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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22화)
Chapter 06.(6)
기분이 상한 울리히는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무나 덤비는 족족 상대해 줄 만큼 한가한 몸이 아니다! 나를 상대하고 싶으면 우선 내 제자를 쓰러뜨려 봐라!”
기사가 무어라 응수하기도 전에 윈프레겐이 성큼 나서며 외쳤다.
“너희들 따위가 스승님을 상대하려면 백 년은 이르다! 스승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나부터 먼저 쓰러뜨려 보아라!”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기사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오냐! 네놈의 혀부터 베어 주마!”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맹렬한 속도로 검집을 빠져나온 칼날이 힘차게 허공을 가른다.
쉐에엑―!
포스(Force)의 힘 때문인지 기사의 검이 먼저 윈프레겐의 면전으로 들이닥쳤다. 하지만 윈프레겐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틀며 검을 교묘하게 마주 찔러 들어갔다.
바로 울리히에게 배운 변형된 검술 동작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검의 궤도와 방향이 교묘하여 도저히 부상을 피할 수 없는 상황!
이대로라면 둘 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된다.
결국 검을 되돌리며 물러난 것은 젊은 기사 쪽이었다. 훈련 교관 따위와 동시에 부상을 입어 봤자 치욕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상황이다.
젊은 기사가 흠칫 몸을 빼내자 윈프레겐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승님이 일러 준 대로 저 기사 놈은 고작 체면 때문에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구나!’
사실 젊은 기사의 검이 더 빨랐기에 동시에 부상을 입는다고 해도 윈프레겐 쪽이 더 심하게 다칠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약간의 상처를 감수하면 간단히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만한 기사는 윈프레겐을 상대로 조금도 체면 구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있었기에 얼마든지 이길 수 있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이제는 그것이 착각이자 오만에 불과하다는 걸 톡톡히 깨우쳐 주기만 하면 되었다.
슈아악―!
윈프레겐의 검을 통해 폭풍처럼 검술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연속 동작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공격!
윈프레겐 역시 예전에 혹독하게 당해 보았기에 이 검술이 소름 끼치도록 정밀하고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려든 파리처럼 아무리 열심히 발버둥 쳐 봐도 집요하게 옭아매는 이 연결 동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대는 그저 검을 사용해 열심히 공격을 막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버티기만 하다 보면 아무리 포스 유저라도 체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다.
채앵! 챙!
“크윽!”
답답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온 직후부터 젊은 기사는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윈프레겐은 더욱 전력을 다해 검술을 펼쳐 상대를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콰앙!
결국 연이은 충격으로 피투성이가 된 손아귀에서 검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슈아악―!
윈프레겐의 검은 곧바로 상대의 목을 파고들었다.
미련하게 버티다간 목이 잘릴 판이라 젊은 기사는 다급히 입을 열어 소리쳤다.
“하…… 항복!”
완벽한 승리!
윈프레겐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들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자! 덤빌 사람은 어서 덤벼!”
그날 윈프레겐은 다섯 명의 기사를 쓰러뜨렸지만 울리히와 미리 상의한 대로 아무에게도 부상을 입히진 않았다. 오만한 기사들의 콧대를 꺾어 놓으려는 목적이었을 뿐, 그들과 원수가 되길 바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단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다섯이 쓰러지자 기사들의 기세가 한층 꺾인 듯했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한꺼번에 덤비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했는데, 다행히 완전히 애송이들은 아니어서 최소한의 자제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여하튼 진정된 것 같아 다행이군! 이제 강의를 시작해 볼까?’
울리히는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한 적이 있기에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 자체에 별다른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때는 이렇게 난폭한(?) 학생들을 다루지 않았을 뿐이다.
울리히는 우선 기사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울리히 디 쥐세페다. 원래는 마도학을 전공하고, 마도학과 금속 연금술 연구에 전념해 왔지만, 아말락기흄 황자님의 명령대로 이제부터 너희들의 검술 사범이 되었다.”
황자의 이름을 슬쩍 들먹이자 기사들은 예상대로 반응을 조금 보였다.
‘역시 아말락기흄 황자는 모든 가신들에게 인기가 많구나.’
기이한 카리스마 덕분인지 황자는 수하들 모두에게 인기인(?)이었다.
울리히는 은근한 어조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은 가르치는 건 어디까지나 황자님의 뜻이다. 즉, 너희들이 나의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황자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긴 했지만 기사들은 이 말에 눈에 띄게 동요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는 잔뜩 긴장해서 몰랐는데 다들 체격이 건장하지만 얼굴이 꽤 젊어 보였다. 기사들의 반응을 찬찬히 살핀 울리히는 그중 가장 동요하는 듯 했던 주근깨투성이의 젊은 기사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네? 필립 데 크레시앙…….”
젊은 기사는 무심코 대답했다가 흠칫 말을 멈췄다. 질책하는 듯한 동료들의 눈빛이 한꺼번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울리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질문을 이어 갔다.
“그래, 필립!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면 대답해 보게. 나이가 어떻게 되지?”
필립이란 기사는 이미 대답해 버렸기 때문인지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스물둘…….”
존대를 붙이지 않는 것이 마지막 자존심인지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입을 열게 한 것이 어딘가? 울리히는 일단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보통 스무 살 전후로 기사 서임을 받는다는 걸 고려하면, 그리 실전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겠군. 다행히 다들 젊어서 굉장한 실력자는 없었구나!’
