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도학자 1권(14화)
Chapter 05.(2)
“부탁할 것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잘 만났다!”
“저어……. 그런데 누구신지?”
교관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이거, 참! 날 못 알아본단 말이야? 쳇! 한 번 이겼다고, 나를 너무 무시하는군.”
울리히는 그 말을 듣고서야 그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아! 그때 그 교관님이셨군요.”
얼마 전 인튜이션―리프(Intuition―leap) 상태가 된 울리히와 검술 대결을 펼쳤다가 무참히 깨진 바로 그 교관이었다.
그런데 교관은 뭐가 불만인지 별것도 아닌 걸로 빈정거렸다.
“그때 그 교관은 또 뭐야? 그래, 내가 그때 그 교관이다!”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으니 달리 부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음. 내 존함을 듣고 싶은 거로군! 그토록 알고 싶어 한다면 들려줄 테니 귀를 씻고 들어라! 내 이름은 윈프레겐이다!”
귀족의 예법대로라면 이름을 처음 소개할 때는 풀 네임을 알려 주는 것이 예의지만, 눈치 없이 묻지는 않았다. 딱 보기에도 훈련 교관은 귀족 출신이 아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학자들을 가르치게 된 훈련 교관들은 원래 일반 병사들을 가르치는 훈련 교관들이어서 대부분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포로 신세가 되니 평민들에게조차 반말을 듣게 되는구나. 하긴, 포로가 되는 순간 노예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처치가 되어 버렸으니, 정식 참모가 되기 전에는 이들에게 존대를 요구할 수 없겠지?’
윈프레겐과 이야기를 좀 나누다 보니, 말투가 좀 거칠지만 소탈한 편이라 심하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대화가 너무 길어진다는 느낌이 든 울리히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 뭔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참! 깜빡할 뻔했군. 사실은…….”
울리히에게 무참히 깨진 이후 윈프레겐은 동료들에게 자주 놀림을 받게 되었다.
워낙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이라 짓궂은 농담도 오고 가는 것이겠지만, 윈프레겐에게는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허약한 학자에게 당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동료들에게 자네 실력을 보여 주게! 결코 겉보기만큼 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란 말일세!”
윈프레겐의 요청에 울리히는 몹시 당황했다.
그런 이유로 교관들과 맞붙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인데다, 그들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
‘원할 때마다 인튜이션―리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생각 없이 나섰다가 자칫 괜히 망신당할 뿐이다! 또한 그런 일로 낭비할 시간도, 체력도 없어.’
울리히는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려 했지만 윈프레겐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허락하기 전에는 결코 자넬 놓아주지 않겠네! 그러니 자네 볼일을 보러 가고 싶으면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빠를 거다!”
쇠심줄 같은 윈프레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제멋대로 구는 데 도가 텄군! 그래, 하찮은 포로 신세인데,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된 울리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럽시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하하! 그럼, 그래야지. 나를 따라오게!”
슬쩍 빠져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윈프레겐은 울리히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쪽 길로 가면 곧 연무장이 나타나겠구나. 아마도 거기서 한판 붙어 보라는 모양이다.’
윈프레겐의 손에 끌려가다시피 이동하는 동안, 울리히는 인튜이션―리프 현상이 발현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편히 먹기로 생각을 바꿨다.
‘인튜이션―리프 상태가 되면 죄다 쓰러뜨리면 된다! 만약 그렇게 안 된다면 그냥 항복하면 그뿐이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윈프레겐이 거짓말한 것처럼 되어 버리겠지만……. 아! 거기까지 걱정하진 말자. 그때 가서 어떻게 되겠지, 뭐.’
몸을 조금 움직이자 더위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울리히는 저주에 가까운 탁월한 기억력 때문에 며칠째 현실처럼 생생하게 반복되는 처형 장면에 시달려 왔다. 거기다 식사 부족, 수면 부족, 더위까지 겹치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그저 뭐든 빨리 끝내고 쉬고 싶었다.
윈프레겐은 비슷한 덩치의 동료 두 명을 그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그저 윙윙거리는 소음으로만 들릴 뿐 무슨 말이 오갔는지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다.
