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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조우(遭遇)
“이은준 대리, 이거 회의실에 좀 가져다주세요.”
“네.”
은준은 김 과장이 건네는 한 뭉치의 회의 자료를 받아 들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바인더로 만들어진 회의 자료는 은근 무거웠다.
곧 있을 새 브랜드 론칭으로 회사는 초긴장 상태였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였고 다들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자신이 있는 지원사업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 회의 자료를 만들어야 했고 시장 조사를 한 후 시장 분석을 이끌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움직여야 했다. 지금도 회사로 복귀한 지 몇 분 만에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은준!”
은준은 고개만 돌리기도 힘들 만큼 안고 있는 회의 자료 때문에 몸 전체를 틀어 돌아봤다.
“들어와서 쉬지도 못하고 회의 준비하러 가는 거야?”
“응.”
“난 보다시피 음료 담당.”
은준은 입사 동기인 희경이 음료 박스를 든 채 어깨를 으쓱이자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런데 치마가 너무 길지 않아?”
“으응? 뭐…….”
치마는 무릎을 조금 덮는 길이였다. 은준은 그녀가 또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대충 얼버무리듯 대꾸했다.
“봐 봐, 이렇게 예쁜 다리를 이렇게 긴치마로 가리고 있는 건 죄악이야.”
‘이렇게’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희경 때문에 은준은 벙싯 웃었다.
“예쁘게 웃는 눈웃음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 수녀복 같은 차이나 칼라는 비추야. 너 쇄골 정말 예쁘거든.”
“예쁘긴.”
희경은 툭하면 가리지 말라고 타박을 주고는 했다. 딱히 가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선호하는 옷 취향일 뿐인데도 늘 희경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긴치마인데도 은근 섹시한 것을 보면…… 빵빵한 엉덩이 탓인가?”
“웃기지 마, 쫌.”
은준은 희경의 너스레에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찡그렸다.
“참, 들었어?”
낮게 목소리를 깐 희경을 은준은 멀건 얼굴로 쳐다보기만 했다. 사내에 떠도는 소문은 늘 희경을 통해 듣게 되는 편이었다.
“이번에 새로 론칭하는 스톤블링 주얼리, 사실은 회장님 아들이 추진한 사업이래.”
“아…….”
“해외 지사에 있으면서 귀국하기 전에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하더라.”
희경의 말에 간투사를 내뱉은 은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사업 계획서가 계속 메일로 수신되고 업무적인 지시도 메일로 내려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윗선에서 하는 일이니 자신은 몰라도 크게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운동화와 운동복에 주력하던 회사가 주얼리 제품을 론칭한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상당한 것이었다.
은준은 상석부터 시작해 회의 자료를 차례로 내려놓으며 음료를 놓고 있는 희경과 반대편에서 움직였다. 회의 자료를 다 놓은 은준은 PT 화면이 정상적으로 나오는지 확인하려 버튼을 누르다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음료를 다 세팅한 희경이 다가와 PT 화면과 자신을 번갈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델이 스캔들의 여왕 황선휘로 애초에 결정 난 거였어?”
은준은 몰랐던 사실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새 브랜드 론칭을 하면서 이렇게 부담을 안고 가야 한다는 것에 자신은 처음부터 반대 의사를 피력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음을 또 한 번 깨닫는 중이었다. 그래서 PT 자료를 부장님이 혼자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언짢아졌다.
“소문엔…… 그 모델이 회장님 아들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더라.”
“어쩐지…….”
은준은 눈살을 찌푸리다 신경질적으로 PT 화면을 껐다. 그리고 쥐고 있던 리모컨을 노트북 옆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가끔 윗선에 잘 보이려 오버하는 최 부장이 문제였다.
“오늘 발표는 최 부장님이 하시는 거지?”
“응, 아까부터 긴장된다면서 화장실을 얼마나 들락날락하시는지 내가 다 정신이 없었어.”
“뭘 그렇게 긴장하시는 거야?”
“몰라. 하도 정신없이 굴어서 차라리 외근을 내가 나갈 걸 하고 생각했었다니까.”
은준은 희경의 넋두리에 피식 웃고는 회의실의 조명을 체크했다. 조금 있으면 이곳은 사람들로 꽉 찰 것이고 자신은 회의실 단상과 반대편에 서서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도록 서포트를 해야 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끝났으니 나가자.”
