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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11화)
Chapter 04.(2)
“오전에 상부의 지령을 받았네. 참모부 회의실에 잠입해 빼내야 할 서류가 있으니 자네도 협조하게!”
‘하필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쯤 제뮤엘도 살바도르가 자신이 데려온 학자들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두 사람의 이목이 학자들에게 한껏 집중되어 있을 터! 이럴 때 그런 작전을 펼치는 건 기름통을 지고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격이다.
울리히는 논리적으로 엠브란트 교수를 설득하려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상부의 지령을 받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실행해야 하네! 거스트가 한바탕 휘젓고 난 뒤에 잠입하면 되니 너무 걱정 말게.”
“거스트(Gust, 돌풍)라면 혹시 지난번에 봤던…….”
“자네 짐작이 맞네. 그 바람 마법사의 별명이 거스트라네.”
엠브란트 교수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첩자 조직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바람 마법사의 별명을 듣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울리히 역시 그들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더 많이 알게 되면 알수록 첩자 조직과 깊이 엮이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작전에 끌어들일 속셈이라 그런지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을 덧붙였다.
“거스트가 참모부 건물 입구로 진입하는 순간, 우리는 건물 뒤쪽 문을 통해 잠입하게 될 것일세. 이후 거스트가 소란을 피워 순찰병들을 유인할 것이야. 그때 우리가 회의실에 곧바로 잠입해 필요한 서류만 챙겨 나오면 되는 거네. 어때 아주 간단한 일 아닌가?”
울리히는 슬쩍 발을 빼기 위해 넌지시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그런데 그 정도의 일이라면 제가 없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엠브란트 교수에게 그런 얕은 수는 통하지 않았다.
“첫 임무는 쉬운 것이 좋지 않겠나? 쉬운 일부터 슬슬 적응하는 편이 좋을 거네.”
울리히는 어차피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상황이라 설득을 포기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미루어 집작할 수 있었다.
‘별다른 전투력이 없는 엠브란트 교수와 나까지 이런 작전에 끌어들이는 것을 보면, 첩자 조직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구나.’
엠브란트 교수는 금속 연금술을 전공했지만 마법사는 아니었다. 울리히 역시 마나 친화력이 매우 낮은 탓에 룬―스톤을 만들어 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둘 다 전투 요원이라 말할 수 없다.
또한 거스트(Gust)라는 요원이 자주 작전에 투입되는 것도 이상했다.
‘혹시 전투 요원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전투 요원들을 전부 제거해 버릴 수 있을지도…….’
물론 지금으로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룬―스톤을 완성하여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면, 하나씩 은밀히 제거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어쨌거나 그건 룬―스톤을 완성한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는 일!
지금은 이번 작전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울리히는 사실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로 끝나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도중에 발각되어 붙잡히게 되면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자칫하면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뭔가 나름대로 대비해 둬야 했다.
순간 울리히는 룬―스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비록 미완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룬―스톤에 저장된 마나를 뇌전 속성으로 가공해 둬야겠다!’
룬―스톤에 현재 저장된 마나는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속성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필요한 속성만 추출해 정제해 두지 않으면, 필요한 마법을 구현하는 데 수십 배의 시간이 걸리게 된다.
만약 전투가 일어나게 되면, 0.1초 차이로 생사가 갈리게 된다.
즉, 전투 마법은 시전 시간이 가급적 짧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울리히는 룬―스톤 안쪽에 새로운 수식을 덧붙여 순수한 마나를 뇌전 속성으로 가공해 두었다.
‘테스트를 한번 해 봐야겠다.’
마음껏 뇌전 마법을 실험해 볼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울리히는 우선 실험실로 향했다.
‘실험 조수들을 모조리 쫓아냈으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겠지? 하지만 바쁘고 정신없게 만들 수는 있을 거다.’
실험실에 도착한 울리히는 가능한 최대한 일을 벌였다. 조수들을 독려해 일곱 개의 실험을 동시에 시작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한 실험에 쓰는 금속용 해제에 폭발성 용액을 몰래 섞어 버렸다.
나중에 들키더라도 잠시 착각했었다고 둘러대면 그뿐이다! 뒷감당은 전혀 염려하지 않고 화끈하게 저질러 버렸다.
콰아앙―!
“엇?! 조심해!”
“부…… 불이다!”
콰앙―!
“아악! 젠장! 얼굴에 튀었어!”
“정지! 작동 정지시켜!”
순식간에 실험실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대혼란에 빠졌다.
