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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학자 1권(24화)
Chapter 07.(2)


“파격적인 조건을 내거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그 이유만 속 시원히 알려 주신다면 기꺼이 협조하겠습니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교수의 태도에 울리히는 짜증이 치밀었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지어내 주지!’
연구비 지원이란 지키지도 못할 약속까지 내뱉었으니 어차피 내친걸음이었다.
자칫하면 뇌와 내장이 녹아 끔찍하게 죽을 판인데, 몇 마디 말을 꾸며 내는 게 무슨 대수인가?
울리히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은 아말락기흄 황자님께서 제게만 따로 지시한 것이 있습니다. 기밀 사항이지만 그리 궁금해하시니 렉티오 교수님께만 은밀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황자님께서 지금 비밀 작전을 구상하고 계신 중인데, 거기에 특수한 약물을 필요로 하십니다.”
연구와 실험만 몰두하는 학자들은 자신의 전공과 관련되지 않는 분야에 대해선 다소 순진한 구석이 있다. 울리히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변이나 대인 관계에 상당히 서투른 편이었다. 다만 시련과 고통이 점차 그를 잡초처럼 억세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렉티오 교수 역시 순진한 면모가 있어서 울리히가 꾸며 낸 말을 쉽게 믿어 버렸다.
“특수한 약물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까지 알게 된다면 렉티오 교수님 역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발설하지 않으리라 맹세하실 수 있겠습니까?”
울리히의 심각한 어조에 렉티오 교수는 덜컥 겁이 났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입이 무겁지 않으니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습니다.”
“현명하게 판단하셨습니다. 황자님께서 이 일을 굳이 문외한이 저에게 부탁하신 것도 각별히 기밀에 신경을 쓰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약리 연금술에 문외한인 저에게 맡기면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역발상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역시 황자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감히 쫓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사실 렉티오 교수가 이처럼 쉽게 납득한 이유는 황자를 깊이 존경하고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꾸며 낸 말로 렉티오 교수를 설득한 울리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역시 아말락기흄 황자가 가진 기이한 카리스마 때문인지, 황자의 이름을 언급하며 설명하니 뭐든 쉽사리 납득해 버리는구나.’
렉티오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정을 알았으니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일에 관한 건 가급적 비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 시각부터 울리히는 렉티오 교수의 지도 아래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추천해 주는 기초 약리학 서적을 빠른 속도로 읽으며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즉시 질문을 던졌다.
점심때가 되자 렉티오 교수는 몹시 감탄한 듯 말했다.
“그리 빨리 읽으시면서 모든 걸 기억하시다니! 과연 마도학의 천재라 불리신 이유가 있었군요. 울리히 님이 지금까지 약리 연금술에 관심이 없으셨던 것이 제겐 천만다행입니다! 만약 관심이 있으셨다면 제가 이 분야에서 자그마한 명성이나마 얻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 대놓고 과찬하시니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단순히 암기력이 조금 좋을 뿐인데 너무 과찬하시는군요.”
“아닙니다! 암기력뿐만 아니라 이해력도 범상치 않으십니다. 이젠 제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에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운이 좋게도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어서 성취가 조금 빨라진 것뿐입니다.”
울리히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어떤 분야에 특출한 업적을 쌓았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렉티오 교수의 경우는 예외였다.
어려운 개념을 몹시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재능이 있어서 더욱 빨리 배울 수 있었다. 즉, 훌륭한 학자이자 스승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재능이 울리히의 천재성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그 증거로 울리히는 오후 무렵이 되자 렉티오 교수의 학식을 가볍게 능가해 버렸다.
‘인튜이션―리프를 여러 번 경험하면서 뇌가 자극을 받아서 그런가? 왠지 예전보다 머리가 더 좋아진 것 같은 기분이야.’
여하튼 울리히는 렉티오 교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약리 연금학을 충분히 익혔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에 재능을 마음껏 뽐내다 쓰라린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너무 철이 없었지.’
처음에는 우수한 학생인 자신을 가르치는 데 보람을 느끼던 교수들!
하지만 결국 그들을 훨씬 뛰어넘는 천재성이 드러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다들 멀리하게 되었다. 교수가 학생보다 못하다는 건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Species)을 보는 듯한 눈빛! 그 차가운 시선에 어린 시절의 울리히는 꽤나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울리히는 렉티오 교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연구실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저도 제 일이 있으니 하루 종일 약리 연금술에만 매달릴 수는 없으니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뛰어난 학생을 가르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저 역시 더 늦기 전에 연구실로 직행해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렉티오 교수가 자리에서 급히 몸을 일으켰을 때 울리히가 재빨리 말했다.
“교수님! 괜찮으시다면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몇 가지 약물을 조금씩 가져다 써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 사용한 약물의 가격은 지불하겠습니다.”
“얼마든지 가져다 쓰셔도 괜찮습니다! 약물의 여유분이 별로 없을 경우엔 실험 조수들에게 따로 일러두시면 가져다 드릴 겁니다. 이게 다 황자님을 위한 일인데 어찌 돈을 받겠습니까?”
“흔쾌히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외부에서 약물을 사들이면 너무 늦을 뿐 아니라 왕실의 첩자들에게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처럼 렉티오 교수의 허락을 맡아 둔 것이다.

푸른색이었던 시약의 색이 점차 붉게 변했다.
“젠장!”