오늘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은준은 회의실 조명을 껐다.
“오케이.”
희경이 먼지를 털듯 손을 탁탁 털고는 곧이어 은준을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후우. 낮게 심호흡을 한 은준은 건침을 꿀꺽 삼켰다.
회의 직전 비서가 사장에게 메모를 건네는 것을 본 은준은 더 긴장하고 말았다. 원래 자신의 자리는 회의실 끝이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리는 곳에 서 있었고 사장은 자신의 목을 조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가 전해 주는 메모 때문에 잠시 사장의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긴장은 극에 달하고 말았다. 메모를 본 사장이 휴대폰을 꺼내 들자 은준은 미간을 모았다. 회의 중에 딴짓하는 상사는 달갑지 않은 부류였다. 더군다나 이 브랜드는 사장 본인이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지 않은가 말이다.
“이 부분은 현재 비밀리에 모집된 모니터 회원들의 리뷰를 참고로 수정한 계획서입니다.”
은준은 때아닌 발표자가 되어 회의실 상단에 서 있었다. 입사하고 회의실에서 이런 PT를 맡은 일은 다반사였지만 본인이 준비한 회의 자료가 아니라 짧은 시간에 숙지한다고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난처한 것은 줄곧 자신에게 꽂혀 있는 사장의 시선이었다. 기회를 노리며 쉽사리 덤벼들지 않는 맹수처럼 사장의 눈빛은 냉혹한 살벌함을 띠고 있었다.
드르륵.
단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진동하자 은준의 눈길이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향했다.
[기억해? 2017호.]
액정 화면에만 잠깐 떴다 사라진 문자를 읽은 은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얗게 질렸다고 봐야 했다.
고개를 들던 은준은 사장과 눈이 딱 마주치자 건침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이름하에 사장의 직함을 달고 온 그는 직원들과 악수를 건성으로 하는 듯했다. 그래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것처럼 그도 기억을 하는 듯했다. 그러니 낯선 번호가 뜬 문자는 그가 보낸 것이 분명했다.
“모니터 요원들의 리뷰에 따르면…….”
은준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땀이 밴 손바닥을 치마에 쓰윽 문질러 닦았다. 회의를 망칠 수는 없었다. 비록 자신이 준비한 회의가 아니더라도 무사히 치러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를 세트로 하는 기본에서…….”
원래 자신이 서 있어야 하는 위치에서 희경이 잘하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 보였다.
“지갑의 버튼과 가방의 버클이나 장신구 같은 곳에도 같은 디자인을 적용해 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디자인 부서에서는 난색을 표한 프로젝트가 마케팅 부서에서는 환영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지원사업부는 어느 한쪽의 편도 들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 은준 대리?”
“!”
은준은 갑자기 이름이 불리어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고개를 돌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시선이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 담긴 저의는 자신을 난도질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네.”
“그렇게 주얼리를 한 세트로 묶어 놓으면 이은준 대리는 살 겁니까?”
“네?”
되묻던 은준은 당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나를 알면서 왜 외면해? 하고 바라보는 것 같아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얼굴에 닿은 시선이, 어깨에 닿은 시선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달아날 수도 없다는 듯 바라보는 사장의 날카로운 시선에 미칠 것만 같았다.
“이 대리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어 그러는데…… 곤란합니까?”
나른하면서도 정확하게 들리는 음성이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하필 이럴 때 최 부장님이 맹장염을 앓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은준은 최 부장의 일을 떠맡게 된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찌 되었든 사장을 회의실에서 맞닥트리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곤란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완벽한 세트가 있다면 기쁠 겁니다.”
의자 팔걸이에 팔을 괴고 검지 마디로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있던 사장의 눈이 가늘죽해지는 것을 본 은준은 또다시 건침을 삼켰다.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던 그였다.
