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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17화)
Chapter 05.(5)
‘다짜고짜 무릎을 꿇다니! 자존심도 뭣도 없는데다 경솔하기 짝이 없구나. 이처럼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니 그처럼 대형 사고를 쳤겠지! 이처럼 쉽게 무릎을 꿇은 것도 앞으로 내 검술을 배우지 못하게 될까 봐 이러는 것일 거다.’
의심이라는 것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
하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간 울리히는 주로 마도학 연구에만 몰두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대인 관계에 폭이 넓지 않았다. 인간관계 경험이 많지 않은 만큼, 다른 사람의 실수에 그리 관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 역시 살얼음을 내딛는 듯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할 상황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인 처지까지 일일이 헤아려 배려해 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울리히는 곧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한 번 실수한 것은 이해해 주겠다고 하였으니,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두 번은 없습니다! 저와 한 약속을 또 깨 버리게 된다면…….”
윈프레겐은 울리히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급히 외쳤다.
“절대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약조를 어긴다면 울리히 님에게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울리히는 윈프레겐의 거창한 맹세를 조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목숨을 내놓겠다니. 하하! 설마 내 앞에서 자결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지난번처럼 너무 쉽게 호언장담하는구나!’
정말로 자결할 리가 없다.
혹시 진짜로 한다고 해도 죽는 걸 그냥 지켜볼 수는 없으니, 울리히의 입장에선 당연히 자결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리라! 그런 부분을 다 계산하고 하는 말이라 생각되어 그의 행동이 더욱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만약에 대비해 언제 무엇을 얼마만큼 가르칠지는 전적으로 내 마음이라고 해 둔 것이 정말 다행이다. 재촉할 때마다 나중에 가르쳐 준다고 해 둬도 아무 말도 못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공연히 그를 자극하지 말자.’
울리히는 윈프레겐이 벌인 일로 혹시 자신에게까지 피해가 오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러웠다. 오만한 기사들이라면 윈프레겐에게 검술을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처벌할지도 모르니 가능한 연관 고리를 끊어 버려야 했다.
윈프레겐을 차츰 멀리 하는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용서할 테니 얼른 일어나세요, 윈프레겐 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스승님.”
“동료들에게 검술을 일부분 가르쳐 주었다고 하셨는데, 혹시 그분들에게 제 이름도 밝혔습니까?”
“아닙니다! 엉겁결에 몇 동작을 가르쳐 주긴 했지만 스승님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습니다.”
윈프레겐의 시원스런 대답에 울리히는 다소 안심했다.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구나! 윈프레겐만 입을 다물면 내게서 검술을 배웠다는 사실은 기사들의 귀에 들어가진 않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울리히는 차분한 목소리로 윈프레겐에게 경고했다.
“그 어떤 경우라도 내게서 이 검술을 배웠다는 사실을 말해선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윈프레겐이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울리히는 그걸로 미덥지 않아서 거듭 다짐을 받았다.
Chapter 06.(1)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났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모든 일이 그럭저럭 풀려 나갔다.
울리히에게 학자들 포섭과 회유의 임무를 맡겼던 제뮤엘은 그간의 시원찮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았다. 그저 포기하지 말고 계속 수고하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참모장인 살바도르가 손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학자들을 포섭한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어! 무리란 걸 잘 알면서도 내게 맡긴 이유는 달리 이 일을 맡길 만한 적임자가 없기 때문이겠지.’
제뮤엘은 오래전 실권을 잃은 처지라 원래부터 수하들이 별로 없었다.
거기다 최근 학자들을 영입하려던 움직임을 참모장 살바도르에게 들켜 은밀한 반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나마 있던 수하들마저 하나둘씩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게 늘그막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고 되지도 않을 욕심을 부려서 결국 내 처지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울리히가 영입에 성공한 것은 기껏해야 포섭할 가치조차 없는 무능한 학자 두 명뿐! 하지만 회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만으로도 살바도르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어쨌거나 조용히 넘어갔으니 이걸로 한고비 넘긴 셈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윈프레겐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가 장담한 것처럼 추격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거나, 그게 아니라면 기사들에게 뭔가 신경 쓸 만한 다른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을 텐데……. 뭐, 걱정해 봐야 별다른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일이 잘 풀리길 바랄 수밖에!’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에 매달리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다.
울리히는 고민을 잊기 위해서라도 뇌전 마법 연습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윈프레겐과 당분간 마주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의 개인 연무장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연습할 장소가 달리 없어도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뇌전 마법의 특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으로 충분해!’
거듭 말하지만 울리히는 소름 끼치도록 세밀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이미 지난 며칠 동안 반복한 연습을 통해 뇌전 속성 특성에 대한 충분한 자료와 정보를 확보한 상태! 거기다 어차피 마법 구현에는 별다른 신체 활동이 필요 없었다.
마법 수식을 계산하고 계산한 수식에 대응해 마법 스펠을 배열하는 작업은 거의 모두 뇌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머릿속의 모의실험만으로도 충분했다.
울리히는 윈프레겐을 피하기 위해 연구실에 주로 틀어박혔다.
