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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입추가 지나 조금은 서늘한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비웃듯, 햇살은 당당히 기운을 다해 세상을 태우려는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가을은 길을 잃어 여전히 녹음이 푸르게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하늘에서는 가을이 제자리를 찾아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한결 높아져 있었다.
한 면을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조용하고 시원하며 편안해 보였다.
이른 시간이지만 뜨거운 햇살은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꽂히며 저절로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게 하고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그늘을 찾도록 만들었다.
개중에는 가벼운 옷차림에 가끔은 손부채질을 하며 느긋하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였으나 카페 안은 밖의 더위와는 상관없이 싸늘한 에어컨 바람이 지배하고 있었다. 오스스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사람을 유혹한다. 그래서인지 카페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꼭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정했니?”
밖이 훤하게 보이는 자리 중 가운데 테이블에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중년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탁자 끝만 바라보는 젊은 여자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조용히 묻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가 예쁜 잔에 놓여 있었다. 대꾸가 없는 여자의 행동에도 중년 여인은 딱히 독촉 없이 우아하게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커피 향에 집중했다.
“……정말 약속은 지키시는 겁니까?”
긴 생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여자는 여인이라고 칭하기에도 아직은 앳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요즘 여자들처럼 화장이나 옷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편한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일 뿐인데도 묘하게 사람 눈을 끄는 아름다움이 인상적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자는 마음을 정했는지 똑바로 눈을 마주하며 앞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도드라진 까만 눈동자는 그녀가 제법 총명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약속은 지켜. 그런 일이야 나에게는 별일도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알고 있었다. 앞에 앉은 여인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는지를. 그래서 이렇게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변명 따위도 필요가 없었다. 매달려 보는 것은 더욱 엄두도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런 기회가 왔다면 당연히 잡아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마음에 박혀 있는 감정 하나 빼내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아프다. 생각보다 너무 아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가슴에 담는 것조차 자신에게는 과한 욕심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스스로를 탓하며 해서가 입술을 깨물고 다시 여인의 눈을 마주했다. 변함없는 눈동자에서는 그녀를 탓하는 기색도 그렇다고 업신여기는 기색도 없었다.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는 확고한 의지만 담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행이구나. 똑똑한 아이라서. 앞일 역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 절대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럼 뒷일도 부탁하지. 깨끗이 잊게 해 주겠지?”
해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으로 여인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겠습니다.”
무너지는 가슴을 그대로 마음 한편에 묻으며 해서가 변함없는 음성으로 답을 했다.
“그래, 그럼 나도 곧바로 움직여 주지. 너도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감사합니다.”
들을 말은 모두 들었다는 듯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툭 던지는 말에 해서가 따라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해서는 이미 자리를 떠나 카페를 나서는 여인의 모습이 사라지는데도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떨리는 어깨와 긴 머리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숨겨진 그녀의 마음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날 해서는 카페를 나서지도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입추가 얼마 지나지 않은 가을의 시작을 알리려 파랗게 빛나던 하늘이 무심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 우연이라는 뜻밖의 만남(1)
지방대학이라고는 하지만 의대가 제법 유명한 제인대학교의 정문을 지나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작은 꽃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십 분을 더 걸어가면 제인대학병원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작지만 목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꽃집에는 대학생들을 위한 개성 넘치는 예쁜 꽃다발부터 병문안을 위한 따뜻한 느낌의 꽃바구니까지 가게 문 앞에 화사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 평수는 열다섯 평 남짓.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전시된 꽃들 말고도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예쁜 종소리와 더불어 이국적인 꽃향기가 먼저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꽃 중의 꽃 장미부터 색색의 국화와 안개꽃. 거베라부터 튤립과 수국, 카라. 그리고 당당한 극락조화까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지만 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릎 높이부터 시작해 해서의 키를 넘는 대형 화분들이 양쪽으로 줄을 서 자신을 찾아올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면 짙은 꽃향기 대신 대형 식물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꽃집치고는 바깥에 장식해 놓은 화분도 몇 개 없었지만 팔려고 내놓은 꽃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여름방학인지라 학생 손님도 거의 없고 오가다 병문안을 위해 꽃바구니를 찾는 사람들 몇몇이 전부였기에 해서도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운이 좋아 인근 장례식장의 화환을 도맡게 되면서 가게 운영에는 그리 구애받지 않을 수 있었다. 바쁠 때는 아르바이트를 부탁할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기도 했지만, 손님도 없고, 주문받을 화환도 없는 날이 드물어 지금의 한가함이 더욱 반가웠다.
