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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20화)
Chapter 06.(4)
울리히는 머뭇거리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그날 윈프레겐이 기사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이 만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윈프레겐의 실력이나 검술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이런 말을 꺼낸 것은 먼저 울리히 자신의 검술을 깎아내려 둬야 설명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즉, 검술 자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몰아갈 수 있다면 자신의 책임은 그만큼 가벼워지는 것이다.
울리히의 말을 들은 심문관은 아군의 주축인 기사단의 체면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건 그렇겠지.”
거기까지 납득시키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설득하기 쉬웠다.
우선 교관들의 기본 검술을 응용해 변형된 검술을 만들어 낸 것을 사실대로 설명했다. 다만 거기에 가문의 정통 검술을 조금 가미하여 검술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덧붙인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심문관을 납득시키기 쉬우리라 판단한 것이다. 때론 진실을 약간 가공해서 들려주는 것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릴 때도 있으니까.
다행히 호른 심문관은 울리히의 말에 그럭저럭 납득하는 것 같았다.
“자네의 천재성이 마도학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에서도 발휘될 줄은 몰랐군. 하지만 그간 자네가 발표한 논문과 연구 성과를 생각하면 아주 믿기지 않는 것도 아니지. 물론 좀 더 세밀히 조사해 봐야겠지만.”
완전히 수긍한 것이 아닌 애매모호한 말투였지만 울리히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심문관이란 직업 자체가 의심이 고질병(?)인 직업이다. 즉, 이 정도로 말한다면 완전히 납득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앞으로 수차례 반복될 심문에서 지금 내뱉은 답변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울리히는 절대 망각을 모르는 완벽한 기억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조금도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감이 들 때 즈음 호른 심문관이 갑자기 의외의 말을 꺼냈다.
“자네에게 솔직히 말해 두지! 훈련 교관들의 하극상 문제 때문에 이번 사건에 착수하게 되었지만, 기사단의 위신 문제도 있고 해서 애초에는 이렇듯 대대적인 조사를 할 계획은 아니었지.”
울리히는 자신의 추측과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른 심문관은 강조하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분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도 높으신 분이 보고서를 보고 이번 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네. 특히 그분은 뛰어난 무예를 익히고 계셔서 그런지 자네가 고안한 검술 동작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계신 듯하네.”
말을 듣는 순간 울리히의 머릿속은 온갖 추측들로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높으신 분이라…….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여하튼 그자의 개입 때문에 날 이렇듯 혹독하게 다룬 것이구나!’
원래 높으신 분이 움직이면 아랫것들이 놀라 필요 이상으로 수선을 떨게 마련인데, 그건 아랫것들의 자리(직위)가 높으신 분의 한 마디에 좌지우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사단의 체면 때문이라도 은근슬쩍 덮고 넘어갈 이 사건을 이렇듯 집요하게 조사하게 된 것은 틀림없이 그분이 관심을 보였다는 이유 때문이리라.
‘누군지 모르지만 그의 개입으로 이번 사건이 매우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어! 게다가 그자가 정말 무예에 조예가 깊다면 가문의 정통 검술을 조금 가미했다는 내 거짓말을 눈치챌 수도 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 거짓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밝혀질지도 모르는 거짓을 덧붙인 것은, 자신의 검술을 가능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평가절하(?)해 둬야만 했기 때문이다.
포로로 잡혀 온 이후 울리히는 지금까지 제국에 성실히 협조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기 위해 마도학이나 금속 연금술에 관한 연구 결과를 꾸준히 발표했다.
하지만 검술 연구 분야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절대 밝혀져선 안 되었다.
암흑제국 테넨로베프는 마법보다는 검술이 발달된 곳이다.
즉, 마도학에 재능이 있다는 것과 검술 연구에 재능이 있다는 건 그 중요도과 이용 가치에 있어서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그렇게 중요 인물로 낙인찍히게 되면 감시 수준이 더욱 높아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곳을 탈출하기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뒤끝이 개운치 않으리라 예측하면서도 말을 꾸며 둔 것인데, 높으신 분(?)이라는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나타나면서 앞으로의 상황을 예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역시 실험 상황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불필요한 변수를 배제하는 것이 어렵다.
