었다.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며 이젠 눈물도 말라 버린…… 꿈속에서조차 제대로 보여 주지 않던 얼굴이 바로 지금, 눈앞에 되살아났다.
뚝뚝. 호흡마저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잇새로 남자의 짙은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도헌의 입에서 휘몰아쳤다.
“……나……리야…….”
□ ◆ □
우중충한 회색 하늘은 사람의 기분까지 무채색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유진에게만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서인지 그녀는 비가 오는 날을 치 떨리게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런 성향에 플러스 요인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징크스였다. 늘 이런 우울한 날씨엔 어김없이 하루 일과가 꼬여 버리곤 했으니까.
아침부터 책상에 바짝 엎드려 팀장의 눈치만을 살피던 유진은 애꿎은 하늘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출근하는 내내 ‘조심하자.’를 입에 달고 바쁜 걸음을 옮겼건만, 오늘따라 유독 까다롭기로 소문난 팀장의 기분이 심상치 않았다. 잔뜩 뚱하게 굳어 있는 얼굴에서 곧 피바람이 불어닥칠 거라고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션 너머로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팀장의 안색을 살피던 유진은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심기를 이토록 어지럽힌 가장 큰 원인은 자신에게 있을 것이란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탓이었다. 그리고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표독스러운 눈으로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편집 팀을 날카롭게 훑기 시작했다.
“오전 회의 시작하죠.”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팀원들의 입에서 짧은 신음을 흐르게 했다. 저마다 회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한없이 늘어졌다. 그 중심에 선 유진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힘겹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회의실이라 해 봐야 창가와 마주 서 있는 벽의 빈 공간을 불투명한 유리로 경계를 지은 곳이어서 성인 걸음으로 열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광활한 공간에 각각의 부서들이 나뉘어져 있었지만 가장 가깝고 효율성이 좋은 이곳 회의실은 출판사에서도 파워가 막강한 웹툰 팀의 전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라리 다른 층의 회의실이라면 마음의 준비가 조금은 남달랐을까.
유진은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축 처진 어깨로 코앞에 있는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계속 이어지던 발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원형의 회의 탁자에 막혀 멈췄고, 모두 팀장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으려고 눈동자를 바삐 굴려 댔다. 하지만 유진은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팀장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 먼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직원들은 그녀가 앉자마자 재빠르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팀장은 특유의 콧소리 섞인 헛기침으로 으스스한 회의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우리 팀은 가장 실적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그건 다들 아시겠죠. 그래서 더욱 사장님의 애틋한 관심을 많이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직원분들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들?”
“…….”
“…….”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팀장의 시선에도 팀원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것이 또 마뜩지 않은지 날카롭게 안경을 밀어 올리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들 아무런 대답이 없군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날짜와 기한은 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회의 분위기에 팀장인 기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대신 대답해 드리죠.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신뢰이자, 믿음이죠. 그래서 마감은 피를 토하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회사의 피해가 적어지죠.”
유진은 몸을 움찔 떨었다. 왠지 기량이 자신을 뚫어지게 직시하며 말을 내뱉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탓이었다. 하지만 오금이 저려서인지 고개를 들어 아까부터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확인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저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최대한 불쌍한 척 앉아 있어 봐도 여전히 귓가를 까랑까랑 울려 대는 기량의 목소리가 쉬이 끝나지 않을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작은 희망에 모든 걸 기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길. 이놈의 징크스.
두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읊조리는 그녀의 귓가엔 여전히 버거운 기량의 목소리가 파고들고 있었다.
“작가분들의 마감이 늦어질수록 인쇄소와의 협상도 길어지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빠져나가야 하는 게 바로 돈입니다. 여러분들이 힘겹게 일해서 회사에 이익을 남긴 바로 그 돈 말입니다. 회사의 손해가 커질수록 이곳에 몸담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임엔 분명하다 이 말입니다.”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의 표정과는 달리 기량의 얼굴은 조금 후련해 보였다. 저마다 수첩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느라 아래로 향해 있는 고개를 한 명씩 차례대로 훑는 그녀의 눈빛이 처음보단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이제 제게 어떤 말들을 해야 하는지 그 대답이 떠오르셨습니까? 여러분들의 무거운 입술을 제가 가볍게 해 드린 게 맞습니까?”
작은 한숨들이 허공에 메아리치자 조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기량은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여섯 명이 나란히 앉아 있는 회의실 내부에 시선을 던졌다.
