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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8화)
Chapter 03.(3)


비록 원치 않았지만 첩자인 엠브란트 교수와 손을 잡게 된 일.
오르하르콘을 조금씩 빼돌린 일.
연구일지의 비밀을 혼자 알고 있는 일.
아직 저들이 알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울리히는 병사들의 인도를 받아 응접실 문 앞에 도착했다.
‘응접실에 있는 걸 보면 외부에서 날 만나러 온 사람이 있는 건가? 하지만 제국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특별히 찾아올 사람도 없을 텐데…….’
병사들은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뮤엘 님! 울리히를 데려왔습니다.”
‘제뮤엘이라…….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울리히는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심문당할 당시 만났던 사내구나! 전략 참모라 했었지?’
울리히는 제국군의 포로가 된 직후 많은 사람들에게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심문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제뮤엘이란 사내를 만났다.
‘뭔가 내게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기습을 받는 바람에 그냥 가 버렸지? 그 이후로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다시 찾아왔구나.’
거기까지 생각해 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예상했던 대로 제뮤엘이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예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예전에 참모장직에 올랐던 전략 참모였다.
“오랜만이군, 울리히.”
울리히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뮤엘은 마치 친한 사람을 대하듯 소탈하게 말을 꺼냈다.
“그날 이후 전투가 끊이질 않아서 이제야 자넬 다시 보는군. 그간 잘 지냈나?”
울리히는 친밀한 척하는 그의 태도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네……. 뭐, 그렇습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텐데 너무 겸연쩍어 말게.”
“네? 그게 무슨…….”
제뮤엘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솔직하게 말하지. 참모부는 정치판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곳이네! 권력이 있는 곳은 어디나 음모와 모략이 판을 치게 마련이니까.”
제뮤엘은 과거에 참모장직에 올라 아말락기흄 황자를 직접 보필하였다.
하지만 그는 건강상의 문제로 제자인 살바도르에게 참모장직을 물려주어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데 살바도르는 참모장에 오른 후 조금씩 그와는 뜻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살바도르의 힘이 너무 커지자 큰 위협을 느끼게 된 제뮤엘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세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기존의 참모들은 이미 대부분 살바도르에게 영입된 상태!
이에 제뮤엘은 외부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포로가 된 자들 중에 학식이 뛰어난 자들을 선별하여 아쉬운 대로 영입하고자 한 것이다.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울리히는 궁금한 점이 있어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외부의 인사를 뽑으면, 결국 출신 문제가 발목을 잡게 되지 않겠습니까?”
노골적으로 말하면 타국인, 그것도 적국의 인재를 어찌 믿고 중임할 수 있으랴?
하지만 제뮤엘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살바도르 역시 이민족 출신이니, 결코 그 부분은 문제 삼을 수 없을 것이네!”
“정말 이민족 출신이란 말입니까?”
“그는 우루니크 산맥의 체이프타족 출신이네.”
이민족은 타국인 혹은 적국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뿌리 깊은 차별을 받았다.
특히 체이프타족은 대륙인들과 생김새가 너무 달라 대부분 가까이 오는 것조차 싫어할 만큼 경멸했다.
“체이프타족 출신이 어떻게 참모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울리히의 질문에 제뮤엘은 뭔가 불만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살바도르는 어릴 때부터 책략과 임기응변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네. 녀석의 자질을 중히 여겨 그 자리에 올렸건만, 결국 공들어 키운 개에게 손을 물린 격이 되고 말았지.”
울리히는 계속되는 제뮤엘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튼 지금 참모부의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참모장인 살바도르인 것 같구나. 게다가 복잡한 권력관계에 얽혀 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제뮤엘의 눈에 든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
제뮤엘은 자신이 이미 자기 사람이 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의 졸개(?)가 되길 거부한다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아아! 힘이 없다는 건 정말 비참한 거구나. 자신의 행보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니!’
울리히가 티 나지 않게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 밖에 있는 병사들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뮤엘 님! 엠브란트 교수님과 필립 님이 도착했습니다.”
병사의 말을 들은 울리히는 흠칫 놀랐다.
‘뭐? 엠브란트 교수라고?’
얼마 전 울리히는 엠브란트 교수의 모략에 넘어가 그와 손을 잡게 되었다. 제뮤엘의 권유를 받은 이 시점에서 교수까지 끼어들게 되면 자칫 일이 복잡해진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울리히는 결국 제뮤엘에게 물었다.
“저들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이번에 자네와 같이 한꺼번에 영입하려 하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가?”
“엠브란트 교수님과 약간 친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울리히가 둘러대는 말에 제뮤엘이 아는 척하며 말했다.
“하긴, 엠브란트 교수와 자네는 로열 아카데미에서 같이 일했을 테니 친분이 좀 있겠지.”
울리히는 제뮤엘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과거 행적을 철저히 조사한 모양이구나! 하긴 전략 참모의 위치에 있으니 그 정도 손을 쓰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겠지.’
겉으로는 느슨한 듯 소탈한 태도를 가장하고 있지만, 상대는 참모장까지 지낸 인물인 것이다. 이런 말을 슬쩍 흘린 것도 지켜보고 있으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이래서 정치적 인물들과는 얽혀 들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진창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구나!’
덜컥―!
문이 열리며 엠브란트 교수와 필립이 입구에 발을 들였다.
“오! 어서들 오게.”
