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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18화)
Chapter 06.(2)
울리히는 확신에 찬 말투로 거듭 강조했다.
“심문받는 건 고통스럽겠지만 며칠만 견디면 아무 일 없이 풀려날 수 있을 겁니다.”
“휴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좀 됩니다.”
하지만 사실 울리히는 이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했다.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그럭저럭 잘 풀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뿐, 돌발적인 변수가 하나라도 끼어들면 일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안심시켜 놔야 그를 설득할 수 있겠지?’
어느 정도 윈프레겐을 안정시킨 울리히는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가급적 솔직하게 진술하되, 저와 제가 연구한 검술에 대해선 절대로 언급해선 안 됩니다!”
“그건 또 어째서 그렇습니까?”
의아해하는 윈프레겐을 향해 울리히는 지극히 신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언급해 봤자 괜한 오해를 사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윈프레겐 님도 아시겠지만, 제 검술은 교관들의 기본 검술을 바탕으로 고안해 낸 겁니다.”
당연한 말인지라 윈프레겐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울리히가 뭔가 쑥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건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저 같은 천재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심문관들이 고작 며칠 만에 이 정도의 검술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하다고 믿어 줄 것 같습니까?”
자신을 천재라 지칭하는 것은 분명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아! 그렇군요.”
“분명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게 될 겁니다! 의심이란 건 원래 또 다른 의심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심각한 오해가 발생할 수도 있고……. 그럴수록 윈프레겐 님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입니다!”
울리히가 이런 말을 꺼낸 건 사실 윈프레겐을 위해서라기보다 자신까지 이 일에 엮이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윈프레겐은 성품이 단순한 편이라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부분만 조심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일은 절대 단언하시면 안 되고, 짐작을 말하셔도 안 됩니다. 자칫 왜 말이 맞지 않느냐고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 단단히 조심하십시오.”
울리히는 윈프레겐이 미덥지 않아서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불리해지면 약속이고 뭐고 죄다 말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득은 이쯤 해 둬야겠다! 감찰부에서 한창 그를 찾고 있을 테니 같이 있는 모습을 들켜서 좋을 것 없겠지.’
그런 생각에 울리히는 그에게 간단히 인사를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감찰부의 병사들이 윈프레겐에게 들이닥쳤다. 저항해 봤자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는 정도는 아는지 윈프레겐은 그들의 손에 순순히 끌려갔다.
“휴우. 조금만 늦었으면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킬 뻔했군.”
여하튼 이제부터 윈프레겐이 잘 버텨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실험에 열중하고 있던 울리히는 점심때가 되었다는 조수의 말에 문득 윈프레겐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점심과 저녁 식사 이후에는 거의 그의 개인 연무장에 들렸기 때문이다.
울리히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했으니 잘 버티고 있는 거겠지.”
윈프레겐이 감찰부에 잡혀간 지 꼬박 이틀이 지났다.
그간 울리히는 윈프레겐이 혹독한 심문을 견디지 못해 자신까지 걸고넘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또한 별다른 소문이 들려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조사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짐작한 대로 기사단의 체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인지 형식적인 조사에서 그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나저나, 계속 이렇게 마음 졸이며 살 수는 없어!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이곳을 탈출해야겠다.’
앞으로 약 한 달 정도 후.
아말락기흄 황자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출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울리히는 출정식 준비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룬―스톤의 성능을 확실히 개선하지 못한 것이 맘에 걸리긴 하지만, 어쨌든 이제는 뇌전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튜이션―리프가 제때에 발동해 주기만 한다면 그럭저럭 검술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룬―스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상 앞으로 내 전투력이 더 향상된다는 보장은 없다! 뇌전 마법 연습은 지금까지 해 온 걸로도 충분해.’
그동안 울리히가 은밀히 만들어 둔 룬―스톤은 여섯 개.
마력 제어 문제 때문에 룬―스톤은 한 번에 두 개까지만 동시에 쓸 수 있었다. 즉, 룬―스톤 두 개에서 뽑아 올린 마력이 최대출력(?)이다.
여섯 개면 여분까지 충분히 만들어 둔 셈이니 더 이상 만들어 두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또한 룬―스톤의 주재료인 오르하르콘을 몰래 빼돌리는 것도 이제 거의 한계여서 당분간은 더 빼돌릴 수도 없었다.
물론 반드시 탈출에 성공한다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울리히는 그동안 탈출할 힘을 얻기 위해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또 얼마나 참고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 윈프레겐과 엮인 문제도 그렇지만, 전략 참모인 제뮤엘이 공동 연구 계약서를 틀어쥐고 있다. 언제든 내가 더 이상 쓸모없다고 여겨지면 계약서를 공개해 왕국의 첩자로 내몰 것이다.’
제뮤엘은 언제든 계약서를 공개해 자신을 처형시킬 수 있었다. 타인의 변덕에 생사가 달려 있다는 것은 피를 말릴 정도로 숨 막히는 일이다.
언제까지 이런 숨 막히는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울리히는 한적한 곳으로 달아나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새로운 뇌전 마법 연구를 완성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진정한 지식과 힘을 손에 넣게 된다면!
단지 약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멋대로 이용하고 괴롭혔던 모든 자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찾아가 톡톡히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이었다.
‘악행의 대가를 치를 그날을 기대하라!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내게 행한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울리히는 탈출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혔다.
평소 때처럼 한창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실험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병사들이 난입했다.
“울리히 디 쥐세페가 누구인가?”
울리히는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감찰부에서 보낸 병사들이군. 그냥 넘어갈 수 있길 바랐는데 결국 올 것이 왔구나!’