“자, 그럼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해 보죠. 먼저 이세라 씨.”
“네.”
“지금 한창 인기가 오르고 있는 한량 작가의 ‘벗어라, 그대여’는 진행 상황이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아……. 19금인만큼 채색에도 신경을…… 신인 작가분이셔서…… 이번에는 마감일을…….”
유진은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움켜쥐었다. 분명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음에도 기량의 질문은 전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고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만 같다. 이것은, 그랬다. 팀장 특유의 사람 피 말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출판사에서도 가장 실적이 좋은 웹툰 팀은 사내에서도 관심이 높았다. 그만큼 보수도 세고, 이곳을 지원하는 직원 또한 많았다. 당연히 만화가가 꿈이었던 유진은 이곳에 지원했고 기량의 적극적인 추천에 한 번에 합격이란 달콤함을 맛봤다. 하지만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생각과는 달리 만화계는 마감일의 연속적인 소모전이 계속되는 곳이었다. 아프다, 급한 일이 생겼다, 갑자기 아이가 입원했다 등등의 핑계들로 마감을 늦추려는 작가들과의 씨름은 언제나 그녀를 힘겹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차라리 잠수를 타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독 그녀를 괴롭히는 건 작가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촉박한 마감일도 아니었다. 언제나 제일 문제가 되는 직원을 맨 마지막 질문자로 몰아넣고 서서히 피를 말려 죽이는 박기량 팀장 특유의 고약한 취미가 제일 골치라면 골칫거리였다. 더구나 당장에 잘라 버리겠다고 윽박지를 땐 저승에서 막 올라온 악마와도 같아 보였다.
유진은 고개를 힘없이 아래로 떨궜다. 하필 입사하자마자 업무에 적응할 새도 없이 가장 인기가 높다는 웹툰을 담당하게 되어 이런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리고 있음에 두 주먹 불끈 쥐고 감사를 표해야 할 듯싶었다.
눈물을 머금고 멍하니 수첩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좇던 기량이 천천히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유진 씨.”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유진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뭐. 굳이 일어나서 브리핑할 건 없고.”
기량의 미소에 머쓱해진 그녀는 멍한 표정을 애써 덤덤히 감추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기량의 입술이 위로 치켜지며 날카로운 인상을 더욱 차갑게 얼려 버렸다.
“그나저나 어서 일어나고 싶었나 봐요? 재빠르게 일어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이 시간이 싫었나 봐?”
“아뇨.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면 달리 찔리는 게 있나 보죠? 내가 보기엔 충분히 많아 보이는데.”
“…….”
뭐가 그리 좋은지 달리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유진에게 싱긋 웃어 보인 기량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까지 회의 내용 어떻게 들었나요? 다들 이번 마감은 늦지 않겠다고 하는데. 오유진 씨도 가능한 이야기겠죠?”
“아, 저…… 그게…….”
“즉답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또 딜레이되는 건가요? 지금 오유진 씨가 맡고 있는 웹툰이 모두 몇 가지죠?”
“다, 다섯 가지입니다.”
“네. 그렇죠. 그렇다면 담당하고 있는 작가는 모두 메인 작가 다섯이네요. 아, 컬러가 취약한 작가 둘 때문에 따로 컬러 팀 두 곳도 관리를 하고 있겠고. 그렇죠?”
“……네.”
“그렇다면 말입니다. 출근해서 퇴근까지 작가분들 관리에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되어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매번 마감일에 늦는 이유가 뭘까요?”
“이번 마감의 제 담당 원고는 세 가지입니다. 그중에 두 개는 마감 원고를 어제 새벽에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유진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기량은 본격적인 질문을 위해 손에 들린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신 거고요. 저희 팀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내는 작품이 바로 오유진 씨가 담당하고 있는 작품, 김도헌 작가의 ‘숨겨진 진실’이 아닙니까?”
“……네.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매번 마감일에 늦을 수가 있을까요? 도대체 작가 관리를 어떻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겁니까?”
“하지만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아서…….”
“작가가 마감 목전에 두고 증발하는 거 하루 이틀입니까? 오유진 씨의 당찬 모습에 반해 사장님께 적극 추천드려 입사를 시킨 접니다. 그렇지만 갈수록 사장님 앞에서 면이 서질 않아요.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오유진 씨의 사내에서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기만 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두 손 놓고 하늘만 바라볼 게 아니라 작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셔야죠.”