해서는 일부러 커다란 화분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동백나무 옆에 서 눈을 감고 깊은 산속에 있다 상상하며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그곳에는 안슈리움, 폴리샤스, 해피트리, 재스민, 벤자민, 행운목, 홍콩야자 등등. 해서가 좋아하는 초목이 물방울을 잎 끝에 매달고 싱싱하게 빛나고 있었다.
깔끔한 단발이 달걀형 얼굴에 부드럽게 음영을 드리운다. 긴 속눈썹이 뺨 위에 그림자를 만들고 턱을 올린 자세 때문에 조금 더 들린 코끝이 귀엽게 반짝이고 있었다.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카키색 앞치마로 마무리한 패션 때문에 언뜻 보면 해서도 잘 자란 화분의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심호흡하자 깨끗하고 청명한 식물들이 내뿜는 상쾌한 공기가 해서의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머리카락을 살랑대는 바람만 불어 준다면 머릿속에 그린 산속의 느낌이 살아나겠지만 안타깝게도 바람은 무리였다.
해서는 유난히 기계 바람을 싫어해 여름에도 화초를 핑계 삼아 에어컨을 돌리지 않았다. 겨울에야 어쩔 수 없다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절제하고 살아 아르바이트생에게 짠순이 사장이라는 놀림을 받고 있었다.
해서만의 상상 속 삼림욕은 가게 문에 달아 놓은 작은 방울 소리 때문에 현실로 돌아왔다.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해서가 화분들을 뒤로하고 손님도 확인 안 한 채 인사부터 했다.
“어서 오세요.”
여전히 화분 속에 둘러싸여 있던 자리가 아쉽지만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갖가지 꽃들이 향연을 벌이는 가게 앞쪽으로 나섰다.
“화분 하나 보내 주시죠.”
선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해서가 무심코 상대방을 확인하다 저도 모르게 놀라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다. 벌써 눈앞이 깜깜해지고 입이 말라 온다. 그리고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듯 난타질 하고 있었다.
먼빛으로나마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빌 때는 죽어도 보이지 않더니 정작 만나고 싶지 않을 때 나타난 그를 보며 해서는 죽을힘을 다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만들려 애쓰고 있었다.
“난을 좋아하시니 가장 좋은 난 화분으로 골라 생신 축하 메시지 넣어 주시고 진서훈만 써서 의학부 심장외과 전임 교수실로 보내 주십시오.”
간신히 떨림을 숨기고 서 있는 해서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지 서훈은 아예 눈앞에 놓인 메모지에 쓸 말을 적은 후 지갑을 꺼내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주인도 없는 카운터에서 홀로 떠들고 있음을 깨달았나 보다.
“누구 없어요?”
한층 올라간 목소리에 담긴 짜증은 그대로였다. 이 남자는 예전에도 짜증이 나면 목소리부터 높아졌다. 저도 모르게 숨죽이고 있던 해서가 그의 음성에 밀려 앞으로 나섰다.
“알아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우리 꽃집에서 가장 좋은 난은 풍란이지만 제가 알기로는 백석기 교수님의 취미 생활은 분재입니다. 분재로 하면 더 좋아하실 겁니다.”
해서는 억지로 마른입에 침을 만들어 축이고는 천천히 그의 주문에 이견을 달았다. 어쩌면 그가 그녀를 못 알아볼 수도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에 매달리며 짧은 단발머리로 최대한 얼굴을 가리려 애썼다.
일부러 바쁜 척 등을 돌려 그가 원하는 난을 꺼내고 또 백 교수님이 좋아할 만한 분재를 골라 그 앞에 내밀었다.
“……여기 ……있었군. 그런데 겨우 꽃집이야? 여기보다는 더 좋은 곳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희망은 어차피 사라지라고 있는 것일까? 해서를 알아보고 놀란 목소리가 어느새 이죽거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돌아서 그를 똑바로 마주한 해서가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서훈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스물넷의 패기 어린 젊은이는 없었다.
핏이 살아 있는 블랙의 고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깔끔하게 정리된 머릿결이 눈이 부신 멋쟁이 신사가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잘생긴 외모였다. 뜨거운 여름 햇살조차 그를 피해 간 모양인지 더위에 지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서는 처음 그의 얼굴을 보기 전에 그의 이름부터 먼저 들었다. 의대 본과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이 진서훈이라고.