‘하아……. 가득이나 더운데 머리에 열까지 오르니 질식할 것 같군.’
열 때문인지 주위의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때 윈프레겐이 울리히에게 검과 방패를 건네주었다. 반사적으로 받아 들자 상대측이 다짜고짜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슈아악―!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섬뜩한 파공음을 냈다.
그 소리가 마치 신호가 된 것처럼 주위의 풍경이 모조리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시퍼런 빛을 번뜩이는 칼날뿐이었다.
‘인튜이션―리프(Intuition―leap)가 발현되었구나!’
흥미, 집중, 한계(탈진).
인튜이션―리프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며 뇌세포 간의 정보 전달이 극도로 활성화되었다.
적의 공격은 순식간에 분석되었다.
또한 울리히에겐 인튜이션―리프를 통해 개량된 검술이 있었다.
‘체력과 검술이 윈프레겐 교관과 비슷한 수준이군.’
울리히는 교묘한 각도로 방패를 들어 상대의 검을 흘려 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상대를 향해 뛰어들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쉐엑―!
검에 실린 힘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칼날이 막기 힘든 부위로 파고들고 있었다.
상대는 어쩔 수 없이 방패를 들어 검을 막았다.
하지만 울리히는 내디딘 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갑작스럽게 칼날의 방향을 바꿨다.
파앗―!
“크윽!”
칼날이 교관의 옆구리를 스치며 붉은 피가 튀었다.
힘이 부족한 만큼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왼쪽 옆구리를 베였기 때문에 더 이상 방패를 들어 올릴 수 없게 되었다.
교관들이 배운 검술은 기본적으로 검과 방패(Sword&Buckler)를 함께 다루는 기술이다.
방패를 쓸 수 없다면 검술의 위력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 잠깐!”
위협을 느낀 상대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울리히의 검술이 뭔가 범상치 않음을 피부로 느끼고 대결을 중지하려는 것이다. 상대는 미련한 윈프레겐과는 달리 꽤 판단이 빠르고 약삭빨랐다.
하지만 울리히는 고작 이 정도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너희들도 좀 당해 봐!’
사실 칼질(?) 한 번으로 고상하게 끝내기엔 그동안 쌓인 울분이 너무 많았다.
울리히는 상대가 항복을 외치기 전에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슈아악―!
“헛!”
상대는 어쩔 수 없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검을 마주 휘둘러 공격을 막아 내려 했다.
하지만 울리히는 간단히 칼날의 방향을 바꾸며 다른 응용 동작으로 연결해 공격을 펼쳤다. 그의 검술은 어떤 경우에도 각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파앗―!
“크악!”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튀자 상대는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 소리를 듣는 순간 말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통쾌한 기분을 느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쑥 하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 만큼 그동안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던 것이다.
물론 단순히 화풀이에 쓰기엔 검(Sword)은 너무나 위험한 물건이다.
하지만 울리히의 힘이 너무 약해 마음껏 휘둘러 봤자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그걸 뒤집어서 말하면, 얼마든지 마음껏 휘둘러도 상대가 크게 상할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아아! 통쾌해!’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에 울리히는 거의 무아지경으로 휘둘렀다.
체력의 한계도, 지금의 상황도 모두 잊었다.
슈아악― 서걱!
“크윽!”
계속해서 인튜이션―리프 상태가 유지되자 울리히의 검술이 한층 더 개량되었다.
대결을 통해 분석한 정보를 응용하여 검술의 응용 동작을 더욱 정교하고 교묘하게 가다듬었다.
또한 울리히는 작은 힘으로 최대한의 힘을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극도로 활성화된 두뇌가 평소보다 수십 배는 빠른 속도로 결과를 도출해 냈다.
뭐든 반복하면 늘게 마련이라더니 검을 쓰는 것도 처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그래! 무게중심을 좀 더 앞으로 향하고 허리를 틀면서 이렇게…….’
자세가 교정되며 울리히의 검에 좀 더 강한 힘이 실렸다.
피부 위를 살짝 긋고 지나간 이제까지의 공격과는 달리, 이번에는 칼날이 제법 깊게 들어갔다.
쉐에에엑― 서걱!
“크아악!”