말을 하다 말고 기량이 전체 팀원들을 훑었다.
“그게 여기 앉아 있는 팀원분들이 해 주셔야 하는 일입니다. 어떻게든지 원고를 받아 오세요. 연재는 계속 올라오고 있으니 적어도 작가분들에게 별다른 지장은 없단 증거입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시간에 받아 오시길 바랍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기량의 시선이 유진에게 내리꽂혔다.
“그리고 오유진 씨. ‘숨겨진 진실’은 내일까지가 마감일인 건 아시겠죠. 앞으로 일주일의 시간을 더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원고 받아 올 자신이 없으면 앞으로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얗게 질린 유진의 얼굴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기량의 입이 쉬지 않고 달싹였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 동안 출근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저와 약속한 기간에 맞춰 원고만 가져오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비정규직 사원에서 정규직 사원으로 전환될 겁니다.”
저, 정규직? 순간 유진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남들처럼 높은 스펙이나 그렇다고 이름 있는 좋은 대학을 나온 게 아닌지라, 이런 큰 회사의 정식 사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에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없던 의욕마저 솟게 만드는 힘. 정규직.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쥔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아니 심지어 입사 확정 때보다 더 커다란 열정에 타올랐다. ‘꼭 쟁취하고 말겠다.’라는 강력한 의지 앞에 자신의 먼 미래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 꼭 원고를 두 손 가득 들고 사무실 땅을 밟겠습니다!”
달콤한 당근 앞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한 마리의 당나귀처럼 붉게 상기된 얼굴로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량의 시선을 뒤로한 채 자리로 돌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가방에 소지품을 챙기는 손길이 서글프도록 밝고 경쾌했다.
쾅쾅쾅! 손아귀에 진득이 배어 나오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차디찬 철제문을 두드리는 우악스러운 손길은 쉽게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높은 습도를 뒤로하고, 꽉꽉 들어찬 만원 버스에 몸을 실으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온 몰골은 심히 지쳐 보였지만 그 얼굴 위에 떠오른 희망은 모든 것들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꿈에 그리던 정규직이 이 문 너머에 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다. 오늘은 무사히 하루를 마치기를, 오늘은 무사히 내 책상을 지킬 수 있기를, 오늘은 무사히 내일을 기약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라 왔던가. 생각보다 비정규직이란 타이틀은 험난해서 타사의 경력이 있는 유진일지라도 쉬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늘 자신의 자리가 없어질까 노심초사, 잠 못 이루는 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그런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 조그만 문 너머에 있을 원고만 받아 낸다면 간절히 원하던 불안들과의 다디단 이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은 다시금 호흡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이 건물은 이상하게도 복도에 집으로 보이는 문이라곤 지금 눈앞의 문이 전부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철제문 이외에 문이라고는 달랑 이거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웃들에게 끼칠 피해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긴 했지만, 문제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 봐도 안에선 조그만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뭔가 불길하다. 갑자기 사색이 된 얼굴로 떨리는 손을 문에 조심스레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귀를 바짝 붙여 정말 아무도 없는 건지 확인했다.
“뭔가 이상한데?”
안에서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자, 현관문에 바짝 붙었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호, 혹시…… 서, 설마!”
왜 이 상황에서 기량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둥둥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해지며 날 선 목소리가 점점 크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적어도 작가분들에게 별다른 지장은 없단 증거입니다…… 별다른 지장은 없단…… 별다른…….’
처음엔 한 번만 울리고 잠잠했던 그 소리는 이윽고 온 집 안을 뒤흔들 듯 거세게 요동치며 과격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 바람에 귀에서 먹먹한 통증을 느끼던 도헌은 미간을 구기며 입으로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도저히 현관으로 발걸음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지독한 문밖의 존재에게 짙은 살의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불퉁하게 입을 웅얼거렸다. 귀찮음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거실화를 직직 끌며 아이보리색의 4인용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거실을 지나쳐 현관으로 이어진 복도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물음을 듣지 못한 것인지, 시끄럽게 울려 대는 여자의 고함 소리가 부서질 듯 흔들리는 현관문과 함께 귓가로 파고들었다.