“저어……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일단 이리 들어와서 앉게.”
제뮤엘은 두 사람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수하가 되길 권유했다.
권유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강요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골적으로 위협하진 않았지만,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간 어찌 될지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
결국 그들은 제뮤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필 엠브란트 교수와 룸메이트(?)가 되다니…….’
제뮤엘의 수하로 영입된 울리히는 불행히도 엠브란트 교수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하긴 제뮤엘의 입장에서야 가급적 한곳에 모아 두고 관리하는 게 편하리라. 손수 영입하긴 했지만 아직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데다, 암습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편하니까.
하지만 하필 같은 방을 배정받게 되다니!
엠브란트와 껄끄러운 관계가 된 울리히에게는 실로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온종일 감시당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밖에서는 제뮤엘이 붙인 병사들에게 감시를 받고, 안에서는 엠브란트 교수의 감시를 받는 격이었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고 룬―스톤을 만들 방법이 없구나!’
울리히는 어렵게 오르하르콘을 빼내고도 도무지 은밀히 작업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무슨 수를 내야 했다.
‘이번에도 역시 마법 실험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나?’
울리히는 제뮤엘을 찾아가 마법 실험을 요청했다.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마법 합금 연구가 있습니다. 실험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곧 결과물을 보여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다행히 제뮤엘은 울리히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지 않아도 자네같이 우수한 인재를 전략 참모로만 활용하긴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자네 같은 천재라면 충분히 책략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겠지? 실험실을 마련하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보게.”
“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라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딱 잘라 거절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여하튼 제뮤엘은 새로 영입한 인재들에게 군사학자들을 보냈다.
기초적인 군사학 지식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는데, 주로 병법, 용병술, 외교, 전술 등의 과목이었다.
‘아함……. 군사학은 몹시 지겹구나.’
울리히는 의외로 군사학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워낙 기억력이 좋아 가르치는 족족 외워 버리긴 했지만, 축척된 지식을 활용하지는 못했다.
단순히 암기하기만 한 지식은 죽은 지식을 뿐!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전술이라는 것은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했다.
‘제뮤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익혀야 하는데…….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으니 큰일이군!’
사실 연금술의 경우 마도학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금방 배우게 되었지만 군사학은 전혀 달랐다.
울리히의 천재성은 흥미가 없는 분야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아직 군사학 학습 초기 단계라는 것!
탁월한 암기력 덕분에 울리히의 학습 부진(?)이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제뮤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단순히 내친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사실 전략 참모가 되지 못한다면 실험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될 테니 오히려 달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진한 발상일 뿐!
오만한 권력자들이 흔히 그렇듯 제뮤엘 역시 실패를 용납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틀림없이 본보기 삼아 잔인하게 죽이겠지? 그래야 비슷한 처지의 수하들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사력을 다해 봉사하게 될 테니까.’
울리히가 그동안 살펴본 바로 제뮤엘이라면 그런 식으로 처리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이처럼 병법의 기본은 효율성에 있으며, 따뜻한 감성이 스며들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그것이 울리히가 좀처럼 병법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고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효율성에만 사로잡혀 인성을 잃어버린다면 한낱 말 못하는 짐승들보다도 못하게 되리라.’
어떤 요소이건 간에 상호 간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울리히의 지론이었다.
결코 균형이 깨지거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결핍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울리히가 보기에 일반적인 군사학은 균형을 잃은 학문이었다.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날 이용하거나 소모시키려는 사람들뿐이니! 들통 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해!’
다행히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다시 마법 합금 실험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실험 조수 명목으로 실험실 안까지 감시자들이 따라붙었다.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울리히는 룬―스톤을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따로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울리히는 일곱 조각을 모두 만드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룬―스톤을 완성했다!’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려면 며칠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았다.
울리히는 미리 제작해 둔 작은 상자에 룬―스톤을 보관해 두었다.
상자 표면에는 마나 저항력이 높은 아만다티움을 특별한 방식으로 코팅해 두었다.
외부의 마나가 룬―스톤으로 스며들 수 있지만, 반대로 내부에 응집된 마나는 상자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즉, 상자를 열어 보기 전에는 룬―스톤에 응집된 마나를 감지할 수 없도록 안전장치를 해 둔 것이다.
또한 상자를 억지로 열려고 하면, 안쪽에 부식액이 흘러나와 룬―스톤을 망가뜨리도록 장치를 해 두었다.
‘이 정도는 해 둬야 안심할 수 있겠지?’
고생고생하며 만든 룬―스톤을 다른 자의 손에 넘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무렵 제뮤엘이 새로 들인 학자들을 집무실로 호출했다.
“머지않아 실전에 투입될 테니 다들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 좋겠다.”
학자들 중 하나가 용기를 내며 질문했다.
“네? 저희는 후방에서 전술을 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제뮤엘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버럭 호통을 쳤다.
“전투를 직접 체험해 보지도 않고 어찌 전술을 논할 수 있단 말이냐? 게다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다! 참모부라 해도 군인인 이상 최소한의 육체 단련은 필수다!”
울리히는 그의 말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지만 항변해 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땀 흘리며 몸을 쓰는 건 딱 질색인데…….’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았던 울리히는 몸 쓰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초가을이었다. 신체 단련이란 명목으로 땀투성이가 되도록 몸을 혹사하는 것은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아아……. 정말 싫다!’
그날부터 울리히는 체력 훈련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