‘연쇄 폭발이 일어나도록 손을 써 두었으니 한동안 고생 좀 할 거다! 이런 짓을 하고 즐거워하면 안 되겠지만……. 후훗! 속이 다 후련하군!’
울리히는 혼란을 틈타 실험실 안쪽의 연구일지 보관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이제 룬―스톤의 마력을 이용해 뇌전 마법을 펼쳐 볼 차례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이거 생각대로 잘될지 모르겠군!’
울리히는 그간 틈이 날 때마다 뇌전 마법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상상으로면 시뮬레이션해 보았을 뿐, 실제로 시전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무척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꿀꺽―!
울리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마법 스펠을 완성했다.
“라이트닝(Lightning)!”
파직― 파지지직!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시동어를 외치자마자 곧바로 하얀 스파크(Spark)가 일어났다.
울리히는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아! 드디어 내 손으로 직접…… 마법을!’
그간 천재 마도학자인 울리히는 셀 수 없이 많은 마법 수식을 고안해 냈지만, 막상 본인은 마나 친화력이 부족해 직접 마법을 펼쳐 볼 수 없었다.
룬―스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듯 직접 마법을 시전하게 되자 가슴속에 응어리진 뭔가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사실 울리히는 그동안 마법사들과 마도학자들의 존경과 경외를 한 몸에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마법을 펼치지 못하는 것에 뿌리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오늘 그 한을 풀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언제까지 감격에만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울리히는 흥분을 수습하고 냉정을 되찾았다.
‘이젠 번개(Lightning) 속성 마력 제어를 연습해야 해!’
울리히는 그동안 연구일지에 숨겨진 문장을 통해 뇌전 속성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개념은 양(+)의 마나와 음(-)의 마나!
그리고 챠지드 바디(Charged Body, 대전체)의 개념이었다.
‘양의 마나와 음의 마나는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가 되고자 한다. 거꾸로 하나가 된 마나는 양의 마나와 음의 마나로 분리할 수 있다! 물체를 구성하는 마나 역시 둘로 분리할 수 있는데, 이때 양의 마나 혹은 음의 마나만 남은 상태를 챠지드 바디라 한다.’
즉, 뇌전 속성의 마나를 생성하는 과정이 챠지(Charge), 마력을 방출해 번개를 구현하는 과정이 디스챠지(Discharge)다.
‘아마도 마그누스 역시 챠지드 바디를 이용해 뇌전을 제어했을 거야!’
아쉽게도 연구일지에 숨겨 둔 문장은 번개 속성의 기본 개념에 대해 설명뿐이었다.
울리히는 그동안 기본 개념을 토대로 나름대로 연구하였다.
만약 목표 대상을 챠지드 바디(Charged Body)로 만들어 버린다면?
양의 마나와 음의 마나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즉, 일종의 복원력)을 이용해 정확히 목표한 곳에 명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울리히는 마그누스가 분명 이 방법을 사용해 뇌전 속성의 마력을 제어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자! 그럼 한번 시작해 볼까?’
울리히는 룬―스톤을 이용해 뇌전 마법을 다시 펼쳤다.
“라이트닝!”
하지만 그간 머릿속으로 구상해 본 것과는 달리 제어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목표한 지점만 정확히 챠지드(Charged, 대전된) 상태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챠지(Charge)에 무려 5분이나 소요되었다!
파직― 파지지직!
뒤늦게 스파크가 일어나며 번개가 생성되었지만 사실 5분은 너무 늦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투 상황에서 어느 누가 5분 동안 멍하니 기다려 주랴?
‘그래도 목표한 지점으로 정확히 날아가 꽂히긴 했다!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분명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시전 시간이 터무니없이 길 뿐만 아니라, 번개의 크기도 작고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울리히는 이 작은 번갯불 하나가 훗날 세상을 뒤흔들 거대한 섬전의 폭풍(Thunder Storm)이 되라 굳게 확신했다.
부우― 부우―
어두운 밤하늘, 저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풀벌레 우는 소리와 산들바람이 고즈넉이 어우러지며 한밤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하지만 시궁창에 몸을 구겨 넣듯 잔뜩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사람에겐 밤의 정취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내가 이 야밤에 시궁창 냄새를 맡으며 밤이슬을 맞아야 하는 거지?’
속으로 불평하고 있지만 사실 그 답을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엠브란트 교수에게 약점을 잡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작전에 동참해야 했다.
참모부 회의실의 금고를 터는 황당한 작전!