상대는 결국 오른쪽 어깨를 깊게 베이는 바람에 더 이상 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울리히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슈아악― 파앗!
“으앗! 사…… 살려 줘!”
검은 상대의 옷깃을 살짝 베고 지나갔을 뿐이다.
하긴, 칼날이 목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어찌 태연할 수 있으랴?
‘겁에 질린 모습을 보니 속이 다 후련하군!’
울리히는 윈프레겐 곁에 서 있는 다른 교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쪽도 한판 하시려고 왔습니까?”
교관은 당황한 듯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 아닐세. 난 구경하려 왔네.”
교관들은 울리히의 검술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실력을 겨뤄 볼 생각을 버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귀가 울리며 시야가 흐려졌다.
찌이잉―!
‘엇? 왜 이러지…….’
울리히는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지만 의식이 흐트러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울리히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털썩―!
“으음…….”
“이제 정신이 드는가?”
깨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얼굴은 뜻밖에도 윈프레겐이었다.
“혹시 절 간호하셨습니까?”
윈프레겐은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커험! 가…… 간호는 무슨! 가끔씩 시간 나면 들러 봤네.”
“그런데 어쩐지 말씀하시는 것이 꽤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이 듭니다.”
“3일이 지났으니 꽤 시간이 흘렀다고 볼 수도 있겠지.”
윈프레겐의 답변에 울리히는 화들짝 놀랐다.
“네? 3일이나 지났습니까?”
울리히는 3일 전 제뮤엘에게 학자들을 회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으니 무슨 문책을 받을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비틀거리다 다시 누웠다.
“무슨 일 때문에 그리 서두르는 건가?”
“사실은 3일 전 제뮤엘 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큰일입니다!”
윈프레겐은 울리히의 말을 듣고 다소 놀란 듯했다.
“제뮤엘 님이라면……. 자네 높은 분과 연이 닿았군. 이거 이제부터 자네에게 잘 보이도록 노력해야겠는데?”
윈프레겐의 말에 울리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뮤엘 때문에 참모장인 살바도르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는 걸 모르니 태연히 그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그런데 그때 윈프레겐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아파서 일을 못한 사람을 문책하는 법은 없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게. 그리고 제뮤엘 님은 지금 다른 일로 바빠서 자네에게 신경 쓰지 못하실 거네.”
“다른 일이라면……. 무슨?”
“아말락기흄 황자님이 승전보를 가지고 성으로 돌아오셨네! 높으신 분들은 다들 그분을 위해 열린 성대한 연회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일세.”
“아! 그렇군요. 이번 연회는 며칠 동안 계속됩니까?”
“오늘부터 5일 동안이라고 하더군.”
그렇다면 약 5일의 시간을 벌게 된 셈이었다.
‘그건 그렇고, 인튜이션―리프의 후유증이 꽤 심하구나!’
온몸이 나른한 것이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다.
또한 3일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도 인튜이션―리프의 부작용으로 추측되었다. 추측컨대 지속 시간이 길거나 몰입의 강도가 높을수록 부작용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인튜이션―리프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구나! 하긴,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하지.’
그런데 그때 윈프레겐이 그에게 수상한 병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사내가 몸이 그리 부실해서 되겠는가? 원기 회복에 좋은 거니까. 한 번에 죽 들이켜게!”
울리히는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 뚜껑을 열고 병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헉! 이…… 이건! 뱀이 아닙니까?”
“뭘 그리 놀라나? 정력에 무진장 좋은 뱀술일세.”
“성의는 고맙지만 저는…….”
“허어! 자네, 내 성의를 이렇게 무시하긴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끈질기게 거듭 권하는 바람에 울리히는 결국 뱀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크읏!”
비리고 독한 향에 울리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윈프레겐에게 병을 건넸다.
“저는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내가 마셔 줄 테니, 대신 앞으로 형님이라 부르게.”
“네? 그게 무슨…….”
“그럼 그렇게 알고 마시겠네.”
윈프레겐은 울리히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단숨에 술병을 비워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울리히는 윈프레겐이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형님이라 부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솔직하게 털어놓으시죠? 원하시는 게 뭡니까?”
윈프레겐은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