시약병을 들여다보던 울리히는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저속한 말을 내뱉었다. 그처럼 흥분한 이유는 시약 테스트 결과 자신이 복용한 만성독의 정체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에칼드(Ekard)라 불리는 이 만성독은 암살자들이 주로 쓰는 것인데, 뱀독과 광물독 등 일곱 가지 독성분을 혼합해 만든 것으로 해독제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있지도 않은 해독제로 날 조정하려 한 것이군!’
울리히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갑자기 흥분한 탓인지 머리와 아랫배의 통증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크윽!”
격렬한 두통이 머릿속을 파고들고, 아랫배가 후끈 달아오르며 창자가 가닥가닥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8시간!
그 시간 안에 해독제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1차적으로 뇌와 내장이 녹기 시작하며 멍청해질 것이고, 결국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죽게 될 것이다.
울리히는 저도 모르게 무심코 중얼거렸다.
“뭔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돼.”
이제 울리히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인튜이션―리프(Intuition―leap)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인튜이션―리프 현상은 울리히의 의지로 활성화되지 않았다.
흥미와 몰입, 그리고 한계상황! 이 세 가지가 최소한의 발현 조건이다.
사실 울리히는 자신의 안위가 달린 이 실험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극도로 몰입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튜이션―리프가 발현되지 않은 건 역시 극단적인 한계상황에 내몰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정도의 위기감으론 아직 부족하단 말이지? 그렇다면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진짜 위기를 경험하는 수밖에 없겠군!’
마음의 결단을 내린 울리히는 실험 조수들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그런데 그는 조수들을 불러다 놓고 막상 무언가 망설여지는 듯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조수들 중 대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셨습니까?”
“후우.”
대답 대신 돌연 깊이 심호흡을 한 울리히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미리 챙겨 둔 각종 포션들을 탁자 위에 모두 꺼내 놓으며 말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응급조치를 해 주기 바란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유명한 격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각오를 다진 울리히는 초록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수상한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크억!”
지독한 독이 식도와 내장을 녹여 버렸기 때문에 울리히는 피를 울컥 쏟아 냈다.
“엇?! 울리히 님!”
“이…… 이게 무슨?”
깜작 놀란 조수들은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포션을 집어 들고 다가왔다. 하지만 울리히는 손바닥을 내저으며 포션을 거부했다.
‘아직 아냐! 조…… 좀 더!’
울리히가 스스로 독을 삼킨 것은 자신을 치명적인 한계상황으로 내몰아 인튜이션―리프를 강제로 발현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칫하다간 버티다 죽을 수도 있었지만 독한 마음을 품고 버텼다.
‘하늘은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울리히는 잘될 것이라는 자신의 직관을 믿었다.
하지만 실험 조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재빨리 울리히의 팔을 붙잡고 강제로 입을 벌렸다.
“빨리 포션을!”
“발버둥 치지 못하게 꽉 붙잡아!”
울리히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젖히며 포션을 마시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몸에 힘이 빠졌다. 기운을 쓸 수 없게 된 것은 지독한 독에 첨차 죽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수들은 울리히의 입안에 포션을 들이부었다. 마시지 않으려 했지만 도저히 저항할 힘이 없었다.
조수들은 그가 포션을 뱉어 버리지 못하게 코와 입을 동시에 틀어막았다.
꿀꺽!
결국 울리히는 자신도 모르게 포션을 삼키게 되었다.
‘젠장! 틀려먹은 건가?’
인튜이션―리프가 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울리히는 절망감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귀울림과 함께 익숙한 감각이 찾아왔다.
위이잉―!
‘온다! 드디어 왔어!’
주위의 풍경이 물결치듯 한차례 일렁거리더니 스르륵 지워져 버렸다.
파팟―!
철저한 암흑의 고독 속에서 뇌세포가 기분 좋은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뒤늦게 인튜이션―리프가 발현된 것이다.
울리히는 머릿속에 약리학 서적들을 동시에 떠올렸다.
키워드(핵심 단어)는 에칼드(Ekard)와 해독!
축척한 정보를 조합하여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 낸다! 그리하여 직관적으로 정보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약적 도약을 이루어 냈다.
‘그래! 조금만 더!’
울리히는 해독제에 대한 몇 가지 발상을 얻었다.
이제 이 몇 가지 정보를 조합하여 수백수천 가지의 가설을 세운 뒤, 시뮬레이션을 반복하여 결론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수천 번의 실험 과정을 통해서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만 인튜이션―리프 상태에서라면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다시 귀울림이 들려왔다.
위이잉―!
주위의 풍경이 다시 눈앞에 떠오르며 두뇌의 연산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몸이 회복되고 있구나!’
포션을 들이킨 탓인지 지독한 독에 손상된 육체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위기감이 사라지며 인튜이션―리프 상태도 해제되고 있었다.
죽지 않은 건 기쁜 일이지만 이대로라면 시간 안에 해독제를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울리히는 필사적으로 몰입을 유지하려 애쓰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가상 시뮬레이션에 집중했다. 하지만 결국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젠장!”
오늘따라 울리히는 교양 없는 단어를 자주 내뱉게 되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실험 조수들은 걱정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짜증이 났지만 그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울리히는 아직 죄 없는 사람들을 탓할 만큼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속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다시 한 번 독을 마실까? 아냐! 그건 미친 짓이야.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 따른 일인데 또다시 정신 나간 도박을 할 수야 없지. 결론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상당히 접근했으니 몇 시간 정도 실험 과정을 거치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직 8시간 정도가 남아 있다.
몇 시간 정도 투자하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날 좀 일으켜 주게!”
“네! 학자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에 울리히는 조수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8시간 안에 해독제를 만들려면 그 방면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한 사람의 이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