알고 보니 이들은 기사 서임을 받은 지 1년에서 최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서임을 받은 지 채 3개월도 안 되는 애송이들보다야 낫겠지만, 당연히 감탄할 정도의 실력은 없었고 포스의 총량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또한 따져 보니 신흥 귀족 출신이라 정통 귀족들만큼 고지식한 혈통도 아니었다.
‘비록 적국이지만 정통성으로 따지면 내가 더 순혈 귀족(?)에 가까운데, 다들 귀족이라고 무게 잡고 있으니 우습군.’
사실 울리히는 아주 어릴 때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기 때문에 귀족주의적인 권위 의식에 그리 물들어 있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는 원칙적으로 학생들을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직적인 차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여하튼 필립이란 녀석이 말문을 연 것을 계기로 침묵시위(?)는 별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기사들도 차츰 입을 열었다.
‘기사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여 부담스럽게만 생각했는데, 다들 어린 나이라 그런지 아직 순수한 면이 있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구나.’
사실 울리히 역시 그들과 비슷한 또래였지만, 일찍부터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또한 마도학을 연구하며 학자들만 상대하다 보니 나이에 비해 상당히 조숙한 편이었다.
젊은 기사들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이성 문제나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점이 비슷했다.
뭐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그날 수업은 그렇게 간단한 대화만 나누며 서로 간의 긴장감을 다소 낮추는 것으로 만족했다.
‘뭐, 이런 식이라면 금방 친해질 수 있겠지.’
울리히는 기사들에게 존경받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수준으로 수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어차피 원해서 검술 사범이 된 것도 아니라서, 갑작스럽게 임명된 직책에 특별한 자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울리히는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되었다.
다음 날 같은 시각에 찾아갔을 때 연무장이 텅 비어 있었다.
‘설마…… 수업 거부?’
어제의 분위기만 해도 그럭저럭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었기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소 당황했지만, 울리히는 예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젊은 기사들의 단체 행동은 아닐 거다. 어제는 분명 그만한 조직력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분명 뒤에서 지시를 내린 자가 있겠지.’
젊은 기사들에게 압력을 넣을 만한 자가 누구일지 짐작해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은 무척 자부심이 높은 존재다. 즉, 기사들은 고집이 센 편이라 남의 말을 쉽게 따르지 않는다. 지금 그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건 기사단장이나 검술 사범들뿐이었다.
‘기사단장은 곧 있을 출정 준비로 몹시 바쁠 테니 젊은 기사들의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터! 그렇다면 검술 사범들 중 누군가가 내게 시비를 걸어오고 있다고 봐야겠군.’
사실 기존의 검술 사범들이 갑작스럽게 임명된 자신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만 이렇듯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
거기까지 추측한 울리히는 곁에서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윈프레겐에게 신속히 지시를 내렸다.
“가서 기사들이 이전에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는지 알아봐 주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윈프레겐이 보고했다.
“대부분 볼켄 사범님과 브루넨 사범님 밑에 있었다고 합니다.”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울리히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에 대해서 자네가 아는 대로 모두 말해 보게.”
윈프레겐은 높으신 분들에 대해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운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저어……. 제가 아는 건 그분들 성함과 연세뿐입니다.”
“괜찮으니 그거라도 말해 보게.”
윈프레겐은 울리히의 재촉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볼켄 사범님은 올해 72세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곧 은퇴를 앞두고 계신 분입니다. 브루넨 사범님은 54세로 아직 정정하십니다.”
너무나 간단한 설명이었다. 알고 있는 게 분명 더 있을 거라 추측한 울리히는 은근슬쩍 그를 재차 재촉하며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윈프레겐은 입이 가벼운 편이라 버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브루넨 사범님이 울리히 님의 가르침을 받지 말라 하였다는 말이 언뜻 들렸습니다.”
울리히는 윈프레겐의 말을 듣고 거의 확신했다.
‘뒤에서 수작을 부린 건 브루넨이라는 자로구나! 하긴, 자격도 없는 자가 갑자기 나타나 자기 밥그릇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그럴 만도 하지.’
울리히는 모략과 술수에 얽혀 드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싫어서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렇게 된 이유는 순전히 아말락기흄 황자의 일방적인 결정 때문이었다.
잠시 황자의 그늘에 기대는 건 어떨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이번 일로 울리히의 마음은 황자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이제 그 누구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나를 이용하거나 귀찮게 구는 건 못 참아! 이만하면 참을 만큼 참았어! 가능한 빨리 탈출해서 마도학 연구에만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야겠다.’
울리히는 그저 로열 아카데미에서 마도학 연구에만 몰두하던 시절이 그리웠다.
온전히 좋아하는 일에만 몰입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황홀한 행복인가?
이제 며칠만 지나면 출정식을 하게 된다.
울리히는 출정 준비로 다들 바쁜 틈을 타서 이곳을 탈출할 계획이었다. 기사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때까지만 별 탈 없이 버티면 되는 문제다.
문제는 브루넨 사범이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에 무탈하게 지내긴 글렀다는 것이었다.
‘고약하게 굴지 않아도 어차피 이곳을 떠날 텐데, 고작 며칠을 기다리지 못해서 이렇듯 날 괴롭게 하는군!’
귀찮았지만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뭔가 문제가 생겨 주목을 받게 되면 탈출 계획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울리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윈프레겐에게 말했다.
“휴우……. 골치 아프군. 당장 브루넨 사범을 찾아가 이렇게 전하게! 인사가 늦은 것 같아 죄송하게 생각하며, 언제든 한 번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한다고 전해 두기만 하게.”
“알겠습니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