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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21화)
Chapter 06.(5)


“도대체 뭐였을까?”
심문에서 풀려난 울리히는 한동안 아말락기흄 황자의 신비한 카리스마에 대해 생각했다. 실로 기묘한 부분은,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에 있었다.
울리히는 실로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기에 언제든 눈을 감으면 그날 일이 바로 지금 겪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결코 잊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황자와 대면한 기억은 안개에 휩싸인 듯 흐릿하게만 남아 있었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는 건 울리히에게 몹시 생소한 경험이었기에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인튜이션―리프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함락되어 버렸을 것이다. 또한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황자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겠지.’
기이한 카리스마의 정체가 뭔지는 아무리 고심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번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런데, 황제와 자주 접촉하는 고위층의 수하들은 모두 그의 충신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황자의 카리스마도 결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신묘한 카리스마를 항상 사용할 수는 없는 듯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 기이한 기운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추측컨대 지속 시간이 짧거나 어떤 부작용이 있어서 중요한 순간에만 사용하는 듯했다.
‘하긴 나의 인튜이션―리프 능력도 잠시만 사용해도 부작용이 심한 편이니까.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해 두면 되겠지.’
여하튼 아말락기흄 황자는 약속대로 울리히를 포로 신세에서 해방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테넨로베프 제국의 시민권을 만들어 주었다. 타국의 사람이 제국의 시민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몹시 파격적인 대우였다.
사실 속주국(식민지)의 경우 안전보장 명목으로 수입의 10%를 추가로 거두어들인다. 하지만 시민권을 가진 자는 이 속주세를 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공정한 재판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문책이나 고문을 받지 않게 된다.
즉, 제국의 시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제국의 시민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많은 혜택을 보장받았기에 울리히의 마음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아말락기흄 황자가 내게 이렇듯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는데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할 필요가 있을까?’
솔직히 말해 대륙의 정세는 테넨로베프 제국을 중심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고국인 마도왕국, 체브멘티온은 이미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또한 현시점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테넨로베프 제국과 맞설 만한 강대국은 없었다. 약소국끼리 연합한다고 해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듯싶었다.
즉, 실익을 추구하려면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자의 파격적인 대우에 단 한 순간의 흔들림조차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울리히는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이름을 드높이는 데 별로 욕심이 없었다.
일종의 가진 자의 여유랄까?
귀족가의 자제로서 풍족한 삶을 살아왔고, 마도학자로서 충분히 명성을 떨쳐왔기 때문에 부와 명예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 없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오직 더욱 지혜로워지는 것뿐이었다.
충만한 지혜로 세상에 감춰진 모든 지식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여하튼 울리히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냉정한 태도로 상황을 분석할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대로 눌러앉기엔 걸리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역시 황자의 기묘한 카리스마가 마음에 걸려! 게다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황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필연적으로 시기와 질투를 불러오기 마련이겠지?’
정체불명의 카리스마 덕분에 황자는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또한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듯이 뛰어난 천재성은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과거 로열 아카데미에서 생활했을 때는 귀족 혹은 교수라는 신분이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또한 마도학 실험에만 지독하게 몰두하여 실험 조수를 제외한 사람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과 마찰을 빚을 상황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갑작스럽게 황자의 눈에 들게 되었지만, 자신에겐 지지기반이라고 할 만한 세력이 전혀 없었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심문받는 동안 전혀 도와주지 않았던 전략 참모 제뮤엘과,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울리히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한 윈프레겐뿐이었다.
둘 다 눈곱만큼도 신용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앓느니 그냥 죽고 말지! 내가 그자들을 어떻게 믿겠어?’
딱히 비빌 언덕이 없으니 이곳에 버티고 있다간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에 말라죽게 될 것이다. 높으신 분들은 질투도 살벌하게(?) 하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죽기 딱 알맞다.
시민권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역시 계획대로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아말락기흄 황자가 그를 검술 사범으로 임명해 버렸다.
‘어째서 내게…… 가당치도 않은 직위를 내리는 거지?’
일반 중보병들을 훈련시키는 훈련 교관들과는 달리 검술 사범은 기사들을 지도할 권한과 의무를 가진 높은 직위였다.
보통 퇴역한 기사단장 출신이나 전장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기사들이 검술 사범이 된다. 즉, 명예와 실력을 모두 갖춘 자만이 설 수 있는 특별한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문외한으로 보이는 학자가 임명된다면 기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를 곤경에 처하게 하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처음엔 무턱대고 원망만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황자의 속셈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보병들이 쓰는 기본 검술만으로 뛰어난 응용 검술을 창안해 냈으니, 정통 검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기사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리라 생각한 거겠지? 또한 아직 나에 대해 파악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테니, 검술 사범이란 애매한 직책을 내린 거겠지.’
사실 검술 사범이란 직책은 일종의 명예직으로, 실제로 기사들을 지휘할 권한은 없었다. 즉, 혹여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더라도 검술 사범이란 직책만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것이다.
또한 검술 사범이라는 직책도 엄밀히 말해 군인 신분이다. 상부의 명령 없이는 지정된 곳에서 이탈할 수 없으니, 이로써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차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무단으로 이탈하면 탈영!