‘제니스 호텔 2017호. 기다릴게.’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지키지 않은 이유를 지금 말한다고 해서 그가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약속의 이행 여부가 자의나 타의에 의해 바뀌었다는 것이 그에겐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만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그의 싸늘한 눈초리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넌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라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희경이 적극적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을 했고 몇몇 여자 상사들도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디자인 부서는 브랜드 론칭 전까지 좀 더 화려하고 눈에 띄는 디자인을 몇 점 더 넣어 주세요. 브랜드 론칭 장소는 제. 니. 스. 호텔로 준비해 주시고 최고의 론칭쇼가 되도록 힘을 합쳐 주시기 바랍니다.”
은준은 ‘제니스 호텔’이라는 이름에 몸이 경직되는 기분이었다.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회의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빠르게 지시한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자 다들 얼떨결에 후다닥 따라 일어나 인사를 했다. 회의실을 나가기 전 사장이 자신을 돌아보자 은준은 숨을 참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기분이 들어 주먹을 꼭 쥐었다.
“은준! 잘했어!”
희경이 다가와 덥석 안아 주었다.
“……나 정말 잘한 거 맞아?”
은준은 망연한 얼굴로 회의실 PT 화면을 바라보다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뒤에 준비한 자료가 발표한 자료보다 더 많은데 회의 중간에 상황 정리를 해 버린 사장 때문에 다 보여 주지도 못한 것이었다. 최 부장이 이 자리에 서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은준은 가시밭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땜빵이 이 정도로 했으면 된 거지. 날벼락도 아니고 부장님이야 맹장염이라서 할 수 없었다지만 과장님은 진짜 깬다, 그지?”
못 한다고 뒤로 나자빠졌던 과장님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던 은준은 입으로 바람을 훅 불어 앞머리를 넘겼다.
“아, 머리 아파.”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긴장이 풀려서 그래. 가자, 내가 커피 타 줄게.”
희경의 손에 붙들린 은준은 휴게실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우우웅.
커피를 타는 희경을 보며 휴게실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던 은준은 휴대폰에 뜬 발신인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회의 시간에 문자를 받았던 그 번호였다.
“……여보세요?”
안 받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를 안 받았다가 찾아오면 더 거북한 상황이 될 것이다. 은준은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이은준?
흡! 은준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엎지를 뻔했다. 사장인 줄 알면서도 기억하던 후두음이 흘러나오자 몸이 굳어졌다. 사실 회장의 아들이 서재준일 줄은 몰랐다. 아니,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동명이인이 아니라 바로 그 서재준이었다. 자신이 이용하려 했던 그 서재준. 그리고 자신에게 멋지게 이용당해 준 그였다.
― 9년이 지나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그, 그러네요.”
커피를 앞에 놓아 주던 희경이 누구 전화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은준은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풀리지 않은 매듭을 다시 떠안은 기분이 들었다.
― 그날 왜…….
“이미 지난 일이고 시간이 흘러 무색해졌어요, 선배.”
은준은 그날의 일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은 재준의 등장과 함께 깨어진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심장을 찔러 왔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상처들. 아프게 묻었던 눈물이 다시금 되살아나려 했다.
― 선배? 네가 그렇게 부르는 거 오랜만에 들어 보네.
“…….”
선배라고 부르며 그를 기만했고 이용하려 했던 자신을 그는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힘이 되어 주고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었다.
‘네 처음은 내 거야.’
기억의 파편들 중 갑자기 날아든 목소리에 은준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빠짝 주었다. 귓가에 울리는 기억 때문에 단전 아래가 아릿하게 저려 왔다.
― 나에게 고맙다며?
“고마웠던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 그럼, 약속 지켜.
“네?”
그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은준은 미간을 모으고 어깨를 움츠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시간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발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일에 허덕이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선배, 서재준을 까맣게 잊어버렸었다.
― 제니스 호텔 2017호. 10시.
“…….”
은준은 오늘 밤 오라는 말임을 알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간다는 말도 기다리지 말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 이번에도.
자신은 그에게 갚을 빚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 어디 한번 도망가 봐.
#1화 약속 이행
“사장님?”
재준은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양 비서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재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재킷을 걸쳤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는 것은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외국이 더 좋았는데도 미루어 둔 숙제를 마무리 짓지 않은 듯 늘 한국이 마음에 걸렸다. 입술을 짓씹으며 떠나야 했던, 반기는 이가 별로 없는 한국이었는데도 말이다.
“저, 사장님 혹시…….”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망설이는 것인지 양 비서가 약간 거북한 웃음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프롤로그 조우(遭遇)
“이은준 대리, 이거 회의실에 좀 가져다주세요.”