분명 상부의 누군가가 개량된 검술의 출처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혹독한 심문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의지가 굳건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하물며 입이 가벼운 윈프레겐이 어찌 버틸 수 있으랴?
이틀을 버틴 것만 해도 생각보다 꽤 버틴 셈이니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야 하리라.
순간 어차피 이렇게 되었는데 마법으로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도주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너무 때가 좋지 않았다.
목숨이 달린 문제니 결코 경솔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으려면 탈출하기 가장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다.
울리히는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접니다! 제가 울리히입니다.”
“군기문란 혐의로 체포한다.”
철컥!
병사들은 다짜고짜 쇠사슬로 연결된 수갑과 족쇄를 채웠다. 울리히는 어떤 항변도 반항도 하지 않고 순한 양처럼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괜한 저항을 해 봤자 괘씸죄만 추가될 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심문관을 만나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궁리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믿지 않을 테니 큰일이군!’
고작 며칠 만에 병사들이나 쓰는 검술을 개량해 기사들의 정통 검술을 능가하는 검술을 구상해 냈다는 건 누가 들어도 믿지 못할 말이다.
심지어는 울리히 본인조차 자신의 검술이 그리 뛰어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만약 그렇게 대단한 검술이란 것을 미리 알았다면 윈프레겐에게 가르쳐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데, 의심하는 것이 직업인 심문관들이 어찌 믿겠어? 기본 검술을 개량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여 주지 않은 이상 믿지 않겠지. 하지만 인튜이션―리프는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런 식으로 증명하는 것도 불가능해.’
한참을 고심하던 울리히는 생각을 전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어떻게든 심문관을 설득하는 것이다. 내 말을 믿게 하려면 진실을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기본 검술에 가문에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정통 검술을 조금 섞어서 변형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믿을지도 모르지.’
여하튼 울리히는 순진하게도 일단 심문관을 만나면 어떻게든 해명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심문관의 얼굴을 대면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사들은 우선 울리히의 옷을 모조리 벗기고 날카로운 쇠붙이가 달린 채찍으로 기절할 때까지 채찍질하였다.
심문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울며 애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울리히가 정신을 잃자 병사들은 그를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좁은 구덩이에 구겨 넣고 문을 잠가 버렸다.
흔히 우블리엣(Oubliette)이라 불리는 형벌이었다.
잔뜩 웅크린 상태로 꼼짝달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거기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벌레들이 상처를 물어뜯으며 날카로운 침으로 마구 찔러 댔기 때문에 고통과 혐오감으로 진저리를 쳤다.
심지어 벌레들이 쉴 새 없이 달라붙는 통해 잠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기에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추측할 수 있는 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닷새는 지나지 않은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사람은 닷새 이상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어째서 다짜고짜 고문을 하는 거지?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된 걸까?’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신체를 치명적으로 손상하는 처벌이나 고문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부에서 어떤 결론을 내린 것은 아직 아닌 듯했다.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지 점점 논리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어졌다.
기분이 극도로 우울해지며 영원히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이곳에 날 감금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초초하고 불안해지며 가끔 호흡이 가빠지는 증상이 생겼다.
감금 시간이 길어지자 일종의 폐쇄공포증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지 시작한 것이다.
“허억! 허억!”
망상이 심해지며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가 심장과 폐를 짓눌렀다. 근육 경련과 구역질, 어지러움 등의 증상이 동반했다.
극심한 압박감을 느낀 울리히는 처절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우욱! 여…… 여길 나가야 해! 나가고 싶어! 나가게 해 줘!”
하지만 밖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최대한 발버둥 쳐 봤지만 워낙 좁은 공간에 틀어박혀 있어서 조금도 힘을 쓸 수 없었다. 공연히 벌레들만 자극하게 되어 녀석들의 혹독한 반격을 받았을 뿐이다.
“으아아! 으아아악!”
답답한 마음에 짐승처럼 괴성을 내질러 보았으나 조금도 후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악을 써서 그런지 온몸에 기운이 빠지며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위잉―!
탈진한 상태라서 그런지 갑자기 이명(귀울림)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때 귀울림과 동시에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바로 인튜이션―리프(Intuition―leap)였다!
뇌세포가 활성화되며 기묘하게도 마음이 차분히 진정되었다. 무엇이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기 때문이다.
‘이 상태를 지속하려면 뭐든 몰입할 만한 주제를 찾아야 해!’
겨우 되찾게 된 마음의 평온이었기에 어떻게든 인튜이션―리프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울리히는 최근 자신이 몰두하고 있던 것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룬―스톤!
해결되지 않은 룬―스톤 성능 개량 문제가 가장 집착하며 고민하고 있던 것이었다.
순간 룬―스톤이란 단어를 중심으로 그에 관련된 모든 기억들이 울리히의 머릿속에 한꺼번에 떠올랐다.
파앗―!
두서없이 떠올랐던 기억들은 순식간에 재분류되어 정리되었다. 또한 극도로 활성화된 두뇌는 기억에서 얻어 낸 정보들을 즉시 조합하여 새로운 발상들을 뽑아냈다.
발상의 씨앗들은 한순간에 자라나 결실을 맺었다.
그동안 고민했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마나를 응축하기 위한 마법 수식은 순식간에 수정되었다.
이것으로 룬―문자에 세 배 이상의 마나를 모울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상 응축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도 곧바로 깨달았다.
‘오르하르콘 합금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야! 응축 효율을 좀 더 높이려면 새로운 재료가 필요해.’
간단히 해답을 찾게 되자 생각의 흐름은 자연히 다른 주제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