시민권을 줘서 자유 시민으로 만들어 주고, 검술 사범이라는 허울 좋은 직책에 임명했지만, 결국엔 자유롭지 못하다는 면에서는 포로 신세였을 때와 별다를 것이 없다.
‘그나저나, 기사들과 필히 무력 충돌이 생길 것 같은데, 인튜이션―리프를 마음대로 쓸 수 없으니 이것 참 큰일이군. 참!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기사들과 대신 충돌해 줄 방패막이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적임자(?)가 곧 머릿속에 떠올랐다.
울리히는 하인을 보내 훈련 교관인 윈프레겐을 불러오게 했다.
훈련 교관이라 해도 검술 사범에 비하면 한없이 하찮은 직위였기에 윈프레겐은 꼼짝없이 불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윈프레겐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지…… 지난번 일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스승님!”
그의 말을 들은 울리히는 실소를 머금었다.
‘용서라는 말을 참 쉽게 하는군.’
지독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던 광경이 머릿속에 선연히 떠오르는데 어찌 간단히 용서를 바란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지난번 사건 때문에 그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갚아 주는 건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리라.
울리히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자네에게 맡길 일이 있으니 부디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거절이라뇨?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검술 사범이 명예직에 불과하긴 해도 엄연히 훈련 교관보다는 한참 계급이 높았다. 가득이나 하극상 문제로 한동안 혹독한 고문과 문초에 시달렸는데, 또다시 말썽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또 문제를 일으켰다간 정말로 머리가 뎅강 잘려 나가게 될 테니까.
윈프레겐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울리히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기사들은 거칠고 난폭하기 마련이니 나같이 허약한 학자가 어찌 감당하겠나? 혹여 검술을 지도하는 도중에 돌발 상황이 일어나면 자네가 나 대신 그들을 상대해 주게.”
기사들을 상대하라는 말에 윈프레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에야 만취한 상태라 겁 없이 검을 뽑아 든 것일 뿐! 귀하신 분들에게 자꾸 미움을 사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실 지금도 지난번 기사들이 보복해 올까 봐 몸을 잔뜩 사리며 지내는 처지였다.
하지만 윈프레겐은 울리히의 요청을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검술 사범이란 직책도 마음에 걸리지만, 그가 최근 황자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사방에 파다했기 때문이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이미 잔뜩 미움을 사게 된 상황이니, 어찌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으랴?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으니, 그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하겠습니다! 스승님.”
사실 울리히는 윈프레겐에게 개량한 검술을 모두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를 방패막이로 내세워야 했기 때문에 그날부터 좀 더 상세히 가르치기 시작했다.
윈프레겐은 기본기와 체력이 충실한 편이라 가르침을 잘 따라왔다.

조금 있으면 가르치게 될 기사들과 첫 대면을 하게 된다.
기사들이 시비를 걸어올 것은 거의 틀림없었기에 울리히는 다소 긴장되었다.
‘처음부터 너무 강한 놈이 나서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윈프레겐은 얼마 전 기사들과 시비가 붙었고, 어렵지 않게 그들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기사들은 기사 서임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송이들에 불과했다.
이후 추가로 검술을 가르치긴 했지만, 실력이 출중한 기사와 맞붙어도 이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울리히의 불안해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윈프레겐이 당찬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승님. 전 지금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호언장담하는 윈프레겐의 말을 듣고도 울리히의 표정은 별로 밝아지지 않았다. 평소에 별생각 없이 큰소리를 잘 치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리히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허튼소리 말고 신중하게 상대해! 만약 패한다면 덮어 두기로 한 지난번 일까지 모두 싸잡아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테니까.”
혹독한 대가라는 말에 움찔한 윈프레겐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역시나 별로 미덥진 않았다.
울리히는 윈프레겐과 함께 연무장으로 들어서며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제발 센 놈은 덤비지 마라!’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자 대략 스무 명 정도의 기사들이 나란히 도열해 서서 마치 적을 맞이하듯 흉흉한 눈빛을 쏘아 내고 있었다. 어느 집단이나 처음엔 텃세를 부리기 마련이지만, 이건 살기가 흉흉할 정도니 정도를 한참 지나쳤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적국의 포로 출신에 학자 나부랭이라서 그렇겠지? 원치도 않은 자리 때문에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건지, 원!’
황자의 지시에 항명할 수는 없으니 푸념해 봤자 의미 없는 짓일 뿐이다.
그때 미리 맞춰 두기라도 한 듯 건장한 체구의 기사 한 명이 다짜고짜 불쑥 걸어 나오며 지극히 불량스런 어조로 외쳤다.
“사범님! 저희는 아무에게나 가르침을 받지 않습니다! 가르칠 만한 실력이 되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기사의 말에 울리히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날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저렇게 나올까? 하긴,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나 있을지 의문이 생기는 부실한 몸으로 보일 테니, 저런 식으로 나올 수도 있겠지.’
그간 나름 체력 단련을 했지만 하루아침에 건장한 몸으로 탈바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