“네.”
은준은 김 과장이 건네는 한 뭉치의 회의 자료를 받아 들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바인더로 만들어진 회의 자료는 은근 무거웠다.
곧 있을 새 브랜드 론칭으로 회사는 초긴장 상태였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였고 다들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자신이 있는 지원사업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 회의 자료를 만들어야 했고 시장 조사를 한 후 시장 분석을 이끌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움직여야 했다. 지금도 회사로 복귀한 지 몇 분 만에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은준!”
은준은 고개만 돌리기도 힘들 만큼 안고 있는 회의 자료 때문에 몸 전체를 틀어 돌아봤다.
“들어와서 쉬지도 못하고 회의 준비하러 가는 거야?”
“응.”
“난 보다시피 음료 담당.”
은준은 입사 동기인 희경이 음료 박스를 든 채 어깨를 으쓱이자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런데 치마가 너무 길지 않아?”
“으응? 뭐…….”
치마는 무릎을 조금 덮는 길이였다. 은준은 그녀가 또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대충 얼버무리듯 대꾸했다.
“봐 봐, 이렇게 예쁜 다리를 이렇게 긴치마로 가리고 있는 건 죄악이야.”
‘이렇게’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희경 때문에 은준은 벙싯 웃었다.
“예쁘게 웃는 눈웃음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 수녀복 같은 차이나 칼라는 비추야. 너 쇄골 정말 예쁘거든.”
“예쁘긴.”
희경은 툭하면 가리지 말라고 타박을 주고는 했다. 딱히 가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선호하는 옷 취향일 뿐인데도 늘 희경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긴치마인데도 은근 섹시한 것을 보면…… 빵빵한 엉덩이 탓인가?”
“웃기지 마, 쫌.”
은준은 희경의 너스레에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찡그렸다.
“참, 들었어?”
낮게 목소리를 깐 희경을 은준은 멀건 얼굴로 쳐다보기만 했다. 사내에 떠도는 소문은 늘 희경을 통해 듣게 되는 편이었다.
“이번에 새로 론칭하는 스톤블링 주얼리, 사실은 회장님 아들이 추진한 사업이래.”
“아…….”
“해외 지사에 있으면서 귀국하기 전에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하더라.”
희경의 말에 간투사를 내뱉은 은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사업 계획서가 계속 메일로 수신되고 업무적인 지시도 메일로 내려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윗선에서 하는 일이니 자신은 몰라도 크게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운동화와 운동복에 주력하던 회사가 주얼리 제품을 론칭한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상당한 것이었다.
은준은 상석부터 시작해 회의 자료를 차례로 내려놓으며 음료를 놓고 있는 희경과 반대편에서 움직였다. 회의 자료를 다 놓은 은준은 PT 화면이 정상적으로 나오는지 확인하려 버튼을 누르다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음료를 다 세팅한 희경이 다가와 PT 화면과 자신을 번갈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델이 스캔들의 여왕 황선휘로 애초에 결정 난 거였어?”
은준은 몰랐던 사실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새 브랜드 론칭을 하면서 이렇게 부담을 안고 가야 한다는 것에 자신은 처음부터 반대 의사를 피력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음을 또 한 번 깨닫는 중이었다. 그래서 PT 자료를 부장님이 혼자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언짢아졌다.
“소문엔…… 그 모델이 회장님 아들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더라.”
“어쩐지…….”
은준은 눈살을 찌푸리다 신경질적으로 PT 화면을 껐다. 그리고 쥐고 있던 리모컨을 노트북 옆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가끔 윗선에 잘 보이려 오버하는 최 부장이 문제였다.
“오늘 발표는 최 부장님이 하시는 거지?”
“응, 아까부터 긴장된다면서 화장실을 얼마나 들락날락하시는지 내가 다 정신이 없었어.”
“뭘 그렇게 긴장하시는 거야?”
“몰라. 하도 정신없이 굴어서 차라리 외근을 내가 나갈 걸 하고 생각했었다니까.”
은준은 희경의 넋두리에 피식 웃고는 회의실의 조명을 체크했다. 조금 있으면 이곳은 사람들로 꽉 찰 것이고 자신은 회의실 단상과 반대편에 서서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도록 서포트를 해야 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끝났으니 나가자.”
