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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3화)
Chapter 01.(3)


포로 호송 마차를 타고 운송되는 동안 울리히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으음, 그렇게 된 거였구나!’
지하 연구실에 갇혀 지낸 것은 약 5년!
그사이 그의 고국인 마도왕국, 체브멘티온이 테넨로베프 제국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침략 전쟁이 시작된 것은 제국의 새로운 황제인 이스칸다르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대략 5년 전―그러니까 울리히가 납치되고 4개월쯤 지났을 무렵―이전 황제인 엔타마타헬이 암살을 당하였고, 이스칸다르가 곧바로 황위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실상 귀족들이 내세운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스칸다르 황제는 야심이 크고, 음모와 모략에 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고작 4년 만에 정적을 대부분 제거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스칸다르 황제는 황권을 더욱 강화시키고,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곧바로 정복 전쟁을 일으켰다.
제일 먼저 표적으로 삼은 곳은 마도왕국, 체브멘티온!
전쟁이 발발한 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아서 체브멘티온은 왕국의 절반을 잃게 되었다.
그 무렵 테넨로베프 제국의 다섯 번째 황자, 아말락기흄은 병력을 이끌고 체브멘티온의 북서쪽에 위치한 피레카고 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아말락기흄 황자는 성을 함락한 직후, 뇌전 마법 비밀 실험에 대한 기밀문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자는 비밀 연구소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테넨로베프 제국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 버렸구나! 하지만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울리히는 상당히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재에겐 불운 따윈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랄까?
잠깐의 시련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은 서사시에서 흔히 묘사되듯 더욱 빛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울리히의 이런 사고방식은 조금 재수 없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특출한 재능이 하늘의 신들로부터 내려온다고 믿고 살았다. 즉, 비범한 재능을 가진 자들은 곧 신들의 총애를 받는 자들인 것이다.
여하튼 그런 관습 탓에 울리히는 포로로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마차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결박을 당하진 않았고, 음식의 질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긴 뭐! 어차피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울리히는 뛰어난 마도학자였지만 불행히도 마나 친화력이 낮아서 직접 마법을 펼칠 수는 없었다. 육체 또한 조금도 단련되지 않았다.
방법은 오직 마나를 응집할 룬―스톤을 만들어 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조바심을 낸다고 갑자기 좋은 방법이 생각날 리가 없었다.
파삭―!
룬―스톤은 흡수한 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번번이 깨져 버렸다.
하지만 울리히는 결코 초초해하지 않았다.
마도학자인 그는 실험이라는 것이, 원래 무수한 실패를 반복하는 과정임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별다른 성과 없이 며칠이 지났고, 포로 호송 마차는 제국군의 주둔지에 도착했다.
털컥―!
어느덧 마차의 문이 열렸다.
울리히는 재촉하는 병사들의 목소리에 황급히 마차에서 내려서다가 엄청난 규모의 주둔지를 보고 흠칫 놀랐다.
‘이 정도 규모라면 병력이 어느 정도 되는 걸까?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기에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걸까?’
울리히는 군사학이나 용병술에 대해 평소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실 전공인 마도학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귀족으로서 사람들을 부려 보았기에 이렇듯 기강을 살리려면 얼마나 힘든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이렇듯 강력한 제국군과 맞서서 조국인 체브멘티온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부모님과 형들은 무사하실지 모르겠구나!’
울리히는 5남 중 넷째였다.
귀족들은 의무적으로 국가 간의 전쟁에 참여해야 하며, 또한 장성한 자제들 중 최소한 한 명 이상 참전해야 했다.
울리히는 아버지나 형들이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을까 몹시 걱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포로의 몸이라 걱정된다 한들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만 귀족들의 경우 대체적으로 몸값을 받기 위해 살려 두는 편이었다.
‘휴우……. 그저 무사하시길 바랄 수밖에는 없겠구나. 하긴, 지금 가족들 처지를 걱정할 때가 아니지! 곧 심문을 받게 될 테니 각오를 단단히 해 둬야겠다.’
포로들은 1차적으로 심문을 받게 된다.
포로로 위장한 첩자를 가려내기 위함인데, 조금이라도 의심받게 된다면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된다.
일단 고문을 받게 되면 사실상 끝이다!
아무리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도 끝없이 반복되는 참혹한 고통을 견뎌 낼 수는 없다. 결국 첩자가 아닌 사람들도 거짓 자백을 하고 목이 잘리게 된다.
‘이미 내 명성이 테넨로베프 제국에까지 알려졌으니, 과거 행적에 대해선 낱낱이 밝혀졌을 터! 조금이라도 말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비밀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까지 저들이 낱낱이 알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비밀 연구소에서 같이 연구하던 마도학자들 중 몇몇도 생포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이 진술한 것과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작은 충격에도 산산이 부서져 버릴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조심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만 알고 있는 것은 한두 가지 숨겨도 괜찮겠지?’
마그누스의 일지에서 얻은 몇 가지 단서. 그리고 은밀히 룬―스톤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벽히 숨겨야 했다.
그것 외에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상세하게 진술하는 편이 유리했다.
덜컹―!