몇 마디 말로 울리히를 심각한 혼란 속에 몰아넣어 버린 심문관은 곧이어서 말을 꺼냈다.
“특별히 자네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유로 가능한 철저히 심문해야 하니 번거롭더라도 협조해 주게나.”
추측과 근심으로 머릿속이 꽤 복잡한 상태였지만 울리히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태도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성실히 답변하겠습니다.”
심문은 이후로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그간 울리히는 황당한 억측으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혹은 윈프레겐 등과 대질심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절대 무엇 하나 잊어버리는 일이 없는 비상한 기억력 덕분에 단 한 번도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
이제는 세상의 어떤 심문 전문가(?)가 찾아와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그런데 단 한 차례도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문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여하튼 고문을 병행하지 않는 걸 보면 다행히 내 말을 의심하는 것 같진 않구나! 언제까지 심문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풀려날 수 있을 거다. 조금만 더 인내심 있게 참고 견뎌 보자!’
울리히의 추측대로 심문관들은 그의 답변에서 의심스런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높으신 분’에게 이렇듯 총력을 기울여 수사하고 있다는 걸 알릴 필요성이 있기에, 순전히 보여 주기 위한 심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시 행정의 병폐를 보여 주는 좋은 예시라 할 수 있었다.
여하튼 보여 주기가 목적이라 그런지 이번 심문에 수많은 숫자의 심문관이 동원되었다. 울리히 역시 매번 다른 심문관을 통해 처음부터 다시 심문을 받게 되었다.
‘휴우. 이번이 열일곱 번째 심문관이군.’
심문관이 달라졌지만 옭아매려는 수법이 대부분 비슷해서 상대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간혹 제법 예리하다 싶은 질문들도 있었지만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질문이라 간단히 응수할 수 있었다.
심문받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충분한 자료가 축척되자 울리히의 천재성은 심문에 대응하는 방식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하지만 인생사 거의 모든 일이 그렇듯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돌발적인 변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원래 좋은 일 하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
여느 때처럼 심문관의 말에 침착하게 답변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심문실의 문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레온 심문관님! 잠시만 심문을 멈춰 주십시오.”
병사의 외침에 심문관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마땅찮은 듯 외쳤다.
“대체 무슨 일인가?”
사실 심문 도중에 이처럼 방해를 받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문이라는 것은 원래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항복을 받아 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병사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였다.
“황자님이 직접 오셨습니다!”
“뭣?! 황자님께서 친히?”
화들짝 놀란 심문관은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어서 문을 열어 드려라!”
그들의 대화를 들은 울리히 역시 흠칫 놀랐다.
‘황자라니? 설마 아말락기흄 황자를 말하는 건가?’
지금까지 울리히는 황자의 모습을 한 번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없었으며, 단지 소문으로만 전해 들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단지 암흑제국이라 불리는 테넨로베프의 황제인 이스칸다르의 다섯 번째 아들이라는 사실과 포스를 오러로 전환해 발출할 정도로 뛰어난 무예를 갖췄다는 것 정도였다. 또한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온화하여 모든 가신들의 진심 어린 충정을 이끌어 내는 기묘한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어째서 황자씩이나 되는 자가 지저분한 심문실까지 몸소 찾아온 거지? 단순히 내가 개량한 검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 생각해도 될까? 아니, 지금은 그런 것보다 거짓을 들키지 않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만약 아말락기흄 황자가 전해 들은 것처럼 뛰어난 무인이라면 가문의 검술을 조금 가미해 기본 검술을 개량했다는 거짓말 정도는 금방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개량한 검술의 뛰어남을 감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덜컥―!
고심하던 그때 문이 열리며 한눈에도 고귀해 보이는 젊은 사내가 등장했다.
무인답게 극도로 단련된 근육질이었지만 키가 커서 둔탁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황금을 가늘게 뽑아 만든 듯한 눈부신 금발과 서늘한 빛을 뿜어내는 푸른 눈동자가 섬세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눈빛은 강렬했지만 표정은 온화해 보였다.