겉으로는 조수들을 독려해 마법 실험에 매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뇌전 마법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번쩍!
뇌전의 섬광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서 번개 줄기가 뻗어 나갔다. 생성된 번개 다발을 나선 형태로 회전시켜 자기장을 중첩시켰다.
우르릉―
뒤늦게 천둥소리가 울리며 강력한 자기장이 형성되었다. 상상으로 만들어 둔 쇳조각이 번개 회오리를 향해 슈욱 하고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번개 다발과 함께 쇳조각들이 목표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쾅―!
번개 다발과 쇳조각에 맞은 목표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울리히는 시뮬레이션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아직 너무 느려! 차라리 쇳조각을 좀 더 작은 걸로 써 봐야겠어.’
파괴력 상승을 우선 목표로 두고 머릿속으로 모의실험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런데 이른 오후 무렵에 누군가 찾아와 연구실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쾅! 쾅!
“스승님! 거기 계십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울리히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윈프레겐이구나! 일부러 한동안 피했더니 연구소로 곧장 찾아왔군.’
이처럼 윈프레겐을 피하는 건 단순히 감정이 상했기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었다.
언제든 기사들이 윈프레겐 일행에게 앙갚음하러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특별히 친밀한 관계가 아님을 보이기 위해―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귀찮음을 느낀 울리히는 실험 조수들에게 그를 적당한 말로 돌려보내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윈프레겐은 물러가지 않고 다시 외쳤다.
“안에 계신 거 알고 있습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보아하니 쉽게 물러갈 기세도 아닌 것 같고, 할 말이라는 게 궁금하기도 해서 울리히는 결국 실험실 문을 열어 주었다.
“지금 한창 바쁜데 무슨 일입니까?”
울리히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지만 윈프레겐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감찰부의 병사들이 찾아왔습니다! 동료들 중 몇 명이 이미 끌려갔습니다. 그날 일이 결국 터진 모양입니다!”
한 달쯤 지나서 이젠 조금 안심하고 있었는데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 울리히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매몰차게 돌려보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윈프레겐이 자신의 이름을 꺼내지 않도록 하려면 지금 잘 다독거려 둘 필요가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울리히는 실험 조수들의 귀를 의식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리를 옮겨 차근차근 이야기합시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원의 분수대 근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다시 나눴다.
“동료들이 언제 잡혀 간 겁니까?”
“대략 한 시간 정도 전에 잡혀 간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한차례 심문을 받았겠군요. 혹시 잡혀 간 동료들이 혹독한 고문을 견딜 만큼 심지가 굳은 분들이십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평소에도 입이 가벼운 편이니 아마도 지금쯤 모든 것을 실토했을 겁니다.”
윈프레겐의 대답에 울리히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하긴,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평소의 네 행실을 보면 동료들의 입이 얼마나 가벼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지!’
그런 속내와는 달리 울리히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너무 당황하지 마십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기 마련입니다.”
“휴우……. 혹독한 심문을 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겁이나 죽겠습니다! 도대체 제가 어찌 처신하면 좋겠습니까?”
당황한 윈프레겐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울리히에게 매달렸다.
자신 같은 무식한 무지렁이보다는 아무래도 많이 배운 사람이 뭔가 좋은 수를 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머릿속으로 신중하게 할 말을 정한 울리히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날 있었던 일은 가급적 솔직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어설프게 뭔가 감추거나 축소하려 했다간 그 방면의 전문가(?)인 심문관들에게 죄다 들통이 날 겁니다.”
“그렇군요. 결국…… 처벌을 피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잔뜩 겁먹은 그의 태도에 울리히는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기 시작했다.
“하극상이긴 하지만, 그리 크게 처벌받지는 않을 겁니다. 잔뜩 만취한 상태로 아무 곳에서나 검을 뽑았다는 건 기사단의 위신을 크게 깎는 일이니, 상부에서 가급적 조용히 해결하려고 할 겁니다. 여러분들만 처벌하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으니까요.”
군율은 항상 엄격하게 행해져야 군기가 사는 법! 훈련 교관들을 처벌하려면 기사들까지 같이 처벌해야 형평성이 맞다.
그러나 이 일이 대대적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결국 기사들이 훈련 교관 몇 명을 이기지 못했다는 망신스런 소문까지 멀리 퍼지게 되리라.
감찰부 역시 상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단체였다. 또한 이처럼 사소한 일로 아군 전력의 핵심인 기사단의 위신을 꺾었다간 뒷감당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
결국 단호하게 처벌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시간만 끌다가 풀어 주게 될 것이다.
윈프레겐은 울리히의 차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상부에서 움직이리라 어찌 장담하십니까?”
“기사들이 직접 찾아오지 않고 감찰단이 찾아왔다는 건 이 일이 이미 상부에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기사들 역시 처벌이 두려워 쉬쉬했을 겁니다. 하지만 분함을 잊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을 찾아보려고 애쓰다가 발각되고 말았겠죠.”
“듣고 보니 그렇군요.”
윈프레겐은 울리히의 설명에 차츰 납득하기 시작했는지 불안하게 떨리던 시선이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