오늘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은준은 회의실 조명을 껐다.
“오케이.”
희경이 먼지를 털듯 손을 탁탁 털고는 곧이어 은준을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후우. 낮게 심호흡을 한 은준은 건침을 꿀꺽 삼켰다.
회의 직전 비서가 사장에게 메모를 건네는 것을 본 은준은 더 긴장하고 말았다. 원래 자신의 자리는 회의실 끝이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리는 곳에 서 있었고 사장은 자신의 목을 조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가 전해 주는 메모 때문에 잠시 사장의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긴장은 극에 달하고 말았다. 메모를 본 사장이 휴대폰을 꺼내 들자 은준은 미간을 모았다. 회의 중에 딴짓하는 상사는 달갑지 않은 부류였다. 더군다나 이 브랜드는 사장 본인이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지 않은가 말이다.
“이 부분은 현재 비밀리에 모집된 모니터 회원들의 리뷰를 참고로 수정한 계획서입니다.”
은준은 때아닌 발표자가 되어 회의실 상단에 서 있었다. 입사하고 회의실에서 이런 PT를 맡은 일은 다반사였지만 본인이 준비한 회의 자료가 아니라 짧은 시간에 숙지한다고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난처한 것은 줄곧 자신에게 꽂혀 있는 사장의 시선이었다. 기회를 노리며 쉽사리 덤벼들지 않는 맹수처럼 사장의 눈빛은 냉혹한 살벌함을 띠고 있었다.
드르륵.
단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진동하자 은준의 눈길이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향했다.
[기억해? 2017호.]
액정 화면에만 잠깐 떴다 사라진 문자를 읽은 은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얗게 질렸다고 봐야 했다.
고개를 들던 은준은 사장과 눈이 딱 마주치자 건침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이름하에 사장의 직함을 달고 온 그는 직원들과 악수를 건성으로 하는 듯했다. 그래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것처럼 그도 기억을 하는 듯했다. 그러니 낯선 번호가 뜬 문자는 그가 보낸 것이 분명했다.
“모니터 요원들의 리뷰에 따르면…….”
은준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땀이 밴 손바닥을 치마에 쓰윽 문질러 닦았다. 회의를 망칠 수는 없었다. 비록 자신이 준비한 회의가 아니더라도 무사히 치러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를 세트로 하는 기본에서…….”
원래 자신이 서 있어야 하는 위치에서 희경이 잘하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 보였다.
“지갑의 버튼과 가방의 버클이나 장신구 같은 곳에도 같은 디자인을 적용해 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디자인 부서에서는 난색을 표한 프로젝트가 마케팅 부서에서는 환영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지원사업부는 어느 한쪽의 편도 들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 은준 대리?”
“!”
은준은 갑자기 이름이 불리어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고개를 돌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시선이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 담긴 저의는 자신을 난도질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네.”
“그렇게 주얼리를 한 세트로 묶어 놓으면 이은준 대리는 살 겁니까?”
“네?”
되묻던 은준은 당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나를 알면서 왜 외면해? 하고 바라보는 것 같아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얼굴에 닿은 시선이, 어깨에 닿은 시선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달아날 수도 없다는 듯 바라보는 사장의 날카로운 시선에 미칠 것만 같았다.
“이 대리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어 그러는데…… 곤란합니까?”
나른하면서도 정확하게 들리는 음성이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하필 이럴 때 최 부장님이 맹장염을 앓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은준은 최 부장의 일을 떠맡게 된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찌 되었든 사장을 회의실에서 맞닥트리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곤란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완벽한 세트가 있다면 기쁠 겁니다.”
의자 팔걸이에 팔을 괴고 검지 마디로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있던 사장의 눈이 가늘죽해지는 것을 본 은준은 또다시 건침을 삼켰다.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던 그였다.