강인함과 섬세한 인상이 절묘하게 뒤섞여 한 마디로 단언하기 힘든 위엄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신분에 걸맞은 화려한 복색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설령 남루한 옷을 입었다 하여도 고귀한 혈통임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리히는 황자의 압도적인 위엄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아말락기흄 황자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라!”
울리히는 황자의 명령대로 고개를 들다가 그와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기이하게도 겹겹이 쌓아 두었던 마음의 방벽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 갑자기 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지?’
황자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어찌 된 영문인지 마음의 무장이 해제되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다.
그런가 하면 마치 신을 대면한 성직자처럼 마음속에 경건한 느낌이 가득 차올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하고 충만한 이 느낌! 모든 불안과 경계심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울리히는 황자의 카리스마에 매료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에 저항할 마음조차 들지 않을 만큼 마음이 온통 평화로웠다.
아말락기흄 황자는 부드럽지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응용한 검술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해 보라!”
“네! 황자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울리히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응용 검술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심문관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조금도 거짓을 덧붙이지 않았으며, 의도적으로 사실의 일부를 숨기지도 않았다.
“아! 순전히 발상의 전환만으로 응용 검술을 만들어 내다니! 그대는 과연 진정 천재라 불릴 자격이 있는 자로구나!”
“감사합니다, 황자님!”
울리히는 칭찬에 몹시 감격하며 기뻐했다. 그것은 부모나 형제, 혹은 사모하던 여인에게 인정받은 것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충만한 기쁨이었다.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울리히는 황자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열렬한 충성을 바치지 않고선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몹시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 모두 아말락기흄 황자의 기이한 카리스마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자는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말했다.
“그동안 포로 취급에 혹독한 심문까지 받느라 많이 서럽고 힘이 들었겠구나. 하지만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재능을 알게 되었고, 너를 선택할 것이니, 이제부터 포로가 아니라 나의 소중한 신하가 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황자님! 감사합니다!”
황자의 말을 들은 울리히는 더할 나위 없는 감격에 목이 콱 막혔다. 온화한 미소를 계속 유지하며 아말락기흄 황자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내게 더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순간 울리히는 인튜이션―리프를 떠올렸다.
축척한 정보를 조합하여 한계를 뛰어넘는 비약적 도약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 지금까진 비밀로만 간직해 왔지만, 사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단단히 걸어 뒀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울리히는 마치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조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인튜이션―리프에 대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이명(귀울림)이 들려왔다.
위이잉―!
동시에 익숙한 감각이 찾아오며 주위의 풍경이 일렁이다가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보이는 것은 오직 황자의 푸른빛 광체를 뿜어내는 눈동자뿐!
그렇다! 인튜이션―리프(Intuition―leap)가 발현된 것이다.
온몸의 핏기가 싸악 가시는 듯한 느낌과 함께 울리히는 갑자기 냉정을 되찾았다.
‘어째서 아말락기흄 황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거지? 도대체 그의 뭘 믿고 경계심을 완전히 놓아 버린 걸까?’
또한 돌연 인튜이션―리프 상태가 되었다는 것도 수상했다.
지금까지는 흥미, 몰입, 한계(위기)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발현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에 몰두하거나 강한 흥미를 가진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딱히 한계상황인 것도 아니…….
그 순간 울리히는 돌연 깨달았다.
‘잠깐! 한계상황? 그렇다면 내가 지금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뜻일까?’
풀숲에 숨어 있는 뱀을 건드린 것처럼 가슴이 서늘해지고, 전신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없이 온화해 보이던 황자의 눈빛이 이제는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처럼 잔뜩 탐욕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황자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뭐든 결코 순수한 호감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생각은 길었지만 실제로 1초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인튜이션―리프에 대해서만큼은 감춰야겠다고 생각한 울리히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제가 황자님께 감히 무얼 감출 수 있겠습니까? 이미 숨김없이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뿐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도록 해라.”
다행히 황자는 별달리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울리히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화가 그렇게 끝나자 아말락기흄 황자는 주위에 도열해 있는 수하들을 둘러보며 명령을 내렸다.
“이제 심문을 중단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풀어주어라!”
“네! 황자님.”
“그리고 울리히란 자는 내가 데려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