그를 인솔하던 병사들은 쇠창살 문을 열어 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대기하시오!”
철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공기가 한층 무겁고 답답해진 것 같았다.
‘윽! 냄새가 굉장히 고약하군! 안쪽에서 뭔 일이 있기라도 한 건가?’
커다란 상자처럼 된 철장을 두꺼운 천으로 가린 구조였기 때문에 실제로도 안쪽은 매우 덥고 습했으며 쾨쾨한 냄새가 났다.
무엇보다 빛이 한 점도 스며들지 않아서 어둠 자체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후각과 시각을 동시에 고문당하는 느낌이군! 지금도 이렇게 견디기 힘든데,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가 된다면……. 이런 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심문당하며 진술을 반복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몹시 피곤한 일이다.
울리히는 예전에 고약한 심문 방식과 악랄한 고문 수법에 대해 상세히 기록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또한 그는 한 번 읽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을 만큼 기억력이 좋았다.
사소한 것까지 세밀하게 기억하는 기억력 때문에, 심문과 고문에 대한 상상도 현실과 별다를 것 없을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하게 구현되었다.
‘우욱! 토할 것 같아. 재미삼아 그런 책을 읽는 것이 아니었어!’
이처럼 머리가 좋다는 건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울리히는 어렸을 적 기르던 고양이가 죽은 이후 거의 1년 동안이나 폐인처럼 지낸 적이 있었다.
너무나 기억력이 탁월한 탓에 끔찍한 기억을 지우는 데 남들보다 30배는 더 걸린 것이다.
이후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거리를 두었다.
의식적으로 무뎌지려고 노력한 탓인지 지금은 어렸을 때만큼 감수성이 풍부하진 않았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이야 어떻게든 객관화시켜 떨쳐 버릴 수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게 다가올 위협과 고통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만약 고문당해 손가락이 한 번 부러지게 된다면 이후 매순간마다―실제와 거의 다를 것 없이 생생히 구현된―손가락이 부러지는 고통에 계속해서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울리히가 실체적인 투쟁이나 고통에서 벗어나 이론적인 마법 연구에만 주로 몰두하게 된 이유였다.
여하튼 그때, 어둠 속에서 돌연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거기 누…… 누구요?”
울리히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때까지 아무런 인기척을 느낄 수 없어서 혼자 갇힌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울리히입니다! 울리히 디 쥐세페.”
기운이 없던 사내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아! 울리히……. 반갑군요.”
“그런데 누구십니까?”
“절 모르……. 하긴, 이런 몰골이 되었으니…….”
울리히는 직감적으로 그가 이미 모진 고문을 받았음을 알아차렸다.
기운 없고 말이 끊기는 것도 그때문인 것 같았기에 울리히는 일부러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힘드시면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내는 한참 숨을 헐떡거리더니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맥베스…….”
“아! 맥베스 님이셨군요.”
울리히는 그제야 그가 비밀 연구실에서 같이 연구하던 맥베스란 이름의 마도학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목이 잔뜩 쉬기는 했어도 틀림없이 맥베스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이제야 알아보는…….”
“맥베스 님!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울리히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몹시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같은 곳에서 잡혀 왔으니, 이런저런 이유로 맥베스가 먼저 도착했다 해도 몇 시간 정도의 차이일 터! 그렇다면 고작 몇 시간 동안 사람을 저 상태로 망가뜨려 놨다는 말인가?’
고문에 대한 공포에 식은땀이 절로 났지만 두려움에 져서는 안 된다!
지금은 맥베스가 도대체 어떤 말실수를 하여 곧바로 고문을 받게 되었는지 알아내야 했다. 심문 과정에서 그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 지금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친분이 있는 두 사람을 함께 가둔 것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작위적이었다.
사실 그의 추측대로 철장 근처에서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빠짐없이 엿듣고 있었다.
울리히는 말실수하지 않으려고 각별히 주의하며 맥베스로부터 자연스럽게 필요한 정보를 캐냈다. 다행히 맥베스는 억울함을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싶었는지 힘들어하면서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쯧! 쯧! 바보같이 저들의 심기를 건드렸군!’
울리히는 대화를 통해 맥베스가 의도적으로 정보의 일부를 은폐하려 했다는 걸 눈치챘다.
수계(Water) 마법 학파인 아퀘리에스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모양이다.
“자네도…… 절대…… 말하지 말게.”
울리히는 엿듣는 자를 의식해 신중하게 답변했다.
“전 비밀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당신들에게 납치당해 강제로 실험에 협조했을 뿐이니까요!”
“자…… 자네……. 그게 무슨?”
“제가 도대체 왜 가증스런 아퀘리에스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겁니까? 아니,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저를 괴롭힌 아퀘리에스에 복수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울리히의 답변은 진심이었다.
다만 테넨로베프 제국 역시 그에게 적국일 뿐이니,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약간의 비밀은 끝까지 감추어 두어야 할 것이다.
울리히는 아무도 모르게 힘을 키워 자신을 괴롭히고 압박한 모든 이들에게 복수할 계획이었다. 마음속에서 천천히 싹트기 시작한 복수심은 그가 어려움과 수난을 겪을수록 조용하지만 착실하게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