잘생겼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었다. 사람을 향해 진심을 다해 환하게 웃으면 볼 아래 입가에 패던 보조개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름달에서 곧바로 초승달로 변하던 눈매도 기억하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밝은 미소로 주변을 밝히던 그 모습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를 만나 정면으로 잔인하고 차가운 미소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다 만나는 상상은 했었다. 드라마나 노래 가사에 나오는 우연이라는 뜻밖의 만남으로 화를 내는 그를 상상한 적은 있지만 현실로 이뤄지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하고 나니 현실은 상상보다 두렵고 가슴이 아파 왔다.
두 눈에 담긴 적의와 더불어 조롱하는 미소에 소름이 돋아 해서는 먼저 시선을 돌려야 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본 듯 질색하는 차가운 눈에 저절로 오금이 저려 왔다.
“주문은 취소야. 세상에 꽃집이 여기 하나라고 해도 내가 여기서 살 일은 없을 테니까.”
해서가 탁자에 올려놓은 분재를 노려보는 눈초리도 매서웠다. 마치 거기에도 더러운 것이 잔뜩 묻어 있다는 듯 경멸이 가득했다. 그리고 곧 그 눈빛은 해서를 향해 쏟아지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며 비웃음을 흘리고 망설임 없이 꽃집을 나선다.
그가 나가고도 한동안 해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않은 만남에 속이 쓰리고 아파 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무뎌졌다고 믿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간신히 의자에 주저앉은 해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기억 속의 그는 이십 대의 팔팔한 젊은이였지만 이제는 삼십 대의 성공한 사내로 남을 것 같았다.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또 다른 기억을 덧대지 않아도 남은 기억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로 힘들었다.
이제 이곳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는 곳을 찾아 떠날 때가 된 모양이었다. 남은 빚은 가게를 정리하면 충분히 갚을 수 있었지만, 빚이야 갚으면 그만이고 그녀가 그에게 준 상처는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꽃집을 나온 서훈의 심장도 무섭게 뛰고 있었다.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주차돼 있던 차 문을 열고 시동을 켜자 곧바로 시원한 바람이 그의 열기를 식혀 주려 애를 쓴다. 그런데도 놀란 심장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만날까.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그리 반가운 우연은 아니었다. 모두 잊었다 생각하던 자신을 비웃듯 여전히 같은 얼굴 같은 표정의 그녀를 보며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잊었다 생각했다.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헤맸던 시간들과 마침내 쓰디쓴 쓸개처럼 잔인한 진실 앞에 무너졌던 시간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또다시 그를 좀먹고 있었다.
프롤로그
입추가 지나 조금은 서늘한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비웃듯, 햇살은 당당히 기운을 다해 세상을 태우려는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가을은 길을 잃어 여전히 녹음이 푸르게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하늘에서는 가을이 제자리를 찾아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한결 높아져 있었다.
한 면을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조용하고 시원하며 편안해 보였다.
이른 시간이지만 뜨거운 햇살은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꽂히며 저절로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게 하고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그늘을 찾도록 만들었다.
개중에는 가벼운 옷차림에 가끔은 손부채질을 하며 느긋하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였으나 카페 안은 밖의 더위와는 상관없이 싸늘한 에어컨 바람이 지배하고 있었다. 오스스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사람을 유혹한다. 그래서인지 카페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꼭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정했니?”
밖이 훤하게 보이는 자리 중 가운데 테이블에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중년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탁자 끝만 바라보는 젊은 여자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조용히 묻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가 예쁜 잔에 놓여 있었다. 대꾸가 없는 여자의 행동에도 중년 여인은 딱히 독촉 없이 우아하게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커피 향에 집중했다.
“……정말 약속은 지키시는 겁니까?”
긴 생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여자는 여인이라고 칭하기에도 아직은 앳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요즘 여자들처럼 화장이나 옷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편한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일 뿐인데도 묘하게 사람 눈을 끄는 아름다움이 인상적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자는 마음을 정했는지 똑바로 눈을 마주하며 앞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도드라진 까만 눈동자는 그녀가 제법 총명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약속은 지켜. 그런 일이야 나에게는 별일도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알고 있었다. 앞에 앉은 여인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는지를. 그래서 이렇게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변명 따위도 필요가 없었다. 매달려 보는 것은 더욱 엄두도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런 기회가 왔다면 당연히 잡아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마음에 박혀 있는 감정 하나 빼내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아프다. 생각보다 너무 아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가슴에 담는 것조차 자신에게는 과한 욕심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스스로를 탓하며 해서가 입술을 깨물고 다시 여인의 눈을 마주했다. 변함없는 눈동자에서는 그녀를 탓하는 기색도 그렇다고 업신여기는 기색도 없었다.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는 확고한 의지만 담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행이구나. 똑똑한 아이라서. 앞일 역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 절대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럼 뒷일도 부탁하지. 깨끗이 잊게 해 주겠지?”