‘이게 무슨 작전이야? 이러다 걸리면 다 죽자는 수작이지, 뭐.’
여하튼 아무쪼록 들키지 않고 무사히 끝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동안 숨죽여 기다리자 참모부 건물 안쪽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아앙―!
“크아악!”
“침입자다!”
“출입구 쪽이다!”
계획대로 거스트(Gust)가 마법을 마구 쏟아 내어 순찰병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그때 곁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엠브란트 교수가 손짓으로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알았어!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간다! 가!’
울리히는 엠브란트 교수와 함께 건물 뒤편에 있는 작은 문을 향해 접근했다.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었는데, 요리에 쓸 식료품을 받고 음식물 쓰레기 등 오물을 버리는 문이었다.
원래는 닫혀 있는 문이었는데, 이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지금은 잠겨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간신히 작은 문을 통과했다.
복도를 통해 이동하는 동안 폭발음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콰앙! 콰아앙!
“크악!”
이렇듯 거스트가 열심히 소란을 피운 덕분인지, 두 사람은 순찰병과 마주치지 않고 회의실이 있는 복도에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운은 거기까지!
건장한 경비병 두 명이 회의실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지키고 있었다.
울리히는 분석하는 걸 좋아하는 평소 습관대로 재빠르게 두 사람의 차림새와 무기를 살폈다.
‘가죽 갑옷을 갖춰 입고 장검(Long Sword)을 허리에 찬 것을 보니 전형적인 기사들이구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얼핏 보기에도 둘 다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체형이다.’
기사라고 해서 항상 플레이트 메일을 입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사들은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가죽 갑옷을 걸치고 다니기 때문에 차림새만으로도 병사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또한 어깨 부분에 가문의 문장을 수놓은 것을 보면 둘 다 귀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의무적으로 어릴 때부터 고급 검술과 기사 수련을 받기 때문에 결코 일반 병사나 용병들 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어째서 기사들이 직접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거지?’
기사들같이 귀한 인력이 고작 밤새 회의실 입구를 지키는 하찮은 임무를 맡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순찰병들의 대응도 지나치게 빠른 것 같았다.
그때, 울리히의 머릿속에 함정이란 단어가 번뜩 떠올랐다.
‘첩자들이 이곳을 노린다는 정보가 미리 샌 모양이구나!’
울리히가 엠브란트 교수에게 경고하려는 순간, 황당하게도 교수가 갑자기 울리히의 등을 힘껏 떠밀었다.
툭!
느닷없이 복도로 등 떠밀려(?) 나온 울리히는 황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황급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살폈을 때는 이미 엠브란트 교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울리히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나를 미끼로 내어 주고 빠져나갈 생각이었군!’
울리히를 발견한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 안 돼!’
기사들이 검을 뽑는 즉시 목이 잘려 나갈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울리히는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룬―스톤을 꽉 붙잡았다.
우우우웅―!
손바닥을 통해 룬―스톤 안에 웅크리고 있는 뇌전의 마력이 느껴졌다.
지금 믿을 것은 이 마력밖에 없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늦어!’
열심히 연습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마법 발현에 4분 이상 시간이 걸렸다.
또한 포스를 익힌 기사들의 반응속도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면 반드시 죽는다.
그때, 기사들이 울리히를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칼날이 대기를 가르며 울리히의 목을 향해 곧장 날아왔다.
그 순간 죽음의 공포가 울리히의 인튜이션―리프를 일깨웠다.
번쩍―!
몰입이 극대화되며 뇌세포가 극도로 활성화되었다.
주위의 풍경이 모두 지워지며 남은 것은 오직 두 개의 칼날뿐이었다.
몰입이 극대화되며 칼날의 궤도와 속도는 낱낱이 분석되었다.
‘찾았다!’
울리히는 품속에서 상자를 꺼내 날아오는 칼날을 막아 냈다.
카앙―!
비록 조그만 상자였지만 표면이 마법 금속인 아만다티움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아만다티움은 마나 저항력이 상당히 높은 금속!
포스의 본질이 마나와 같기 때문에 기사들의 검을 타고 쏟아져 나온 포스는 상자에 가로막혔다.
파악!
상자가 망가지는 순간!
울리히는 검에 실린 엄청난 힘과 포스의 반발력에 밀려 멀리 튕겨 나갔다.
우당탕!
울리히는 넘어지면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오른쪽 어깨를 먼저 부딪쳐 탈골되긴 했지만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운이 꽤 좋은 편이다.
하지만 위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