‘제니스 호텔 2017호. 기다릴게.’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지키지 않은 이유를 지금 말한다고 해서 그가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약속의 이행 여부가 자의나 타의에 의해 바뀌었다는 것이 그에겐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만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그의 싸늘한 눈초리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넌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라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희경이 적극적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을 했고 몇몇 여자 상사들도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디자인 부서는 브랜드 론칭 전까지 좀 더 화려하고 눈에 띄는 디자인을 몇 점 더 넣어 주세요. 브랜드 론칭 장소는 제. 니. 스. 호텔로 준비해 주시고 최고의 론칭쇼가 되도록 힘을 합쳐 주시기 바랍니다.”
은준은 ‘제니스 호텔’이라는 이름에 몸이 경직되는 기분이었다.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회의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빠르게 지시한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자 다들 얼떨결에 후다닥 따라 일어나 인사를 했다. 회의실을 나가기 전 사장이 자신을 돌아보자 은준은 숨을 참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기분이 들어 주먹을 꼭 쥐었다.
“은준! 잘했어!”
희경이 다가와 덥석 안아 주었다.
“……나 정말 잘한 거 맞아?”
은준은 망연한 얼굴로 회의실 PT 화면을 바라보다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뒤에 준비한 자료가 발표한 자료보다 더 많은데 회의 중간에 상황 정리를 해 버린 사장 때문에 다 보여 주지도 못한 것이었다. 최 부장이 이 자리에 서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은준은 가시밭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땜빵이 이 정도로 했으면 된 거지. 날벼락도 아니고 부장님이야 맹장염이라서 할 수 없었다지만 과장님은 진짜 깬다, 그지?”
못 한다고 뒤로 나자빠졌던 과장님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던 은준은 입으로 바람을 훅 불어 앞머리를 넘겼다.
“아, 머리 아파.”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긴장이 풀려서 그래. 가자, 내가 커피 타 줄게.”
희경의 손에 붙들린 은준은 휴게실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우우웅.
커피를 타는 희경을 보며 휴게실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던 은준은 휴대폰에 뜬 발신인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회의 시간에 문자를 받았던 그 번호였다.
“……여보세요?”
안 받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를 안 받았다가 찾아오면 더 거북한 상황이 될 것이다. 은준은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이은준?
흡! 은준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엎지를 뻔했다. 사장인 줄 알면서도 기억하던 후두음이 흘러나오자 몸이 굳어졌다. 사실 회장의 아들이 서재준일 줄은 몰랐다. 아니,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동명이인이 아니라 바로 그 서재준이었다. 자신이 이용하려 했던 그 서재준. 그리고 자신에게 멋지게 이용당해 준 그였다.
― 9년이 지나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그, 그러네요.”
커피를 앞에 놓아 주던 희경이 누구 전화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은준은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풀리지 않은 매듭을 다시 떠안은 기분이 들었다.
― 그날 왜…….
“이미 지난 일이고 시간이 흘러 무색해졌어요, 선배.”
은준은 그날의 일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은 재준의 등장과 함께 깨어진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심장을 찔러 왔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상처들. 아프게 묻었던 눈물이 다시금 되살아나려 했다.
― 선배? 네가 그렇게 부르는 거 오랜만에 들어 보네.
“…….”
선배라고 부르며 그를 기만했고 이용하려 했던 자신을 그는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힘이 되어 주고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었다.
‘네 처음은 내 거야.’
기억의 파편들 중 갑자기 날아든 목소리에 은준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빠짝 주었다. 귓가에 울리는 기억 때문에 단전 아래가 아릿하게 저려 왔다.
― 나에게 고맙다며?
“고마웠던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 그럼, 약속 지켜.
“네?”
그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은준은 미간을 모으고 어깨를 움츠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시간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발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일에 허덕이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선배, 서재준을 까맣게 잊어버렸었다.
― 제니스 호텔 2017호. 10시.
“…….”
은준은 오늘 밤 오라는 말임을 알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간다는 말도 기다리지 말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 이번에도.
자신은 그에게 갚을 빚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 어디 한번 도망가 봐.
#1화 약속 이행
“사장님?”
재준은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양 비서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재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재킷을 걸쳤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는 것은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외국이 더 좋았는데도 미루어 둔 숙제를 마무리 짓지 않은 듯 늘 한국이 마음에 걸렸다. 입술을 짓씹으며 떠나야 했던, 반기는 이가 별로 없는 한국이었는데도 말이다.
“저, 사장님 혹시…….”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망설이는 것인지 양 비서가 약간 거북한 웃음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