해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으로 여인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겠습니다.”
무너지는 가슴을 그대로 마음 한편에 묻으며 해서가 변함없는 음성으로 답을 했다.
“그래, 그럼 나도 곧바로 움직여 주지. 너도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감사합니다.”
들을 말은 모두 들었다는 듯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툭 던지는 말에 해서가 따라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해서는 이미 자리를 떠나 카페를 나서는 여인의 모습이 사라지는데도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떨리는 어깨와 긴 머리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숨겨진 그녀의 마음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날 해서는 카페를 나서지도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입추가 얼마 지나지 않은 가을의 시작을 알리려 파랗게 빛나던 하늘이 무심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 우연이라는 뜻밖의 만남(1)
지방대학이라고는 하지만 의대가 제법 유명한 제인대학교의 정문을 지나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작은 꽃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십 분을 더 걸어가면 제인대학병원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작지만 목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꽃집에는 대학생들을 위한 개성 넘치는 예쁜 꽃다발부터 병문안을 위한 따뜻한 느낌의 꽃바구니까지 가게 문 앞에 화사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 평수는 열다섯 평 남짓.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전시된 꽃들 말고도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예쁜 종소리와 더불어 이국적인 꽃향기가 먼저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꽃 중의 꽃 장미부터 색색의 국화와 안개꽃. 거베라부터 튤립과 수국, 카라. 그리고 당당한 극락조화까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지만 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릎 높이부터 시작해 해서의 키를 넘는 대형 화분들이 양쪽으로 줄을 서 자신을 찾아올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면 짙은 꽃향기 대신 대형 식물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꽃집치고는 바깥에 장식해 놓은 화분도 몇 개 없었지만 팔려고 내놓은 꽃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여름방학인지라 학생 손님도 거의 없고 오가다 병문안을 위해 꽃바구니를 찾는 사람들 몇몇이 전부였기에 해서도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운이 좋아 인근 장례식장의 화환을 도맡게 되면서 가게 운영에는 그리 구애받지 않을 수 있었다. 바쁠 때는 아르바이트를 부탁할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기도 했지만, 손님도 없고, 주문받을 화환도 없는 날이 드물어 지금의 한가함이 더욱 반가웠다.
해서는 일부러 커다란 화분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동백나무 옆에 서 눈을 감고 깊은 산속에 있다 상상하며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그곳에는 안슈리움, 폴리샤스, 해피트리, 재스민, 벤자민, 행운목, 홍콩야자 등등. 해서가 좋아하는 초목이 물방울을 잎 끝에 매달고 싱싱하게 빛나고 있었다.
깔끔한 단발이 달걀형 얼굴에 부드럽게 음영을 드리운다. 긴 속눈썹이 뺨 위에 그림자를 만들고 턱을 올린 자세 때문에 조금 더 들린 코끝이 귀엽게 반짝이고 있었다.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카키색 앞치마로 마무리한 패션 때문에 언뜻 보면 해서도 잘 자란 화분의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심호흡하자 깨끗하고 청명한 식물들이 내뿜는 상쾌한 공기가 해서의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머리카락을 살랑대는 바람만 불어 준다면 머릿속에 그린 산속의 느낌이 살아나겠지만 안타깝게도 바람은 무리였다.
해서는 유난히 기계 바람을 싫어해 여름에도 화초를 핑계 삼아 에어컨을 돌리지 않았다. 겨울에야 어쩔 수 없다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절제하고 살아 아르바이트생에게 짠순이 사장이라는 놀림을 받고 있었다.
해서만의 상상 속 삼림욕은 가게 문에 달아 놓은 작은 방울 소리 때문에 현실로 돌아왔다.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해서가 화분들을 뒤로하고 손님도 확인 안 한 채 인사부터 했다.
“어서 오세요.”
여전히 화분 속에 둘러싸여 있던 자리가 아쉽지만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갖가지 꽃들이 향연을 벌이는 가게 앞쪽으로 나섰다.
“화분 하나 보내 주시죠.”
선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해서가 무심코 상대방을 확인하다 저도 모르게 놀라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다. 벌써 눈앞이 깜깜해지고 입이 말라 온다. 그리고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듯 난타질 하고 있었다.
먼빛으로나마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빌 때는 죽어도 보이지 않더니 정작 만나고 싶지 않을 때 나타난 그를 보며 해서는 죽을힘을 다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만들려 애쓰고 있었다.
“난을 좋아하시니 가장 좋은 난 화분으로 골라 생신 축하 메시지 넣어 주시고 진서훈만 써서 의학부 심장외과 전임 교수실로 보내 주십시오.”