“작가님! 작가님!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있더라도 원고는 끝마치시고 생기셔야 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세요? 작가님! 혹시 쓰러지신 건 아니죠? 쓰러지셨더라도 원고는 끝내신 거죠? 작가님! 이러면 안 돼요! 작가님 원고에 제 목숨이 달렸다고요! 이번에도 마감 펑크 내시면 제 밥줄 끊긴다고요! 그건 알고 계시는 거죠? 뭐라 말 좀 해 보세요! 말하기 곤란하면 공이라도 문을 향해 던져 보시든가요! 제발요! 저 진짜 죽을 만큼 간절해요!”
이 여자가 진짜.
신경질적으로 벌컥 열려 버린 문 탓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 바람에 당장에라도 터질 듯 요동치던 귓가가 고요해지며 반쯤 열린 문틈으로 가느다란 여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적잖이 놀랐는지 두 눈만 껌뻑이는 여자의 얼굴은 어딘지 멍해 보였다. 하지만 멍청한 표정은 문고리를 잡고 있는 도헌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십 년 만에 마주한 얼굴이었다.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며 이젠 눈물도 말라 버린…… 꿈속에서조차 제대로 보여 주지 않던 얼굴이 바로 지금, 눈앞에 되살아났다.
뚝뚝. 호흡마저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잇새로 남자의 짙은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도헌의 입에서 휘몰아쳤다.
“……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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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회색 하늘은 사람의 기분까지 무채색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유진에게만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서인지 그녀는 비가 오는 날을 치 떨리게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런 성향에 플러스 요인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징크스였다. 늘 이런 우울한 날씨엔 어김없이 하루 일과가 꼬여 버리곤 했으니까.
아침부터 책상에 바짝 엎드려 팀장의 눈치만을 살피던 유진은 애꿎은 하늘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출근하는 내내 ‘조심하자.’를 입에 달고 바쁜 걸음을 옮겼건만, 오늘따라 유독 까다롭기로 소문난 팀장의 기분이 심상치 않았다. 잔뜩 뚱하게 굳어 있는 얼굴에서 곧 피바람이 불어닥칠 거라고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션 너머로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팀장의 안색을 살피던 유진은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심기를 이토록 어지럽힌 가장 큰 원인은 자신에게 있을 것이란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탓이었다. 그리고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표독스러운 눈으로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편집 팀을 날카롭게 훑기 시작했다.
“오전 회의 시작하죠.”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팀원들의 입에서 짧은 신음을 흐르게 했다. 저마다 회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한없이 늘어졌다. 그 중심에 선 유진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힘겹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회의실이라 해 봐야 창가와 마주 서 있는 벽의 빈 공간을 불투명한 유리로 경계를 지은 곳이어서 성인 걸음으로 열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광활한 공간에 각각의 부서들이 나뉘어져 있었지만 가장 가깝고 효율성이 좋은 이곳 회의실은 출판사에서도 파워가 막강한 웹툰 팀의 전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라리 다른 층의 회의실이라면 마음의 준비가 조금은 남달랐을까.
유진은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축 처진 어깨로 코앞에 있는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계속 이어지던 발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원형의 회의 탁자에 막혀 멈췄고, 모두 팀장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으려고 눈동자를 바삐 굴려 댔다. 하지만 유진은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팀장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 먼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직원들은 그녀가 앉자마자 재빠르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팀장은 특유의 콧소리 섞인 헛기침으로 으스스한 회의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우리 팀은 가장 실적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그건 다들 아시겠죠. 그래서 더욱 사장님의 애틋한 관심을 많이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직원분들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들?”
“…….”
“…….”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팀장의 시선에도 팀원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것이 또 마뜩지 않은지 날카롭게 안경을 밀어 올리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들 아무런 대답이 없군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날짜와 기한은 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회의 분위기에 팀장인 기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대신 대답해 드리죠.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신뢰이자, 믿음이죠. 그래서 마감은 피를 토하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회사의 피해가 적어지죠.”
유진은 몸을 움찔 떨었다. 왠지 기량이 자신을 뚫어지게 직시하며 말을 내뱉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탓이었다. 하지만 오금이 저려서인지 고개를 들어 아까부터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확인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저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최대한 불쌍한 척 앉아 있어 봐도 여전히 귓가를 까랑까랑 울려 대는 기량의 목소리가 쉬이 끝나지 않을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작은 희망에 모든 걸 기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길. 이놈의 징크스.
두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읊조리는 그녀의 귓가엔 여전히 버거운 기량의 목소리가 파고들고 있었다.
