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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5화)
Chapter 02.(2)


울리히의 질문에 엠브란트 교수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면서 단순한 부분을 어려워하시다니! 역시 울리히 님 같은 천재는 평범한 사람들과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군요.”
뭔가 해결책이 있다는 말에 울리히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흔한 예로 기사들이 쓰는 검에 오러가 맺히는 걸 보지 않으셨습니까?”
“앗! 그렇군요.”
사실 마나, 포스, 오러는 다른 형태로 이용될 뿐 본질적으로 같은 에너지였다.
상급 이상의 기사들은 포스를 검에 응축하여 오러를 발현한다. 포스가 검에 응축된다면 마나 역시 금속에 응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통상 암흑기사들의 검은 오르하르콘으로 제작된다.
“그리 당연한 걸 생각해 내지 못하다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울리히 님! 공기가 있어 숨을 쉬고 있지만 우리가 평소에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고정관념 때문에 생각해 내지 못한 것뿐입니다.”
“충고 고맙습니다.”
그동안 고심했던 것이 무안할 정도로 해답을 간단히 찾아냈다.
하지만 이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르하르콘은 어디서 구하지?’
오르하르콘은 연금술의 총체로, 당연히 값비싸고 희귀했다.
로열 아카데미 소속의 교수이자 마도학자였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한낱 포로 신세가 된 지금은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막막한 일이다.
복잡한 심경이 된 울리히는 한숨을 내쉬며 신세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 있을 때가 그립군요. 그때만 해도 우리가 제국군의 포로 신세로 전락할 줄이야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긴! 한 치 앞조차 장담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저 역시 난감합니다. 하지만 너무 상심하진 마십시오! 잘만 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방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방도라니 그게 뭡니까?”
엠브란트 교수는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은밀히 말했다.
“제국군의 마도병단에서 출신에 상관없이 마법사와 마도학자 등을 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도병단이라고요? 제국군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까?”
“한동안 갇혀 지내시느라 제국의 근황에 어두우시군요.”
엠브란트 교수는 마도병단이 설립된 배경을 설명했다.
원래 테넨로베프 제국은 마도학에 대해서 무지한 편이었다.
제국은 건국 초기부터 검과 무예를 신봉했다. 자연력인 마나를 포스(Force)로 전환하여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게 되면서부터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것이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화의 양상을 보였다.
마도왕국 체브멘티온을 효율적으로 무너뜨리려면 마법에 대해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적국의 마법을 분석해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체적인 마도병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된 거구나! 그런데 이렇듯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을 보면, 엠브란트 교수는 이미 마도병단에 포섭된 것 같군.’
알고 보니 두 사람이 서로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뒤늦게 엠브란트 교수의 의도를 알게 되었지만 울리히는 전혀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목적이 있어 접근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괜히 기분 상할 이유는 없지! 게다가 마지못한 듯 마도병단에 포섭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울리히는 괴팍한 마법사들이나 꼬장꼬장하고 자존심이 강한 학자들과는 달리 지극히 실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지금은 첩자로 내몰려 처형당할 수 있는 포로 신세!
하지만 만약 마도병단에 소속된다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마침 엠브란트 교수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마지못한 듯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모양새도 좋고 자연스럽다.
‘마도병단에 지원하면 전공을 살려 마도학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험을 핑계로 오르하르콘을 요구한다면 룬―스톤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마냥 순조롭게 풀려 나가리란 낙관적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세상일이 원래 그렇듯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리라. 하지만 울리히는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 같은 천재가 아둔한 바보들에게 당할 리 없잖아?’