간신히 떨림을 숨기고 서 있는 해서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지 서훈은 아예 눈앞에 놓인 메모지에 쓸 말을 적은 후 지갑을 꺼내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주인도 없는 카운터에서 홀로 떠들고 있음을 깨달았나 보다.
“누구 없어요?”
한층 올라간 목소리에 담긴 짜증은 그대로였다. 이 남자는 예전에도 짜증이 나면 목소리부터 높아졌다. 저도 모르게 숨죽이고 있던 해서가 그의 음성에 밀려 앞으로 나섰다.
“알아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우리 꽃집에서 가장 좋은 난은 풍란이지만 제가 알기로는 백석기 교수님의 취미 생활은 분재입니다. 분재로 하면 더 좋아하실 겁니다.”
해서는 억지로 마른입에 침을 만들어 축이고는 천천히 그의 주문에 이견을 달았다. 어쩌면 그가 그녀를 못 알아볼 수도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에 매달리며 짧은 단발머리로 최대한 얼굴을 가리려 애썼다.
일부러 바쁜 척 등을 돌려 그가 원하는 난을 꺼내고 또 백 교수님이 좋아할 만한 분재를 골라 그 앞에 내밀었다.
“……여기 ……있었군. 그런데 겨우 꽃집이야? 여기보다는 더 좋은 곳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희망은 어차피 사라지라고 있는 것일까? 해서를 알아보고 놀란 목소리가 어느새 이죽거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돌아서 그를 똑바로 마주한 해서가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서훈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스물넷의 패기 어린 젊은이는 없었다.
핏이 살아 있는 블랙의 고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깔끔하게 정리된 머릿결이 눈이 부신 멋쟁이 신사가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잘생긴 외모였다. 뜨거운 여름 햇살조차 그를 피해 간 모양인지 더위에 지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서는 처음 그의 얼굴을 보기 전에 그의 이름부터 먼저 들었다. 의대 본과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이 진서훈이라고.
잘생겼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었다. 사람을 향해 진심을 다해 환하게 웃으면 볼 아래 입가에 패던 보조개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름달에서 곧바로 초승달로 변하던 눈매도 기억하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밝은 미소로 주변을 밝히던 그 모습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를 만나 정면으로 잔인하고 차가운 미소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다 만나는 상상은 했었다. 드라마나 노래 가사에 나오는 우연이라는 뜻밖의 만남으로 화를 내는 그를 상상한 적은 있지만 현실로 이뤄지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하고 나니 현실은 상상보다 두렵고 가슴이 아파 왔다.
두 눈에 담긴 적의와 더불어 조롱하는 미소에 소름이 돋아 해서는 먼저 시선을 돌려야 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본 듯 질색하는 차가운 눈에 저절로 오금이 저려 왔다.
“주문은 취소야. 세상에 꽃집이 여기 하나라고 해도 내가 여기서 살 일은 없을 테니까.”
해서가 탁자에 올려놓은 분재를 노려보는 눈초리도 매서웠다. 마치 거기에도 더러운 것이 잔뜩 묻어 있다는 듯 경멸이 가득했다. 그리고 곧 그 눈빛은 해서를 향해 쏟아지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며 비웃음을 흘리고 망설임 없이 꽃집을 나선다.
그가 나가고도 한동안 해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않은 만남에 속이 쓰리고 아파 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무뎌졌다고 믿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간신히 의자에 주저앉은 해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기억 속의 그는 이십 대의 팔팔한 젊은이였지만 이제는 삼십 대의 성공한 사내로 남을 것 같았다.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또 다른 기억을 덧대지 않아도 남은 기억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로 힘들었다.
이제 이곳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는 곳을 찾아 떠날 때가 된 모양이었다. 남은 빚은 가게를 정리하면 충분히 갚을 수 있었지만, 빚이야 갚으면 그만이고 그녀가 그에게 준 상처는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꽃집을 나온 서훈의 심장도 무섭게 뛰고 있었다.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주차돼 있던 차 문을 열고 시동을 켜자 곧바로 시원한 바람이 그의 열기를 식혀 주려 애를 쓴다. 그런데도 놀란 심장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만날까.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그리 반가운 우연은 아니었다. 모두 잊었다 생각하던 자신을 비웃듯 여전히 같은 얼굴 같은 표정의 그녀를 보며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잊었다 생각했다.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헤맸던 시간들과 마침내 쓰디쓴 쓸개처럼 잔인한 진실 앞에 무너졌던 시간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또다시 그를 좀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