“작가분들의 마감이 늦어질수록 인쇄소와의 협상도 길어지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빠져나가야 하는 게 바로 돈입니다. 여러분들이 힘겹게 일해서 회사에 이익을 남긴 바로 그 돈 말입니다. 회사의 손해가 커질수록 이곳에 몸담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임엔 분명하다 이 말입니다.”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의 표정과는 달리 기량의 얼굴은 조금 후련해 보였다. 저마다 수첩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느라 아래로 향해 있는 고개를 한 명씩 차례대로 훑는 그녀의 눈빛이 처음보단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이제 제게 어떤 말들을 해야 하는지 그 대답이 떠오르셨습니까? 여러분들의 무거운 입술을 제가 가볍게 해 드린 게 맞습니까?”
작은 한숨들이 허공에 메아리치자 조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기량은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여섯 명이 나란히 앉아 있는 회의실 내부에 시선을 던졌다.
“자, 그럼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해 보죠. 먼저 이세라 씨.”
“네.”
“지금 한창 인기가 오르고 있는 한량 작가의 ‘벗어라, 그대여’는 진행 상황이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아……. 19금인만큼 채색에도 신경을…… 신인 작가분이셔서…… 이번에는 마감일을…….”
유진은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움켜쥐었다. 분명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음에도 기량의 질문은 전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고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만 같다. 이것은, 그랬다. 팀장 특유의 사람 피 말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출판사에서도 가장 실적이 좋은 웹툰 팀은 사내에서도 관심이 높았다. 그만큼 보수도 세고, 이곳을 지원하는 직원 또한 많았다. 당연히 만화가가 꿈이었던 유진은 이곳에 지원했고 기량의 적극적인 추천에 한 번에 합격이란 달콤함을 맛봤다. 하지만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생각과는 달리 만화계는 마감일의 연속적인 소모전이 계속되는 곳이었다. 아프다, 급한 일이 생겼다, 갑자기 아이가 입원했다 등등의 핑계들로 마감을 늦추려는 작가들과의 씨름은 언제나 그녀를 힘겹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차라리 잠수를 타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독 그녀를 괴롭히는 건 작가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촉박한 마감일도 아니었다. 언제나 제일 문제가 되는 직원을 맨 마지막 질문자로 몰아넣고 서서히 피를 말려 죽이는 박기량 팀장 특유의 고약한 취미가 제일 골치라면 골칫거리였다. 더구나 당장에 잘라 버리겠다고 윽박지를 땐 저승에서 막 올라온 악마와도 같아 보였다.
유진은 고개를 힘없이 아래로 떨궜다. 하필 입사하자마자 업무에 적응할 새도 없이 가장 인기가 높다는 웹툰을 담당하게 되어 이런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리고 있음에 두 주먹 불끈 쥐고 감사를 표해야 할 듯싶었다.
눈물을 머금고 멍하니 수첩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좇던 기량이 천천히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유진 씨.”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유진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뭐. 굳이 일어나서 브리핑할 건 없고.”
기량의 미소에 머쓱해진 그녀는 멍한 표정을 애써 덤덤히 감추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기량의 입술이 위로 치켜지며 날카로운 인상을 더욱 차갑게 얼려 버렸다.
“그나저나 어서 일어나고 싶었나 봐요? 재빠르게 일어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이 시간이 싫었나 봐?”
“아뇨.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면 달리 찔리는 게 있나 보죠? 내가 보기엔 충분히 많아 보이는데.”
“…….”
뭐가 그리 좋은지 달리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유진에게 싱긋 웃어 보인 기량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까지 회의 내용 어떻게 들었나요? 다들 이번 마감은 늦지 않겠다고 하는데. 오유진 씨도 가능한 이야기겠죠?”
“아, 저…… 그게…….”
“즉답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또 딜레이되는 건가요? 지금 오유진 씨가 맡고 있는 웹툰이 모두 몇 가지죠?”
“다, 다섯 가지입니다.”
“네. 그렇죠. 그렇다면 담당하고 있는 작가는 모두 메인 작가 다섯이네요. 아, 컬러가 취약한 작가 둘 때문에 따로 컬러 팀 두 곳도 관리를 하고 있겠고. 그렇죠?”
“……네.”
“그렇다면 말입니다. 출근해서 퇴근까지 작가분들 관리에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되어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매번 마감일에 늦는 이유가 뭘까요?”