제국군의 마도병단에 지원한 이후 울리히는 다시 심문과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포로가 된 직후 한차례 심문받은 기록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전처럼 혹독한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또한 울리히 역시 마도병단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학회에 발표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새로운 마법 이론을 알려 주었을 뿐 아니라 마법 수식을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울리히의 이런 행동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사실 마법사들 혹은 학자들은 보통 자신의 지식을 개방하는 데 상당히 폐쇄적이다. 뭐든 흔해지면 가치가 떨어질 뿐 아니라, 노출되는 순간 파훼법이 연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리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하나를 움켜쥐고 있으면 영원히 하나일 뿐! 지식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발전이 있지. 평생 하나만 우려먹으려 하니까(?) 다들 발전이 없잖아? 자칫 그러다 갑자기 죽으면 지식 전수도 못하고 그냥 휙! 사라지게 되는 거지, 뭐.’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뛰어난 마법이 후대에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가진 걸 내놓기가 어디 쉬운가?
사실 울리히가 이렇듯 쉽게 생각하는 것도, 하나를 내놓아도 금방 새로운 하나를 만들어 낼 천재적인 두뇌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렇듯 적극 협조한 끝에 울리히는 원하는 대로 마법 연구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울리히의 진짜 목표는 마법 연구를 자체가 아니라 오르하르콘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마법 금속 개발 연구에 투입되는 편이 오르하르콘을 손에 넣기 쉬울 텐데, 정작 투입된 건 포쉴드(Force―Shield의 줄임말)의 파괴 강도 실험이군.’
포스 쉴더들이 착용하는 포쉴드는 마나 저항력이 높은 아만다티움 합금으로 만들어진다.
울리히에게 필요한 것은 마나를 응축하는 성질이 강한 오르하르콘이었으니 포쉴드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울리히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포스 쉴더 연구에 집중하자! 뭔가 연구 성과를 낸 후에 마법 금속 개발팀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해야겠다.’
지금은 무엇보다 결과물을 보여 유능함과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먼저였다.
특히 제국을 위해 진심으로 일하려 한다는 걸 보여 줘야 했다.
마도병단 수뇌부들의 신임을 얻어야 자신이 원하는 실험에 투입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마지못해 시작한 연구였다.
하지만 막상 실험이 시작되자 울리히는 마도학자로서 순수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아만다티움이 마법 저항이 높은 금속이긴 하지만, 도대체 뭘 섞었기에 저항력이 이토록 비약적으로 높아진 걸까? 그리고 방패 안쪽에 덧댄 것은 또 뭐지? 포스를 주입해 방패의 마법 저항력을 높이는 원리는 대체 뭘까?’
연금술의 세계가 이토록 신비롭고 흥미로울 줄이야!
울리히는 본래의 목적도 잊을 만큼 금속 연금술의 신비(?)에 깊이 매료되었다.
금속 연금술에 관련된 서적은 뭐든 구할 수 있는 대로 탐독했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금속들을 비율을 달리하여 혼합하다 보면, 불쑥 새로운 성질을 가진 합금이 탄생한다.
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으랴?
울리히는 천재 마도학자답게 서적들만으로 기초 연금술을 충분히 익혔다. 하지만 독학하는 것만으로는 곧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연금학을 전공한 엠브란트 교수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해야겠구나!’
엠브란트 교수는 연금술을 가르쳐 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연금술로 최초의 성과를 얻게 된다면 저와 공동 연구한 것으로 발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울리히의 천재성을 익히 잘 알고 있던 엠브란트 교수는 연구 성과를 탐냈다.
공공연한 비밀일 뿐, 이처럼 타인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는 것은 흔한 일.―보통은 제자나 조수의 공적을 가로챈다.―
혼자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같이 먹자는 것이니 나름 신사적인(?) 제안이었다.
‘불쾌한 제안이긴 하지만, 마도병단에서의 업적 따위야 아무러면 어떠랴?’
울리히는 이대로 제국군의 마도병단에 뼈를 묻을 생각이 아니었기에 공적 문제야 어떻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엠브란트 교수의 제안을 수락하여 연금술을 배웠다.
여하튼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배우게 되자 독학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습득 속도가 빨라졌다.

그렇게 열흘이 지난 어느 날 밤.
사각―!
고요한 가운데 울리히의 침실에서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부지런히 들려왔다.
울리히는 항상 잠들기 전 노트에 간단히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떠도는 영감을 손가락을 움직여 가며 기록하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찾아낸 단어를 역순으로 배열하면……. 음, 역순 배열이 답이 아닌가? 아! 역순으로 배열한 뒤 처음과 끝의 순서를 한 번 더 바꿨구나!’
울리히는 그동안 틈틈이 마그누스의 연구일지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교묘하게 숨겨진 단어들로 두 개의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번개(Lightning)는 제어가 불안정하지만 기존의 4원소를 능가하는 우월함을 가진 속성이다. 지금부터 나는 그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울리히는 뛸듯이 기뻤다.
‘역시! 숨겨진 문장이 있었구나!’
솔직히 말해 울리히는 연구일지에서 찾아낸 단서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마그누스의 연구일지에 뭔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가 단순한 망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염려해 왔던 것이다.
이렇듯 확실한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아! 그나저나, 스스로의 힘으로 마그누스의 뇌전 마법을 능가할 마법을 개발해야 할 텐데! 아직 룬―스톤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니……. 이러다 마그누스가 숨겨 둔 문장을 먼저 찾아낼지도 모르겠군!’
울리히는 사실 자신이 마그누스를 능가하는 천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마그누스는 27세가 되는 해에 뇌전 마법에 대한 새로운 논문을 학회에 발표했다.
그렇다면 27세가 되기 전에 자력으로 그와 같은―혹은 그를 능가하는―마법을 만들어 내는 것만이 우월함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더 이상 숨겨진 문장을 찾아내서는 안 되겠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울리히는 마그누스가 대체 뭐라고 썼을지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다.
또한 연구일지에서 숨겨진 문장을 찾아내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두뇌 대결이라 쏠쏠한 잔재미가 있었다.
자존심과 호기심 사이에서 고민하던 울리히는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숨겨진 문장을 찾아내는 건 계속하자! 일지의 단서와는 상관없이, 나는 나대로 새로운 마법 공식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것 아닌가?’
목표는 번개 속성의 마력 제어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식을 창안하는 것!
그렇다면 마그누스가 찾아낸 방법과는 전혀 다른 뇌전 마력 제어 방식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울리히는 계속해서 연구일지에 숨겨진 단서를 찾는 한편, 자신의 방식대로 뇌전 마력 제어 수식을 고안해 내기 위해 힘썼다.
그로부터 이틀 뒤, 울리히는 마그누스가 숨겨 둔 문장을 몇 줄 더 찾아냈다.

―제대로 활용하려면 본질에 대해 명확히 알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번개(Lightning)의 본질은 무엇일까? 어째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치는 것일까? 소리(천둥)와 섬광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의문들보다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바로 번개가 어디서 어떻게 생성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울리히는 마그누스가 숨겨 둔 문장을 읽는 순간 자각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그누스를 능가할 새로운 번개 마법을 창안하기로 결심했으면서 정작 번개의 본질이 원지 의문을 가져 본 적은 없구나!’
공기가 없으면 질식해 죽는다는 것은 알면서도 왜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는지―이 시대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산소가 필요한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울리히는 연구일지에서 찾아낸 문장을 계속해서 해석했다.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고민하라! 충분히 고민했다면 내가 그 해답을 알려…….―

울리히는 그 부분에서 해석 작업을 돌연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