“이번 마감의 제 담당 원고는 세 가지입니다. 그중에 두 개는 마감 원고를 어제 새벽에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유진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기량은 본격적인 질문을 위해 손에 들린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신 거고요. 저희 팀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내는 작품이 바로 오유진 씨가 담당하고 있는 작품, 김도헌 작가의 ‘숨겨진 진실’이 아닙니까?”
“……네.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매번 마감일에 늦을 수가 있을까요? 도대체 작가 관리를 어떻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겁니까?”
“하지만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아서…….”
“작가가 마감 목전에 두고 증발하는 거 하루 이틀입니까? 오유진 씨의 당찬 모습에 반해 사장님께 적극 추천드려 입사를 시킨 접니다. 그렇지만 갈수록 사장님 앞에서 면이 서질 않아요.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오유진 씨의 사내에서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기만 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두 손 놓고 하늘만 바라볼 게 아니라 작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셔야죠.”
말을 하다 말고 기량이 전체 팀원들을 훑었다.
“그게 여기 앉아 있는 팀원분들이 해 주셔야 하는 일입니다. 어떻게든지 원고를 받아 오세요. 연재는 계속 올라오고 있으니 적어도 작가분들에게 별다른 지장은 없단 증거입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시간에 받아 오시길 바랍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기량의 시선이 유진에게 내리꽂혔다.
“그리고 오유진 씨. ‘숨겨진 진실’은 내일까지가 마감일인 건 아시겠죠. 앞으로 일주일의 시간을 더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원고 받아 올 자신이 없으면 앞으로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얗게 질린 유진의 얼굴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기량의 입이 쉬지 않고 달싹였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 동안 출근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저와 약속한 기간에 맞춰 원고만 가져오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비정규직 사원에서 정규직 사원으로 전환될 겁니다.”
저, 정규직? 순간 유진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남들처럼 높은 스펙이나 그렇다고 이름 있는 좋은 대학을 나온 게 아닌지라, 이런 큰 회사의 정식 사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에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없던 의욕마저 솟게 만드는 힘. 정규직.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쥔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아니 심지어 입사 확정 때보다 더 커다란 열정에 타올랐다. ‘꼭 쟁취하고 말겠다.’라는 강력한 의지 앞에 자신의 먼 미래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 꼭 원고를 두 손 가득 들고 사무실 땅을 밟겠습니다!”
달콤한 당근 앞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한 마리의 당나귀처럼 붉게 상기된 얼굴로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량의 시선을 뒤로한 채 자리로 돌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가방에 소지품을 챙기는 손길이 서글프도록 밝고 경쾌했다.
쾅쾅쾅! 손아귀에 진득이 배어 나오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차디찬 철제문을 두드리는 우악스러운 손길은 쉽게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높은 습도를 뒤로하고, 꽉꽉 들어찬 만원 버스에 몸을 실으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온 몰골은 심히 지쳐 보였지만 그 얼굴 위에 떠오른 희망은 모든 것들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꿈에 그리던 정규직이 이 문 너머에 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다. 오늘은 무사히 하루를 마치기를, 오늘은 무사히 내 책상을 지킬 수 있기를, 오늘은 무사히 내일을 기약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라 왔던가. 생각보다 비정규직이란 타이틀은 험난해서 타사의 경력이 있는 유진일지라도 쉬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늘 자신의 자리가 없어질까 노심초사, 잠 못 이루는 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그런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 조그만 문 너머에 있을 원고만 받아 낸다면 간절히 원하던 불안들과의 다디단 이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은 다시금 호흡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이 건물은 이상하게도 복도에 집으로 보이는 문이라곤 지금 눈앞의 문이 전부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철제문 이외에 문이라고는 달랑 이거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웃들에게 끼칠 피해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긴 했지만, 문제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 봐도 안에선 조그만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뭔가 불길하다. 갑자기 사색이 된 얼굴로 떨리는 손을 문에 조심스레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귀를 바짝 붙여 정말 아무도 없는 건지 확인했다.
“뭔가 이상한데?”
안에서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자, 현관문에 바짝 붙었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호, 혹시…… 서, 설마!”
왜 이 상황에서 기량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둥둥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해지며 날 선 목소리가 점점 크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적어도 작가분들에게 별다른 지장은 없단 증거입니다…… 별다른 지장은 없단…… 별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